🔒 비밀번호

이 글은 비밀번호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비밀번호가 올바르지 않습니다.
KREN
9 장

내쉼에서 태어나는 것들

息, 호흡이라는 글자

지친 어느 밤, 나는 그저 숨 한 번을 길게 내쉬어 본 적이 있다. 특별한 명상법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날숨 뒤에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사실 여기에는 과학이 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면 앞 장에서 만난 미주신경이 켜지고, 심장이 느려지며, 몸이 '이제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는다. 우리는 하루에 수만 번을 숨 쉬면서도, 정작 그 숨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은 그 숨에 관한 한 글자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쉴 식(息)이다.

息은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다. 그런데 自는 본래 코의 상형이다. 그래서 息의 첫 뜻은 숨이다. 코 아래에서 마음이 오르내리는 것. 숨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매 순간 완결되면서 동시에 완결이 필요 없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이 시대가 완결을 빼앗긴 시대라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 지표를 채우면 다음 지표. 끝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숨은 다르다. 날숨 하나하나가 "이것으로 됐다"의 반복이다.

여기에 息의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자식(子息), 불어남, 생겨남. 이자(利息)의 息이 그것이다. 원금이 숨 쉬듯 스스로 불어나는 것. 사람에게 오면 자식(子息)이 된다. 그런데 왜 숨(息)과 자식(息)이 같은 글자일까? 우연이 아니다.

불어남은 움켜쥠이 아니라 내어줌에서 온다.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 것을 내어주는 일이다. 부모가 자기 몸과 시간을 덜어내어 다음 생명이 태어난다. 씨앗은 자기를 터뜨려 싹을 낸다. 이자조차 원금을 움켜쥐면 불어나지 않는다. 빌려주어야, 내보내야 불어난다. 息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불어남은 들숨이 아니라 날숨의 원리를 따른다고. 이것이 부풀기만 하는 삶에 대한 완벽한 반증이다. 움켜쥐면 커진다는 믿음과 정반대로, 진짜 자라남은 내쉼에서, 비움에서, 덜어냄에서 온다.

이렇게 보면 내쉼은 일종의 작은 죽음이다. 우리는 날숨마다 방금 붙들었던 공기를 놓아 보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작은 죽음이 있어야 다음 숨이 들어온다. 성경은 사람의 시작을 이렇게 그린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히브리어로 그 숨은 '네샤마'—숨이자 곧 영(靈)이다. 息이라는 글자가 코(自) 아래에 마음(心)을 둔 것처럼, 숨은 몸과 영이 만나는 자리에서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 숨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불어넣어진 것, 곧 빌린 것이었다. 우리는 평생 그 빌린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어느 날 마지막 날숨과 함께 그것을 온전히 돌려드린다. 우리말이 죽음을 '숨을 거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정확하다. 삶이란 결국, 빌린 숨을 잘 쉬다가 잘 돌려드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息은 두 얼굴을 한 몸에 품는다. 한쪽은 그침이다. 숨을 거두다, 불이 꺼지다(熄). 다른 쪽은 낳음이다. 자식, 생식(生息). 한 글자 안에 멈춤과 생명이 함께 있다. 이것이 심오하다. 멈추는 것이 곧 낳는 것이다.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오듯, 종결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얼굴이 온전히 만나는 자리에, 다음 글자가 우리를 기다린다. 安息이다.

이 장의 참고

창세기 2:7 참조 · (호흡·미주신경 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