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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8 장

건강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병인론에서 건강생성론으로

한 의료사회학자가 여성들의 갱년기 적응을 연구하다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사실 하나와 마주쳤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 가운데 일부가,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도 놀랄 만큼 건강하게,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론 안토노프스키다. 당시의 의학은 "왜 사람들이 병드는가"에는 능숙하게 답했다. 그러나 이 소수는 그 질문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무너져야 마땅한 조건에서, 대체 무엇이 이들을 살게 했을까?

의학의 역사는 대부분 하나의 질문 위에 세워졌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 병인론(pathogenesis)이다. 원인을 찾고, 제거하고, 병을 고친다. 세균을 발견해 항생제를 만들고, 유전자 변이를 찾아 표적 치료를 개발한다. 이 패러다임이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는 질문을 뒤집었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건강을 낳는가. 그는 이것을 살루토제네시스(salutogenesis, 건강생성론)라 불렀다. 건강과 온전함을 뜻하는 라틴어 살루스와, 기원을 뜻하는 그리스어 게네시스를 합친 말이다.

그의 유명한 비유가 '강의 흐름'이다. 기존 의학은 강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사람을 하류에서 건져 올린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안토노프스키는 묻는다. 왜 이 사람들은 강물에 빠질까? 그리고 더 중요하게, 어떻게 하면 이들이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할까? 건강은 강에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강 속에서 헤엄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건강은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트레스 속에서도 헤엄치는 힘이다.

나는 이 관점을 평생 몸으로 살아왔다. 운동종양학이라는 내 분야가 바로 이 논리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 환자에게서 병만 없애려 하지 않는다. 병과 더불어, 병 이후에도 살아갈 몸의 힘—헤엄치는 능력—을 길러 주려 한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능력을 통합감(sense of coherence)이라 불렀다. 세상이 이해 가능하고(comprehensibility), 감당 가능하며(manageability), 의미 있다고(meaningfulness) 느끼는 감각이다. 여기서 안토노프스키의 통찰이 앞 장들과 만난다. 그가 말하는 건강은 무균의 안전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것이 그의 전제다. 호르메시스가 말한 것과 같고, 문지방의 불안을 통과하는 힘과 같다.

이 질문의 전환은 건강의 정의 자체를 바꾼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에 건강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문장이었다. 질병이 없는 것만으로는 건강이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이 정의에는 치명적인 말이 하나 들어 있다. 완전한 상태라는 말이다. 그 기준대로라면 평생 건강한 사람은 지구에 거의 없다. 몸은 늘 흔들리고, 관계는 늘 삐걱거리고, 마음은 늘 오르내린다. 건강을 상태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 대부분은 환자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가야 한다. 건강을 이렇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건강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오늘 우리는 건강을 새로운 우상으로 떠받든다. 삶이 의미와 이야기를 잃고 벌거벗은 생존으로 쪼그라들면, 남는 것이 오직 '건강한 몸'이라는 목표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가 통합감의 세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은 것이 바로 유의미성—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오히려 병이 된다. 무엇을 위한 건강인지, 누구와 함께하는 건강인지를 잃으면, 건강 관리마저 또 하나의 성과가 되어 우리를 갉아먹는다.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고 일하고 의미를 살아 낼 수 있게 해 주는 바탕이다. 여는 글에서 물었듯,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답이 있을 때에만, 건강은 비로소 건강이 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마슬로가 사람의 바람 가운데 맨 위에 둔 것도 이 방향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실현'이라 불렀다.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삶에서, 자기 안의 가능성을 피워내는 삶으로 무게가 옮겨가는 것. 안토노프스키의 의미와 마슬로의 자기실현은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건강은 모자람을 메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의미를 향해 자라날 때 온전해진다.

이것을 나는 보스턴에서 배웠다. 처음 그곳에 갈 때 내 마음은 분명했다. 세계적인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그 결과를 이름난 학술지에 실어 내 이름을 알리는 것. 솔직히 말하면 그 일 년의 목표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내가 실제로 한 일 가운데 지금도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논문이 아니었다. 암을 지나온 분들의 운동 프로그램에서 보조원 노릇을 한 일이다. 강사도 아니고 연구책임자도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학부 실습생에게 맡겼을 일이었다. 그 일 년이 끝나 갈 무렵 함께 운동을 가르치던 운동처방사 낸시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 분 가까이 소리 내어 울었다. 왜 울었는지 나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중 몇 분은 그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알게 된 구별이 하나 있다. 멋진 일과 중요한 일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멋진 일을 좇는다. 눈에 띄고 이름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체로 멋지지 않은 일이다. 곁에 있어 주는 일, 운동 기구를 옮겨 주는 일, 이름이 남지 않는 일. 그 뒤로 나는 연구를 고를 때 이 질문을 먼저 한다. 이것은 멋진 일인가, 중요한 일인가.

다만 나는 그의 통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통합감을 개인의 내면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개인 안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통합감은 진공에서 생기지 않는다. 안전한 애착, 믿을 수 있는 사람,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서 자라난다. 병상 옆에서 20여 년을 보내며 나는 그것을 거듭 보았다. 곁에 사람이 있는 환자가 더 오래, 더 잘 견딘다.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라, 경계에서 함께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4부에서 다시 이어진다. 우선은 이것만 붙들자. 건강은 병의 부재가 아니라, 경계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 '매 순간'이란 무엇일까? 경계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리듬이 된다. 이제 3부로 넘어가 보자.

이 장의 참고

세계보건기구 건강 정의(1948) · 아론 안토노프스키(살루토제네시스) · 에이브러햄 마슬로(자기실현) · 한병철, 『피로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