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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밖도 아닌 자리
몇 해 전, 대학원생들과 유럽 암학회(ESMO)에 참석하려던 며칠 전, 학생들의 학회 멤버십 신청이 무더기로 거절당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체육' 전공이라는 것. 나는 그 학회의 초청 발표자였고 좌장이었는데도, 내가 낸 멤버 신청조차 "거절되었습니다(REJECT)"라는 답이 몇 시간 만에 돌아왔다. 속이 상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런 생각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냥 체육 분야에 있으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을 텐데. 그냥 내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 멤버 vs. 비멤버, 내부자 vs. 외부자.— 2023년, 페이스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 자리, 나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보면 나를 가장 많이 바꾼 것이 바로 그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왜 그럴까? 오늘은 '문지방'이라는 오래된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문지방은 문 아래 깔린 나무 판대기다. 안도 밖도 아닌, 그 얇은 나무 위에 서 있는 순간. 라틴어 리멘(limen)이 바로 이 문지방을 뜻하고, 여기서 리미널(liminal)이라는 말이 태어났다. 인류학자 아르놀트 반 헤네프는 통과의례가 세 단계—분리, 전이, 통합—를 거친다고 보았고, 빅터 터너는 그 가운데 '전이'의 단계에 주목했다.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의례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이상한 시간이 있다. 더 이상 소년도 아니고 아직 어른도 아닌 시간. 이름도, 지위도, 소속도 잠시 벗겨진 채 문지방 위에 서 있는 시간이다. 터너는 바로 이 리미널한 상태에서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옛것을 벗고 새것을 입는 일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태어난다.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내 공식 호칭은 '방문자(visitor)'였다. 하버드의 도서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하버드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그 시절은 참 외로웠다. 소속이 없다는 것은 나를 받쳐 줄 벽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나는 두 세계를 잇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체육과 의학 사이에 서 있었기에, 운동을 암 병동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어정쩡함은 나이가 든다고 끝나지 않는다. 몇 해 전 부산에서 열린 대장항문학회에서 발표 책자를 넘겨보다가, 나는 오랜만에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참가자 명단에서 내 소속만 유난히 쌩뚱맞았다. 외과 의사들 사이에 체육 전공자 하나. 그런데 그날 내가 발표한 것은 대장암 수술을 받은 환자가 정해진 운동을 하면 퇴원이 하루 이틀 당겨지고 입원 기간에도 다리 근력이 오히려 좋아진다는 결과였다. 걷기만 많이 한 환자에게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혼자서는 그 결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외과의 언어와 운동생리학의 언어를 둘 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만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문지방은 건널 수도 있다. 보스턴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내가 있던 당뇨센터에서는 매주 외부 강사를 초청해 특강이 열렸다. 뒷자리에 앉아 하버드 의대 교수들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여러 해가 지나 어느 여름, 나는 한창 꿈에 관한 책에 꽂혀 있었다. 학생들에게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데 도전하자고 이메일까지 보내 놓은 참이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서 그 센터의 교수를 우연히 마주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불쑥 말했다. 와서 특강 한번 하시죠. 나는 얼떨결에 그러지 뭐, 하고 헤어졌다.
한 달쯤 뒤에 정말로 연락이 왔다. 그것도 조그만 모임이 아니라 한 학기에 여덟 번뿐인 그 시리즈 중 하나였다. 뒷자리에서 올려다보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메일을 보내며 잔뜩 허풍을 떨었다. 거 봐라, 꿈꾸고 도전하면 실제 현실이 되는 거야.
그날 그 방에서 나는 두 사람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꿈꾸던 사람과 앞에 서 있는 사람. 문지방을 건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방에서의 내 자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건너 본 사람은, 다음 문지방 앞에서 조금 덜 무서워한다.
문지방에 선 사람의 쓸모가 여기 있다. 그는 어느 쪽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래서 통역을 할 수 있다. 양쪽 방의 말을 다 서툴게 하는 사람이 두 방을 잇는다.
이 쓸모가 개인의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얼마 전 한 강연에서 확인했다. 유체역학을 전공한 민태기는 윌리엄 허셜을 꺼냈다. 교과서는 그를 천왕성을 발견한 천문학자로 적는다. 그런데 그는 교향곡을 스물네 편 쓴 음악가였고, 과학자들의 모임에 음악가로 초대받아 갔다가 망원경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보다가 새 행성을 찾았다.
음악가라는 이야기는 한 줄도 안 나오죠. 천왕성을 발견한 사람 윌리엄 허셜은 음악가였습니다.— 민태기, 「문과도 이과도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2024
허셜은 천문학의 식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배우는 자리에 앉았고,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굳이 하지 않던 일—망원경을 자기 손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가 새것을 본 것은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방의 식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그 방에 들여보낸 것은 천문학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나는 여기서 순서가 뒤집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안쪽에서 인정받아야 비로소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에게는 반대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안쪽에 있지 않고 경계에 있었다. 명찰 한 줄을 늘 설명해야 했던 그 자리가, 실은 문 앞이었다.
사실 모든 탄생은 문지방을 지난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산도(産道)라는 좁은 경계를 지나는 일이고, 씨앗이 싹트는 것도 껍질이 터지는 경계의 사건이다. 문지방은 불편하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그 불편을 건너뛰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 있다면, 그 불안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자리가 바로 무언가 태어나려는 자리일지 모른다. 문지방을 견디는 힘—그것이 다음 장에서 만날 건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장의 참고
아르놀트 반 헤네프, 『통과의례』 · 빅터 터너, 『의례의 과정』 · 민태기, 강연 「문과도 이과도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언더스탠딩,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