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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메시스, 경계에서의 자극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운동을 하세요"라고 말하면, 많은 분이 놀란다. "이렇게 힘든데 몸을 더 힘들게 하라고요?" 충분히 그럴 만한 반응이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의 연구가 한결같이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적절한 운동은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고, 여러 암에서 재발과 사망 위험을 낮춘다. 2019년 미국스포츠의학회는 전문가들을 모아 "운동은 암 환자에게 안전하며 권장되어야 한다"고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몸에 스트레스를 주는 그 운동이, 어떻게 몸을 살릴까? 그 비밀이 오늘 이야기의 열쇠다.
운동생리학에는 호르메시스(hormesis)라는 개념이 있다. 소량의 스트레스가 오히려 유기체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원리다. 독(toxin)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 말은, 약간의 독이 면역을 깨우고 적응을 촉발한다는 역설을 품는다. 운동이 바로 그렇다. 운동은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심장에 부담을 주고, 세포를 산화 스트레스에 노출시킨다. 그런데 그 작은 손상에 몸이 반응하여, 이전보다 더 강하게 회복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자극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가 남긴 이 문장은, 사실 세포 생물학의 문장이기도 하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죽이지 않을 만큼이어야 한다. 너무 크면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파괴이고, 너무 없으면 그것은 안전이 아니라 쇠퇴다.
경계는 부딪히며 단단해진다. 시험받지 않은 경계는 경계가 아니다.
나 역시 그 '죽이지 않을 만큼'의 경계에서 자주 논다. 캐나다에서 밴프의 산을 오르던 날, 나는 케이블카를 두고 6킬로미터 산길을 걸어 올랐다.
3분의 2쯤 갔을까? 심박수가 165다.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거의 최대 심박수다. … 어질어질하다. … 정상에 올라가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황홀했다.— 2023년, 페이스북
어질어질할 만큼 심장을 몰아붙였지만, 죽지 않을 만큼이었기에 나는 더 튼튼해져 내려왔다. 무균실에서 자란 몸을 상상해 보라. 아무 균도 만나 본 적 없는 면역계는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하다. 적을 만나 본 적이 없기에, 진짜 적 앞에서 무너진다. 오늘날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나는 한 가지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깨끗한 세계에서, 경계를 시험받지 못한 채 자란다. 아이를 온실에서만 키우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1장에서 말한 우쭈쭈 시대가 바로 이 무균실이자 온실이다. 상처를 지운 다정함이, 우리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어려움이 우리를 자라게 한다는 이 원리를, 나는 몸에서 배웠다. 그런데 같은 것을 문명에서 본 사람이 있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다. 그는 문명도 '도전과 응전'으로 자란다고 보았다. 편안한 곳에서는 문명이 생기지 않고, 어려움을 만나 응답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도전에 알맞은 크기가 있다고 했다. 너무 작으면 아무 자극이 못 되고, 너무 크면 자극이 아니라 사람을 짓눌러 버린다. 내가 세포에서 본 호르메시스의 원리를, 그는 문명에서 다시 확인해 준 셈이다.
사실 내가 평생 재어 온 것이 바로 그 알맞은 크기다. 환자에게 운동을 얼마나, 얼마나 세게, 얼마나 자주 처방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그것이고, 우리는 그 관계를 용량반응이라 부른다. 너무 적으면 듣지 않고 너무 많으면 해가 되며, 그 사이 어딘가에 몸을 바꾸는 구간이 있다. 토인비가 문명에서 그린 곡선과 우리가 운동처방에서 그리는 곡선은 같은 모양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문명의 흥망에서 보았고 나는 환자의 혈액검사지에서 볼 뿐이다.
이 알맞은 크기를 물고기 한 마리가 보여 준다. 코이라는 잉어는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이십 센티미터 남짓에서 자라기를 멈추고, 큰 강에 풀어 놓으면 일 미터까지 자란다고 흔히 이야기된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항을 벗어나 강으로 나가라는 말로 즐겨 쓴다. 그런데 나는 그 결론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강물은 성장을 주지만 위험도 함께 준다. 급류가 있고 천적이 있다. 어항은 답답하지만 안전하다.
그러니 문제는 어항이냐 강이냐가 아니라 때다. 어린 물고기에게는 어항이 맞고 자란 물고기에게는 강이 맞다. 언제 머물고 언제 나갈지를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물고기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물고기는 강의 크기를 바꿀 수 없지만 사람은 견딜 힘을 만들 수 있다. 강물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물고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물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내모는 도전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도전을 가르는 것은 도전의 크기가 아니라 곁에 누가 있는가다.
자극의 크기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도 몸을 바꾼다. 심리학자 알리아 크럼은 한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가 도전을 이겨 내도록 돕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배운 집단은 긍정적 정서와 인지 유연성이 높아졌고, 면역과 근골격에 이로운 것으로 알려진 호르몬의 분비까지 늘었다. 스트레스는 무조건 나쁘니 피하라고 배운 집단에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자극인데 이름이 달랐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9장에서 한 사람이 같은 사십 년에 두 개의 이름을 붙이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같은 연구자가 그전에 한 실험은 더 놀랍다. 호텔에서 객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하루 종일 하는 그 일이 곧 운동이라고 알려 주기만 했다. 일과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뒤 그들의 체중과 혈압이 의미 있게 낮아져 있었다. 같은 노동인데 이름이 바뀌자 몸이 다르게 반응한 것이다.
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재는 방법도 이 원리를 따른다. 최대산소섭취량은 사람이 쓰러지기 직전에 측정된다. 더 못 하겠다고 내려오기 바로 그 순간에 몸은 가장 많은 산소를 쓴다. 최대치는 언제나 실패 직전에 있다. 나는 연구비 신청에서 백 번 넘게 떨어졌고, 어떤 논문은 스무 번을 거절당하고 십일 년 만에 실렸다. 그 숫자가 자랑스러워서 적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까지 가 보지 않았다면 내 한계가 어디인지 나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겪어 봐서 알게 되었다는 이 말에는 이천오백 년 된 이름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파테이 마토스라 불렀다. 겪어서 배운다는 뜻이다. 아이스킬로스가 기원전 458년에 쓴 비극 『아가멤논』에 나오는데, 코러스가 제우스를 부르며 그분이 겪어서 배우는 일을 사람의 법으로 정해 두었다고 노래한다. 파토스는 겪는 것이고 마토스는 배우는 것이어서, 두 낱말은 뜻만이 아니라 소리까지 닮았다.
내가 오래 붙들린 것은 그 배움의 이름이었다. 원문이 겪은 사람에게 온다고 지목한 것은 강함이 아니다. 분별이다. 제정신을 차리는 일, 우리말로 하면 철이 드는 일에 가깝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겪은 자에게 오는 것을 힘이 아니라 선을 아는 감각이라고 보았다. 이 책이 내내 말해 온 바로 그 감각이다. 겪어 본 사람은 세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자기 자리인지를 알게 된다.
다만 아이스킬로스가 이 노래를 어디서 불렀는지 알고 나면 이 말을 함부로 쓰기 어려워진다. 그 노래는 위로의 자리에서 불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딸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 위에서 불렸다. 게다가 코러스는 소녀가 죽는 대목에 이르자 그다음은 보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겠다며 입을 다문다. 겪어서 배운다는 말은 그 침묵 바로 다음에 나온다. 설명이 되는 자리에서 흐뭇하게 꺼낸 말이 아니라, 설명이 불가능한 자리에서 겨우 꺼낸 말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말은 자기가 지나온 겪음을 두고 뒤늦게 할 수는 있어도, 지금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지나는 중인 사람에게 이것이 너를 자라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판정이 된다.
더 서늘한 것은 그다음이다. 코러스가 겪어서 배운다고 노래한 직후, 아가멤논은 딸을 죽인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 배치가 우연일 리 없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원리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것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거의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을 같은 호흡으로 보여 준다. 그러니 이 구절을 고난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뜻으로 읽을 때, 우리는 정확히 아가멤논의 자리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배움은 대체 누구에게 가는가. 그 물음은 12장에서 다시 꺼내겠다.
여기서 1장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부풀기만 하는 사람은 진짜 자극을 피한다. 실패라는 작은 독을 거부한다. 그래서 강해지지 못한다. 자극 없이 부풀기만 한 근육은 사실 근육이 아니라 부종(浮腫)이다. 겉보기엔 커 보여도 힘이 없다. 그러니 상처를 거부하는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거부다. 살아 있는 것은 경계에서 조금씩 다치고, 그 상처를 통해 자란다. 이 진실은 뒤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이것만 기억하자. 적당한 독은 약이다. 그리고 상처는, 경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장의 참고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176–183행(파테이 마토스)과 248–250행 — 삼부작 전체의 논지는 12장에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도전과 응전) · Campbell 외(2019), Medicine & Science in Sports & Exercise 51(11):2375–2390 — ACSM 운동-암 라운드테이블 · Crum & Langer(2007), Psychological Science 18(2):165–171 — 호텔 객실 청소 노동자 · Crum, Salovey & Achor(2013), JPSP 104(4):716–733 — 스트레스 마인드셋 · 코이 사례는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