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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5 장

그 선은 누가 그었는가

경계는 실체가 없다

중학교 여름 보충수업 때였다. 학교가 학생들을 성적으로 갈라 반을 다시 짰다. 우반과 열반이었다. 나는 열반이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날의 기분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열이 받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나는 그 보충수업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은 시험지 몇 장이 그은 것이었다. 몇 점 차이였을 것이고, 어느 날 컨디션이었을 수도 있고, 애초에 그런 반을 만들기로 한 어느 회의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선을 그은 사람들도 아마 대단한 뜻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은 내 안으로 들어와 오래 살았다. 나는 열반에 배정된 아이가 아니라 열반인 아이가 되었다.

4장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막을 보았다. 세포를 세포이게 하는 그 막은 실제로 거기 있다. 만질 수 있고, 뚫리면 죽는다. 그런데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경계가 있다. 우반과 열반 사이의 선 같은 것이다. 그 선은 어디에도 없다. 운동장에 그어져 있지도 않고 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간 아이는 다른 사람이 된다.

어떤 경계는 실재하고, 어떤 경계는 합의될 뿐이다. 그리고 합의된 경계가 더 아프다.

이 구별을 가장 철저하게 밀고 간 사람이 이천 년쯤 전 인도에 있었다. 나가르주나, 한자로는 용수라 불린 이 사람이 쓴 책이 『중론』이다. 내가 이해한 한에서, 그가 말한 핵심은 이렇다. 무엇이든 그것만으로 홀로 성립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이 된다. 길다는 것은 짧은 것이 있어야 성립하고, 안이라는 것은 밖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그 자체로 고유한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

경계에 이 말을 대 보면 이렇게 된다. 경계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우반이 있어야 열반이 있고, 멤버가 있어야 비멤버가 있다. 선 자체가 어딘가에 실물로 존재해서 나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나누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그 선이 있다.

이것은 힘 빠지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산은 옮길 수 없지만 합의는 다시 할 수 있다. 나를 가둔 그 선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누군가의 결정이었다면, 다른 결정도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서둘러 말하면 위험하다. 실체가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그 선 안에 갇혀 본 적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그 선을 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열반이라는 두 글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두 글자가 내 안에서 힘을 잃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실체가 없는 것이 사람을 이십 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무서운 부분이다.

열반이라는 두 글자에게 일어난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밖에 있었다. 교무실의 결정이었고 게시판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앉더니, 어느 순간 밖의 합의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앞에서 나는 열반에 배정된 아이가 아니라 열반인 아이가 되었다고 썼다. 그 '되었다'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합의가 자아가 되는 순간이 거기 있다.

그러니 자아의 경계는 실재하는 경계와 합의된 경계 사이에 낀 어정쩡한 제3의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합의된 경계가 안으로 들어와 실재가 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 사람을 이십 년 지배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때쯤 그것은 더 이상 합의가 아니라 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은 논박으로 벗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4장의 세포막을 다시 불러야겠다. 우리는 세포막이 만질 수 있는 물건이라서 실재하고, 자아의 경계는 만져지지 않으니 그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말한 대로, 세포막도 원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고, 우리가 그것을 막이라는 물건으로 부를 뿐이다. 나가르주나의 말과 다르지 않다. 경계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그렇다면 세포막과 자아의 경계는 재료가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만들어지는 속도가 다를 뿐이다. 세포막은 쉼 없이 새로 만들어져서 늘 그대로인 물건처럼 보이고, 자아의 경계는 너무 느리게 새로 만들어져서 바꿀 수 없는 바위처럼 보인다.

둘 다 실은 흐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느릴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경계를 갈라 보는 것이다. 첫째는 주어진 경계다. 세포막이 그렇고 장벽이 그렇다. 그것이 무너지면 융합이거나 죽음이다. 둘째는 합의된 경계다. 누가 안이고 누가 밖인지, 누가 멤버이고 누가 비멤버인지를 정한 선이다. 이것은 다시 그을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있다. 자란 경계다. 나와 너 사이의 선, 그리고 나 자신의 윤곽이 여기 속한다. 그것은 세포막처럼 주어지지도 않았고 명단처럼 밖에 걸려 있지도 않다. 밖에서 들어와 안에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셋은 다루는 법이 저마다 다르다. 주어진 경계는 지키는 것이고, 합의된 경계는 다시 긋는 것이며, 자란 경계는 지킬 수도 다시 그을 수도 없어 길러야 한다. 이것을 헷갈리면 잘못이 생긴다. 지켜야 할 막을 허물면서 자유롭다고 하거나, 다시 그을 수 있는 선 앞에서 이것이 내 운명이라고 하거나, 길러야 할 경계를 두고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다그치거나.

어릴 적의 나는 가운데 잘못을 저질렀다. 누군가 그은 선을 자연법칙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선을 지우는 대신 그 선 아래에서 나를 미워했다.

선을 다시 긋는 일은 대개 조용히 일어난다. 어느 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처음으로 다른 대접을 받거나, 누군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거나 할 때다. 그때 알게 된다. 아, 저 선은 나를 따라오지 않는구나. 저 선은 저 학교 안에서만 있던 것이구나.

나에게 그 일은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역도부에 들어가 주장을 맡으면서 바닥이던 자존감이 조금 올라왔다. 그리고 체육을 전공할 수 있다는 것, 운동선수가 되지 않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평생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적이 올랐다. 순서가 중요하다. 성적이 올라서 자신감이 생긴 것이 아니라, 다른 방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나서 성적이 올랐다.

그러니 누군가를 그은 선에서 꺼내는 방법은 그에게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선은 설득으로 지워지지 않고 다른 합의로만 바뀐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선이 사라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면 학회가 있고, 학회를 넘으면 또 다른 명단이 있다. 어느 학회의 회원 명단에서 내 이름이 거절되던 날의 이야기를, 나는 7장에서 하려 한다. 쉰이 넘어 받은 그 메일이 열네 살의 여름을 그대로 데려왔다. 선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앞에서 조금 덜 무너진다.

이 장의 참고

나가르주나(용수), 『중론』 — 연기와 무자성에 관한 이해 · 우열반 관련 회고는 저자의 페이스북 기록(2015) · 마투라나·바렐라(자기생성) — 4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