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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는 경계로 산다
대학에서 처음 현미경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들여다보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세포의 '내용물'—핵이며 소기관이며—이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을 붙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싸며 안과 밖을 가르는 얇은 막. 만약 누가 나에게 "생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하겠다. 생명은 막(膜)이다.
이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다. 세포 주기를 조절하는 원리를 밝혀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생물학자 폴 너스(Paul Nurse)는,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에서 생물학의 위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로 다름 아닌 '세포'를 꼽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세포 안에 담긴 정교한 부품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바깥 세계로부터 갈라 주는 막이다. 막이 안과 밖을 나누어 하나의 구별된 내부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생명의 화학이 흩어지지 않고 조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명의 첫 조건은 복제도, 대사도 아니었다. 자기를 세계로부터 구별해 내는 경계, 곧 막이었다. 생명은 경계에서 시작된다.
세포를 세포이게 하는 것은 핵도, 유전자도 아니다. 그것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막이다. 막이 없으면 세포도 없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물에 풀린 화학물질일 뿐이다. 수리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은 살아 있는 모든 시스템이 '마르코프 블랭킷'이라 부르는 경계를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안은 밖을 감지하고(받음), 밖을 향해 행동한다(응답). 즉 산다는 것은 경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일이다. 막이 없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경계가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부터 말해 온 것—존재는 경계에서 태어난다—을, 생물학도 같은 말로 들려준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시 만드는 경계'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했다. 살아 있는 것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은 따로 있지 않고, 서로를 빚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경계 이전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경계에서, 세상과 주고받으며 매 순간 만들어진다. 경계는 이미 다 된 나를 두른 벽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자리다.
세포막의 위대함은 그것이 단순한 벽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벽은 모든 것을 막는다. 그러나 세포막은 고른다. 어떤 것은 들이고, 어떤 것은 내보내고, 어떤 것은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 산소와 영양은 받아들이고, 노폐물은 내보내며, 해로운 것은 거부한다. 이것을 선택적 투과라고 부른다. 막은 가르는 동시에 잇는다. 그래서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다.
이 문장을 그림 한 장으로 본 적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에셔의 판화인데, 검은 새들과 흰 새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검은 새에 시선을 맞추면 검은 새가 선명해지고 흰 새는 배경으로 물러난다. 흰 새를 보면 반대가 된다. 그런데 둘 다 언제나 거기 있다. 검은 새의 윤곽선을 만들어 주는 것이 흰 새의 몸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를 지우면 다른 하나도 함께 사라진다. 경계란 그런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제3의 물건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그어 주는 선이다.
이 한 문장 안에 2장에서 본 두 병의 처방이 모두 들어 있다. 막이 완전히 열려 아무거나 들이면—녹아버림—세포는 안팎의 구별을 잃고 죽는다. 막이 완전히 닫혀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면—굳어버림—세포는 굶어 죽는다. 건강한 세포는 늘 그 사이에 있다. 열려 있으되 분별하고, 닫혀 있으되 소통하는 막. 나는 히브리어의 오래된 두 단어를 떠올린다. 창세기에서 사람에게 맡겨진 두 소명, 아바드(섬김·경작함)와 샤마르(지킴·보존함)다. 놀랍게도 세포막이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받아들여 섬기고, 지켜서 보존하는 일. 경계를 지키는 것이 곧 사랑이고, 경계 없는 융합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세포막이 가르쳐 준다. 세포가 죽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바로 막의 붕괴다.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고, 안의 것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밖의 것이 안으로 밀려든다. 경계의 소멸이 곧 죽음인 것이다. 2장에서 사회의 병으로 보았던 '녹아버림'을, 세포는 문자 그대로의 죽음으로 안다.
이 막은 세포에만 있지 않다. 우리 몸에는 층층이 경계가 있고, 그중 가장 넓은 것이 바로 장(腸)의 벽이다. 장 상피를 활짝 펼치면 테니스코트만 하다는 말을 나는 오래 들어 왔고, 부끄럽지만 그렇게 강의해 온 적도 있다. 그런데 2014년에 스웨덴 연구진이 정밀한 현미경 계측으로 다시 재어 보니 삼십에서 사십 제곱미터였다. 테니스코트가 아니라 배드민턴 코트의 절반쯤이다. 교과서에 오래 실려 있던 숫자가 열 배 가까이 부풀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원룸 한 채만 한 면적이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바깥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안과 밖이 맞닿는 가장 큰 최전선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지는 관은, 위상학적으로 보면 사실 몸의 '바깥'이다. 도넛의 구멍처럼, 우리 몸을 관통하는 외부인 것이다. 그러니 장벽은 나와 세계가 가장 크게 맞닿는 막, 곧 세포막의 거대한 신체적 확장이다.
그리고 이 장벽도 세포막과 똑같은 원리로 작동한다—선택적 투과다. 상피세포들 사이를 밀착연접(tight junction)이라는 이음매가 촘촘히 봉합하고 있어서, 영양소는 들이고 독소와 병원체는 막는다. 그런데 이 이음매가 헐거워지면 어떻게 될까? 원래 통과하면 안 되는 것들—채 소화되지 않은 단백질 조각, 세균 성분—이 혈류로 새어 들고, 몸은 이 침입자들에 반응해 만성적인 낮은 불씨의 염증을 켠다. 이것이 흔히 '장 누수'라 불리는, 장 투과성이 높아진 상태다. (대중적으로는 만병의 근원처럼 과장되기도 하지만, 장벽 기능과 투과성 자체는 엄연히 확립된 생리 현상이다.)
여기서 이 책의 명제가 몸속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장벽의 건강은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장에 사는 수십조 마리 미생물—곧 내 몸 안의 '타자'—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채소와 통곡물의 식이섬유를 먹으면, 장내 세균이 그것을 발효시켜 부티르산이라는 짧은사슬지방산을 만든다. 그런데 이 부티르산이 바로 대장 상피세포의 주된 먹이다. 부티르산이 넉넉해야 상피가 튼튼하고, 점액층이 두꺼워지고, 이음매가 단단하고, 염증이 가라앉는다. 반대로 섬유질을 안 먹으면 부티르산이 마르고, 굶주린 세균은 몸을 지키던 점액층을 대신 갉아먹어 경계를 허문다. 내가 타자(미생물)를 먹이면, 그 타자가 나의 경계를 지켜 준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이 관계야말로, 몸으로 실현된 상호내주다.
경계가 무너질 때 벌어지는 일도 의미심장하다. 장벽이 새어 자기와 비자기의 구별이 흐려지면, 면역계가 혼란에 빠져 급기야 자기 몸을 공격하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계가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지 못해 자기를 공격하는 것—말하자면 세포 차원의 나르시시즘이다. 앞 장들에서 마음의 병으로 본 '경계의 붕괴'가, 여기서는 면역의 병으로 나타난다. 물론 반대의 실패도 있다. 항생제를 남용하고 지나치게 무균으로 살아 미생물이라는 타자를 아예 박멸하면, 면역이 타자를 배우지 못해 오히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이 늘어난다. 경계를 지우는 것(융합)도, 경계를 벽으로 만드는 것(격리)도 병이다. 건강한 장은 그 사이—열려 있으되 분별하는 살아 있는 막이다.
이 원리는 뇌에서 가장 엄격하게 지켜진다. 뇌를 지키는 혈뇌장벽은 우리 몸에서 가장 선택적인 경계다. 뇌는 가장 지켜야 할 '안쪽'이니, 그 문지기도 가장 삼엄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경계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 장벽이 새어 염증 물질이 온몸을 돌면, 그것이 혈뇌장벽마저 헐겁게 하고, 뇌 안으로 염증이 번져 우울과 멍한 피로를 부른다. 이른바 장-뇌 축이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내가 주목해 온 뇌의 한 부위, 섬엽(insula)이 등장한다. 섬엽은 장과 내장에서 올라오는 몸속 신호를 '느낌'으로, 나아가 '나'라는 감각으로 번역하는 자리다. 그러니 몸의 경계가 무너지면, 그 무너짐이 섬엽을 통해 '내가 낯설다'는 자기의 흔들림으로 번역된다. 몸의 경계와 마음의 자기가 바로 여기서 만난다.
그런데 이 번역은 한 방향만이 아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염증이 나를 낯설게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벌어진 일도 몸의 경계를 바꾼다. 생쥐를 반복해서 사회적으로 패배시키면, 그 스트레스에 무너진 개체들의 뇌에서 혈관의 이음매를 봉합하던 단백질 하나가 줄어든다. 클라우딘-5라고 한다. 이음매가 헐거워지자 혈뇌장벽이 열리고, 그 틈으로 염증 신호가 들어가 우울한 행동이 나타났다. 눈여겨볼 것은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도 버텨 낸 개체들에게서는 그 감소가 없었다는 점이다. 무너진 쪽에서만 경계가 새었다. 그리고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의 뇌를 사후에 살펴보았을 때, 같은 자리에서 같은 단백질이 줄어 있었다. 관계에서 겪은 일이 내피세포의 이음매를 푸는 것이다. 그러니 몸의 경계와 마음의 경계는 위아래로 포개진 두 층이 아니다. 하나의 회로다.
여기서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세포막은 만질 수 있고 장 상피는 제곱미터로 잴 수 있지만, 마음의 경계는 대체 무엇으로 재느냐고. 나도 오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실험은 뜻밖에 단순하다. 한쪽 손을 가려 두고 그 옆에 고무손을 놓는다. 보이지 않는 진짜 손과 눈에 보이는 고무손을 붓으로 동시에 쓸어 준다. 몇십 초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저 고무손이 내 손 같다. 뒤이은 연구는 한 걸음 더 갔다. 그 고무손을 다치게 하는 시늉을 하자, 진짜 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손바닥에 땀이 배며 몸이 놀랐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을 자기로 삼은 몸이, 그 물건이 위협받자 진짜로 반응한 것이다.
내 몸의 경계가 몇십 초 만에 저쪽으로 옮겨 간 셈이다. 그러니 마음의 경계는 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재는 정도가 아니라 밀어서 옮길 수도 있다.
옮길 수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세포막에서 본 것을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갖다 붙이는 것이 그럴듯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말장난이 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층위가 다른 것들 사이에 같은 무늬가 반복될 때, 그것은 아래층이 위층을 만들어 냈다는 뜻도 아니고 둘이 그저 닮았다는 뜻도 아니다. 각 층위에는 그 층위에서만 나타나는 성질이 있고,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것이 자기를 유지하려면 어느 층위에서든 풀어야 하는 같은 문제가 있다. 안과 밖을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 일이다. 세포도 장기도 사람도 공동체도 그 문제를 푼다. 그래서 같은 무늬가 나온다. 이 책이 세포에서 시작해 관계로 올라가는 것은 은유의 사다리를 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제가 층마다 어떻게 풀리는지를 따라가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몸은 하나의 경계 지도다. 가장 안쪽 미토콘드리아의 막에서 시작해, 세포막, 혈뇌장벽, 장벽, 피부, 그리고 나와 남의 마음의 경계까지—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일을 한다.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고, 자기를 지키면서 세계와 주고받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경계를 한꺼번에 살리는 하나의 처방이 있다. 다름 아닌 운동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장내 미생물을 다양하게 하고 부티르산을 만드는 세균을 늘려 장벽을 튼튼하게 하고,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와 미주신경을 통해 혈뇌장벽과 신경염증을 다스리며, 미토콘드리아를 되살린다. 내가 평생 운동을 '약'이라 불러 온 까닭이 여기 있다. 운동은 미토콘드리아의 막부터 마음의 경계까지, 모든 층위의 경계를 동시에 살리는 개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속 수십조 개의 막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가장 구체적인 생명의 일이다. 나는 경계로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막이 건네는 지혜가 하나 더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폴 너스, 『생명이란 무엇인가』 · 칼 프리스턴(자유에너지 원리) · 마투라나·바렐라(자기생성) · M. C. 에셔, 「낮과 밤」(1938) · 창세기 2:15(아바드·샤마르) · Helander & Fändriks(2014), 소화관 표면적 재측정 · Botvinick & Cohen(1998), Nature 391:756 — 고무손 착각 · Armel & Ramachandran(2003),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270(1523):1499–1506 — 고무손을 위협했을 때의 피부전도반응 · Menard 외(2017), Nature Neuroscience 20(12):1752–1760 — 만성 사회패배 스트레스와 클라우딘-5, 혈뇌장벽 투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