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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숨 없는 들숨, 소진의 해부학
몇 해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적이 있다. 대단한 장면도 아니었다. 어떤 어른이 고등학생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었다. 아이고 많이 힘들었겠다, 맘고생이 심했지, 고생했어. 그 세 마디에 내가 왈칵 울었다. 나에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내 안에 위로 받고 싶은 내가 있나 보다.— 2022년, 페이스북
그때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강의를 했고 논문을 썼고 회의에 들어갔다.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안 어딘가에는 저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소진이라는 것이 그렇게 온다.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오지 않는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는 사람 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다가, 전혀 엉뚱한 데서 한 번에 드러난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병은 소진, 곧 번아웃이다. 여기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철학자 한병철의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해 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다 타 버린다. 예전에는 명령하는 주인이 있었다. 상사가, 규율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이루어도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그가 성과주체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부리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를 자유라고 착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 에렝베르는 이 시대의 지친 마음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라 불렀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그러지 못한 것이 온전히 자기 탓이 되어, 자기를 실현하려다 지쳐 무너진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짜 문제는 자기가 자기 이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댈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자면 에렝베르가 "자기가 되지 못해 아프다"고 했다면, 그는 "자기밖에 없어서 아프다"고 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라진 타자를 되찾는 쪽에 서 있다.
드라마를 보다 운 그날, 나는 글을 이렇게 맺었다.
우리는 힘이 들지만 다 힘든 티를 내고 살 수는 없다. 내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무 힘들 때는 괜찮은 척 할 필요 역시 없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이 나에게 새 힘이 되듯, 우리는 종종 타인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그게 사람 사는 것이니까.— 2022년, 페이스북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아무 이론도 읽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다 운 밤에 그냥 적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저 마지막 줄이 이 장의 답이다. 소진의 반대는 더 많은 휴식이 아니라 기댈 사람이다.
왜 끝이 없을까? 1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어 오르는 사람은 들이쉬기만 하려 한다. 성취를 쌓고, 크기를 부풀리고, 움켜쥔다. 그러나 날숨 없이 들숨만 반복하는 것—그것이 과호흡이고, 그것이 풍선의 팽창이다. 숨을 생각해 보라. 들이쉬기만 하면 죽는다. 내쉬어야 다시 들이쉴 수 있다. 생명은 채움과 비움의 교대다. 그런데 성과에 쫓기는 사람은 비우기를 거부한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아서.
채우기만 하는 것은 자라남이 아니라 터짐을 향한 팽창이다.
이 말을 삼천 년 전에 이미 한 사람들이 있다. 『주역』의 첫 괘인 건괘는 여섯 효가 모두 양인, 순수한 상승과 창조의 괘다. 그 여섯 자리가 용이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에 잠긴 용에서 시작해 점점 올라가다, 다섯째 자리에서 비룡재천, 곧 하늘을 나는 용이 되어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째 자리의 이름이 항룡유회다. 끝까지 올라간 용에게는 후회가 있다는 뜻이다.
절정과 추락 사이가 한 칸이다. 더 오를 데가 없어진 순간이 곧 떨어질 일만 남은 순간이라는 것을, 저 오래된 책은 괘의 맨 윗자리에 적어 두었다. 이 장의 제목을 다르게 쓰면 그것이 항룡유회다.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태극도를 떠올려 보아도 좋다. 검은 것이 가장 커진 자리에 이미 흰 점이 박혀 있고, 흰 것이 가장 커진 자리에 검은 점이 박혀 있다. 극에 이르면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점은 안전한 자리가 아니다. 정점은 방향이 바뀌는 자리다. 지혜란 비룡에서 멈출 줄 아는 것, 항룡이 되기 전에 물러설 줄 아는 것이다.
몸은 이 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다. 2004년, 심리학자 엘리사 에펠과 노벨상 수상자 엘리자베스 블랙번의 연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아픈 아이를 돌보며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린 어머니들의 세포에서, 염색체 끝을 보호하는 마디인 텔로미어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던 것이다(Epel et al., 2004). 쉬지 못한 시간만큼 세포가 실제로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운동생리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근육은 운동하는 동안 자라지 않는다. 근육은 쉬는 동안 자란다. 우리는 운동으로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회복으로 그것을 더 굵게 키운다. 회복을 생략한 훈련을 과훈련(overtraining)이라 하는데, 쉬지 않고 몰아붙인 몸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미묘한 구별이 하나 있다. 멈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진되어 주저앉는 멈춤과, 스스로 택해 숨을 고르는 멈춤. 앞의 것은 죽음이고, 뒤의 것은 생명이다. 앞의 멈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지만, 뒤의 멈춤은 다음을 잉태한다. 날숨이 다음 들숨을 부르듯이. 여기서 문학의 한 인물이 스쳐 간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침묵의 부동으로 스러진다. 흔히 그는 저항의 영웅으로 읽히지만, 나는 그를 소진의 초상으로 읽는다. 그의 멈춤은 주권적인 '아니오'가 아니라, 다 타 버린 자의 무력이다. 그는 새것을 낳지 못한 채 꺼진다.
쉬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여기 있다. 스스로 택하는 멈춤을 배우지 못했기에, 끝내 택하지 못한 멈춤—무너지는 정지—에 붙잡힌다. 그러니 이 책이 찾는 것은 뒤의 멈춤이다. 소진의 정지가 아니라, 새것을 낳는 날숨의 멈춤. 그렇다면 부푸는 대신 자라나게 하고, 무너지는 대신 회복하게 하는 경계란 대체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 하나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 몸의 지혜를 따라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Epel 외(2004), PNAS 101(49):17312–17315 — 만성 스트레스와 텔로미어 단축 · 알랭 에렝베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주역』 건괘 상구 항룡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