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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3 장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날숨 없는 들숨, 소진의 해부학

첫 번째 안식년을 보스턴에서 보내던 해, 나는 세계 최고의 대학 옆에 살면서 통장 잔고가 60달러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쪼들리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더 읽고, 더 쓰고, 더 증명하려고 나를 몰아붙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를 태우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여기서 멈추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두려움이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병은 소진, 곧 번아웃이다. 번아웃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이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해 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다 타 버린다. 예전에는 명령하는 주인이 있었다. 상사가, 규율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이루어도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면, 성과를 좇는 주체는 아무도 자기를 부리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를 자유라고 착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 에렝베르는 이 시대의 지친 마음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라 불렀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그러지 못한 것이 온전히 자기 탓이 되어, 자기를 실현하려다 지쳐 무너진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짜 문제는 자기가 자기 이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댈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자면 에렝베르가 "자기가 되지 못해 아프다"고 했다면, 한병철은 "자기밖에 없어서 아프다"고 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라진 타자를 되찾는 쪽에 서 있다.

왜 끝이 없을까? 앞 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어 오르는 사람은 들이쉬기만 하려 한다. 성취를 쌓고, 크기를 부풀리고, 움켜쥔다. 그러나 날숨 없이 들숨만 반복하는 것—그것이 과호흡이고, 그것이 풍선의 팽창이다. 숨을 생각해 보라. 들이쉬기만 하면 죽는다. 내쉬어야 다시 들이쉴 수 있다. 생명은 채움과 비움의 교대다. 그런데 성과에 쫓기는 사람은 비우기를 거부한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아서.

채우기만 하는 것은 자라남이 아니라 터짐을 향한 팽창이다.

몸은 이 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다. 2004년, 심리학자 엘리사 에펠과 노벨상 수상자 엘리자베스 블랙번의 연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아픈 아이를 돌보며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린 어머니들의 세포에서, 염색체 끝을 보호하는 마디인 텔로미어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던 것이다(Epel et al., 2004). 쉬지 못한 시간만큼 세포가 실제로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운동생리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근육은 운동하는 동안 자라지 않는다. 근육은 쉬는 동안 자란다. 우리는 운동으로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회복으로 그것을 더 굵게 키운다. 회복을 생략한 훈련을 과훈련(overtraining)이라 하는데, 쉬지 않고 몰아붙인 몸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미묘한 구별이 하나 있다. 멈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진되어 주저앉는 멈춤과, 스스로 택해 숨을 고르는 멈춤. 앞의 것은 죽음이고, 뒤의 것은 생명이다. 앞의 멈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지만, 뒤의 멈춤은 다음을 잉태한다. 날숨이 다음 들숨을 부르듯이. 여기서 문학의 한 인물이 스쳐 간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침묵의 부동으로 스러진다. 흔히 그는 저항의 영웅으로 읽히지만, 나는 그를 소진의 초상으로 읽는다. 그의 멈춤은 주권적인 '아니오'가 아니라, 다 타 버린 자의 무력이다. 그는 새것을 낳지 못한 채 꺼진다.

쉬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여기 있다. 스스로 택하는 멈춤을 배우지 못했기에, 끝내 택하지 못한 멈춤—무너지는 정지—에 붙잡힌다. 그러니 이 책이 찾는 것은 뒤의 멈춤이다. 소진의 정지가 아니라, 새것을 낳는 날숨의 멈춤. 그렇다면 부푸는 대신 자라나게 하고, 무너지는 대신 회복하게 하는 경계란 대체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 하나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 몸의 지혜를 따라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Epel 외(2004, PNAS, 텔로미어) · 알랭 에렝베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