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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사라진 시대의 두 얼굴
내가 어릴 적 자란 시골 동네에서는,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서로 알고 지냈다. 누구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온 동네가 함께 울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어머니들은 마당에 솥을 걸어 국수를 한 솥 가득 삶았고, 담이라고 해봐야 허리께에 오는 낮은 돌담이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낮은 담이 높은 벽돌담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혼밥, 혼술, "나 혼자 산다"가 자랑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여러분의 동네는 어떤가?
나는 오늘의 많은 병이 바로 여기, 경계의 소멸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의 병은 옛날의 병과 결이 다르다. 예전의 병이 대개 무언가의 결핍—먹을 것, 위생, 자유의 결핍—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과잉에서 온다. 너무 많은 연결, 너무 많은 자극, 너무 많은 "할 수 있음"에서.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을 긍정성의 과잉이라 불렀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밖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라, 안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긍정의 홍수라는 것이다.
이 진단을 나는 얼마 전 가보르 마테와 직접 나눈 대담에서 더 선명하게 들었다. 2026년, 나는 동료 교수와 함께 그를 화상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테는 우리가 '정상(normal)'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뒤섞어 쓴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건강하고 자연스럽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다, 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을 건강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끝없는 경쟁도, 만성적인 수면 부족도, 도구가 되어 버린 관계도,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정상'으로 통하지만 결코 건강하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마테에게 병이란 개인의 고장이 아니라, 이 비정상이 정상 행세를 하는 독성 문화에 대한 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아무리 개인을 치료해도 그를 같은 환경으로 돌려보내면 병은 되돌아온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왜 아픈가"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 환경은 무엇인가"이다.
이 홍수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다. 바로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이다. 나는 얼마 전, 힘든 시간을 지나며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런데, 난 '힘들다'라고 인정하는 건 내가 실패한 거라는 생각을 한 걸까? … 힘들어도 힘든 걸 부정하고, 다른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고 밥맛 없는 소리만 해댔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난 괜찮아'라고 자기 암시를 넘어 자기 최면을 하고 있었는지도.— 2024년, 페이스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요가 되면,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할 자리마저 사라진다. 슬픔에도, 분노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밀려드는 것에 저항하고, 잠시 멈추고,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선을 긋는 힘—이 바로 경계를 세우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이 약해지면,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가지 병이 찾아온다. 뿌리는 하나다.
하나는 녹아버림이다. 경계가 무너져 모든 것이 서로에게 흘러든다. 밤늦도록 그치지 않는 알림, 퇴근이라는 선이 지워진 노동, 멈추지 못하는 손가락의 스크롤. 우리는 그것을 연결이라 부른다. 그러나 연결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연결이 아니라 침수다. 섬이 물에 잠기는 것은 섬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과 이어져 있으나, 정작 어느 것과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굳어버림이다. 녹아내림에 지친 사람은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담을 쌓고, 문을 닫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아무것과도 만나지 않는다. 냉소가 편해지고, 무감각이 안전해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갑옷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는 성(城)은, 밖의 적에게 함락되기 전에 안에서 먼저 말라 간다.
녹아버림도 병이고, 굳어버림도 병이다.
심리학자 칼 융도 같은 두 얼굴을 보았다. 사회적 가면 뒤에 자기를 가둬 딱딱해지는 것이 굳어버림이라면, 나와 너의 선이 흐려져 상대를 삼키고 자기 안에 잠기는 것—융이 나르시시즘이라 부른 것—이 녹아버림이다. 둘 다 살아 있는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먼 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 안에서 자주 교대한다. 온종일 모든 알림에 반응하며 자신을 흩뿌리다가(녹아버림), 저녁이 되면 아무도 만나기 싫어 방문을 닫는다(굳어버림). 과잉연결과 고립은 반대가 아니라,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 보이는 두 얼굴이다. 경계를 잃은 사람은 늘 너무 열려 있거나 너무 닫혀 있다.
그러니 치유의 방향은 분명하다. 더 많이 연결되는 것도, 더 단단히 닫는 것도 아니다. 잃어버린 경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열려 있으되 아무거나 들이지 않고, 닫혀 있으되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경계. 병이 경계의 소멸이라면, 치유는 경계의 회복이다. 그런데 그 살아 있는 경계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아주 뜻밖의 곳에서 배울 수 있다. 바로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 세포 하나에서.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가보르 마테, 『정상이라는 신화』 · 칼 융(페르소나·나르시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