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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성이 사라진 시대, 상처를 두려워하는 마음
요즘 캐나다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석차를 발표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험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 번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한국도 점점 그쪽으로 가고 있다. 등수를 지우고, 기회를 늘리고,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쭈쭈는 아기를 어를 때 내는 소리다. 다 자란 사람에게도 그 소리를 내고 있는 시대라는 뜻으로, 나는 이 시대를 '우쭈쭈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게 아픈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다. 아무도 함부로 상처 주지 않으려 한다. 비판은 조심스러워지고, 소셜미디어에는 "너무 좋아요"가 넘친다. 겉으로 보면 이보다 따뜻한 세상이 없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긍정성이 과잉된 시대라 불렀다. 예전의 병이 억압과 금지, 곧 '아니오'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끝없는 '예스'에서 온다는 것이다. 우쭈쭈 시대는 바로 그 '예스'만 남은 세상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 아프게 하는 말, 곧 부정성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다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약해진다. 작은 비판에도 무너지고,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한다. 왜일까? 답은 뜻밖이다.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살아 있는 것은 적당한 상처를 통해 자란다. 근육은 미세하게 찢겨야 굵어지고, 면역은 균을 만나야 강해진다. 상처를 완전히 지운 세계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자랄 기회를 빼앗긴 무균실이다.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인 동시에, 상처를 두려워하는 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가 길러 내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치는 것이 무서워, 진짜로 자기를 걸지 않는다. 대신 부푼다. 여기서 이 책의 첫 번째 구별이 시작된다. 부푸는 것과 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라는 것은 안에서 채워지는 일이다. 나무가 자랄 때, 나무는 안쪽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다. 밀도가 높아지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부푸는 것은 밖으로 얇아지는 일이다. 풍선이 커질 때 고무막은 점점 얇아진다. 그리고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숲에서 폭풍에 먼저 쓰러지는 것도 작은 나무가 아니라, 속이 빈 채 키만 자란 큰 나무다.
자라남은 밀도를 얻고, 팽창은 밀도를 잃는다.
이 구별을 심리학자 칼 융은 오래된 이미지 하나로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내보이는 사회적 얼굴을 '페르소나(persona)'—배우의 가면—라 불렀다. 가면은 나쁜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그 가면을 자기 자신이라 착각하고 거기에 자기를 부풀리면—융은 이것을 '팽창(inflation)'이라 불렀다—겉은 커 보여도 속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반대로 참된 성장은 가면(밖)이 아니라 자기(Self, 안)로 향한다. 흩어진 나를 안에서 통합해 단단해지는 것, 융이 평생 '개성화'라 부른 그 길이 바로 자라기다. 부풀기는 가면의 팽창이고, 자라기는 자기의 심화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부풀까? 자신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짜 실패가 무섭기 때문이다. 진짜 실패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전부를 걸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존재에 대한 판결. 그 판결이 두려워, 사람은 최선을 아껴 둔다. 심리학은 이것을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라 부른다. 시험 전날 일부러 공부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이다. 열심히 하고도 낮은 점수를 받으면 "나는 원래 이 정도"라는 판결이 남지만, 하지 않고 낮은 점수를 받으면 "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알리바이가 남는다. 하지 않은 최선은 실패할 수 없다. 그러나 하지 않은 최선은 성공할 수도 없다.
우쭈쭈 시대는 이 도피를 부추긴다. 아무도 "아니, 그건 부족해"라고 말해 주지 않으니, 사람은 자기 한계에 부딪힐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니체는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밀려드는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 '아니오'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은 검증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다만, 자라지 못할 뿐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이 부풀림을 정확히 가리키는 문장이 있다. "지식은 사람을 부풀리고, 사랑은 사람을 세운다(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고린도전서 8장 1절) 부풀리는 것과 세우는 것—팽창과 성장의 차이가 벌써 여기 있다.
힘에는 두 종류가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앞의 힘만 있고 뒤의 힘이 없으면, 우리는 밀려드는 모든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는 기계가 된다. 멈출 수 없고, 거절할 수 없고, 그래서 자라지도 못한다. 성숙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경계란 바로 그 힘이 사는 자리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아니오'를 세울 수 있는 작은 틈, 부정성의 공간 말이다. 우쭈쭈 시대가 지운 것이 바로 이 틈이고, 이 책이 되찾으려는 것도 바로 이 틈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에게도 그 두려움이 있다. 보스턴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절, 죽음의 언덕이라 부르던 오르막이 있었다. 끙끙거리며 오르는데 앞에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탄 백발의 할머니가 나를 쌩하고 지나쳐 갔다.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나는 그분을 쫓았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가고 또 다른 언덕을 올라가며 이십 분을 쫓아가다가, 거의 잡았다 싶었는데 그분은 옆길로 빠져 다른 방향으로 가 버리셨다.
내가 이래도 체육 전공인데, 앞에 바구니를 달고 있는 할머니 자전거에 추월을 당하다니. 자존심 박살났다.— 2011년, 페이스북
그 자존심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이십 분을 쫓아간 것은 목적지가 급해서가 아니었다.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나와 겨루고 있지 않았다. 겨루고 있던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치지 않으려고 부푼다.
그런데 그날의 결말은 따로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예정보다 오 분이 일렀다. 그분을 쫓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평소보다 빨리 달렸던 것이다. 나를 창피하게 만든 사람이 나를 제시간에 데려다 놓았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 사람이, 그 상황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사람들. 자존심이 상하는 일과 나를 자라게 하는 일이 같은 얼굴로 온다는 것을, 나는 그 언덕에서 배웠다. 이 이야기는 6장에서 다시 하겠다.
그러니 이 책은 우쭈쭈 시대가 지워 버린 상처를 다시 초대하는 책이다. 다정함이 성장을 지우지 않도록, 아픔이 다시 자람의 자리가 되도록.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상처를 피하지 말고 통과하기를. 두려움은 감출 때가 아니라 마주할 때 비로소 작아지니까. 자,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이 장의 참고
칼 융, 페르소나·자기(Self)·개성화 개념 · Berglas & Jones(1978),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36(4):405–417 —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보는 법을 배운다") · 한병철, 『피로사회』 · 고린도전서 8장 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