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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10 장

멈추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休·安·息, 그리고 창조의 완성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가 점점 약해지신다. 이제 워커가 없으면 걷기 힘드시고, 손자의 이름도 잊으셨다. 논어를 다 외우시던 분인데. 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이런 글을 적었다.

누군가 그런다. 우리도 아빠와 엄마이지만, 우리도 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존재라고. 그런데 그 아빠와 엄마는 점점 약해지고, 힘들어지고… 참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2024년, 페이스북

나는 그 글을 쓰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였다. 아무리 강한 어른도 기댈 품이 필요하다. 그 자리를 우리 조상들은 세 글자에 새겨 두었다.

먼저 쉴 휴(休)를 보자. 休는 사람(亻)과 나무(木)가 합쳐진 글자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다. 여기 첫 번째 답이 있다. 쉼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休 안의 사람은 혼자 웅크린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것—나무—에 자기를 맡기고 있다. 나무는 성과를 내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어 준다. 성과에 쫓기는 사람이 잃어버린 바로 그 존재가 休의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를 조금 멀리서 보면, 그저 한 그루 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의 한가운데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고 상상했다. 뿌리는 땅속 깊이 내리고 가지는 하늘에 닿아,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 북유럽인은 그것을 위그드라실이라 불렀고, 신라의 금관은 그 나무를 머리에 얹은 형상이었으며, 에덴의 한가운데에도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를 우주목(宇宙木)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주목이 선 자리가 언제나 경계라는 점이다. 땅과 하늘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사람이 참으로 쉬는 자리는 바로 그 경계의 나무 아래다.

다음은 편안할 안(安)이다. 갓머리(宀, 지붕)와 여자 여(女)가 합쳐진 글자, 지붕 아래 사람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安의 편안함은 성취에서 오지 않는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음에서 온다. 그러니 끝없이 바깥으로 부푸는 사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병명은 정확히 불안(不安), 곧 安이 없음이다. 이제 두 글자가 만난다. 安息. 安은 제자리에 깃들어 자리 잡음, 곧 공간의 안정이다. 息은 내쉬며 그치고 그 비움에서 새로 태어남, 곧 시간의 리듬이다. 安息은 제자리에 깃들어(安) 숨을 내려놓는 것(息)이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여기서 창조의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경에서 신은 엿새를 만들고 이렛날에 安息한다. 히브리어 샤바트(shabbat)는 '그치다, 멈추다'라는 뜻이다. 놀랍지 않은가? 창조의 마지막이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치는 것이라니. 안식일이 있어야 창조가 완성된다. 노동이 아니라 멈춤이 창조를 매듭짓는다. 우리는 쉼을 창조의 중단으로 여기지만, 창세기는 정반대로 말한다. 쉼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이라고. 신조차 息하심으로 "이것으로 됐다"를 선언했는데,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그 息을 거부하기에 영원히 "됐다"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安息에는 가장 깊은 층이 하나 더 있다. 동아시아에서 安息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이 安息하소서." 息에 숨을 거둔다는 뜻이 있으니, 安息은 숨을 온전히 내려놓음, 곧 죽음과 맞닿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앞 장에서 보았듯 息은 그침과 낳음을 한 몸에 품는다. 安息의 죽음도 그러하다.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자리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요한복음 12장 24절). 씨앗은 땅에 묻혀(安, 자리 잡아) 자기를 그쳐야(息) 비로소 새싹을 낸다. 安息은 바로 그 씨앗의 자리다.

그래서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실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매일 밤 잠드는 것은 작은 죽음의 연습이고, 매 순간의 날숨은 그보다 더 작은 연습이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쉼이 아니라 죽음이다. 멈추면 사라질 것 같은 그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살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가 오늘을 산다는 오랜 지혜가, 安息이라는 두 글자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잘 쉬는 법이 곧 잘 죽는 법이고, 잘 죽는 법이 곧 잘 사는 법이다.

그러니 다음 물음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기대어 쉴 수 있을까? 그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4부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출애굽기 20:8–11 · 요한복음 12:24 참조 · (우주목·axis mundi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