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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경계
사랑은 첫 번째 선물이다. 아이가 말하기 전에, 선택하기 전에, 이해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져야 한다. 안기고 먹여지고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사랑은 아이를 덮어 주고, 스스로 설 수 없을 때 대신 들어 준다. 그것이 없으면 생명은 시작되기도 전에 시든다.
그런데 사랑만으로는 한 사람을 불러내지 못한다. 어떤 부모는 깊이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는다. 정원을 돌보듯 아이를 아낀다. 보호하고 가꾸고 무엇이 될지를 정해 준다. 그 헌신은 진짜이고 때로 희생적이다. 아이는 자기가 귀하다는 것을 배운다. 배우지 못하는 것은 자기 목소리에 무게가 있다는 것, 자기 질문이 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자기 판단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존중은 소유가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관리하는 대신 말을 거는 일이다. 약할 때조차 내 아래가 아니라 내 앞에 선 사람으로 보는 일이다. 그러면 아이의 거절은 고쳐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이 되고, 아이의 질문은 방해가 아니라 초대가 된다.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존중인 이유가 여기 있다. 성장이란 부모가 주는 것이 커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아내가 급히 캐나다로 가고 나는 한 달 넘게 기현이와 둘이 지냈다. 그때 쓴 글을 지금 다시 읽으면 낯이 뜨겁다.
애를 깨운다. 이게 보통 10분 정도 걸린다. 이거 잘못하다 아들의 발차기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다.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곁들여 밥을 입에 쑤셔 넣고 나면… 애를 씻기고 간식을 먹이고 재우면 나는 마음도 몸도 영혼도 만신창이가 된다. 왜 불쌍한 애에게 소리를 질렀을까? 왜 궁뎅이를 때렸을까? 내가 정신이 미쳐 가는 것은 아닐까?— 2014년, 페이스북
그런데 그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날 나는 이렇게도 적었다. 애를 재우고 텔레비전을 보며 멍때리는 시간이 힐링타임이라고, 그리고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면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고, 귀찮다는 애를 꼭 껴안고 잠이 든다고. 다음 날 또 한 번의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그 글은 끝난다.
이것이 부모의 하루다. 소리 지른 것과 껴안은 것이 같은 날 안에 있다. 나는 나쁜 아버지였다가 좋은 아버지였다가 한 것이 아니다. 사랑과 불안이 한 몸으로 굴러간 것이다. 그래서 구별이 어렵다.
협박과 회유. 내가 고른 단어다. 그 한 달 동안 내가 아들에게 한 일의 대부분은 관리였다. 깨우고 먹이고 데려다주고 학습지를 시키고 재웠다. 사랑이 아니었느냐고 물으면 사랑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문법이 명령형이었다.
부모의 가장 큰 유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불안이다.
우리는 아이가 실패할까 봐, 다칠까 봐, 어리석게 선택할까 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불안은 너무 쉽게 사랑으로 위장해서 좀처럼 들키지 않는다. 불안은 쉬지 않고 말한다. 고치고 상기시키고 경고하고 지시한다. 침묵할 수가 없다. 침묵이 방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이 깊어지면 우리는 사랑을 희생으로 재기 시작한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 줬는데. 그 셈법 아래에는 말해지지 않은 간청이 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어떻게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니. 그때부터 사랑은 이 아이가 누가 되어 가는지를 묻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아이는 깊이 사랑받지만 온전히 신뢰받지는 못한다. 보호받되, 되어 가는 것은 허락받지 못한다.
2018년 케임브리지에서 그 불안이 한 번 터졌다.
기현이가 말을 시킨다. 대답하다 왼쪽 공사하던 곳을 들이받았다. 차 왼쪽이 찌그러졌다. 기현이가 뭐라 말한다. 닥쳐. 소리치는 나를 발견한다.— 2018년, 페이스북
그것은 아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의 불안, 가장이라는 압박, 뜻대로 되지 않던 연구, 사오십 명이 함께 쓰는 방에서 눈치를 보던 수치심. 그 전부가 차가 찌그러지는 순간 한꺼번에 터졌고, 하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터졌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미안하다 뒤에 그런데를 붙이고 싶은 충동을 참는 일이었다. 그 한마디가 붙는 순간 사과는 변명이 된다.
그래서 존중은 사랑보다 어렵다. 사랑은 책임을 느끼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오고, 사랑은 행동하고, 행동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존중은 다르다. 한 사람의 삶이 통제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자유로 단단해진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림은 무섭다. 안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위험한 자리이고, 어떤 아이는 그 자리에 훨씬 덜 안정되게 선다. 흔들리는 아이가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것을 보면 부모는 앞을 막아서고 싶어지고, 대개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매번 경계를 건너 안겨 온 아이는 경계에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경계는 머지않아 그 아이를 혼자 찾아온다. 부모의 자리는 가장자리 위가 아니라 가장자리 바로 뒤다.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서는 일이 아이의 것이 될 만큼은 떨어진 자리.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조정할 것은 존중이 아니라 무게다. 아이가 가진 것을 넘어서는 도전은 아이를 키우지 않고 부순다. 6장의 호르메시스가 여기서 부모의 언어로 번역된다. 죽이지 않을 만큼. 다만 무게가 무거울 때의 답은 무게를 줄이는 것이지 신뢰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맡기고, 어떤 아이에게는 오늘 어느 문제부터 풀지를 맡긴다. 크기는 다르되 맡긴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경계는 위험하고, 동시에 무엇인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다. 안전한 한가운데에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진짜 기술은 아이를 가장자리에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가 태어나는 자리로 남을 만큼만 위험하게 두는 것이다.
이 장을 쓰면서 오래 걸린 것은 개념이 아니라 한 가지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들을 관리하려 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성적은 양호하나 주의가 산만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중학교에 가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주의도 산만함이 되었다. 우산과 보온도시락은 들고 나가면 집에 들어온 날이 별로 없었다. 나는 고쳐야 할 아이였다.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나를 다시 불렀다.
의사들은 나 같은 사람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라고 부르고 범주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Active, Diligent, Highly-sensitive, Delightful. 나는 자랑스러운 ADHD입니다.— 2014년, 페이스북
나에게 그 말을 해 주기까지 마흔 해가 걸렸다. 그런데 같은 기질을 가진 아들에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깨우고 먹이고 학습지를 시켰다. 고치려 했다. 평생 듣기 싫었던 그 문장을, 나는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사랑은 말한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다. 존중은 말한다. 나는 네가 스스로 서도 될 만큼 너를 믿는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존중 없는 사랑은 소유가 되고, 사랑 없는 존중은 거리가 된다. 하나는 숨 막히게 하고 하나는 버린다. 두 가지가 서로 안에 깃들 때에만 어느 쪽도 온전해진다. 13장에서 말한 상호내주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취하는 형태가 이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존중은 사람을 놓아준다.
10장에서 나는 아들을 공항에서 보내며 걱정과 화는 줄었는데 기쁨이 확연히 줄었다고 적었다. 그때는 그것을 상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읽는다. 그 빈자리는 잃어버린 자리가 아니라 놓아준 자리다. 부모됨의 가장 깊은 소명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살아남는 아이를 기르는 것도, 성공하는 아이를 기르는 것도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 앞에 서서 자기 이름으로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나는 나다, 라고.
이 장의 참고
저자의 미발표 에세이 「Love Keeps a Child Alive; Respect Lets a Child Become」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14, 2018) · 상호내주는 13장, 감당할 만한 무게는 6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