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밀번호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상호내주라는 오래된 지혜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평생 무엇을 좇아왔는지가 선명해진다. 나는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인정을 늘 간구하던 나. 새로운 성취를 이룰 때 아버지에게 하던 자랑질. 그때마다 늘 기뻐하시던 아버지. 돌아보면 내 성취의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고 기뻐해 줄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쉬지 못하는 사람의 병은 바로 여기서 온다.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스스로의 주인이 된 대가로, 우리는 인정해 주는 이도 함께 잃었다. 생각해 보면 만족이란 본질적으로 인정이고, 인정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상은 상이 아니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다. 부풀기의 비극이 여기 있다.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려는, 원리상 불가능한 시도에 갇혀, 아무리 이루어도 됐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는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기댈 나무를 찾고, 함께 숨 쉴 사람을 찾는 것.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캐나다 유학 시절 이야기다.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로 한 시간이고 첫차를 타도 시간에 댈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다섯 시에 집을 나와 정류장에 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나님이 내가 새벽기도에 가기를 원하신다면 저 차 중 하나가 나를 태워 주겠지.
아무도 서지 않았다. 손을 들면 될 일이었지만 창피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십 분쯤 서 있는데 마음에 한 문장이 들려왔다.
용관아, 네가 진정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싶다면, 왜 너의 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니?— 2016년, 페이스북
나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지 않아도 차가 알아서 서 주기를, 창피를 무릅쓰지 않고도 도움이 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손을 들었다. 세 번째 차가 섰다. 그 사람은 내가 말한 환승소가 아니라 교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의 새벽기도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休가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이라면, 기대지 못하는 병의 이름이 바로 그 십 분이다. 우리는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손을 들지 못해서 혼자인 경우가 많다.
반대편에는 먼저 알아보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후배 기주를 나는 1990년에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03년 보스턴의 한국 식품점에서, 다시 2011년 찰스강가 맥도날드에서 그를 만났다. 두 번 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불렀다. 용관이 형. 낯선 땅에 막 도착해 정신없던 우리 가족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의 아내 덕분이었다. 자전거 사고로 앞니가 부러졌던 날, 토요일이라 열지 않는 병원을 열어 내 이를 치료해 준 사람도 그의 아내였다. 손을 드는 쪽과 먼저 부르는 쪽. 관계는 그 두 동작으로 완성된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두 가지 관계를 구별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 나-그것에서 상대는 이용하고 분석하는 대상이다. 나-너에서 상대는 온전한 현존으로 마주 서는 존재다. 부버는 나-너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고 했다. 사이(das Zwischen)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와 너가 살아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다. 나는 관계 이전에 있지 않다. 나는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몸도 이 진실을 안다. 우리 몸에는 관계의 분자라 불릴 만한 호르몬이 있다. 옥시토신이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안고, 신뢰할 때 옥시토신이 오른다. 2005년에 나온 유명한 실험이 있다.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한 사람이 낯선 상대에게 더 많은 돈을 맡겼다는 연구다. 한동안 이 결과는 신뢰의 호르몬이라는 별명의 근거로 널리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 결과는 뒤이은 재현 시험을 잘 통과하지 못했다. 2015년의 한 비판적 검토는 재현에 실패한 연구 여섯 편을 모아 놓았고, 2020년의 대규모 사전등록 재현 연구도 효과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을 이 책에 그대로 적어 두려 한다. 오래 옥시토신을 이야기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좋아하는 결과일수록 흔들린 뒤에 남는 것만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패한 재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이 나온다. 원래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투약 뒤 오 분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재현 연구들은 대개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는 조건이었다. 2020년 연구도 사람 사이의 접촉이 최소인 조건에서 효과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증거가 가리키는 것은 이렇게 정리된다. 분무기로 넣은 옥시토신이 사람을 믿게 만들지는 않는다.
옥시토신은 관계를 대신하지 못한다.
이 책의 주장에는 오히려 이쪽이 맞다. 신뢰를 만드는 것은 분자가 아니라 사이다. 몸의 화학은 관계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기보다, 관계가 일어날 때 몸에서 함께 일어나는 일에 가깝다. 관계가 건강을 만든다는 말은 그래서 은유가 아니다. 다만 그 말의 주어는 호르몬이 아니라 사람이다.
신학은 이 오래된 지혜를 상호내주(perichoresis)라 부른다. 서로 안에 깃들어 삶.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안에 깃들어 쉰다. 성부가 성자 안에서, 성자가 성부 안에서. 신은 홀로 쉬지 않고, 관계 안에서 쉰다.
이 오래된 신학의 통찰을, 나는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와의 대담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로 다시 만났다. 이 교수는 우리라는 것이 나와 너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1 더하기 1이 아니라, 그보다 큰 제3의 실재, 곧 우리 사이가 창발(emergence)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이 우리 집, 우리 아내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가, 사실은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관계의 과학인 셈이다. 신학자 마리아 목사와의 대담에서는 같은 진실이 더 따뜻한 이미지로 왔다. 늙어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엄마를 돌봐 줄 엄마가.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그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돌 때, 관계는 멈추지 않는 춤이 된다.
安息은 곧 관계 안에서의 쉼이다.
이 상호내주에는 두 얼굴이 하나로 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되(연합), 각자는 온전히 자기로 남는다(구별). 녹아 하나가 되는 융합도 아니고, 등 돌린 격리도 아니다. 앞서 본 세포막처럼, 가르면서 잇는 살아 있는 경계가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다. 그러고 보면 4장에서 본, 장 속 미생물과 내가 서로를 먹이고 지켜 주던 그 관계가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가장 작은 몸속 판본이었다. 관계 안에서 쉰다는 것은, 신학이기 이전에 생물학이다. 11장에서 만난 우주목이 바로 이 궁극의 나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쉬는 그 나무는, 하나의 고독한 기둥이 아니라 서로 안에 깃들어 함께 서 있는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나무가 되어 줄 때,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목이 된다. 누군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축.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서로 안에 깃든다는 것은 문을 활짝 열어 두는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경계는 열림과 닫힘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무엇을 언제 들일지 매번 가려내는 조건부의 투과다. 세포막이 그렇고 장벽이 그렇다. 사람 사이에서 그 가려냄의 이름이 환대다. 환대는 아무나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를 지운 채 삼켜지지도 않고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으면서 낯선 이를 안으로 들이는 기술이다. 그래서 환대에는 반드시 주인이 필요하다. 자기가 없는 사람은 손님을 맞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8장에서 남겨 둔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안토노프스키의 통합감은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받쳐 주는 관계, 나를 조건 없이 인정하는 사람, 함께 숨 쉬는 사이에서 태어난다. 9장에서 본 미주신경이 안전한 관계 앞에서야 비로소 켜지듯이.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다. 건강은 관계라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장의 참고
마르틴 부버, 『나와 너』 · Kosfeld 외(2005, Nature 435:673–676, 옥시토신과 신뢰)와 그 재현 논쟁 — Nave, Camerer & McCullough(2015,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의 비판적 검토, Declerck 외(2020, Nature Human Behaviour)의 사전등록 재현 · 이성회 교수·마리아 목사와의 대담 · 상호내주(perichoresis) — 요한복음 14:10–11, 카파도키아 교부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