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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제 4 부

생성 —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

상처, 관계, 그리고 성숙

12 장

상처 입은 치유자

경계의 신학

2015년 봄, 보스턴에서 자전거로 출근하다 크게 넘어졌다. 언덕을 내려와 코너를 돌며 멈춰 선 차 옆으로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난 자전거를 던지고 몸을 날렸고, 나의 왼 엉덩이는 기찻길을 때리고, 나의 몸은 굴러 나의 얼굴로 기찻길에 착지. 혀로 느껴진 깨진 앞니, 뱉은 침과 섞인 핏물. 헬멧에 보호된 나의 머리, 살이 열린 나의 어깨, 쑥 들어간 나의 앞니. 앰뷸런스를 부르는 사람, 휴지를 가져다주는 사람, 차를 열고 바라보는 아이, 쓰러져 버린 나의 자전거.— 2015년, 페이스북

그날 나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무언가를 적었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고, 아니 영혼이 더 또렷해졌다고 썼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나왔다.

넘어짐은 순간이다. 그게 나의 진짜 모습이다. 넘어질 수도 있는 나의 모습이 진짜다. 넘어진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넘어진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으켜 줄 수밖에는….— 2015년, 페이스북

피가 흐르는 자리에서 쓴 문장이라 그런지, 나는 그 뒤로 이 말을 취소하지 못했다. 넘어져 본 사람만이 넘어진 사람 곁에 앉을 수 있다.

여러 해 뒤, 나는 연세대학교 채플 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오래된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만점에 2.63이던 성적, 발표만 하려 하면 두근거리던 가슴, 외모와 낮은 자존감. 어릴 적에는 간염 보균자라는 이유로 식판을 따로 써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상처들을 꺼내 놓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강당이 조용해지고, 몇몇 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성취가 아니라 내 상처가, 그들에게 가닿은 것이다.

왜 감춘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가 사람을 살릴까? 얼마 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나는 그 답의 한 자락을 몸으로 배웠다. 상주에서 아들의 혼주까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씩씩해야 했다. 그런데 그 억누름의 대가가 있었다.

슬픈 감정을 부인하고 억누르다 보니 모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몸에서 오는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2025년, 페이스북

정신의학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감당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고 말한다. 감정을 닫아 버리면, 몸은 그 닫힘을 앓는다. 상처를 감추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몸을 병들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상처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열어야 하는 무엇이다.

가보르 마테는 이 단절을 더 깊은 곳에서 짚는다. 그와의 대담에서 가장 오래 남은 말이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감정을 닫는 것은 곧 나의 몸과, 나 자신과 끊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를 감추는 사람은 남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이 된다. 치유가 상처를 여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열림은 곧 나 자신과 다시 이어지는 일이니까.

나는 이것을 몸으로 오래 겪었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9년 여름, 수상스키 훈련 중에 보트가 터지는 사고로 몸의 삼십 퍼센트에 화상을 입고 한 달을 입원했다.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그런데 몸이 나은 뒤가 더 길었다. 흉터를 남들이 볼까 봐 나는 삼 년 동안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여름마다 긴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나는 상처를 감추는 일이 상처보다 오래간다는 것을 배웠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생각은 근대의 발명이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09년에 올린 「필록테테스」가 이미 그 이야기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로 가는 길에 뱀에 물려 낫지 않는 상처를 얻는다. 상처에서 나는 악취와 그가 지르는 비명을 견디지 못한 그리스군은 그를 렘노스라는 섬에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십 년 뒤, 그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이 없으면 트로이를 이길 수 없다는 신탁이 내려온다. 버린 자들이 데리러 돌아온다.

이 극에서 내가 오래 붙든 것이 둘이다. 하나는 상처와 활이 같은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것이다. 냄새가 나서 내다 버린 그 사람 없이는 이길 수 없다. 공동체가 견디지 못해 밀어낸 것과 공동체가 끝내 필요로 하는 것이 한 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상처가 언제 낫는가다. 섬에서는 십 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신탁은 그가 트로이에 도착해서야, 곧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을 때 낫는다고 말한다. 혼자 있는 동안 아물지 않던 것이 무리 안으로 돌아가자 아문다.

그리고 이 극에서 정작 배우는 사람은 필록테테스가 아니다. 그를 데리러 간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속여서 활을 빼앗아 오라는 지시를 받고 간다. 그런데 곁에서 그의 발작을 지켜보다가 부끄러워져 활을 돌려준다. 십 년을 앓은 사람이 아니라 그를 속이러 온 젊은이가 달라진다. 이 어긋남이 이 장의 뒷부분에서 다시 문제가 된다.

네덜란드의 사제이자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로 붙잡았다.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이 자기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닿는다. 나는 동료인 이지선 교수를 떠올린다. 대학생 시절 음주운전 사고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고 수십 번의 수술을 견뎌 낸 그는, 지금 학생을 가르치며 수많은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건넨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사고와 만났고, 그리고 성공적으로 헤어졌다고. 우리가 2003년에 처음 만나 이십 년이 넘도록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로 남은 것은, 아마 우리 둘 다 같은 자리를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상처가 닫히지 않고 열려, 타인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나우웬에게서 배우기 전에 다른 자리에서 먼저 만났다. 2013년 여름, 한 학기 수업과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사랑은 자기를 상처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영어의 vulnerable은 깨어지기 쉽다, 상처받기 쉽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크기를 재는 자도 달라진다.

사랑의 척도는,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얼마나 상처받을 수 있는가이다.

그때 내가 적어 둔 목록은 뜻밖에 사소했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전화를 끊기 전에 먼저 그 말을 해 주는 것, 먼저 자기 약점을 고백하는 것, 먼저 안아 주는 것, 먼저 주는 것. 전부 먼저였다. 사랑이 위험한 일인 이유가 여기 있다. 먼저 내민 손은 언제나 거절당할 수 있고, 먼저 내민 사람이 언제나 더 많이 다친다.

같은 무렵 나는 취약함의 힘에 관한 브레네 브라운의 강연을 보다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온전한 사람이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대목에서였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옮겨 적었다. 온전한 사람은 자기 약점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꺼이 열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사람이다.

여기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것은 상처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상처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자기를 세워 두는 일이고, 그 일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다. 그날 내 글은 밀알 이야기에서 끝났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11장에서 그 구절은 멈춤의 이야기였다. 여기서는 사랑의 이야기가 된다. 그 사람을 위해 땅에 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이 그날 내가 나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상처 없는 사람은 닫힌 성(城)이다.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한다.

왜 그럴까? 상처란 나의 표면이 뚫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매끈한 껍질로 닫혀 있던 내가, 그 자리에서 열린다.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열린 자리로만 타인이 들어올 수 있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나갈 수 있다. 상처는 곧 경계다. 안의 나와 밖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 6장의 호르메시스를 기억하는가.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몸을 강하게 했다. 여기서 그 원리는 관계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사람을 치유자로 만든다. 6장에서 겪어서 배운다는 말의 끝이 자기 분별이었다면, 여기서 그 분별은 남에게 건너간다. 같은 자리를 지나 본 사람만이, 남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아본다. 우쭈쭈 시대는 상처를 감추고 괜찮은 척하라고 가르치지만, 감춘 상처는 결코 통로가 되지 못한다.

다만 상처가 저절로 통로가 되지는 않는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했다. 그 순간을 겪는 경험 자아와, 그 경험에 이야기를 붙이는 기억 자아다. 군대에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이 제대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군대 이야기만 하는 것은, 그가 그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같은 고통이라도 이름 붙이지 못한 고통은 흉터로만 남고, 이름을 얻은 고통은 통로가 된다. 9장에서 모세가 같은 사십 년에 두 번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그런데 여기에 정직하지 못한 구석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 상처가 통로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실패한 사람은 대개 그냥 부서지고, 아픈 사람은 대개 그냥 아프다.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고통이 훨씬 많다. 6장에서 남겨 둔 물음이 이것이었다. 아가멤논은 겪고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은 누구에게 가는가.

아이스킬로스는 그 답을 삼부작 전체로 풀어 놓았다. 아가멤논은 십 년 뒤 돌아와 아내에게 죽고, 아내는 아들에게 죽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배신자가 없다. 아가멤논은 동생을 위해 원정을 일으켰고, 아내는 딸을 위해 남편을 죽였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죽였다. 저마다 지킬 사람이 있었고 모두 그 의무에 충실했다. 부딪히는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선과 선이다.

그래서 이 순환은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정당함을 근거로는 멈출 수 없고, 더 옳은 사람을 데려와도 그는 자기 몫의 정당함을 들고 회로 안으로 들어올 뿐이다. 삼부작이 화해나 용서가 아니라 아테네에 세워진 재판정에서 끝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릴 자리를 회로 바깥에 만드는 것. 그러니 겪어서 배운다는 말은 애초에 한 사람의 성장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공동체가 배우는 방식에 관한 말이었다.

배움은 순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오지 않았다. 아가멤논도 그의 아내도 그의 아들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지혜는 그 순환을 바깥에서 지켜본 사람들, 기원전 458년 봄 아테네의 극장에 앉아 있던 관객에게 왔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진다.

잔인하게 들리지만 이쪽이 정직하다. 당신의 실패가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라는 약속은 자주 거짓이다. 그러나 검증할 수 있는 다른 문장이 있다. 말해진 고통은 누군가에게 도달한다는 것, 이야기가 된 실패는 그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장이 없다. 내가 채플에서 성적과 식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듣던 사람 몇은 울었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부작의 마지막에서 아들은 끝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후회하지도 않고 자기 행위를 다시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무죄가 된다. 판결을 내리는 것은 그 회로 안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자, 유일하게 바깥에 서 있던 자다. 그리고 그는 판정에서 그치지 않고 복수의 여신들을 자비의 여신들로 바꾸어 놓는다. 밖에서 배운 자가 회로 자체의 성질을 바꾼 것이다.

그러니 방향은 이렇게 완성된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지며, 그 배움이 다시 안으로 돌아와 값을 치른 사람을 건진다. 내 이야기가 나를 지나 누군가에게 닿았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 내가 끝내 보지 못한 것을 대신 보고 돌아올 수 있다. 나는 내 실패의 뜻을 모른 채로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프리모 레비를 떠올린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 평생을 증언에 바친 사람인데,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 생존자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완전한 증인은 바닥까지 가라앉은 자들인데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말할 수 없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말할 뿐이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진다는 말이 결코 흐뭇한 문장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장 깊이 겪은 사람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다. 우리가 듣는 모든 증언은 덜 겪은 사람의 것이다.

다만 두 가지를 잊으면 이것은 곧바로 위선이 된다. 하나, 돌아온 사람이 잃은 것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이피게네이아는 끝까지 죽어 있다. 회로를 끊는 일과 값을 갚는 일은 다르다. 이 둘을 섞는 순간 우리는 고난을 사후에 정당화하는 장부로 미끄러진다. 둘, 밖에서 배운 사람은 값을 치르지 않고 배운 사람이다. 그가 구원자 자리에 서면 가장 쉽게 시혜자가 되고, 그러면 순환은 끊어지는 대신 위계로 모양만 바꾼다. 그가 돌아갈 자격을 얻는 근거는 그가 더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빚졌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상처를 부끄러워했다. 더 많은 성취로 그것을 덮으려 했다. 부풀기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은 덮은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였다. 암 환자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두려움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무너져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치유자는 경계에 서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라는 경계를 닫지 않고 열어 두어, 그 자리로 타인의 아픔이 드나들게 하는 사람. 그렇게 열린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태어날까? 그것이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 · 에드먼드 윌슨, 『상처와 활』(1941) · 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 브레네 브라운, 「취약함의 힘」(TEDxHouston, 2010) · 요한복음 12:24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13, 2015, 2025) · 아이스킬로스,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 「아가멤논」의 파테이 마토스와 「자비로운 여신들」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재판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가보르 마테, 『정상이라는 신화』(2022) — 트라우마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로부터의 단절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2011) —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