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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N
12 장

관계 안에서 쉬다

상호내주라는 오래된 지혜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평생 무엇을 좇아왔는지가 선명해진다. 나는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인정을 늘 간구하던 나. 새로운 성취를 이룰 때 아버지에게 하던 자랑질. 그때마다 늘 기뻐하시던 아버지." 돌아보면 내 성취의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고 기뻐해 줄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쉬지 못하는 사람의 병은 바로 여기서 온다.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스스로의 주인이 된 대가로, 우리는 인정해 주는 이도 함께 잃었다. 생각해 보면 만족이란 본질적으로 인정이고, 인정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상은 상이 아니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다. 부풀기의 비극이 여기 있다.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려는, 원리상 불가능한 시도에 갇혀, 아무리 이루어도 "됐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는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기댈 나무를 찾고, 함께 숨 쉴 사람을 찾는 것.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두 가지 관계를 구별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 나-그것에서 상대는 이용하고 분석하는 대상이다. 나-너에서 상대는 온전한 현존으로 마주 서는 존재다. 부버는 나-너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고 했다. '사이(das Zwischen)'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와 '너'가 살아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다. 나는 관계 이전에 있지 않다. 나는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몸도 이 진실을 안다. 우리 몸에는 관계의 분자라 불릴 만한 호르몬이 있다. 옥시토신이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안고, 신뢰할 때 옥시토신이 오른다. 2005년 한 연구는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한 사람이 낯선 상대를 더 잘 믿는다는 사실을 보였다(Kosfeld et al., 2005). 옥시토신이 높으면 상대의 마음을 더 잘 읽고, 스트레스에 덜 무너지며, 심지어 상처도 더 빨리 아문다. 반대로 옥시토신이 낮으면 우울과 염증, 통증의 위험이 오른다. 관계가 건강을 만든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우리 몸속에 흐르는 화학이다.

신학은 이 오래된 지혜를 상호내주(perichoresis)라 부른다. 서로 안에 깃들어 삶.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안에 깃들어 쉰다. 성부가 성자 안에서, 성자가 성부 안에서. 신은 홀로 쉬지 않고, 관계 안에서 쉰다.

이 오래된 신학의 통찰을, 나는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와의 대담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로 다시 만났다. 이 교수는 '우리'라는 것이 나와 너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1 더하기 1이 아니라, 그보다 큰 제3의 실재—'우리 사이'—가 창발(emergence)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사회과학이 오래 '개인의 행위'에만 매달려 온 반면, 그는 그 '사이' 자체를 살아 있는 하나의 실체로 보고 연구한다. 우리말이 '우리 집', '우리 아내'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가, 사실은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관계의 과학인 셈이다.

신학자 마리아 목사와의 대담에서는 같은 진실이 더 따뜻한 이미지로 왔다. 마리아 목사는 어느 날 늙어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엄마를 돌봐 줄 엄마가." 상호내주란 바로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땅에게 하늘이 되어 주고, 다시 그 땅의 땅이 되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것. "네가 기댈 언덕이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돌 때, 관계는 멈추지 않는 춤이 된다. 각자가 자기를 내어주며 상대를 자기보다 높이기에, 그 순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安息은 곧 관계 안에서의 쉼이다.

이 상호내주에는 두 얼굴이 하나로 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되(연합), 각자는 온전히 자기로 남는다(구별). 녹아 하나가 되는 융합도 아니고, 등 돌린 격리도 아니다. 앞서 본 세포막처럼, 가르면서 잇는 살아 있는 경계가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다. 그러고 보면 4장에서 본, 장 속 미생물과 내가 서로를 먹이고 지켜 주던 그 관계가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가장 작은 몸속 판본이었다. 관계 안에서 쉰다는 것은, 신학이기 이전에 생물학이다. 10장에서 만난 우주목이 바로 이 궁극의 나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쉬는 그 나무는, 하나의 고독한 기둥이 아니라 서로 안에 깃들어 함께 서 있는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나무가 되어 줄 때,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목이 된다. 누군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축.

이제 우리는 7장에서 남겨 둔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안토노프스키의 통합감은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받쳐 주는 관계, 나를 조건 없이 인정하는 사람, 함께 숨 쉬는 사이에서 태어난다. 8장에서 본 미주신경이 안전한 관계 앞에서야 비로소 켜지듯이.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다. 건강은 관계라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장의 참고

마르틴 부버, 『나와 너』 · Kosfeld 외(2005, Nature, 옥시토신·신뢰) · 이성회·마리아 목사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