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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우산 하나 · 서론

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보다

— 생존, 성장, 성숙, 그리고 팽창에 대하여
Justin Jeon

한 페이지 요약

한 해를, 한 생을 평가하는 잣대는 흔히 성공이냐 실패냐로 좁혀진다. 그러나 삶은 그 이분법보다 넓다. 이 글은 삶이 통과하는 네 자리 — 생존, 성공, 성장, 성숙 — 을 따라가며, 그 곁에 따라붙는 그림자 하나, 팽창을 함께 본다.
진짜 성장은 끝없이 커지는 삶이 아니라, 커질수록 더 단단해지는 삶이다.
세상의 경계에 사는 이들에게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 같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 충분히 멀리 당겨지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한 사람,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지쳐버린 사람 — 그 모든 이에게 이 글을 바친다.
꽃이 피는 것은 꽃이 아니다
꽃이 지는 것도 꽃이 아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그 자리가 꽃이다— 함민복

한 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는 너무 빠르게 결론에 도달한다. 성과가 있으면 성공, 없으면 실패. 통과하면 잘한 해, 떨어지면 잘못 산 해. 이 단순한 이분법은 편리하지만, 삶을 지나치게 축소한다. 특히 중년 이후에는 더 그렇다. 젊을 때의 목표는 대개 분명했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더 많이 이루는 것, 더 빨리 도착하는 것.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목표는 흐릿해지고, 질문 자체가 바뀐다. "얼마나 성취했는가"에서 "어떻게 버텼는가, 무엇을 잃지 않았는가"로.

이 글은 그 바뀐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삶이 통과하는 네 개의 자리를 따라간다. 생존, 성공, 성장, 성숙. 이것은 사다리가 아니라 무게중심의 이동에 가깝다. 바깥을 향하던 시선이 천천히 안으로 돌아오고, 속도를 중시하던 삶이 리듬을 중시하게 되는 이동. 그러나 이 이동에는 그림자가 하나 따라붙는다. 성장처럼 보이지만 성장이 아닌 것, 곧 팽창이다.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그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는 체육과 의학의 경계에서 일해 왔다. 한쪽에서는 "당신은 체육전공 교수잖아요"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당신은 정통 체육전공이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그 사이에 서서, 나는 경계가 단지 선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배웠다. 경계는 늘 두 방향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쪽은 익숙한 안전이고, 다른 한쪽은 불확실한 가능성이다. 그래서 경계에 선 사람은 자연스럽게 경계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넘어가려 하는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를 묻는다.

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늘 어떤 선 위에 서 있고, 그 선이 생존과 성장을, 성장과 팽창을, 성장과 성숙을 가른다. 이 글은 그 선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어디서 멈추고 어디서 넘어야 하는지를 묻는 시도다.

그리고 한 가지를 미리 말해 둔다. 이 네 자리는 한 번 통과하면 끝나는 계단이 아니다. 경계는 한번 넘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달라진 나로 같은 경계를 다시 만나게 한다. 나선형이다. 중학교 때의 열등감과 지금의 연구비 낙방은 다른 경계처럼 보이지만, 그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같다. "나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 질문 자체가 경계다. 그래서 생존과 성공과 성장과 성숙은 나이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한 사람 안에서 같은 날에도 오르내린다. 다만 삶의 무게중심은 분명히 이동한다. 그 이동을 따라가 보자.

· · ·

1생존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질문이 극도로 단순해진다. 잘 살고 있는가, 의미 있는가, 성장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은 문득 사치처럼 느껴지고, 오직 하나만 남는다. 무너지지 않았는가. 오늘을 건넜는가. 다음 날로 넘어갈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우리는 비로소 생존이라는 단어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생존은 흔히 낮은 목표로 취급된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변명처럼, 성장을 포기한 이의 자기 위안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나 삶의 실제를 들여다보면, 생존은 결코 하위 개념이 아니다. 생존은 모든 가치의 전제다. 성공도, 성장도, 성숙도 모두 생존이라는 바닥 위에만 놓일 수 있다.

생존의 세계에서 실패는 다른 얼굴을 가진다. 여기서 실패는 성과의 부재가 아니다. 실패는 탈락이고, 배제이며, 지속 불가능함이다. 그래서 생존이 위협받는 시기에는 실패를 낭만화할 여유가 없다. 도전은 미덕이 아니라 위험이 되고, 확장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 된다. 이때 삶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오늘을 견딜 수 있는가."

삶이냐 죽음이냐

삶이 가장 거칠 때, 질문은 극도로 단순해진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무겁다. 잘 살고 있는가, 의미 있는가,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오직 무너지지 않았는가만 남는다. 이 질문은 사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존의 무게는 종종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내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운동회 날, 친구들이 어머니가 싸 온 도시락을 먹는 동안 혼자 뒷산에 올라가 눈물을 훔치며 도시락을 먹었다고 했다. 그 기억을 팔순이 넘도록 안고 사셨다. "어머님도 야속하시지. 80여 년 한 번도 꿈에 안 나타나시나." 팔순 노인에게도 평생 그리워한 어머니가 있었다. 생존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한 사람의 삶을 통과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오늘 하루를 건너는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건너는 일이다.

그래서 생존은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그것을 견뎌낸 사람은, 화려한 무엇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이미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는 가장 많은 에너지

생존의 시기는 종종 조용하다. 눈에 띄는 성취도 없고, 설명할 만한 결과도 없다. 겉으로 보면 정체처럼 보이고, 뒤처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삶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람을 놓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이 세 가지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보면 안다. 매일의 실망 속에서도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것,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관계와 책임을 유지하는 것,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날에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잠드는 것. 이것이 삶에서 가장 어려운 성취다. 화려한 성공보다 어렵고, 빛나는 성장보다 깊다.

우리는 종종 생존을 부끄러워한다. "이 정도로 만족해도 되나." "아직 여기 머물러 있는 게 맞나." 그러나 생존은 머무름이 아니다. 생존은 지켜냄이다. 관계, 책임, 일상의 리듬, 그리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음을 끝내 손에서 놓지 않는 일. 머무름은 수동이지만, 지켜냄은 능동이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서, 사실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붙들고 있다.

가장 근원적인 용기

삶이 가장 거칠 때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묻는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러나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답이 보인다. "이만큼을 견뎌냈다는 건, 아직 내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생존은 비겁함이 아니다. 생존은 가장 근원적인 용기다. 아무도 박수 치지 않는 자리에서 하루를 다시 선택하는 일. 그 선택이 반복될 때, 삶은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나에게도 그런 해가 있었다. 연구비는 도전하는 족족 떨어졌고, 논문은 거절이 일상이 되었다. 강의까지 내려놓고 연구에만 매달렸지만, 누군가 성과를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해에 나는 유난히 밥을 많이 지었다. 평생 아이들 밥을 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그 해에는 더 많은 밥을 지었다. 한국에 남겨진 연구원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냈고, 졸업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나아갔다. 성과표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소소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해를 실패로만 접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생존은 최소 조건이 아니라, 성장으로 가는 전제다. 생존을 통과한 사람만이 성공을 꿈꿀 수 있고, 성장을 감당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성숙을 말할 자격을 얻는다. 그래서 생존은 정체가 아니라 통과 의례에 가깝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떤 해가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어떤 시간이 성장으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만약 그 시간 동안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시간이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2생존을 넘어 성장으로

생존이 위태로울 때 목표는 단순하다. 오늘을 버티는 일, 무너지지 않는 일이 전부가 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숨을 돌리게 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음을 생각한다. 그 다음 단계가 성공이다.

성공은 아주 현실적인 목표다. 월급이 오르고, 논문이 게재되고, 연구비가 되고, 누군가가 "잘했다"고 말해 주는 것. 성공은 내 삶이 앞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특히 젊을 때는 더 그렇다. 세상은 계속 묻는다. "그래서 너는 뭘 해냈니?"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어른이 된 것 같고, 그 답이 있어야 내 자리가 생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공의 세계는 기준이 분명하다. 합격과 불합격, 선정과 탈락, 게재와 리젝. 그래서 성공을 좇는 삶은 피곤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하다. 맞고 틀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패도 분명하다. 기준을 못 넘었을 때, 떨어졌을 때, 선택받지 못했을 때다. 이 실패는 아프지만 "왜 실패했는지"가 대체로 선명하다. 실력을 더 쌓아야 하는지, 전략을 바꿔야 하는지, 타이밍이 아니었는지 점검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분명히 해 두자. 성공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생존을 넘어 사회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드는 일이며, 그 자체로 건강한 단계다. 뒤에서 나는 성과주의를 길게 비판할 테지만, 그 비판이 성공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성공과 성과는 다르다. 성공은 자리를 만드는 일이고, 성과는 삶을 오직 밖에 내놓을 결과물로만 환산하는 사고다. 이 둘의 구별은 다음 장의 몫이다.

성공의 함정

그런데 성공이 주는 안정감에는 함정이 있다.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 도전하지 않는 일이다. 내가 성공할 일만 하는 일이다. 이미 익숙한 분야에서,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이미 안전한 길만 택하는 것. 그러면 실패의 확률은 줄어든다. 당연히 성과는 더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함께 사라지는 것이 있다. 확장이다. 실패가 사라지는 만큼, 새로움도 사라진다.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에만 생기는 배움,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하는 사건들, 실패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깊이. 실패를 최소화하는 삶은 종종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만, 그 성공은 어쩌면 한 번도 경계를 넘지 않은 성공일 수 있다.

그래서 생존과 성공을 가르는 지점은 결과가 아니다. 그 차이는 한 가지 질문에서 갈린다. 시도해 보았는가. 떨어질 가능성을 알면서도 한 번이라도 문을 두드려 보았는가. 성공을 향한 시도는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이 시도가 있어야 삶의 지형이 달라진다. 시도는 결과를 바꾸지 못해도 기준을 바꾼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지를 드러낸다.

성공에서 성장으로

그래서 어느 순간, 성공만으로는 삶이 설명되지 않을 때가 온다. 성공했는데도 마음이 꽉 차지 않고, 실패했는데도 이상하게 멈출 수가 없다. 성공이 내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는데, 막상 증명하고 나니 남는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는데도 어떤 일은 계속 붙잡고 싶다. 그 일이 내 삶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질문이 바뀐다. 성공했나를 묻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넓어지고 있나.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나.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나.

성공의 언어는 주로 결과를 말한다. 얼마나 통과했는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얼마나 얻었는지다. 하지만 성장의 언어는 과정과 방향을 말한다. 한 번 더 시도했는지, 모르는 것을 배웠는지, 이전의 나를 넘어섰는지다. 그래서 성장의 시기에는 실패가 급격히 늘어난다. 그러나 이 실패는 더 이상 방향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도를 벗어났다는 흔적이다. 성장의 실패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지도의 끝에 도달했다는 신호다. 나는 이 시기의 실패를 영적 확장의 자국이라고 부르고 싶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는데, 삶의 안쪽이 넓어지는 경험이다.

여기에 한 가지 오래된 비유가 있다. 활을 쏘려면 뒤로 당겨야 한다. 최대치는 실패 직전에 있다. 운동생리학에서는 이것을 최대산소섭취량, VO2max라고 부른다. 산소 소모량의 최대치는 쓰러지기 직전에 온다. 성장은 바로 그 당겨짐이다. 고통스럽지만, 그 당겨짐 없이는 더 멀리 날아가는 화살도 없다. 삶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목적지는 늘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는 것은 항로다. 예상하지 못한 정박, 돌아가야 했던 선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구간에서의 인내.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사람과는 다른 얼굴로 도착한다.

성공에서 성장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더 큰 성취를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더 큰 사람이 되겠다는 말이다. 더 많이 갖겠다는 말이 아니라, 더 넓게 살겠다는 말이다. 성공은 나를 세상 위에 올려놓는다. 성장은 그 위에서 내 경계를 다시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 경계를 다시 그리는 순간부터, 삶은 결과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한 해는 통과했는가로 끝나지 않고, 어디까지 넓어졌는가로 이어진다.

생존이냐 성공이냐, 성공이냐 성장이냐는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순서다. 생존이 먼저이고, 그 위에 성공이 있으며, 성공의 언어가 설명력을 잃을 때 성장이 온다.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한 번이라도 안전한 선 밖으로 문을 두드려 보았다면, 이미 다음 자리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3성과사회에서 성장 사회로

성장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장에는 늘 긴장이 따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함정이 있다. 채찍을 쥔 손이 어느새 내 손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성과사회'라 불렀다. 예전의 규율사회에서는 권력이 우리를 통제하는 주체였고, 우리는 그 권력에 저항하며 버텼다. 적이 분명했다. 감옥과 병원과 학교가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고, 우리는 그 금지에 맞섰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는 더 이상 누가 우리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명령이 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으며 자신을 착취한다.

무서운 것은 여기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적이 더 이상 밖에 있지 않다는 것. 성과사회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한 몸이 된다. 그래서 저항할 대상조차 사라지고, 우리는 무력해진다. 규율사회가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낳는다. 번아웃은 게으른 사람의 병이 아니라, 가장 성실했던 사람의 병이다. 끝까지 '할 수 있다'를 믿었던 사람,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텅 비어 주저앉는다.

성장이 성숙 없이 폭주할 때, 우리는 정확히 그 성과주체가 된다. 능력은 늘었지만 자신을 다루는 능력은 늘지 않은 상태. 더 멀리 갈수록 더 흔들리는 상태. 더 많은 경험을 했는데 더 오만해지고, 더 많은 성취를 했는데 더 예민해지고, 더 많은 기회를 잡았는데 더 쉽게 분노하는 모습. 나는 그것을 '성장한 바보'라고 부를 때가 있다. 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만 강조한 성장에는 균형 감각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성과·성공·성장·성숙 — 한 글자씩 다른 길

여기서 말 하나를 가르고 가야 한다. 우리가 흔히 뭉뚱그려 쓰는 네 단어가 사실은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을 가르지 못하면, 좋은 말들이 오히려 우리를 옭아맨다.

네 단어는 모두 '이룰 성(成)'을 지닌다. 그런데 그 다음 글자가 길을 가른다. 성과(成果)는 열매 과(果)다. 밖으로 내놓을 결과물, 측정되고 비교되고 보상되는 산출이다. 성공(成功)은 공 공(功)이다. 생존을 넘어 사회 속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성장(成長)은 길 장(長)이다. 안에서 자라남, 구조와 함께 커지는 일이다. 성숙(成熟)은 익을 숙(熟)이다. 때가 되어 무르익고, 물러날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공'과 '성과'를 구별해 쓴다. 성공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성과 — 삶을 오직 밖에 내놓을 결과물로만 환산하는, 구조 없는 사고다. 성과주의는 묘하게도 우리를 위하는 얼굴로 다가온다. 더 건강해지라고, 더 생산적이 되라고, 더 나은 네가 되라고. 그러나 그 끝에는 '충분함'이 없다. 기준선은 도달하는 순간 다시 위로 올라가고, 우리는 평생 미달인 채로 자신을 몰아붙인다.

건강마저 성과가 될 때

성과주의가 가장 깊이 파고든 자리를 하나 들자면, 나는 '건강'을 들고 싶다. 평생 운동과 건강을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지고 싶어 하고, 그래서 별의별 것을 다 한다. 측정하고, 기록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몸을 좇는다. 그런데 정작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대답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건강이 또 하나의 성과가 되는 순간이 바로 여기다. 건강은 본래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오래 있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살기 위해. 그런데 그 '무엇을 위해'가 사라지면, 건강 그 자체가 끝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다. 충분함이 없으니 멈출 수도 없다. 더 많은 운동, 더 엄격한 식단, 더 정교한 수치. 그러다 보면 건강을 위한다는 일이 정작 삶을 갉아먹는다. 함께 먹는 식탁을 숫자 계산으로 망치고, 관계의 시간을 자기 관리로 대체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을 다음 검진 결과에 대한 불안으로 채운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가장 건강에서 멀어져 있을 수 있다. 정말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을 잊고 산다. 우리가 몸을 또렷이 의식하는 것은 대개 어딘가 아플 때다. 건강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는다. 그러니 끊임없이 몸을 재고 의심하는 삶은, 건강의 본질인 그 망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삶이다. 성과주의는 이렇게 우리를 위하는 얼굴로 다가와,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마저 또 하나의 노동으로 바꾼다. 삶을 살리려던 것이 삶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시되는 외로움

성과사회에는 한 겹이 더 있다. 한병철은 우리가 '투명사회'에도 산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전시되고, 모든 것이 비교되며, 혼자 있음조차 결핍으로 노출되는 사회다.

나는 마흔다섯에도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혼자 팥빙수를 먹으면서 숟가락을 두 개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분명히 혼자 먹을 것인데, 혼자라는 사실이 누군가의 시선 앞에 전시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열등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전시하고 비교하는 사회가, 혼자라는 사실에까지 '루저'라는 라벨을 붙이도록 가르친 것이다. 성과사회가 우리를 채찍질한다면, 투명사회는 그 채찍질을 남들 앞에 전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더 분주하고, 더 외롭다.

성과의 언어에서 성장의 언어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사회에서 성장 사회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일이다. 이것은 거창한 사회 개혁의 구호이기 전에,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다.

같은 한 해도 어디에 목표를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힌다. 성과가 목표였다면, 연구비가 떨어지고 논문이 거절당한 그 해는 분명 실패한 해다. 그러나 성장이 목표였다면, 도전하고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놀랄 만큼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좌절 속에서 배웠고,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관계를 다시 배웠다. 지지하고 지지받는 법, 위로하고 위로받는 법, 격려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법을 — 논문과 연구비가 가르쳐 주지 않는 방식으로 배웠다.

성장 사회란, 측정되는 산출이 아니라 자라남 그 자체를 존중하는 시선이다. 보고서나 성과표 바깥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변화를 알아보는 눈이다. 성장은 늘 그렇게 진행된다. 눈에 띄지 않게, 통계에 잡히지 않게. 성과의 언어로 보면 여전히 불확실할지 모르지만, 성장의 언어로 보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다음 단계에 와 있다. 무게중심을 바깥에서 안으로, 산출에서 자라남으로 옮기는 것 — 그것이 성과사회를 통과하면서도 그 병에 먹히지 않는 길이다.

4성장에서 성숙으로

성장은 사람을 앞으로 밀어준다. 경계를 넓히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성장의 시기에는 삶이 분주하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시도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장의 속도가 삶을 앞질러 갈 때가 온다. 할 수 있는 것은 많아졌는데 마음은 자주 흔들리고, 아는 것은 늘었는데 분노는 줄지 않으며, 도전은 계속되는데 삶은 점점 거칠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성장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장이 피곤한 이유

왜 성장은 이토록 에너지를 요구할까. 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존재다. 예측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예측 불가능성이 커질수록 에너지 소모가 커진다. 뇌와 몸은 본래 안정된 패턴 안에 머무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계 안에 머무는 삶은 최소 에너지 상태에 가깝다. 익숙한 사람, 익숙한 일, 익숙한 사고방식 안에 있으면 예측 가능성이 높고, 에너지가 적게 들며, 심리적으로도 안정적이다. 반대로 경계에 서는 순간부터 자유에너지가 증가한다. 예측 오차가 커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 낯선 관계, 익숙하지 않은 역할, 실패 가능성이 높은 시도들은 모두 뇌와 몸에 큰 부담을 준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의 내 모델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장은 본질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요구한다. 우리가 성장의 시기에 쉽게 지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속 경계를 넘고, 계속 새로운 예측 오차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아름답지만 피곤하다. 한병철이 사회철학으로 진단한 그 소진을, 프리스턴은 생물학으로 설명한다. 같은 현상을 양쪽에서 비추는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명체가 단순히 에너지를 최소화하기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완전한 안정만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 도전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익숙한 것만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적응력을 잃는다. 삶의 반경이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건강한 삶은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한다. 경계를 넘어 확장하려는 움직임과, 다시 경계 안으로 돌아와 안정화하는 시간.

무게중심은 이동한다

돌아보면, 삶의 질문은 시기마다 조금씩 모양을 바꾼다. 청년기의 핵심 질문은 대개 "나는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언어는 자연스럽게 성공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학위, 취업, 인정, 속도. 외부 기준이 비교적 분명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곧 자기 증명이 된다. 아직 자신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바깥의 좌표가 필요하다.

초·중년기에 들어서면 질문이 바뀐다. "나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로.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을 경험했거나 그 한계를 맛본 뒤에 나오는 질문이다. 이때부터 삶의 핵심 언어는 성장이 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실패가 급격히 늘지만, 그 실패는 방향 상실이 아니라 영역 확장의 흔적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중년 후반으로 갈수록 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나는 어떤 상태로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더 이상 얼마나 더 얻을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를 묻는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언어가 성숙이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시기적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청년기에도 성숙한 사람이 있고, 중년에도 여전히 성과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으며, 노년에도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삶의 무게중심은 분명 이동한다. 바깥을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고, 속도를 중시하던 삶이 리듬을 중시하게 된다. 성공이 비교의 언어이고 성장이 도전의 언어라면, 성숙은 선택의 언어다.

성숙은 정렬되는 일이다

성숙은 더 넓어지는 일이 아니다. 성숙은 정렬되는 일이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분명히 아는 상태다. 모든 기회에 응답하지 않고, 모든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며, 모든 실패를 자기 부정으로 끌어안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은 속도보다 리듬을, 성과보다 지속 가능성을 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삶을 소모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성장은 "얼마나 멀리 왔는가"를 묻지만, 성숙은 "이 길이 나에게 맞는가"를 묻는다. 성장이 외연의 확장이라면, 성숙은 내면의 정렬이다. 그래서 성숙은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어렵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성숙을 평가해 주지도 않고, 성과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알고, 가까운 사람들만이 느낀다.

영혼이 따라오는 속도

나는 인디언 이야기 하나를 자주 떠올린다.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니, 잠시 멈춰 서서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 이 말이 이상하게도 현대인의 삶을 정확히 찌른다. 우리는 기술과 일정과 목표에 의해 너무 빨리 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왜 뛰고 있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은 대개 마음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뒤처진 영혼의 자리에서 온다.

성숙은 그 영혼의 속도를 존중하는 능력이다. 성숙한 사람은 더 빨리 갈 수 있어도 더 빨리 가지 않는다. 더 많이 할 수 있어도 더 많이 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가 아니라 자신의 리듬을 안다. 그리고 그 리듬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지 결정한다. 그 결정이 쌓여 사람은 단단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전진은 아니다. 멈추는 것이야말로 삶의 방향을 재정렬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일 수 있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조율이다. 몸과 마음과 관계가 한 박자로 맞춰질 때까지, 내가 달려온 궤적이 의미로 바뀔 때까지, 속도를 잠시 낮추는 일.

조용한 실패

성숙의 단계에서도 실패는 있다. 다만 이 실패는 훨씬 조용하다. 관계에서의 어긋남,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순간,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에 미치지 못한 날들. 누군가는 몰라도 자기 자신은 안다. 이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존재의 실패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실패들을 자기 혐오로 연결하지 않는 능력 자체가 성숙의 핵심이 된다는 점이다. 생존의 실패는 위협이었고, 성공의 실패는 판정이었으며, 성장의 실패는 확장의 흔적이었다. 성숙의 실패는 성찰의 계기다. 같은 실패가 삶의 위치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실패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읽어야 할 신호가 된다. 아직 실패가 있다는 것은 아직 길 위에 있다는 뜻이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더 빨리 가는 삶을 멈추는 일이 아니다. 더 온전하게 가는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확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확장을 감당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성숙은 성장의 반대가 아니다. 성숙은 성장의 사용법이다.

5팽창이냐 성숙이냐

이제 마지막 경계 앞에 선다. 성장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성장의 반대를 쇠퇴나 정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정확한 대비는 팽창이다.

팽창과 성장은 겉으로는 닮아 있다. 둘 다 커진다. 둘 다 부피가 늘고, 숫자가 늘고, 외형이 확장된다. 둘 다 바쁘고, 둘 다 도전적이며, 둘 다 이전보다 더 큰 결과를 만든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다르다.

성장은 내적 구조와 함께 커지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힘이 함께 자라고, 회복력도 함께 자란다.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자기 성찰, 삶의 리듬도 함께 깊어진다. 그래서 성장에는 긴장이 있지만 안정도 있다. 확장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팽창은 외연만 커지는 상태다. 속도는 빠르지만 중심은 약하다. 성과는 커지는데 삶은 거칠어진다. 영향력은 넓어지는데 관계는 얕아진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소모하고 있다.

성공해서 무너진다

이 차이는 스타트업의 흥망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건강한 성장의 초기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내부 구조가 조금씩 단단해지며, 팀과 시스템이 함께 자란다. 감당 가능한 속도로 확장하고, 실패해도 회복할 힘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많은 조직은 성장에서 팽창으로 옮겨 간다. 투자가 몰리고, 시장의 기대가 부풀고, 가치 평가와 언론의 관심이 따라붙으면, 조직은 '더 커져야 한다'는 압박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문제는 내적 구조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문화는 준비되지 않았는데 인원만 늘고, 수익 구조는 약한데 외형만 커지며, 리더의 내적 성숙은 부족한데 영향력만 커진다. 실제 가치보다 이야기가 더 커진다. 겉으로는 폭발적 성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도한 팽창인 경우가 많다.

이 상태에서는 작은 실패도 치명적이 된다. 시스템 전체가 이미 과긴장 상태이기 때문이다. 성장 단계의 실패는 학습으로 이어지지만, 팽창 단계의 실패는 붕괴로 이어진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해서' 무너진다. 성공이 만든 과도한 팽창이 내부 구조를 찢는 것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은 실패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 이후의 무한한 확장 욕구 때문에 무너진다. 더 인정받고, 더 영향력을 넓히고, 더 커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삶의 중심 구조가 붕괴한다.

팽창은 회복을 죄악처럼 여긴다

여기에 팽창의 가장 깊은 병이 있다. 건강한 성장은 회복과 안정화를 포함한다. 숨을 쉬듯이 확장과 수축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근육도 운동만 하면 망가지고, 회복이 있어야 비로소 자란다. 우리는 운동으로 근육을 찢고, 쉼으로 근육을 키운다. 자라는 것은 운동하는 동안이 아니라 쉬는 동안이다.

그런데 팽창은 회복을 죄악처럼 여긴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속도를 늦추면 실패할 것 같고, 안정을 추구하면 정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계속 밖으로만 커지려 한다. 쉬는 것을 게으름으로, 물러서는 것을 패배로 읽는 이 감각이야말로 팽창이 스스로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마치 세포막처럼 말이다. 세포는 적절한 긴장과 교환 속에서 살아간다. 안과 밖이 끊임없이 주고받되, 막은 그 경계를 지킨다. 그러나 구조 없이 과도하게 팽창하면 막이 찢어진다. 그 순간 더 이상 성장은 없다. 붕괴만 남는다.

그래서 성장에서 성숙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두 가지 결말만 남는다. 팽창하다 터지거나, 팽창하다 그냥 꺼지거나. 터지는 것은 내적 구조가 외형의 압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일어난다. 꺼지는 것은 팽창을 지탱하던 동력이 소진되어, 부풀었던 것이 안으로 주저앉을 때 일어난다. 번아웃은 꺼짐의 한 형태이고, 붕괴는 터짐의 한 형태다. 어느 쪽이든 결말은 같다.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조직이 그러하고, 한 사회가, 한 문명이 그러하다. 끝없는 확장을 유일한 성공으로 떠받드는 문명은, 자기 바깥으로만 부풀다가 그 부풂을 떠받치던 토대 — 사람과 관계와 땅 — 를 소진시킨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사회는, 거대한 성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대한 팽창일 수 있다. 개인의 번아웃과 문명의 위기는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회복을 죄악으로 여기고, 멈춤을 뒤처짐으로 읽으며, 충분함을 모르는 것. 그래서 성숙은 개인의 덕목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구분하는 능력

그래서 성숙은 단순히 계속 성장하는 능력이 아니다. 성숙은 성장과 팽창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언제 경계를 넘어야 하는지, 언제 다시 안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확장이 정말 건강한 성장인가, 아니면 위험한 팽창인가'를 묻는 능력이다.

이 물음은 개인의 삶에서, 조직에서, 그리고 한 문명에서 반복적으로 되돌아온다. 성과에 사로잡힌 자아는 끊임없이 팽창한다. 더 많은 성취,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소유로 부풀어 오르지만, 그 안에 성숙으로 넘어갈 결을 키우지 못하면 결국 터지거나 꺼진다. 성숙은 바로 그 변질을 막는 힘이다. 성장이 팽창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안에서 함께 자라는 결이다.

젊을 때는 계속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질문이 생긴다. 얼마나 더 커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 확장이 정말 건강한 성장인가를 묻게 된다. 진짜 강한 시스템은 무한히 확장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존중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시스템이다. 성숙은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성숙은 성장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계속 밖으로만 확장하는 삶이 아니라, 확장과 회복, 도전과 안정 사이의 리듬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성장은 끝없이 커지는 삶이 아니라, 커질수록 더 단단해지는 삶이다.

생존을 지나, 성공을 통과하고, 성장을 거쳐, 이제 성숙을 바라볼 수 있다면 —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깊은 여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성과가 목표였다면 어떤 해는 분명 실패한 한 해다. 그러나 성장이 목표였다면 놀랄 만큼 많이 자란 시간이었고, 성숙이 목표였다면 무엇을 내려놓을지 배운 시간이었다.

내가 바라는 삶은 이런 것이다. 경계에 서되,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것. 도전하되, 도전으로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 것. 성장하되, 성숙을 잃지 않는 것. 나는 여전히 경계를 확장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속도보다 정렬을, 성과보다 지속을, 증명보다 의미를 더 자주 묻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멈춘다.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그 다음의 도전은, 더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시작하고 싶다.

연구학기 중 캘거리에서. 6월 29일 오후 3시 3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