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돌 위에서 — 시스템을 설계한 가문
빈 벽감 앞에서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 뒤편, 메디치 예배당의 가장 안쪽 방. 군주 예배당(Cappella dei Principi)이라 불리는 거대한 팔각형 공간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벽은 온통 반암과 청금석과 벽옥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집트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실어 온 돌들을 하나하나 잘라 맞춘 상감이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의 거의 끝까지 가 본 방이었다.
그런데 그 화려함 한가운데, 무언가가 비어 있었다.
무덤은 거기 있었다. 여섯 대공의 석관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 위, 각 무덤을 굽어보도록 마련된 벽감(壁龕)에 올라가야 할 청동상이 — 여섯 중 넷이 — 끝내 오르지 못했다. 채워진 것은 둘뿐이었고, 나머지 네 벽감은 텅 빈 채로 남았다.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재료로 뒤덮인 방이, 정작 그 주인공들의 자리는 비워 둔 채 멈춰 있었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문이 끊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빈 자리 앞에서 묘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메디치란 대체 무엇을 한 가문인가. 우리는 흔히 그들을 "르네상스의 후원자"라고 부른다. 보티첼리에게 그림을 주문하고, 미켈란젤로를 집에 들여 키운 사람들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빈 벽감이 설명되지 않는다. 한 가문이 어떻게 시골 환전상에서 출발해 교황과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고, 300년 동안 한 도시를 사실상 소유하다가, 이렇게 미완성의 영묘를 남기고 사라졌는가.
답을 찾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메디치는 새로운 사상을 발명한 가문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한 가문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이 여행 전체의 첫 단추다.
돈을 정보로 바꾼 사람들
메디치 가문의 진짜 출발점은 화가도 조각가도 아니었다. 은행이었다.
1397년,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가 피렌체에 은행을 세웠다. 그는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조용히,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부를 쌓았다. 그가 택한 결정적 한 수는 교황청의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이 되는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안정적인 고객은 교회였다. 그 교회의 주거래 은행이 된다는 것은, 곧 유럽 금융의 한복판에 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 즉 고리대금을 죄악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기독교도인 메디치는 어떻게 은행으로 돈을 벌었는가.
핵심은 환어음(bill of exchange)이었다. 환어음은 단순한 송금 수단처럼 보이지만, 실은 돈의 본질을 바꾼 발명이었다. 그것은 돈을 금속 덩어리에서 떼어내, 종이 위의 신용으로 — 정보로 — 만든 장치였다.
작동 방식은 이랬다. 피렌체의 상인이 런던에서 양모를 사야 한다. 금화 자루를 마차에 싣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도적, 분실, 무게, 느림. 그래서 상인은 피렌체의 메디치 은행에 플로린(피렌체 금화)을 맡기고, "런던 지점에서 이 사람에게 파운드로 지급하라"는 증서 한 장을 받는다. 그는 종이만 들고 안전하게 런던으로 가, 그곳에서 현지 통화를 받는다. 금은 피렌체에 그대로 있고, 사람과 정보만 이동한 것이다.
여기에 메디치의 천재성이 숨어 있었다. 피렌체에서 돈을 내고 런던에서 받기까지는 몇 주, 몇 달이 걸린다. 그 사이 메디치는 그 돈을 굴릴 수 있었다. 게다가 적용하는 환율에 이윤을 미세하게 녹여 넣었다. 겉으로는 "환전 수수료"였지만, 실질은 이자가 붙은 대출이었다. 교회는 이자를 금했지만 환전 차익은 정당한 상거래로 보았다. 메디치는 이 형식의 틈을 빠져나가, 고리대금 금지를 합법적으로 우회한 것이다.
돈을 물리적 실체에서 분리해 신용과 정보로 다룬다는 것 — 이것이 근대 금융의 가장 깊은 발상이다. 돈이란 금속의 무게가 아니라 신뢰의 기록이라는 것. 메디치는 그 발상의 정점에 섰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환어음도, 복식부기도, 지점망도 메디치가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에는 이미 그런 요소들이 흩어져 있었다. 복식부기는 이탈리아 상인 문화 속에서 오래 쓰이다 1494년에야 루카 파촐리가 책으로 정리했고, 메디치 이전에도 바르디와 페루치 같은 거대 은행이 환어음을 굴리고 있었다.¹ 메디치의 진짜 성취는 발명이 아니라 시스템화였다. 흩어진 부품들을 하나의 작동하는 기계로 결합하고, 그것을 유럽 전역에서 안정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선배의 파산에서 배운 위험 분산
이 대목에서 메디치의 영리함이 가장 잘 드러난다.
메디치 직전, 바르디와 페루치 은행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왕이 빚을 갚지 않아 1340년대에 줄줄이 파산했다. 한 명의 거대 채무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가 무너진 것이다. 메디치는 이 실패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을 분산했다. 한 군주에게 다 걸지 않고, 여러 고객과 여러 지점으로 흩었다. 그리고 각 지점 — 런던, 브뤼헤, 베네치아, 로마 — 을 본사가 100퍼센트 소유한 직영점이 아니라, 현지 지배인이 지분을 갖는 일종의 파트너십으로 운영했다. 지배인은 자기 돈이 걸려 있으니 알아서 신중하게 경영했고, 한 지점이 망해도 그 손실이 본사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현대 지주회사와 프랜차이즈의 원형에 가까운, 회복탄력성을 내장한 구조였다.
무너진 선배를 지켜보고 배운 셈이다. 비즈니스 역사에서 반복되는 패턴이기도 하다. 처음 길을 낸 자가 무너지고, 그것을 지켜본 후발 주자가 시스템을 다듬어 천하를 쥔다. 메디치는 발명가가 아니라 운영의 천재였다.
부를 권력으로 바꾸는 바퀴
그러나 메디치가 단지 영리한 은행가였다면, 우리는 지금 그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진짜 발명은 따로 있었다. 부를 다른 모든 종류의 자본으로 전환하는 시스템.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막대한 재력을 자기 과시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누리는 것에 쏟아부었다. 산 로렌초 성당, 산 마르코 수도원, 시민에게 개방한 도서관. 그는 돈을 권력이 아니라 선물처럼 보이게 썼다. 시민들은 "저 가문 덕에 우리 도시가 아름다워진다"고 느꼈다. 그렇게 부는 후원이 되고, 후원은 인망이 되고, 인망은 권력이 되고, 권력은 다시 부를 지켜 주었다. 자기 강화하는 하나의 바퀴였다.
코시모는 이 바퀴를 보이지 않게 굴렸다. 공식 직함을 마다하고, 검소하게 입고, 거리에서 시민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피렌체는 자부심 강한 공화국이었으므로, 왕을 자처하면 반발을 샀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갖되 권력자로 보이지 않는 길을 택했다. 한 세대 뒤, 그의 손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같은 바퀴를 정반대로, 찬란하게 굴렸다. 시인이자 외교가였고, 미켈란젤로를 집에 들여 가족처럼 키웠다. 코시모가 보이지 않아서 강했다면, 로렌초는 빛나서 사랑받았다.
여기서 나는 메디치 시스템의 본질을 본다. 그들이 다룬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다른 무엇으로든 바꿀 수 있는 메타-자원이었다. 금융으로 번 돈을 예술 후원으로(문화 자본), 시민 지원으로(정치적 인망), 마침내 교황과 군주의 자리로(권력 자본) 전환하는 변환 장치. 르네상스라는 문화의 개화는, 이 거대한 전환 엔진이 가동되며 뿜어낸 잉여 에너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를 여기 미리 적어 둔다. 우리가 무언가를 "자본"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운용하고 축적하고 인출하는 대상이 된다. 메디치는 세상을 자본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천재적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나는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관계마저 "사회적 자본"이라 부르게 된 오늘의 우리에게, 메디치의 유산이 무엇을 남겼는지 묻기 위해서.
바퀴가 멈출 때
권력의 정점은 곧 균열의 시작이기도 했다.
로렌초가 살아 있는 동안 가문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1478년, 경쟁 가문 파치(Pazzi)가 교황의 묵인까지 업고 음모를 꾸몄다. 부활절 미사 도중, 두오모 안에서 로렌초와 동생 줄리아노가 칼에 찔렸다.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로렌초는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다.² 음모자들은 시민이 메디치에 등을 돌릴 것이라 믿었지만, 거리에서 터져 나온 것은 "팔레! 팔레!"(메디치 만세)였다. 코시모 이래 수십 년간 쌓아 온 인망이, 칼날 앞에서 가문을 지키는 방패가 된 것이다. 부에서 후원으로, 후원에서 인망으로 이어진 그 바퀴가 가장 극적으로 작동한 순간이었다.
이후 메디치는 신앙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갔다. 로렌초의 아들 조반니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사촌 줄리오가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그러나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깊었다.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 자금을 마련하려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았고, 바로 그것이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가문이, 역설적으로 서구 기독교를 둘로 쪼개는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그리고 클레멘스 7세 때인 1527년, 로마 약탈이라는 대참사가 르네상스 로마의 영광을 끝냈다.
가문의 마지막은 더 조용했다. 1737년, 마지막 대공 잔 가스토네가 후사 없이 죽었다. 그의 누이 안나 마리아 루이자도 자녀가 없었다. 토스카나는 메디치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대국 간의 영토 거래로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에 넘어갔다. 300년 넘은 가문이, 자식 없는 남매 대에서 끊겼다.
흔히 군주 예배당의 그 막대한 비용이 가문을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빈 벽감 앞에 서 보면 그렇게 느끼기 쉽다. 그러나 정확히 보면 인과의 방향이 조금 다르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후계의 단절이었고, 그 배경에는 권력을 지키려 혈통을 좁은 범위에 가둔 거듭된 통혼이 있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는, 16세기 이후 세계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피렌체 같은 내륙 도시가 변방이 되어 간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부를 생성하던 엔진이 식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군주 예배당은 멸망의 원인이라기보다, 쇠락하는 가문이 마지막까지 매달린 자존심의 증거였다. 흥미로운 대비가 있다. 같은 건물 바로 옆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신 성구실이 있다. 회색 돌과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절제된 방, 조각 몇 점뿐인 그 작은 공간이, 돈을 쏟아부은 군주 예배당보다 예술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다. 활력이 있던 코시모와 로렌초는 돈을 미래에 — 예술가와 인재에게 — 투자했다. 쇠락하던 후기 대공들은 돈을 과거에, 무덤을 치장하는 데 묻었다. 어디에 돈을 쓰는가가 그 시스템의 건강을 드러낸 셈이다.
다시, 그 돌 위에서
나는 군주 예배당을 나와 산 로렌초 성당 본당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면 천장 모서리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 금빛 바탕에 붉은 여섯 개의 공 — 이 박혀 있다. 이 성당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곳곳에서 말없이 드러내는 표식이다.
그 돌들 위에서 나는 메디치가 인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다시 생각했다. 그들의 진짜 유산은 개별 작품의 후원이 아니라, 부를 문화로, 문화를 권력으로 전환하는 모델 그 자체였다. 이 모델은 이후 유럽의 군주와 귀족들이 앞다투어 모방하는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더 멀리, 이 변환의 문법은 —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산하고 운용하는 사고방식은 — 그 뒤 500년 동안 세계를 조직하는 논리가 되었다.
메디치는 시스템을 설계한 가문이다. 한 도시를 르네상스의 무대로 끌어올린 그 설계의 천재성과, 그것이 결국 무엇을 향해 흘러갔는지 — 이 둘을 함께 보는 것이, 피렌체의 돌 위에서 시작하는 이 여행의 첫걸음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한 해, 1492년으로 간다. 로렌초가 죽은 그해, 세계의 무게중심이 통째로 옮겨가기 시작한 그 경첩의 순간으로.
¹ 복식부기의 체계적 정리는 루카 파촐리의 『산술집성(Summa de arithmetica)』(1494)이지만, 실무는 이탈리아 상인 사회에서 그 이전부터 쓰였다. 바르디·페루치 은행의 활동과 파산은 14세기 전반의 일이다.
² 파치 음모(1478)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피살, 로렌초의 생존은 동시대 피렌체 사료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줄리아노의 무덤은 미켈란젤로가 신 성구실에 조각했다.
1492년, 두 개의 문 — 무게중심이 옮겨가다
남쪽으로 난 길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면, 키안티의 언덕이 시작되기 전에 안티노리 와이너리가 나온다. 토스카나의 능선에 파묻히듯 지어진 현대적인 건물이다. 주소부터가 "시에나로 가는 카시아 가도(Via Cassia per Siena)"였다. 나는 그 이름 앞에서 잠깐 멈췄다. 카시아 가도. 로마인들이 닦은 옛길이다. 이 길은 시에나로 내려가고, 시에나를 지나면 결국 로마로 이어진다. 남쪽으로, 계속 남쪽으로.
와인 한 잔을 받아 들고 창밖의 포도밭을 보면서, 나는 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길은 어딘가로 이어지고, 그 끝은 대개 한 시대의 중심을 향한다. 로마로 통하던 길, 피렌체로 모이던 길. 그런데 한 도시가, 한 바다가 세계의 중심이던 시대는 어떻게 끝나는가. 무게중심은 어떻게 옮겨가는가.
그 질문의 답이 한 해에 압축되어 있다. 1492년이다. 공교롭게도, 앞 장에서 본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죽은 바로 그해다.
한 해에 닫히고 열린 문들
1492년에는 세 가지 사건이 맞물려 일어났다.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그라나다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700년 넘게 이어진 레콩키스타 —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땅을 되찾는 기나긴 전쟁 — 가 완성되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가톨릭 군주들은 마침내 반도 전체를 손에 넣었다.
4월, 피렌체에서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마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상징하던 인물이었다. 한 동시대인은 "이탈리아의 평화가 그와 함께 묻혔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가 죽고 2년 뒤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그가 유지하던 도시국가들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다.
8월,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바로 그 가톨릭 군주들의 후원을 받아, 한 제노바 출신 항해자가 대서양으로 배를 띄웠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는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에 닿으리라 믿었다. 10월, 그는 카리브해의 한 섬에 닿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곳을 아시아라 믿었지만, 그 항해로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처음으로 지속적인 연결이 생겼다.
여기서 그라나다 함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스페인은 700년의 국토 회복 전쟁을 끝내자마자, 그 군사적·종교적 에너지를 곧바로 대양 너머의 정복으로 돌렸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곧 콘키스타(conquista)로 이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쪽 문이 열렸다. 반도 안쪽을 향하던 정복의 동력이, 이제 바깥의 대양을 향했다.
그래서 1492년은 단순한 연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첩이다. 지중해의 시대가 저물고 대서양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해. 그리고 그 경첩의 한쪽 끝에, 로렌초의 죽음 — 피렌체 황금기의 끝 — 이 놓여 있다.
무게중심이 옮겨가다
이 전환이 왜 그토록 결정적인가. 피렌체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운명이 여기서 갈렸기 때문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경제의 중심축은 지중해였다.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이 레반트를 거쳐 베네치아와 제노바로 들어왔고, 그 부가 피렌체 같은 내륙 도시의 금융과 모직 산업으로 흘렀다. 앞 장에서 본 메디치의 환어음 네트워크도 이 지중해 교역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피렌체는 그 시스템의 금융 심장이었다.
그런데 대서양이 열리면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새로운 부는 더 이상 지중해를 거치지 않았다. 아메리카의 은과 금,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새 항로는, 대서양에 면한 나라들 — 스페인과 포르투갈, 곧이어 네덜란드와 영국 — 의 손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졸지에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지리가 바뀌자 권력이 바뀌었다.
훗날 더 분명해질 한 가지 흐름을 여기 미리 적어 둔다. 1545년,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된다. 1571년, 스페인은 필리핀에 마닐라를 세우고 갈레온 무역을 시작한다. 아메리카의 은이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흘러들고, 명나라는 은으로 세금을 받는 경제로 재편된다. 이 거대한 은의 강은 뒤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기억할 것은, 그 강이 더 이상 피렌체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영광을 간직한 문화 도시로는 남았다. 그러나 경제와 금융의 주역 자리는 영영 잃었다. 앞 장에서 본 메디치 가문의 쇠퇴 — 은행이 기울고, 가문이 대서양 시대의 변두리에서 시들어 간 그 과정 — 이 바로 이 1492년에 시작된 거대한 흐름의 한 부분이었다.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정점에 올려놓았던 시스템 자체가, 세계의 중심에서 비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도, 그것이 딛고 선 토대가 빠지면 함께 가라앉는다.
항해술은 르네상스의 자식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혹적이지만 부정확한 이야기를 바로잡고 가야 한다.
흔히 대항해를 르네상스의 산물처럼 말한다. 유럽이 합리적 정신과 과학으로 무장해 바다로 나아갔다는 식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따져 보면, 대항해를 가능케 한 실용 기술의 상당수는 르네상스의 자식이 아니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르네상스와 무관하게 중세부터 쓰였다. 역풍에도 나아가게 해 준 삼각돛(라틴 세일)은 아랍과 지중해의 항해 전통에서 왔다. 대양을 건넌 포르투갈의 카라벨선은 이베리아의 실용적 조선 기술이지, 피렌체식 인문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천문 관측기구인 아스트롤라베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해 이슬람 세계가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그러니 "대항해의 핵심 도구들이 르네상스에서 나왔다"고 하면 부정확하다. 이 도구들은 오히려 이슬람·중국·고대로부터 축적된 유산에 더 빚지고 있다.
르네상스가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니라 틀이었다. 고대 문헌의 재발견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 15세기 초 유럽에 다시 소개되면서, 위도와 경도로 세계를 좌표화하는 사고가 살아났다. 콜럼버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실은 잘못된) 지구 둘레 추정을 근거로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라 믿었다. 르네상스의 고전 부활이 항해의 지적 틀을 일부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 구분이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이 여행 내내 지킬 하나의 규율로 삼고 싶다. 매혹적인 서사 — "르네상스가 근대를 낳았다", "유럽이 스스로의 천재성으로 세계를 열었다" — 앞에서 멈추고, 사실의 경계를 따지는 일. 항해술이 르네상스의 자식이 아니라 여러 문명이 수렴해 만든 공동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이 책 전체가 향하는 더 큰 주장의 작은 예고편이다. 어떤 문명도 홀로 도약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항해술은 르네상스의 "결과물"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를 공유한 "병행 현상"이었다. 르네상스가 과거(고전)를 되살려 정신의 공간을 넓혔다면, 대항해는 지리의 공간을 넓혔다. 둘은 직접적 인과로 묶인 부모 자식이 아니라, 유럽이 중세의 한계를 넘어 바깥으로 뻗어 나가던 같은 에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대항해를 주도한 곳은 르네상스 예술이 만개한 피렌체가 아니라, 변방의 이베리아였다. 문화의 중심과 팽창의 중심이 달랐다는 사실 자체가, 둘의 인과가 단순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다시, 카시아 가도에서
와인 잔을 비우고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시에나로 내려가는 길, 카시아 가도를 따라가면서 나는 1492년을 생각했다.
그해, 피렌체에서는 한 시대가 죽었고, 대서양에서는 다른 시대가 태어났다. 로렌초의 죽음과 콜럼버스의 출항이 같은 해에 일어난 것은 물론 우연이다. 그러나 시대의 깊은 리듬을 보여 주는 우연이다. 한 세계의 정점과 다른 세계의 시작이 같은 해에 만난 것이니까.
이 길은 남쪽으로, 로마를 향해 이어진다. 한때 모든 길이 향하던 그 중심. 그러나 1492년 이후, 세계의 진짜 길은 더 이상 로마나 피렌체로 모이지 않았다. 그 길들은 리스본의 부두에서, 세비야의 항구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은 — 다음 장들에서 보게 되겠지만 — 마침내 동쪽으로, 일본과 조선과 명나라의 해안에까지 닿는다.
무게중심이 옮겨간다는 것은 단지 부유한 도시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다시 짜인다는 뜻이다. 1492년에 열린 그 문 너머로, 인류는 처음으로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 안에서 살게 된다. 리스본의 결정이 베이징의 운명에 닿고, 포토시의 은이 조선의 해안에서 칼이 되어 돌아오는 세계. 그 그물망을 추적하는 것이, 이제부터의 여정이다.
인쇄술과 프레스터 존 — 흐른 것과 환상이 낳은 것
계단을 오르며
산 로렌초 성당 경내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그 유명한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색 돌이 마치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듯한 계단. 그것을 올라가면 긴 열람실이 나오고, 양옆으로 메디치 가문이 모은 필사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나는 그 방에서, 인쇄술 이전의 세계를 생각했다. 이 필사본들은 모두 손으로 베껴 쓴 것이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수도사가 몇 달, 몇 년을 매달려야 했다. 그래서 책은 극도로 비쌌고, 메디치 같은 가문만이 도서관을 가질 수 있었다. 지식은 소수의 서재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 지어지던 무렵, 알프스 너머에서 그 모든 것을 뒤집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쇄술이었다. 그리고 그 인쇄술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동아시아 — 그중에서도 한반도 — 에 닿는다. 매혹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매혹적일수록, 나는 더 천천히 걸어야 한다.
누가 먼저였나 — 확실한 것
먼저 확실한 사실부터 적자. 그리고 그 확실함은, 뜻밖에도 한반도에 가장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한국에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다 그 안에서 발견된 불경 두루마리다. 함께 나온 사리장엄의 정황과 본문에 쓰인 어휘로 미루어, 늦어도 석가탑이 세워진 751년 이전 — 대략 704년에서 751년 사이 — 에 신라에서 찍은 것으로 본다. 종이의 성분과 서체가 8세기 신라의 것이라는 점이 신라 제작의 근거다.¹ 연대가 명확히 적힌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중국의 금강경(868)보다도 한 세기 이상 앞선다.
다만 여기서도 정직해야 한다. 이 다라니경이 "세계 최고(最古)"라는 데에 국제적으로 완전한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작 연도와 인쇄 주체가 명문으로 못 박혀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중국과 일본 학자들의 이견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시도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목판 인쇄라는 기술 자체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안에서 7세기 중엽의 다라니 인쇄물이, 투르판에서 690~699년 무렵의 법화경 인쇄물이 발견되는 등 더 이른 중국 측 유물도 있다.²
그러니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목판 인쇄라는 기술의 발명은 중국에 뿌리를 두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목판 인쇄물은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기술의 발명"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은 다른 문제이고,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정직함이다. 나는 우리의 자긍심을 위해 "한국이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부풀리지 않는다. 부풀릴 필요도 없다. 사실 그 자체가 충분히 묵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렇게 또렷이 남는다. 한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 8세기)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직지, 1377)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인류의 인쇄 기술사에서, 그 가장 오래된 실물의 양쪽 끝 — 목판과 금속활자 — 이 모두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점토 활자는 11세기 북송의 필승이 만들었지만, 금속활자를 실용화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쇄본을 남긴 것은 고려였다. 『직지심체요절』(1377)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1450년대)보다 약 70년 앞선다. 고려가 금속활자의 독보적 선구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례를 정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에서는 『직지』보다 138년 앞선 1239년의 금속활자라며 '증도가자'라는 유물이 큰 화제가 되었다. 만약 진품이라면 세계사를 다시 쓸 발견이다. 2017년, 문화재청은 이를 보물로 지정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것을 "위조로 확정되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부정확하다. 진위를 가리는 과학적 분석이 엇갈렸고, 진품임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공인을 유보한 것이지, 가짜라고 못 박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진위 논쟁은 끝나지 않았고, 최근 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³
나는 이 사례를 일부러 적는다. 우리에게 자긍심을 주는 이야기일수록, 더 엄격히 — 그리고 결론이 날 때까지는 더 신중히 —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이 여행 내내 지키려는 규율이기 때문이다. 증도가자는 가짜로 판명된 것이 아니라, 아직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미결의 유물이다. 그렇다면 그 미결의 연대에 논지를 기대기보다, 이미 단단히 선 사실 —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직지』 — 위에 서는 편이 낫다. 진짜 자긍심은 확정된 사실 위에 선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한국의 인쇄사는 충분히 깊다.
흘렀는가 — 개연성과 미입증의 경계
이제 가장 매혹적인 질문에 이른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는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한국인의 가슴이 뛴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개연성 있는 가설이다. 학계의 표현을 빌리면, 결정적 증거(smoking gun)는 아직 없다.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분명히 풍부하다. 동아시아가 인쇄 전통에서 명백히 앞섰고 — 목판이든 금속활자든 가장 오래된 실물이 한반도에 있다 — 13세기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어 동서 교류의 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종이, 화약, 나침반 같은 다른 기술들이 모두 동방에서 서방으로 흘러간 패턴을 보면, 유독 활자 인쇄의 개념만 예외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일부 학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입증 책임은 오히려 "유럽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쪽에 있다고 본다. 모든 정황이 전래를 가리키는데 유독 활자만 예외라 주장하려면 그쪽이 증거를 대야 한다는 것이다.⁴
전파의 구체적 채널도 있었다. 이 책의 다른 장에서 만나게 될 고려와 몽골 제국의 긴밀한 관계가 그것이다. 고려 충선왕은 원의 수도 대도(베이징)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재를 짓고 원나라 최고 학자들과 교류했다. 고려 왕족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서적과 학문을 다루었다는 것은, 지식과 기술이 흐를 수 있는 환경이 실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 여기서 멈춰야 한다. "통로가 열려 있었다"와 "실제로 그 통로로 전해졌다"는 다른 문제다. 환경적 개연성은 높지만, 실제 전파를 입증하는 직접 증거(누가, 언제, 어떤 경로로)는 아직 없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전래설의 강력한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한 연구조차 이 구분을 비껴가지 못한다. 2001년 프린스턴의 폴 니덤과 블레즈 아구에라 이 아르카스는 구텐베르크의 인쇄물을 정밀 분석해, 그가 통설(강철 펀치로 구리 모형을 만들어 활자를 무한 복제하는 방식)과 달리, 매번 주형을 새로 만들어 찍는 — 모래주형에 가까운 — 방식을 썼을 수 있다고 제기했다.⁵ 같은 글자인데도 미묘하게 다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려의 주물사주조법과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보면, 이 연구가 말한 것은 "구텐베르크가 통설과 다른 주조법을 썼을 수 있다"까지다. "고려에서 배웠다"는 별개의, 더 큰 도약이다. 모래주형을 썼다는 것이 곧 한국에서 전수받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비슷한 기술적 문제에 직면하면, 독립적으로도 비슷한 해법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정직한 표현은 이렇다. 고려가 금속활자의 선구자라는 것은 확고한 사실이다. 동방의 인쇄 개념이 유라시아 교류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었을 개연성은 높고,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텐베르크에게 직접 전해졌다는 것은 —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나는 이 경계를 흐리지 않으려 한다. 흐리는 순간, 더 큰 진실 — 동아시아가 인류 문명에 기여한 바가 과소평가되어 왔다는 정당한 통찰 — 까지 의심받게 되기 때문이다.
환상이 낳은 실재 — 프레스터 존
기술이 동에서 서로 흘렀다면, 그 반대 방향으로는 무엇이 흘렀는가. 유럽이 동방을 향해 품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이, 역사를 바꾼 실재를 낳았다.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사제이면서 왕인 인물. 중세 유럽은 이슬람 세계 너머 어딘가에 강력한 기독교 군주의 왕국이 있다고 믿었다. 12세기에 그의 것이라는 편지가 유럽 군주들에게 도착하면서 이 전설은 폭발적으로 퍼졌다. 물론 위조된 편지였다. 그 편지는 황금과 보석이 넘치고 불로장생의 샘이 있는 낙원 같은 왕국을 묘사했다.
유럽이 이 환상에 매달린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십자군은 고전하고 있었고, 동쪽과 남쪽이 모두 이슬람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 너머에 강력한 기독교 동맹자가 있다"는 믿음은 엄청난 희망이었다. 그와 손잡으면 이슬람을 동서에서 협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3세기 몽골이 동쪽에서 이슬람 세계를 강타하자, 유럽인들은 잠시 "드디어 프레스터 존이 왔다"고 환호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군대를 그의 군대로 오해한 것이다. 곧 몽골이 기독교 왕국이 아니라 유럽 자신도 위협하는 세력임이 드러나며 환상은 깨졌지만, 그 와중에 교황과 프랑스 왕은 카르피니(1245), 뤼브룩(1253) 같은 수도사들을 동방으로 보냈다. 프레스터 존을 찾고, 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존재하지 않는 왕을 찾아 떠난 그 사절들이, 결과적으로 유럽에 동방에 대한 실제 지식을 가져왔다.
찾을 수 없던 왕국은 시간이 지나며 그 추정 위치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로 옮겨갔다. 에티오피아는 실제로 고대부터 기독교를 믿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대항해에는 두 가지 동기가 얽혔다. 인도로 가는 향신료 항로를 개척하려는 경제적 동기와, 프레스터 존을 찾아 이슬람에 맞설 동맹을 맺으려는 종교적 동기.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에도 프레스터 존을 찾으라는 임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음미할 역설이 있다. 프레스터 존은 실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찾으려는 열망이, 실제 항로 개척과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았다. 환상이 역사의 동력이 된 것이다. 인간 집단을 움직이는 것이 꼭 실재하는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 — 때로는 공유된 믿음과 서사가 실재하는 변화를 만든다. 앞 장에서 본 메디치의 "인망"도, 뒤에서 만날 종교개혁의 동학도 같은 결을 지닌다.
환상의 끝에서, 총 한 자루
프레스터 존을 찾아 아프리카를 돌고 인도와 동남아를 거친 포르투갈의 항해는, 그 동진의 끝에서 뜻밖의 곳에 닿았다. 일본이다.
1543년(자료에 따라 1542년), 중국으로 가던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배가 풍랑에 떠밀려 일본 규슈 남단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했다. 그들이 가진 화승총을 본 섬의 영주가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들였고, 일본 장인들에게 복제를 명했다.⁶ 이미 정교한 금속 가공술을 지닌 일본은 놀라운 속도로 총을 국산화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제왕을 찾아 떠난 그 긴 항해가, 향신료를 찾던 그 욕망이, 마침내 극동의 섬나라에 총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총 한 자루가 어떤 연쇄를 일으켰는지 — 일본을 통일하고, 그 통일된 힘이 어디로 분출되었는지 — 는 다음 장의 이야기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계단을 다시 내려오면서, 나는 흐름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동에서 서로 흘러간 기술(인쇄술·화약)과, 서에서 동으로 향한 환상(프레스터 존). 그 두 방향의 운동이 만나, 인류는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연결망을 짜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의 계단처럼, 역사도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동시에, 어딘가로 올라가고 있었다.
¹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되었으며, 한국 학계는 제작 시기를 704~751년 사이로 추정한다(석가탑 건립 751년, 한역 704년, 함께 발견된 사리 봉안 정황).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널리 꼽힌다.
² 다만 제작 연도·주체가 명문으로 확정되지 않아 국제적 공인은 미완이며(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미성공), 중국 시안의 7세기 중엽 다라니, 투르판의 690~699년경 법화경 등 더 이른 중국 측 목판 인쇄 유물도 보고되어 있다. 연대가 확실히 적힌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중국의 금강경(868)이다.
³ 증도가자는 2010년 공개 이후 진위 논쟁이 이어졌고, 2017년 문화재청은 보물 지정을 보류했다. 이는 진품임을 확정하지 못해 공인을 유보한 결정이지 위조로 판정한 것이 아니며, 진위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서체·주조 흔적 등을 둘러싼 학계의 견해 대립).
⁴ 이른바 "입증 책임 전환" 논법. 동아시아 인쇄술의 선행과 동서 교류의 정황을 근거로 한다. 다만 이는 개연성에 대한 주장이지 직접 증거가 아니다.
⁵ Paul Needham & Blaise Agüera y Arcas, 프린스턴대 연구(2001). 단 연구자들 자신은 "고려 전래"를 주장하지 않았다. Princeton University, "Gutenberg's role reviewed"(2001).
⁶ 다네가시마 조총 전래의 연도는 자료에 따라 1542년과 1543년으로 갈린다. Olof G. Lidin, 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2002).
도자기와 은의 세계 — 동에서 서로
메디치가 흉내 내려 한 것
피렌체의 한 박물관에서 나는 작고 푸른 무늬가 그려진 도자기 몇 점 앞에 멈췄다. 메디치 자기(Medici porcelain)였다. 16세기 후반,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중국의 청화백자를 흉내 내려고 만든, 유럽 최초의 연질 자기 시도 가운데 하나다. 지금 세계에 60여 점만 남아 있다.¹
흥미로운 것은, 이 시도가 사실상 실패였다는 점이다. 메디치의 장인들은 중국 자기의 그 영롱한 흰빛과 단단함을 끝내 재현하지 못했다. 돈으로 무엇이든 하던 가문이, 도자기 하나만은 살 수도 만들 수도 없었다. 유럽이 진짜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세기, 독일 마이센에서였다.
이 작은 실패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16세기에 도자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이 갈망했지만 만들지 못한 첨단 기술의 정수였고, 영어로 도자기를 아예 "차이나(china)"라 부르게 된 것처럼, 그 물건은 곧 중국이었다. 동아시아의 기술이 세계 무역을 움직이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 도자기를 둘러싸고, 동에서 서로 흐른 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한복판에 임진왜란이 있다. 나는 페루에서 이미 이 전쟁을 한 번 만났다. 그때는 아메리카의 은이 어떻게 조선의 해안에 닿았는지를 좇았다. 이번에는 반대편 — 동아시아의 기술이 어떻게 서쪽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흘러갔는지를 본다. 같은 전쟁의 다른 얼굴이다.
도자기 전쟁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야키모노 센소(やきもの戦争)" —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별칭이 한 측면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일본이 이 전쟁에서 가장 탐낸 전리품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도자기 기술과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도자기 위계는 분명했다. 중국이 정점(청화백자), 조선이 그다음(분청사기·백자), 일본은 한참 뒤떨어져 자기를 자체 생산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일본에서 다도가 크게 유행하면서 찻사발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명품 다완 하나가 성 하나와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일본군은 침공 과정에서 조선의 도공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해 끌고 갔다. 우발적인 약탈이 아니라 기술과 인력을 겨냥한 약탈이었다. 수천 명의 도공과 장인이 일본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 인물이 이삼평(李參平)이다. 전하는 바로는, 그는 일본 규슈 아리타(有田)에서 양질의 백토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굽는 데 성공했다. 그 유명한 아리타야키와 이마리야키의 시작이다. (다만 이삼평을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로 못 박는 이야기는 18세기 이후 정착한 전승으로, 동시대 사료로 온전히 입증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두어야겠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도공들이 일본 자기를 일으켰다는 큰 줄기 자체는 분명하다.) 또 심수관(沈壽官) 가문은 사쓰마(薩摩)에서 사쓰마야키를 일으켰고, 이 가문은 놀랍게도 15대에 걸쳐 400년간 도예 명가로 이어져 지금도 일본에서 활동한다.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 도자기의 명문이 된 것이다.
여기서 세계사적 반전이 일어난다. 17세기 중반,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 도자기의 수출이 일시 중단되었다. 유럽,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토록 갈망하던 중국 자기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공백을,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일군 일본 아리타 자기가 메웠다. 일본 자기가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기 시작했고,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이마리 자기에 열광했다.
조선에서 약탈한 기술이, 일본에서 꽃피워, 유럽으로 수출되어, 세계 도자기 무역의 한 축이 된 것이다. 조선의 흙 빚는 기술 하나가 전쟁과 약탈과 무역을 거쳐 유럽 왕실의 식탁에까지 올랐다. 동에서 서로 흐른 기술의 벡터가, 도자기에서는 이렇게 약탈된 기술의 전파라는 형태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이 버린 기술, 칼이 되어 돌아오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동→서 기술 흐름을 잇는 가장 깊은 사슬은 도자기가 아니라 은이다. 그리고 이 사슬은 — 앞 장들에서 다룬 인쇄술 전래설과 달리 — 각 고리가 문헌으로 입증되는, 강한 인과의 사슬이다.
1503년, 연산군 9년. 양반이 아니라 중인·상민 기술자였던 두 사람,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 새로운 은 제련법을 개발했다.² 이른바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회취법(灰吹法)이라고도 한다. 납과 은이 섞인 광석에서 은만 분리해 내는 기술이었다. 납 합금을 잿더미 위에서 가열하면, 납은 산화되어 재에 흡수되고 순수한 은만 남는다. 전통 방식보다 훨씬 높은 순도의 은을, 훨씬 빠르게 생산할 수 있었다.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기술을 대규모로 채택하기를 주저했고, 어떤 시기에는 오히려 억제했다. 이유는 몇 가지였다. 은 생산이 늘면 명나라의 은 조공 요구가 커질 것이라는 외교적 우려. 쉬운 은 생산이 사회·경제 질서를 흔들 것이라는 보수적 판단. 그리고 이 기술을 개발한 것이 중인·상민이라, 그들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을 꺼린 양반층의 경계. 농업이 본업이고 상공업은 말단이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작동했다.
그래서 조선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1533년경, 두 조선 기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이와미(石見) 은광의 기술자들에게 이 방법을 전했다.³ 자발적 이주였는지 납치·매매였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고, 기술자들의 이름도 자료마다 갈린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하다. 1533년 이후, 일본 이와미 은광의 생산량이 폭발했다.
이와미 은광은 한때 세계 은 생산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포토시 다음가는 은의 원천이었다. 그 은은 어디로 갔는가.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의 은을 사서 중국에 팔고, 그 대가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와 무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일부는 국내 정치 권력의 손에 집중되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은으로 부를 쌓았다.
즉 이와미 은은 두 갈래로 쓰였다. 포르투갈을 통한 군사 기술(조총)의 구매, 그리고 일본을 군사적으로 통일하는 정치 자금.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토대에, 조선이 버린 연은분리법이 있었다.
이 사슬을 한 문장으로 꿰면 이렇다. 조선이 지키지 못한 기술이, 60년 뒤 조선을 찌르는 칼의 자금이 되어 돌아왔다.
1503년 김감불과 김검동이 연은분리법을 개발했다. 조선은 그것을 쓰지 않았고 억눌렀다. 1533년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갔다. 이와미 은광이 세계적 규모로 자랐다. 일본은 그 은으로 포르투갈 조총을 샀다. 히데요시가 일어났다. 1592년, 그 은이 무장시킨 총의 군대가 부산 앞바다에 상륙했다. 그들이 든 총은 유럽에서 왔고, 그 총을 산 돈은 조선이 버린 기술로 만든 은이었다.
같은 파도, 다른 해변
이 대목에서 나는 페루의 기억을 불러온다.
아메리카의 포토시에서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수은 중독으로 죽어 가며 은을 캐고 있었다. 그 은은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 명나라의 은본위 경제를 떠받쳤다. 명의 은 수요가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를 재편했고, 그 수요가 일본 은 생산에 대한 유럽 자본의 투자를 정당화했다. 지구의 한쪽에서 원주민이 은을 캐며 죽어 갈 때, 다른 쪽에서는 조선의 기술자가 일본으로 팔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이 1592년 조선의 해안에서 만났다.
페루 여행에서 나는 이것을 "같은 파도, 다른 해변"이라 적었다. 대서양에서 시작된 파도가 태평양을 건너, 포토시의 원주민과 카리브해의 노예와 일본의 기독교도와 조선의 백성을 모두 같은 물결 속에 두었다는 것. 누구도 그 파도 바깥에 있지 않았다는 것.
이 책에서 나는 그 파도의 동쪽 해변을 본다. 도자기와 은이라는, 동에서 서로 흐른 기술의 물길을. 임진왜란은 단순한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의 제국주의, 가톨릭 네트워크, 전 지구적 은 경제, 동아시아 내부 정치가 조선의 해안에서 폭발적으로 교차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출발점은 — 앞 장에서 본 — 1492년의 콜럼버스였다.
흔히 우리는 임진왜란을 수동적 피해의 역사로 기억한다. 일본이 갑자기 쳐들어왔고, 우리는 견뎠고, 이겼거나 살아남았다고. 이 서사는 부정확하지 않지만 불완전하다. 조선을 세계사의 바깥에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세계화의 외부자가 아니었다. 1500년대 초부터 조선은 이미 세계 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조선의 기술이 일본으로 흘렀고, 조선의 사신이 명을 거쳐 유럽의 물건과 정보에 간접적으로 닿았다. 조선 역시, 작게나마, 첫 세계화의 행위자였다.
흙과 은이 남긴 것
메디치가 끝내 만들지 못한 도자기, 조선이 끝내 지키지 못한 은. 두 이야기는 묘하게 짝을 이룬다. 하나는 가지지 못한 자의 갈망이고, 하나는 가졌으나 버린 자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동에서 서로 흐른 기술의 물길이 가로지른다.
이 이야기에는 깊이 현대적인 교훈이 있다. 한 나라가 자신의 기술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그것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기술은 때로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돌아온다.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이 기술 보호와 기술 자립에 그토록 예민한 이유의 한 자락이, 어쩌면 이 16세기의 경험에 — 집단의 무의식 어딘가에 —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내가 정작 보고 싶은 것은 비극의 교훈을 넘어선다. 그것은 연결이다. 메디치의 도자기 욕망과, 조선의 은 기술과, 일본의 도공 약탈과, 유럽의 자기 열광과, 아메리카의 은이 — 모두 하나의 그물망 안에 있었다는 것. 16세기에 인류는 처음으로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전엔 따로 흐르던 유럽사와 동아시아사가 이제 서로의 운명에 닿게 되었다는 것.
다음 장에서 나는 이 그물망을 더 깊은 시간으로, 더 넓은 공간으로 따라간다. 도자기와 은의 16세기보다 훨씬 오래된, 유라시아 초원의 그물 — 스키타이의 황금과 고구려의 사신이 짜 놓은 매듭으로.
¹ 메디치 자기(Medici porcelain)는 1575~1587년경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제작된 유럽 최초의 연질 자기 시도 중 하나로, 현존 약 60여 점. 유럽의 본격적 경질 자기 생산은 18세기 초 독일 마이센에서 이루어졌다.
² 연은분리법 개발은 『연산군일기』 9년(1503) 기록에 김감불·김검동의 이름으로 전한다.
³ 일본 측 기록은 하카타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1526년 이와미 은광을 발견하고, 1533년 조선에서 온 기술자(경수·종단 등 자료에 따라 이름이 다름)를 통해 회취법을 도입했다고 전한다. 이와미 은광은 16세기 중반 한때 세계 은 생산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라시아의 매듭 — 열린 초원과 고구려
토스카나의 옛 주인들
토스카나(Toscana)라는 이름은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왔다. 로마가 일어서기 전, 이 땅의 주인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 피렌체도, 키안티의 언덕도, 내가 와인을 마신 그 포도밭도 모두 한때 에트루리아의 땅이었다. 그들은 정교한 금세공으로 이름났다. 좁쌀 같은 금 알갱이를 표면에 붙이는 그래뉼레이션 기법은 지금도 재현하기 어려울 만큼 섬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동방, 소아시아에서 건너왔다고 적었다. 다른 이들은 토착민이라 했다. 최근의 유전학 연구는 대체로 토착 기원에 무게를 두면서도, 주변 집단과 공유하는 초원 계통의 흔적을 함께 보여 준다. 결국 그들은 어느 한 줄기에서 깔끔하게 나온 민족이 아니라, 여러 흐름이 만난 자리에서 형성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토스카나의 옛 주인들 앞에서, 이 책이 줄곧 향해 온 한 가지 명제를 다시 만난다. 강한 문명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섞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를 따라가면, 토스카나의 언덕에서 멀리 유라시아의 초원으로, 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그물이 보인다.
열린 초원 — 순수라는 환상
에트루리아의 금세공을 보며 나는 다른 황금을 떠올렸다. 신라의 금관이다.
신라의 금관과 황금 장식, 그리고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무덤 양식은, 멀리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 문화와 양식적으로 닮아 있다. 흑해 북안에서 알타이를 거쳐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황금과 기마와 동물 문양의 거대한 문화 고속도로. 그 길의 동쪽 끝자락에 신라가 있었다.
이 길을 처음 달린 이들이 스키타이다. 그런데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학교에서 우리는 "스키타이는 이란계"라고 배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을 "스키타이는 이란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다"로 읽으면 부정확하다.
최근의 고대 DNA 연구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스키타이는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유라시아 초원 곳곳에서 온 여러 집단이 섞인 혼합체였다.¹ 서쪽(흑해 일대)은 유럽·이란계 요소가 강하고, 동쪽(알타이·중앙아시아)으로 갈수록 동아시아계 유전 요소가 뚜렷이 증가한다. "이란계"라는 분류는 지배층이 쓴 언어 계통을 가리킬 뿐, 그 광대한 세계에 속한 사람들 전체의 혈통이 이란인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 중앙아시아 초원은 동서 사람과 문화가 자유롭게 오가던, 활짝 열린 혼합 지대였다.
이 사실이 중요한 까닭은, 신라와 초원의 연결을 어떻게 읽을지를 가르기 때문이다. 신라 금관이 스키타이 양식과 닮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라인은 스키타이족이다"라는 종족적 동일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종족의 경계를 넘어 전파되기 때문이다. 양식의 유사성은 흐름의 증거이지, 혈통의 증거가 아니다.
나는 이 구분을 고집하려 한다. "우리가 스키타이의 후예다"라는 말은 입증하기 어렵고 반박당하기 쉽다. 반면 "한반도는 유라시아 초원 문화망의 동쪽 종착점이었다"는 말은 고고학과 유전학으로 뒷받침된다. 혈통이 아니라 흐름에 주목할 때, 한반도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크고 단단해진다.
고구려, 유라시아의 행위자
이 그물의 가장 선명한 매듭이 고구려다. 고구려는 만주의 지방 국가가 아니라, 유라시아 외교망에 인식된 국제적 강국이었다.
607년, 한 사건이 이를 증언한다. 수나라 양제가 북쪽 변경을 순행하던 중, 돌궐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뜻밖에 고구려 사신을 마주쳤다. 고구려가 돌궐과 손잡고 수를 견제하려 보낸 사신이었다.² 『수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장면은, 고구려의 외교가 몽골 초원에까지 뻗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도 매혹적인 과장 하나를 경계해야 한다. 더러 "돌궐은 원래 고구려의 구성원"이라는 주장이 떠돈다. 그러나 사료는 그 반대를 말한다. 우리역사넷의 표현을 빌리면, 고구려와 돌궐은 "병렬적이고 독립적인" 강국이었다.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둘이 별개의 독립국이었음을 증명한다. 동맹은 대등한 주체 사이에서만 맺는 것이니까. 그러니 정확한 표현은 "돌궐은 고구려의 일부였다"(미성립)가 아니라 "고구려는 돌궐과 대등하게 동맹을 맺은 북방의 강국이었다"(입증)이다.
고구려가 얼마나 멀리까지 인식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인상적인 물증이 사마르칸트에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7세기)에는, 새 깃을 꽂은 관(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두 인물이 그려져 있다. 복식과 무기로 보아 고구려 사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³
다만 이 벽화의 해석은 둘로 갈린다. 하나는 실제 파견설 — 고구려가 정말로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냈고 그 모습이 그려졌다는 것이다(일부는 연개소문이 보낸 밀사로까지 본다). 다른 하나는 도상 차용설이다. 한성대 정호섭 교수 등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천하 만국 사절단" 그림의 관습적 도상을 소그드 화가가 빌려 왔을 뿐, 소그드인이 고구려인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본다.⁴
흥미로운 것은, 어느 쪽이 맞든 결론의 한 자락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왔다면 고구려의 외교가 사마르칸트까지 닿았다는 뜻이고, 도상으로만 그려졌다 해도 "천하의 사절단에 으레 포함되는 나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양쪽 다, 고구려가 7세기 유라시아 국제 무대에서 하나의 인식된 행위자였음을 증명한다. 나는 이 벽화 앞에서, 입증되는 데까지만 말하고 그 너머는 "시사한다"로 남겨 두려 한다.
융합 제국과 그 한계
초원과 한반도의 이 그물은, 중원의 가장 강력한 제국에도 닿아 있었다.
수와 당 — 369년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이 제국들의 정체는, 흔히 생각하는 "한족의 제국"이 아니다. 수를 세운 양씨도, 당을 세운 이씨도, 북방 유목 계통(선비족)과 깊이 융합된 관롱집단(關隴集團)에서 나왔다. 선비족의 군사력과 한족의 행정력이 결합된 귀족 연합체였다. 즉 수당은 한족이 유목민을 정복한 것도, 유목민이 중국을 정복한 것도 아니라, 이미 섞인 세력이 북방 유목과 남방 농경을 하나로 통합한 제국이었다. 589년 수가 남조를 멸하고 남북을 합쳤을 때, 그것은 단순한 영토 통일이 아니라 두 문화의 융합이었다.
여기서 다시, 이 장의 명제가 확인된다. 가장 강한 것은 순수가 아니라 융합이다. 수당의 힘은 그 혼합과 개방성에서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강력한 융합 제국이, 한 작은 강국 앞에서 거듭 좌절했다. 고구려다.
수 양제는 612년 100만이 넘는 대군으로 고구려를 쳤다가 살수에서 참패했고, 거듭된 원정의 실패로 국력을 소진해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치다 망한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 — 동돌궐을 무너뜨리고 서역을 장악한 당대 최강의 정복 군주 — 조차, 645년 직접 고구려를 쳤다가 안시성에서 막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섰다.⁵ 그는 이 패배를 평생 한으로 여겼다.
물론 인과의 강도는 구분해야 한다. 수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가 직접적 멸망 원인이었다. 당은 원정에 실패했지만 그것으로 멸망하지는 않았고, 한 세대 뒤 신라와 연합해 결국 고구려를 무너뜨렸다(668). 그러나 당도 그 땅 — 만주 — 을 끝내 차지하지 못했다. 곧이어 신라에게 패해 한반도에서 밀려났고(나당전쟁), 옛 고구려 땅에는 발해가 들어섰다. 정복은 했으나 경영에는 실패한 것이다.
세계 최강의 융합 제국조차 함부로 굴복시키지 못한 강국. 고구려의 대수·대당 항쟁은, 동북아 세력이 중원 제국의 패권에 맞서 독자성을 지켜 낸 거대한 서사다. 그리고 그 고구려가 — 돌궐과 동맹하고, 사마르칸트 벽화에까지 그 모습이 새겨진 — 유라시아 그물의 동쪽 강력한 매듭이었다는 사실이, 이 장이 그리려는 그림이다.
매듭들
토스카나의 에트루리아에서 시작해 초원의 스키타이를 거쳐 고구려까지 왔다. 이 긴 선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통찰이다. 순수하게 한 줄기에서 나온 문명은 없다. 강하고 중요한 곳일수록, 그곳은 여러 흐름이 만나는 매듭이었다.
에트루리아도, 스키타이도, 신라도, 수당도 — 모두 섞임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섞임을 가능케 한 것이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연결망이었다. 기마술과 황금 세공과 동물 양식이, 사람과 기술과 사상이, 이 그물을 따라 동서로 끝없이 흘렀다. 한반도는 그 그물의 변방이 아니라, 동쪽 끝의 한 매듭이자 행위자였다.
이것이 이 여행이 줄곧 보아 온 그림이다. 메디치의 금융망에서, 도자기와 은의 16세기에서, 그리고 이 유라시아의 천년에서 — 같은 무늬가 반복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멈추고 더 어두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연결망은 어떤 논리로 작동했는가. 황금과 기술과 사상이 흐른 그 길로, 동시에 무엇이 흘렀는가. 다음 장에서 나는 이 그물의 그늘 — 빼앗고 추출하는 논리를 본다.
¹ 스키타이의 유전적 다양성과 동서 혼합에 관해서는 막스플랑크 연구진의 고대 유전체 연구(2021) 등 참조. 스키타이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기원이 섞인 부족 연합으로 본다.
² 607년 계민가한 장막에서의 고구려-수 사신 조우는 『수서』·『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구려-돌궐 동맹은 동돌궐 패망까지 이어진 것으로 본다(우리역사넷).
³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1965년 사마르칸트에서 발굴된 7세기 중반 소그드 벽화로, 조우관·환두대도 등으로 보아 두 인물을 고구려 사신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⁴ 도상 차용설은 한성대 정호섭 교수 등이 제기. 6~7세기 중국에서 유행한 '천하 사절단' 도식을 소그드 화가가 차용했을 가능성을 본다. 「'조우관' 쓴 아프로시압 사절」, 경향신문(2024) 등에 양설이 정리되어 있다.
⁵ 안시성 전투(645)와 당 태종의 철군,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실패와 수의 멸망은 동아시아사의 주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약탈의 그물
같은 길로 흐른 두 가지
키안티의 밤이었다. 언덕에 어둠이 내리고, 나는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날 본 것들을 되짚고 있었다. 메디치의 시스템, 1492년의 경첩, 동에서 서로 흐른 도자기와 은, 유라시아의 매듭.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림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또렷해질수록,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추적해 온 이 아름다운 연결망이, 오랫동안 하나의 논리로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빼앗고 추출하는 논리. 황금과 기술과 사상이 흐른 그 길로, 동시에 약탈이 흘렀다.
페루를 여행하며 나는 이 약탈의 논리에 붙은 오래된 이름 하나를 배웠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이름을 앞세우지 않으려 한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며, 그 그늘이 얼마나 넓은가이다. 이 장은 그 그늘에 관한 것이다.
제국의 한계선
먼저, 이 여행에서 거듭 만난 한 가지 패턴을 정리하고 싶다. 동아시아의 경계 지대 — 한반도와 만주 — 를 둘러싼 제국들의 흥망이다.
앞 장에서 보았듯, 수나라는 고구려를 치다 멸망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같은 패턴이 천 년에 걸쳐 반복된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대군을 보냈다. 7년에 걸친 그 전쟁이 명의 재정과 군사력을 결정적으로 소모시켰고, 그 약해진 틈에 만주의 여진족(후금→청)이 흥기해 결국 1644년 명을 무너뜨렸다. 청나라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싸우다 참패했고, 그 패배가 몰락을 결정적으로 가속해 17년 뒤 신해혁명으로 끝났다. 그리고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세웠으나, 그 대륙 야망의 끝없는 과확장이 제 발목을 잡아 1945년 패망했다.
수, 명, 청, 일본. 한반도와 만주에 무리하게 손댄 제국들이 차례로 무너지거나 한계를 드러냈다. 이것을 우연의 나열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인과의 강도는 정직하게 구분해야 한다. 수는 직접적 멸망 원인이었다. 명·청·일본은 복합적 붕괴 속에서 한반도 개입이 결정적 가속 요인이거나 한계를 폭로한 시험대였다. "한반도에 개입하면 제국이 망한다"는 법칙으로 절대화하면 과장이다. 각 제국의 멸망에는 내부 부패, 재정 위기, 다른 외세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으니까.
그래도 패턴은 실재한다. 왜인가. 한반도와 만주는 여러 세력권이 만나는 경계 지대였기 때문이다. 중원 농경, 북방 유목, 한반도, 그리고 근대엔 러시아와 일본까지. 경계 지대는 어느 한 세력이 완전히 독점하기 어렵고, 늘 다른 세력의 저항과 개입에 노출된다. 그래서 이곳을 무리하게 독점하려는 제국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도 완전한 지배에 실패하며 과확장의 덫에 빠졌다. 경계를 독점하려는 시도가, 그 시도자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 패턴의 압축판이 만주의 도시 하얼빈이다. 19세기 말 러시아가 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철도를 부설하며 세운, 사실상 러시아가 만든 국제도시다. 차르 제국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정착했고, 일본이 노렸으며,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 역사를 새긴 곳이다. 한 도시 안에 러시아·중국·일본·유대인·한국이 겹쳐 있었다. 만주는 고대의 고구려·발해부터 근대의 열강까지, 온갖 세력이 교차하고 충돌한 거대한 용광로였다.
동아시아를 넘어
그러나 이 약탈의 패턴은 동아시아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같은 시대, 같은 논리가 전 지구를 휩쓸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유럽의 부상을 유럽 내부의 천재성 — 르네상스, 과학혁명, 합리성 — 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따져 보면, 유럽의 성장을 떠받친 연료의 상당 부분은 유럽 바깥에서 왔다. 한때 더 부유하고 강했던 세계들이, 유럽이 부상하는 그 몇백 년 동안 차례로 무너지거나 변방으로 밀려났다.
다음 장에서 나는 그 전 지구적 그물 — 역사가들이 대분기(Great Divergence)라 부르는 거대한 갈라짐 — 으로 시선을 넓힌다. 유럽이 부상할 때 나머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약탈은 어떻게 스스로를 정당화했으며, 약탈당한 쪽은 왜 막지 못했는가. 진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분기 — 유럽이 부상할 때, 나머지 세계는
벽에 걸린 세계
피렌체 베키오 궁(Palazzo Vecchio) 깊숙한 곳에 지도의 방(Sala delle Carte Geografiche)이 있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16세기에 만들게 한 방이다. 벽을 가득 채운 나무 패널마다, 당대에 알려진 세계 전체가 한 장씩 그려져 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까지. 한 작은 내륙 공국의 군주가, 자기 서재의 벽에 지구 전체를 펼쳐 놓고 그 한가운데 앉았던 것이다.
나는 그 방에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지도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욕망의 지도였다. 세계를 한눈에 보고, 좌표로 나누고, 손에 쥐려는 욕망. 1492년에 열린 그 문 너머로, 유럽은 이제 세계 전체를 자기 서재의 벽처럼 다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 걸린 그 세계의 바깥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이 부상하는 그 몇백 년 동안, 한때 유럽보다 부유하고 강했던 문명들이 차례로 무너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났다. 역사학자들은 이 거대한 갈라짐을 대분기(Great Divergence)라 부른다. 그리고 정직하게 보면, 유럽의 부상과 나머지 세계의 하강은 따로 일어난 두 사건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한 가지 경계를 세워 둔다. "유럽이 모든 것을 약탈해 부유해졌다"고 단일 원인으로 절대화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부정확한 신화가 된다. 대분기에는 약탈 말고도 여러 요인이 겹쳐 있었고, 그 이야기는 다음 두 장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이 장에서 내가 보려는 것은 그 그림의 한쪽 면 — 유럽의 부상이 다른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며 이루어진, 그 추출의 구조다.
인도 — 장부로 이루어진 약탈
가장 선명한 사례가 인도다. 그리고 인도의 사례가 무서운 까닭은, 그 약탈이 칼이 아니라 장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의 하나였다. 특히 벵골의 면직물 — 그 유명한 다카의 모슬린은 "짜인 공기"라 불릴 만큼 섬세해, 유럽 귀족이 갈망하던 사치품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플라시 전투(1757)로 벵골을 장악한 뒤, 이 부는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방식이 핵심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세금을 걷어, 그 세금으로 인도의 상품을 사들였다. 그러고는 그것을 "영국의 수출"이라 불렀다. 인도 사람의 돈으로 인도 물건을 사서, 그 이익을 영국이 가져간 것이다. 여기에 '본국 비용(Home Charges)' — 인도를 지배하는 데 드는 행정·군사 비용까지 인도가 부담하게 했다. 빼앗기는 쪽이 빼앗는 쪽의 비용까지 내는 구조였다.
동시에 영국은 인도의 면직 산업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렸다. 인도산 면직물에는 높은 관세를 매기고, 영국 공장에서 기계로 짠 면직물을 인도에 들이부었다. "짜인 공기"를 만들던 다카의 직조공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한 식민 행정관이 "직조공의 뼈가 인도의 평원을 하얗게 덮었다"고 적었을 만큼. 세계 면직의 중심이던 나라가, 영국 공장의 원료 공급지이자 완제품 시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농업국이던 인도에서, 식민 통치기 동안 거듭 대기근이 일어나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인도의 경제사학자들은 이 구조를 "부의 유출(Drain of Wealth)"이라 부른다. 19세기에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처음 이름 붙인 개념이다. 최근 경제학자 우차 파트나익은 1765년부터 1938년까지 영국이 인도에서 빼낸 부를 약 45조 달러로 추산했다.¹ 다만 이 수치는 추산이고, 논쟁적이다. 어떤 이자율과 환산 방식을 쓰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비판자들은 이 방법이 빼앗긴 부의 '기회비용'을 과대 계산한다고 본다. 그러니 나는 "45조 달러"라는 숫자 자체에 기대지 않는다. 정확한 액수가 얼마든, 부가 체계적으로 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구조 자체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인도의 사례에서 나는 약탈의 한 본질을 본다. 약탈은 늘 노골적인 폭력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합법적인 행정과 무역과 재정의 외양을 쓴다. 장부는 정확하게 맞고, 세금은 법대로 걷히고, 무역은 계약대로 이루어진다. 그 '정상적인 제도의 작동'인 척하는 얼굴 뒤에서, 부는 조용히 한 방향으로 빨려 나간다. 칼을 든 약탈은 저항을 부르지만, 장부로 이루어진 약탈은 오랫동안 약탈로 보이지조차 않는다.
중국 — 부유했기에 표적이 되다
같은 논리가, 더 거대한 규모로 중국에 작동했다.
18세기까지 청은 세계 최대의 경제였다. 유럽은 중국의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갈망했지만, 정작 중국에 팔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유럽의 은이 — 4장에서 본 그 은의 강이 — 끝없이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무역 적자가 쌓이자 영국은 그 적자를 메울 방법을 찾았고, 가장 추악한 해법에 이르렀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밀어넣는 것이었다.
중국이 아편을 금지하고 단속하자, 영국은 그 단속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아편전쟁, 1840). 마약을 팔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앞 장들에서 본 그 강력했던 청 제국이 이 전쟁에서 무너지며, 홍콩을 내주고 항구를 열고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인들이 "굴욕의 세기"라 부르는 시대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깊은 역설이 있다. 중국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부유했기에 표적이 되었다. 빼앗을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약탈의 그물은 부가 모인 곳을 향한다. 풍요는 보호받지 못하면 오히려 위험이 된다 — 이것은 4장에서 본, 조선이 은 기술을 지키지 못한 이야기의 더 큰 판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 시혜의 언어로 포장된 약탈
인도와 중국에서 빠져나간 것이 부였다면, 아프리카에서 빠져나간 것은 사람이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강제로 끌려간 아프리카인은 1,200만 명이 넘는다. 한 대륙에서 가장 젊고 건강한 인구가 수백 년에 걸쳐 뽑혀 나갔다. 그 인적 손실이 아프리카의 사회 구조와 정치 질서에 남긴 상처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자체를 나누어 가졌다. 1884년 베를린 회의가 그 상징이다. 유럽의 외교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했는데, 그 자리에 아프리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직선을 그어 국경을 정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경에 유독 직선이 많은 것이 그 흔적이다. 강과 산과 민족의 경계가 아니라, 유럽인의 자가 그은 선. 한 대륙의 운명이,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회의실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 분할의 가장 어두운 자리가 콩고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사실상 자신의 개인 영지로 삼아, 고무를 뽑아내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노동으로 내몰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이들의 손목을 자르는 잔혹이 자행되었고, 수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내걸린 명분은 — '문명화'였다. 야만을 문명으로 이끈다는 시혜의 언어로, 한 대륙의 약탈이 포장되었다. 약탈의 가장 무서운 형태는, 자신을 선행이라 믿는 약탈이다. 이 시혜의 언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따로 해부할 것이다.
이슬람 — 닫혀 버린 중개로, 잊혀진 빚
마지막으로, 한때 유럽보다 앞섰던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이슬람 문명이다.
2장에서 보았듯, 1492년 이후 대서양 항로가 열리면서 지중해와 중동을 거치던 옛 무역로는 무력화되었다. 동방의 향신료가 더 이상 이슬람 세계를 거치지 않게 되자,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 지역의 중개 무역 경제가 서서히 시들었다. 한때 동서 교역의 길목을 쥐고 번영하던 세계가, 길이 옮겨가면서 변방이 되었다. 19세기 유럽은 쇠락한 오스만을 "유럽의 병자"라 불렀다.
여기에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 하나가 있다. 3장에서 나는 동방의 기술이 서방으로 흘러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흘러간 것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유럽이 르네상스에서 '되찾았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로마의 지식 상당수는, 사실 이슬람 세계가 보존하고 발전시켜 되돌려준 것이었다. 유럽이 중세의 암흑 속에서 잊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의학과 수학을, 아랍 학자들이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발전시켜 두었다. 대수학(algebra)이라는 말 자체가 아랍어에서 왔다. 그 지식이 훗날 스페인의 톨레도 같은 곳에서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어 유럽으로 흘러들었다 — 이 톨레도의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만난다. 유럽 부흥의 지적 자양분 한 자락이, 바로 그 유럽이 훗날 "병자"라 부른 세계에 빚진 것이었다. 빚을 진 쪽이 빚을 준 쪽을 내려다보게 된 것 — 이것이 대분기가 가린 또 하나의 진실이다.
20세기에 이 지역은 다시 한번 약탈의 그물에 걸렸다. 이번에는 석유였다. 1차 대전 중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중동을 나눠 가지기로 한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이, 아프리카의 베를린 회의처럼 또 한 번 자로 그은 국경을 남겼다. 그 인위적 경계가 낳은 갈등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 방향으로 흐른 강
지도의 방을 나오면서, 나는 벽에 걸린 그 세계를 다시 떠올렸다. 코시모가 자기 서재에 펼쳐 놓은 그 지도들은, 곧 유럽이 세계를 어떻게 다루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보고, 나누고, 좌표로 만들고, 빨아들이는 것.
인도의 부, 중국의 은, 아프리카의 사람, 이슬람의 지식과 석유. 그 모든 것이 한 시대에 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 흐름의 상당 부분은 칼이 아니라 장부로, 폭력이 아니라 '정상적인 제도'의 얼굴로 이루어졌다. 약탈의 논리는 노골적인 폭력만이 아니다. 그것은 합법과 시혜의 외양을 쓰고, 부를 한 방향으로 빨아들이는 시스템 그 자체다.
페루 여행에서 나는 이 흐름의 반대편 끝을 보았다. 아메리카의 은과 카리브해의 노예 — 같은 그물의 서쪽 매듭이었다. 여기서 내가 본 것은 그 그물의 유라시아 쪽 매듭이다. 두 대륙, 한 그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유럽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가 유럽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절반의 진실이다.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들은 그 약탈을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했는가. 그리고 — 더 아픈 질문 — 약탈당한 쪽은 왜 막지 못했는가. 다음 두 장은 그 두 질문을 차례로 마주한다.
¹ 부의 유출(Drain of Wealth)은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19세기에 제기했고, 우차 파트나익(Utsa Patnaik)은 1765~1938년 영국의 대인도 수탈을 약 45조 달러로 추산했다(2018). 단 이 추산은 환산 방법(복리 가정 등)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으며, 본문은 정확한 액수가 아니라 '한 방향 유출'이라는 구조에 논거를 둔다.
약탈의 정당화 — "지들이 뭔데"의 해부
명패 앞에서
피렌체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학 박물관의 하나가 있다. 나는 그곳의 한 진열장 앞에서 오래 멈췄다. 19세기에 수집된, 인간을 '분류'하려던 흔적들이었다. 두개골의 크기를 재던 도구, 인종을 등급으로 나눈 도표. 한때 이것이 '과학'이라 불렸다.
그 진열장 앞에서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도대체 그들이 뭐라고, 한 대륙을 자로 나누고, 한 문명을 등급으로 매기고, 다른 사람들을 '미개'라 부르며 빼앗았는가. 앞 장을 쓰는 내내 그 분노가 따라왔다. 그러나 나는 그 분노를 그대로 두지 않으려 한다. 분노가 "그들은 악마였다"에서 멈추면, 정작 그 약탈을 가능하게 한 것의 정체를 놓치기 때문이다. 이 장은 그 분노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는 장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탈을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했는가.
시혜로 포장된 약탈
가장 흔한 정당화는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었다. 우리는 미개한 이들을 문명으로 이끄는 고귀한 짐을 졌다는 것. 영국 시인 키플링은 그것을 아예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라 노래했다. 식민 지배가 착취가 아니라 봉사이고, 약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의 무서움은 7장에서 본 콩고에서 절정에 달한다.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고무 수탈이,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약탈하는 자가 스스로를 시혜자로 믿을 때, 그 약탈에는 죄책감조차 없다. 빼앗으면서 감사받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시혜의 언어는 약탈의 가장 정교한 마취제였다.
과학의 옷을 입은 편견
더 깊은 정당화는 '과학'의 옷을 입고 왔다. 19세기 유럽은 인종을 생물학적 등급으로 나누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인종 과학(scientific racism)이다. 두개골을 측정하고, 얼굴을 분류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렸다. 그리고 이 사이비 과학에 가장 강력한 권위를 빌려준 것이, 뜻밖에도 진화론이었다.
여기서 나는 한 모임을 불러와야 한다. 18세기 영국 버밍엄에,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라는 모임이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모였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증기기관의 제임스 와트, 그의 동업자 매슈 볼턴, 도자기의 조사이아 웨지우드,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그리고 이래즈머스 다윈 —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 이 모여, 분야를 넘어 자유롭게 지식을 나누었다. 과학과 산업과 사상이 한 식탁에서 섞이던, 창발의 빛나는 모임이었다. 분야를 넘어 지식을 자유로이 나누던 그 열린 그물은, 이 책이 상생이라 부르는 것의 한 얼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빛이 한 세대 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래즈머스의 손자 찰스 다윈이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발표했을 때, 그것은 생명에 관한 위대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허버트 스펜서 같은 이들이 그 이론을 인간 사회에 가져다, "적자생존"을 사회의 법칙으로 둔갑시켰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따라서 유럽이 다른 문명을 지배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다.
여기서 정확해야 한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이론이 아니라, 다윈의 왜곡이다. 다윈 자신이 식민 지배를 자연법칙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조차 다윈이 아니라 스펜서가 만들었다. 자연을 설명하려던 과학이, 약탈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의 손에서 무기로 둔갑한 것이다. 지식의 빛을 나누던 루나 소사이어티의 그 진화 사상이, 한 세대 뒤 약탈의 알리바이로 쓰인 것 — 같은 사상이 빛도 그림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장이 기억하려는 교훈이다.
힘이 권리로 둔갑할 때
문명화 사명도, 인종 과학도, 사회진화론도, 결국 한 가지를 하고 있었다. 힘을 권리로 둔갑시키는 일. 그들에게는 빼앗을 힘이 있었다. 그러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약탈을 오래 지속하려면, 그것이 정당하다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 문명을 전파할 권리, 우월한 자로서 지배할 권리, 자연의 법칙을 따를 권리.
그러나 그 권리는 환상이었다. 그것은 힘이 스스로에게 입힌 옷이었다. 인종과 종교와 사이비 과학으로 짠 그럴듯한 옷. 벗겨 놓고 보면, 거기에는 권리가 아니라 힘과, 그 힘을 정당화하려는 서사만이 있었다.
분노의 진짜 과녁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분노를 어디로 향해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분노가 "백인은 악마다", "유럽은 악의 문명이다"에서 멈추면, 그것은 통쾌하지만 무력하다. 더 나쁘게는, 약탈의 진짜 정체를 가린다. 왜냐하면 약탈은 특정 인종이나 민족의 고유한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일본도 똑같이 했다. 일본은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대동아공영권' — 함께 번영하는 아시아를 만든다는 — 시혜의 언어를 내걸었다. 서구의 '문명화 사명'과 글자만 다른 같은 문법이었다. 약탈은 국가를 가리지 않는다. 그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면, 어느 인종이든 어느 문명이든 같은 논리를 만들어 낸다. 빼앗을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정당화하는 서사가 따라 나온다. 그것이 약탈의 논리다 — 특정 민족의 본성이 아니라, 힘이 갖추어지면 어디서든 피어나는 시스템.
그러므로 분노의 진짜 과녁은 '나쁜 인종'이 아니라 '약탈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이 구분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책임을 묻는다. 문제가 특정 민족의 본성이라면 그 민족만 비난하면 되지만, 문제가 시스템이라면 — 그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그 자리에 누가 서든 같은 일이 반복된다. 어제의 피해자가 힘을 얻으면 내일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어렵고, 더 근본적인 책임이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나는 그 분노가 조금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느꼈다. 한 인종을 향한 미움이 아니라, 한 시스템을 향한 또렷한 응시로. 미움은 과거에 묶이지만, 응시는 미래를 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응시가 다음 질문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렇다면 — 약탈당한 쪽은, 왜 그것을 막지 못했는가.
왜 막지 못했는가 — 대분기의 안쪽
메디치가 만든 항구에서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리보르노(Livorno)가 나온다. 메디치가 만든 항구 도시다. 내륙 도시 피렌체에는 바다가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는 대서양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며, 늦게나마 바다로 나가는 문을 내려 했다. 리보르노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고, 종교와 출신을 묻지 않고 상인을 받아들였다. 유대인도, 무슬림도, 박해를 피해 온 이들도 이곳에서는 장사할 수 있었다. 작지만 영리한 시도였다 — 흐름이 바뀌는 것을 읽고, 거기에 올라타려는.
그 항구에 서서 나는 앞 장들의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더 불편한 질문을 마주했다. 유럽이 약탈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이 약탈했다"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면, 나는 아시아를 순수한 피해자로만 그리게 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 왜 막지 못했는가. 왜 한때 더 부유하고 강했던 문명들이, 그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는가. 이 질문을 피하면, 피해의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어진다.
분열이 낳은 경쟁, 통일이 낳은 경직
첫 번째 단서는 역설적이다. 유럽의 강점은 그 분열에 있었다.
15세기의 유럽은 수많은 작은 나라로 쪼개져 끝없이 경쟁했다. 흔히 약점으로 보이는 이 분열이, 뜻밖의 힘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이야기가 그 증거다. 그는 서쪽으로 가는 항해 계획을 들고 포르투갈 왕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옆 나라 스페인으로 갔고, 그곳에서 후원을 얻어냈다. 한 군주가 거절해도 옆의 군주가 받아 줄 수 있는 것 — 그 경쟁적 다원성이, 모험적인 시도가 살아남을 틈을 만들었다.
반면 같은 시기의 거대 제국들은 통일되어 있었고, 그래서 경직되어 있었다. 명나라도, 인도의 무굴 제국도, 하나의 중앙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 중앙이 "바다로 나갈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절당한 모험가가 갈 '옆 나라'가 없었다. 통일은 안정과 질서를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도가 빠져나갈 틈을 막았다.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이 대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정화(鄭和)의 함대다.
콜럼버스보다 90년 가까이 앞선 1405년부터, 명나라의 정화는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일곱 차례나 인도양을 누볐다. 그 배들은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컸고, 함대의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동아프리카에까지 닿았다. 기술도, 자원도, 항해 능력도 — 중국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보다 한참 먼저, 한참 더 크게, 대양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1433년, 명은 그 함대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스스로 금했다(해금). 항해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항해할 능력을 가진 채로 항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막대한 비용,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가 더 급하다는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 — 중화(中華)가 세계의 중심이며 바깥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자족적 세계관. 천하의 중심에 있는데, 왜 바깥의 변방으로 나가겠는가.
여기에 대분기의 가장 아픈 진실이 있다. 중국은 할 수 없어서 못 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반면 유럽은 절박해서 나갔다. 오스만이 동방으로 가는 육로를 막고 있었기에, 향신료를 얻으려면 바다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핍이 동력이 되었고, 풍요가 정체가 되었다. 가진 것이 많아 아쉬울 것이 없던 쪽은 멈췄고, 아쉬운 것이 많아 절박하던 쪽은 떠났다.
우연과 미결의 자리
그렇다고 이것을 "동양은 게을렀고 서양은 부지런했다"는 식의 새로운 신화로 만들 수는 없다. 정직하게 보면, 대분기에는 누구의 의지로도 환원되지 않는 우연과 미결의 자리가 크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평생 한 질문에 매달렸다. 중국은 오랫동안 유럽보다 앞선 기술 문명이었는데, 왜 근대 과학혁명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일어났는가. 이른바 '니덤의 질문'이다. 그는 방대한 연구를 남겼지만, 이 질문은 지금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단일한 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답일지도 모른다.
경제사가 케네스 포메란츠는 또 다른 각도를 제시한다. 그의 책 제목이 바로 『대분기』다. 그는 18세기까지 중국의 선진 지역과 유럽의 선진 지역 사이에 생각만큼 큰 격차가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갈랐는가. 포메란츠는 두 가지 우연을 강조한다. 하나는 영국에 마침 석탄이 캐기 좋은 곳에 묻혀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횡재 — 식민지가 영국에 원료와 식량과 시장을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는 것. 유럽의 도약이 순전한 천재성의 결과가 아니라, 지리적 우연과 식민지라는 외부 연료에 크게 빚졌다는 것이다.
가장 정직한 종합
그래서 나는 대분기를 이렇게 정리하려 한다. 그것은 어느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겹이 겹친 복합 현상이었다.
유럽의 약탈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유럽 내부의 경쟁적 다원성이 있었고, 아시아 내부의 자족과 경직이 있었고, 석탄과 아메리카 같은 우연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했다. 가장 정직한 한 문장은 이렇다. 유럽의 부상은 수탈에 크게 의존했으되, 수탈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다만 그 수탈 없이는, 그 규모와 속도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 종합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4장에서 이미 한 번 이 교훈을 만났다. 일본은 표착한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조총을 보자마자 받아들여 국산화했다. 조선은 자기 손에 있던 연은분리법을 억눌렀다. 흐름을 먼저 받아들인 자가 힘을 얻었고, 흐름을 외면한 자가 60년 뒤 그 대가를 치렀다. 대분기도 같은 이야기의 더 큰 판본이다. 아시아는 단지 약탈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아시아도, 바뀌는 흐름 앞에서 자족에 안주하고 그 흐름을 놓쳤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탓하려는 말이 아니다.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또 하나의 약탈이다. 그러나 피해를 세계사적 구조 속에서 정직하게 읽으면, 미래를 향한 태도가 달라진다.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향한 원한이 아니라, 흐름을 읽고 자기 모델을 다시 설계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야말로, 약탈의 시대에 무너진 쪽과 살아남은 쪽을 가른 진짜 분기점이었다.
리보르노의 항구에 저녁이 내렸다. 메디치가 작게나마 흐름에 올라타려 만든 그 항구를 보며, 나는 이 진단을 현재로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흐름을 읽고 모델을 재설계하는가 — 이것은 16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강자와 약자를 가르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음 장은 그 현재로 간다.
메디치의 패턴은 반복된다 — 독일, 스페인, 그리고 AI
언덕 위의 패널
키안티로 돌아오는 길, 한 농가의 지붕 위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태양광 패널이었다. 수백 년 된 돌집의 붉은 기와 위에, 햇빛을 전기로 바꾸는 푸른 판이 얹혀 있었다. 오래된 토스카나의 능선 위로, 멀리 풍력 발전기의 흰 날개도 천천히 돌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이 여행이 줄곧 추적해 온 한 가지 원리를 현재의 풍경에서 다시 보았다. 패권의 흥망은 그 주체가 우월하거나 열등해서가 아니라,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읽고 자기 모델을 다시 설계했는가에 달렸다는 것. 그리고 어제의 성공 공식이 내일의 족쇄가 된다는 것. 한 시대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강자가, 전제가 바뀔 때 가장 취약해진다는 것.
이 장은 진행 중인 현실을 다룬다. 그래서 단정이 아니라 관찰된 경향으로, 숫자보다 패턴으로 적는다. 1492년 당시 누구도 대서양의 시대를 확신하지 못했듯, 지금 우리도 이 전환의 끝을 알지 못한다. 다만 16세기의 패턴이 21세기에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그 무늬를 짚어 볼 수는 있다.
독일 — 현대의 메디치
오늘의 독일을 보면, 나는 자꾸 메디치를 떠올린다.
독일은 전후 유럽 최강의 산업 국가가 되었다. 그 성공에는 몇 가지 단단한 전제가 있었다. 값싼 에너지 — 특히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저렴한 천연가스. 세계 최고 수준의 내연기관 자동차 기술. 그리고 그 정교한 공산품을 사 줄 거대한 수출 시장 — 무엇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 이 세 전제 위에서 독일의 산업 모델은 오래 번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전제들이 거의 동시에 흔들렸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끊기며 값싼 가스라는 토대가 무너졌다. 자동차 산업의 무게중심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옮겨가면서, 독일이 한 세기 동안 쌓은 내연기관의 우위가 갑자기 짐이 되었다. 그리고 최대 고객이던 중국이, 전기차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최강의 경쟁자로 돌아섰다. 고객이 경쟁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메디치의 역설이다. 독일을 정점에 올려놓았던 바로 그 강점들 — 값싼 에너지에 최적화된 중화학 공업, 내연기관에 집약된 기술, 수출 의존 구조 — 이, 흐름이 바뀌자 가장 무거운 족쇄가 되었다. 한 시대를 완벽하게 구현했기에, 다음 시대로 몸을 바꾸기가 가장 어려워진 것이다. 1492년 이후의 피렌체가 그러했듯, 가장 정교하게 한 시대에 맞춰진 시스템이, 토대가 빠지자 함께 흔들린다.
스페인 — 빼앗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
흥미로운 대조가 한 나라 건너에 있다.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오래 유럽 경제의 주변부로 여겨졌다. 그런데 바로 그 '뒤처짐'이, 전환기에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지킬 낡은 산업의 무게가 가벼웠기에, 새로운 흐름에 더 가볍게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은 풍부한 햇빛과 바람을 가진 땅이다. 그 자연 조건 위에서 재생에너지로 빠르게 옮겨가는 흐름이 관찰된다.
여기에 이 책 전체와 닿는 한 가지 울림이 있다. 화석연료는 본질적으로 추출적이다. 땅속 어딘가에서 캐내야 하고, 그 어딘가는 종종 남의 땅이며, 그래서 화석연료의 역사는 곧 약탈과 분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 7장의 석유가 그랬듯. 그러나 햇빛과 바람은 빼앗을 필요가 없다. 누구의 땅에서 캐낼 것도, 그것 때문에 전쟁할 것도 없다. 빼앗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로의 전환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약탈의 문법에서 벗어나는 한 걸음일 수 있다. 이 책이 뒤에서 본격적으로 묻게 될 그 질문 — 약탈의 그물을 상생의 그물로 다시 짤 수 있는가 — 의 작은 물질적 예고편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진행 중이고, 미완이다. 스페인의 전환이 끝내 도약으로 이어질지, 독일이 끝내 모델을 재설계해 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패턴이다. 같은 외부 충격 — 에너지 위기든, 중국의 부상이든 — 을 맞아도, 어떤 나라는 그것을 재앙으로 겪고 어떤 나라는 기회로 전환한다. 충격이 운명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충격 앞에서 자기 모델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가 가른다.
다시, 새로운 흐름 앞에서
그리고 이제, 모든 나라가 함께 마주한 가장 큰 새 흐름이 있다. 인공지능이다.
AI는 1492년의 대서양 같은, 한 시대의 경첩일 수 있다. 무게중심을 통째로 옮길 수 있는 흐름.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항해의 한복판에 있고, 콜럼버스가 자신이 어디에 닿았는지 끝내 몰랐듯, 우리도 이 전환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AI에서 누가 이길지를 점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여행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다만 이 여행이 줄곧 가르쳐 온 것 하나는 분명하다. 흐름을 먼저 타는 것(능력)과, 그 힘을 어디에 쓰는가(방향)는 별개라는 것. 메디치는 금융의 흐름을 먼저 탔다. 유럽은 대항해의 흐름을 먼저 탔다. 그러나 그 능력을 약탈에 쓴 시스템은, 결국 그 약탈이 자기에게 돌아와 무너지거나 곪았다. 흐름에서 이기는 것과, 그 흐름을 상생의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AI 앞에서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우리가 AI에서 이길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가 AI를 어느 방향으로 설계할 것인가" 이다. 빼앗는 도구로 만들 것인가, 잇는 도구로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진단을 끝낸 이 여행이 이제 처방으로 — 약탈의 그물에서 상생의 그물로 — 넘어가는 문턱이다.
언덕 위의 태양광 패널이 마지막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래된 돌집 위에 얹힌 새 기술. 과거와 미래가 한 지붕 위에 포개진 그 풍경이, 묘하게 이 여행의 한가운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늘 옛 토대 위에서 새 흐름을 맞는다. 문제는 그 흐름을 어떤 손으로 쥐느냐다. 이제부터 나는, 빼앗지 않고 잇는 그 손을 찾아 나선다.
분리에서 연결로 — 그리고 다시 설계하다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것
산카시아노의 한 사람이 우리에게 동네 식당을 일러 주었다. 칸티네타 델 노노(Cantinetta del Nonno) — "할아버지의 작은 와인 창고"라는 이름의, 관광객이 아니라 동네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는 트라토리아였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였다. 원하면 자기가 대신 전화를 걸어 두겠다고. 그래야 식당 쪽에서 "당신들이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고.
나는 그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것. 관광객이란 무엇인가. 식당의 입장에서 관광객은 한 번 오고 가는 거래다. 돈을 내고 음식을 받고 떠나는, 서로에게 도구인 관계. 그러나 누군가의 소개로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는 한마디가 얹히는 순간, 그 관계는 거래가 아니라 환대가 된다. 같은 식탁, 같은 음식인데,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통째로 달라진다.
이 작은 차이가, 내가 이 여행 내내 추적해 온 두 논리의 차이를 그대로 압축한다. 한쪽은 다른 존재를 도구로, 거래로, 추출의 대상으로 환원한다. 앞 장에서 본 약탈의 논리다. 다른 한쪽은 다른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서로 잇는다. 빼앗는 그물과, 잇는 그물. 이 장은 그 두 번째 그물에 관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말 속에 숨은 것
그 잇는 그물에 닿기 전에, 나는 1장에서 심어 둔 씨앗 하나를 먼저 거두어야 한다.
우리는 관계를 흔히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 부른다. 인맥, 연줄, 네트워크.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이 보인다. 자본(capital)이란 본질적으로 운용해서 수익을 내는 자산이다. 투자하고, 축적하고, 인출하고, 손익을 계산하는 대상. 그러니 관계를 "자본"이라 부르는 순간, 그 관계는 자동으로 내가 보유하고 운용하는 포트폴리오의 한 항목이 된다. 우정도, 가족도, 공동체도 "나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나의 인맥이다"라는 문장에서, 그 사람은 내 목적을 위해 동원 가능한 자원이다. 관계의 가치가 나에게 주는 효용으로 측정된다. 여기서 "나"는 여전히 중심에 있고, 상대는 주변의 자원이다.
이것이 미묘하지만 무서운 까닭은, 관계를 살리려는 선의의 언어조차 이미 추출의 문법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은 관계의 중요성을 옹호하려 했지만, 그 옹호의 언어 자체가 약탈의 문법 안에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1장에서 본 메디치와 곧장 이어진다. 메디치는 돈을 메타-자원으로 다뤄 세상을 자본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천재적이었다. 그 자본의 문명이 500년 동안 세계를 추출의 논리로 조직해 온 끝에, 이제 우리는 관계마저 "사회적 자본"이라 부르는 데까지 왔다. 메디치가 연 그 변환의 문법이, 마침내 인간의 마음과 관계에까지 적용된 것이다.
자유를 시장에 가둘 때
이 추출의 문법에는 한 시대의 이름이 붙어 있다. 신자유주의다. 그런데 그것을 정확히 보려면, 먼저 자유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 존 스튜어트 밀이 그러했듯 — 자유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넓은 조건으로 보았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되, 그 자유가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함께 간다고 보았다. 자유와 연대가 모순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그 자유를 한 군데로 좁힌다. 시장에서의 거래로.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 — 끊임없이 손익을 계산하며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 — 로 환원되고, 삶의 모든 영역이 시장의 논리로 재편된다. 교육도, 의료도, 돌봄도, 심지어 관계마저 거래와 경쟁과 효율의 언어로 번역된다. 시장이 삶의 한 영역이 아니라 삶 전체의 문법이 되는 것이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작은 국가'의 사상이라 오해한다. 그러나 정확히 보면 그 반대다. 그것은 시장의 논리를 사회 구석구석까지 관철하기 위해, 오히려 강하게 개입하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가 처음 한 나라 단위로 실험된 곳이 군사 독재하의 칠레였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가 시장을 강제로 열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가 왜 약탈의 논리의 이론적 정체인지가 드러난다. 모든 관계를 시장 거래로 환원한다는 것은, 곧 모든 타인을 자원으로, 모든 것을 추출 가능한 가치로 본다는 뜻이다. 앞에서 본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이 바로 그 문법의 응결이었다. 관계마저 운용하고 인출하는 자산으로 보는 시선 —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 마음에 심은 추출의 습관이다. 한국의 자살과 초저출산도, 이 습관이 한 사회의 몸에 새겨진 증상으로 읽을 수 있다. 모두가 모두의 경쟁자인 사회에서, 관계는 비용이 되고 미래는 위험이 된다.
다만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악인 것은 아니다. 시장은 인류가 만든 가장 강력한 조정 장치의 하나이고, 지난 수십 년의 세계화가 수억 명을 빈곤에서 끌어올린 것도 사실이다. 비대해진 국가의 비효율을 비판한 데에도 일리가 있었다. 문제는 시장 그 자체가 아니라 시장의 전면화다. 삶의 한 도구여야 할 것이 삶 전체를 식민화할 때, 시장은 추출의 기계가 된다.
그러니 진짜 물음은 '자유냐 통제냐'가 아니다. '자유를 어떻게 상생과 결합할 것인가'이다. 자유에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고립된 개인이 서로를 자원 삼아 경쟁하는 추출적 자유. 다른 하나는 서로 안에 거하며 함께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다. 마르틴 부버가 '나-그것'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에서 비로소 사람이 사람이 된다고 했을 때, 알프레트 아들러가 인간은 본래 공동체 감각 속에서만 건강하다고 했을 때, 그들이 가리킨 것이 후자다. 참된 자유는 남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남과 바르게 이어지는 자유다.
분리라는 뿌리, 연결이라는 대안
이 추출의 논리는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분리(separation)라는 사고방식이다.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정신과 물질로, 나와 너로 깨끗이 갈라놓는 사고. 분리된 것은 대상이 되고, 대상이 된 것은 측정되고 소유되고 추출될 수 있다. 약탈의 시스템은 이 분리의 사고 위에 세워졌다. 무언가를 빼앗으려면, 먼저 그것을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탈을 넘어서는 일은, 단지 더 착하게 행동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분리된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시선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분리가 약탈의 뿌리라면, 그 대안은 연결이다. 너와 나를 갈라 도구로 만드는 대신, 서로 안에 거하게 하는 것. 각자의 고유함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 개인을 전체에 녹여 버리는 강요된 집단주의와는 다르게 — 서로에게 열려 있는 상태. 오래된 신학은 이것을 페리코레시스(perichōrēsis), 곧 "서로 안에 거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거창한 말보다 단순한 말을 쓰려 한다. 그저 연결, 혹은 서로 잇기.
이 연결이 한낱 감상이 아니라는 것은, 내 전공인 건강의 영역이 증언한다. 사회적 고립은 하루 담배 열다섯 개비에 맞먹고 비만을 능가하는 위험 인자로, 이른 죽음을 예측한다. 외로움은 만성 염증과 맞물리고, 감정의 억압은 면역과 수면을 무너뜨린다. 인간은 결코 홀로인 적이 없었다. 몸과 마음과 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를 끊임없이 조절한다. 그러니 건강이란 한 개인이 소유한 속성이 아니라, 연결이 얼마나 열려 있는가에서 비롯되는 상태다. 관계가 막히면 사람은 병든다 —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생리다.
진단과 처방 사이 — 한 철학자를 넘어
이 추출이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장 날카롭게 진단한 사람이 철학자 한병철이다. 그의 통찰은 이 책의 진단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러나 — 정직하게 말하면 — 나는 그가 멈춘 곳에서 한 걸음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성과사회'라 부른다. 과거의 규율사회가 "하지 마라"는 금지로 사람을 통제했다면, 오늘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명령으로 사람을 몰아붙인다. 무서운 것은 그 채찍을 쥔 손이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점이다. 외부의 착취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착취하는 주인과 착취당하는 노예가 한 사람 안에 함께 산다. 그 끝에 번아웃과 우울이 있다. 그가 다른 책에서 말한 '타자의 소멸' — 모든 것을 자기 성취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진정한 타자가 사라지는 것 — 은, 이 책이 말하는 연결의 정확한 반대말이다. 서로 안에 거할 타자가 사라진 세계. 한병철은 약탈의 논리가 우리 내면에 새긴 상처를 누구보다 선명하게 그려 냈다.
그러나 그의 처방은, 내가 보기에 절반에서 멈춘다. 그가 권하는 것은 대체로 물러섬이다. 깊은 심심함, 사색, 관조, 멈춰 서기. 과잉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 말은 옳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이 홀로 물러나 사색한다고 해서 사람을 소진시키는 시스템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 물러선 그 자리에서, 타자와 어떻게 다시 이어질 것인가가 비어 있다. 한병철은 병을 정확히 진단하지만, 관계를 다시 잇는 처방에는 이르지 않는다.
나는 이 차이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한병철이 진단의(診斷醫)라면, 이 책이 찾는 것은 치유의(治癒醫)다. 진단은 "물러서라, 멈추라"고 말한다. 치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 물러섬이 아니라 관계의 적극적 재건. 그리고 그 재건은 감상이 아니라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건강이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몸의 과학 — 고립의 병리, 옥시토신, 관계의 생리 — 으로 받치고, 그것을 측정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번역하는 것. 진단에서 멈추지 않고 설계로 나아가는 것 — 그것이 한병철을 존경하되 넘어서려는 지점이다.
흥미롭게도 한병철도, 나도, 서구의 개념을 동양의 지혜로 받친다. 그는 선(禪)과 도가의 무위로 성과사회를 비춘다. 나는 도(道)와 원효의 화쟁(和諍), 기(氣)의 상호 침투로 연결을 비춘다. 같은 어둠을 보면서, 한 사람은 멈춤에서, 한 사람은 이음에서 그 답을 찾는다. 그리고 이음은, 다음 절에서 보듯, 설계되어야 한다.
메디치처럼, 다시 설계하다
그렇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메디치를 생각한다.
1397년, 조반니 디 비치는 작은 은행 하나로 시작했다. 그가 설계한 것은 아름다운 사상이 아니라 작동하는 메커니즘이었다. 환어음이라는 도구, 복식부기라는 측정, 지점망이라는 제도, 환차익이라는 인센티브. 비전은 측정과 제도와 인센티브를 만나야 비로소 작동한다. 메디치의 환어음이 세상을 바꾼 것은, 그것이 좋은 생각이어서가 아니라 작동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연결의 비전도 그래야 한다. 따뜻한 이상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것 역시 측정되고 제도화된 시스템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메디치가 부를 다루는 금융 시스템을 설계했듯, 우리는 관계를 일차 단위로 삼는 연결의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단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곳에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인프라를 갖추고도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안고 있다. 흔한 답은 개인을 향한다 — 더 회복탄력적이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추출이다. 시스템이 만든 병의 책임을 개인의 의지에 전가하는 것이니까. 끝없는 경쟁과 비교, 타인을 경쟁자로 보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자살과 초저출산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연결이 만성적으로 막힌 사회의 신호다. 미래가 불안한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시스템의 신호다.
그렇다면 처방도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향해야 한다. 책임을 개인에게서 환경으로 옮기는 것.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서로 잇닿을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과 일상을 다시 짜는 일이다 — 쉴 수 있는 시간, 걸을 수 있는 도시, 자연과 닿는 일상, 비교가 아니라 회복을 주는 미디어 환경. 헬스장 회원권을 권하는 대신 도시 설계 안에 움직임을 심고, 의지를 다그치는 대신 관계가 열리는 기본 환경을 만드는 것. 이런 영역들은 추상적 덕목이 아니라 측정하고 제도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메디치의 환어음이 복식부기로 측정되고 지점망으로 제도화되었듯이.
이것은 첫 설계도일 뿐이다. 미완성이고, 더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메디치도 작은 은행 하나에서 시작했다. 연결의 시스템도 하나의 학교에서, 하나의 병원에서, 하나의 도시에서 — "관계가 열려 있는가"를 묻는 작은 실험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여기까지 적고 나는 잠시 펜을 멈췄다. 솔직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계를 단위로 삼는 시스템, 권력을 사익이 아니라 공동선으로 묶는 시스템 — 이것은 한낱 이상주의적 공상은 아닌가. 인류가 한 번이라도 그런 것을 실제로 그려 보고, 제도로 만들어 살아 본 적이 있는가.
그 의심에 답을 준 것은, 역사 곳곳에 흩어진 사람들이었다. 약탈의 고통을 직접 겪은 뒤, 다른 길을 의식적으로 설계한 이들. 거대한 제도에서 작은 식탁까지, 빼앗지 않고 서로 잇기를 택한 사람들. 다음 장에서 나는 먼저 그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 며칠 전 시에나에서 본, 인류가 좋은 정부를 벽에 그려 두고 매일 그 앞에 앉았던 한 방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이다.
페리코레시스로 간 사람들 — 다른 길이 가능하다
포도를 거두는 저녁
키안티의 가을이었다. 포도 수확이 한창이었다. 언덕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포도를 따고, 광주리가 트랙터에 실려 내려갔다. 저녁이 되자 한 농가의 마당에 긴 식탁이 차려졌다. 그해의 첫 포도주가 따라졌고, 누구의 밭에서 일했는지를 잠시 잊은 손들이 같은 빵을 떼고 같은 잔을 들었다. 수확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 거두고, 함께 먹는 일이었다.
나는 그 식탁 앞에서, 지구 반대편의 아주 오래된 한 장면을 떠올렸다. 2500년 전, 한 사람이 추수의 제사를 마치고 성문 누각 위에 올라 서글피 탄식하고 있었다. 같은 가을, 같은 수확, 그러나 그의 한숨은 잔칫상의 온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확의 제단에서 탄식한 사람
그 사람은 공자였다 — 정확히는, 『예기』 「예운(禮運)」편이 공자의 입을 빌려 전하는 한 장면이다. 그가 막 마치고 나온 것은 한 해 농사를 거두어 땅에 감사하는 제사, 곧 사(蜡)였다. 한 해 농사에 관여한 여러 신에게 한꺼번에 올리는 추수 감사제로, 그 한가운데에는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시조신 — 후대에 흔히 신농(神農)으로 여겨지는 선색(先嗇) — 이 모셔졌다.¹ 신농은 인류에게 농사를 가르친 이이자, 따로 전하는 바로는 백 가지 풀을 몸소 맛보아 약과 독을 가린 의약의 시조이기도 하다. 곧 인류에게 먹임과 돌봄을 준 상징이다. 그 추수 감사의 제단에서 나온 공자가, 성문 위에 올라 한숨을 쉬었다. 곁에 있던 제자 자유(子游, 언언)가 물었다. "선생님은 어찌 탄식하십니까."
공자는 잃어버린 한 세계를 이야기했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때, 천하가 만인의 것이던 때를. 천하위공(天下爲公). 그때는 어질고 능한 이를 뽑아 신의와 화목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제 부모만을 홀로 부모로 여기지 않았고, 제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늙은이는 편안히 일생을 마쳤고, 젊은이는 쓰일 데가 있었으며, 아이는 잘 자랐고, 과부와 홀아비와 병든 이까지 모두 봉양받았다(皆有所養). 남자는 저마다 직분이 있었고, 여자는 시집갈 자리가 있었다(男有分, 女有歸). 재물을 땅에 버리는 것을 싫어했으나 제 것으로 쌓아 두지는 않았고(不必藏於己),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으나 제 것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不必爲己). 그리하여 간사한 꾀가 일어나지 못하고 도둑과 난리가 없어, 바깥문을 닫지 않았다(外戶而不閉). 이를 일러 대동(大同)이라 한다.²
나는 이 비전이 하필 신농의 제단에서 나왔다는 것에 오래 머문다. 좋은 사회의 그림이 궁정이나 법정이 아니라, 먹임과 돌봄의 신 앞에서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大同의 한가운데에는 한 구절이 박혀 있다. 모두가 봉양받는다(皆有所養) — 늙은이도, 아이도, 과부도, 병든 이도. 좋은 사회의 척도가 가장 강한 자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가장 약한 자가 어떻게 돌봄받는가에 있다는 것. 이것은 내가 평생 연구해 온 한 가지와 정확히 같다. 건강이란 한 개인이 소유한 속성이 아니라, 관계가 얼마나 열려 있는가, 사회가 얼마나 서로를 돌보는가에서 비롯되는 상태라는 것. 大同은, 말하자면 건강을 낳는 사회의 가장 오래된 청사진이다. 좋은 사회는 권력이 아니라 돌봄에서 자라난다.
백 가지 풀을 맛본 손
그리고 신농 자신이 그 원리의 화신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백 가지 풀을 직접 맛보아 — 하루에 일흔 번 중독되어 가며 — 무엇이 사람을 살리고 무엇이 죽이는지를 가렸고, 끝내 독초에 스러졌다고 한다.³ 치유의 앎을, 자기 몸을 시험대로 내어주어 얻은 것이다.
이 장면이 8장과 정면으로 맞선다. 8장에서 나는 과학이 약탈의 알리바이로 둔갑하는 것을 보았다. 인종을 등급으로 나누고, 강자의 지배를 자연법칙이라 우기던 사이비 과학. 그것은 타자를 대상으로 삼아 얻은 앎, 빼앗는 앎이었다. 그런데 동방의 의약, 그 시조에게서 앎은 정반대 방향으로 태어난다. 타자가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어 얻은 앎. 빼앗아 아는 것과 내어주어 아는 것 — 같은 '앎'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다. 신농은 추출적 과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안티테제다. 치유의 기원에는 자기 증여가 있다.
두 개의 세계 — 大同과 小康
공자의 탄식이 그토록 깊은 까닭은, 그가 大同 바로 뒤에 지금의 세계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소강(小康)이라 불렀다. 대도가 숨자 천하가 한 집안의 것이 되었다(天下爲家). 이제 사람들은 각자 제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고(各親其親), 재물과 힘을 제 것으로 삼으며(貨力爲己),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世及), 성곽과 해자를 둘러 방비로 삼았다(城郭溝池以爲固). 그리하여 꾀가 일어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謀用是作而兵由此起).⁴
두 세계를 나란히 놓으면, 이 책 전체가 한 문단에 담겨 있다. 大同이 천하위공(공공의 것)이라면 小康은 천하위가(제 집안의 것)다. 大同이 제 부모만 부모로 여기지 않음이라면 小康은 각자 제 부모만이다. 大同이 제 것으로 쌓지 않음이라면 小康은 재물과 힘을 제 것으로다. 大同이 바깥문을 닫지 않음이라면, 小康은 성곽과 해자로 자기를 지킴이다.
바로 이 마지막 대비에 핵심이 있다. 성곽과 해자(城郭溝池) — 그것은 곧 면역의 벽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자를 막아 세우는 벽. 大同은 그 벽이 필요 없는 세계이고(外戶不閉), 小康은 그 벽으로 자기를 지키는 세계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먼저 담을 쌓아야 하고, 담을 쌓는 순간 타자는 손님이 아니라 위협이 된다. 공자가 그린 진단(小康)과 비전(大同)이, 이 책이 진단부와 처방부로 나눠 그린 것과 정확히 겹친다. 동방의 한 노인이, 2500년 전에 이미 같은 두 그림을 한 문단에 그려 두었던 것이다.
다만 정직해야 한다. 大同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공자 자신도 그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어쩌면 한 번도 온전히 존재한 적 없는 것을 탄식했다. 게다가 이 글 자체가 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예운」은 공자 사후 수백 년 뒤, 유가가 공자의 입을 빌려 정리한 글로 본다 — 『예기』 속 공자의 말은 상당수가 후대의 가탁(托名)이다. 그러니 大同은 한 사람의 회고라기보다, 한 전통이 오래 품어 온 꿈을 옛 성인의 입에 실어 말한 것이다. 大同은 역사가 아니라 이상이다 — 인류가 상상하고 글에 새긴 좋은 사회. 시에나의 한 화가가 벽에 좋은 정부를 그렸듯, 한 노인은 글에 大同을 그렸다. 서쪽의 벽과 동쪽의 글, 두 개의 좋은 사회. 두 문명이 서로 알지 못한 채, 같은 꿈을 각자의 자리에 새겨 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옛 꿈만이 아니다 — 생명의 사실
大同을 한낱 이룰 수 없는 옛 꿈으로만 접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서로 안에 거함은 — 이상이기 전에, 생명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전공의 영역이 증언한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 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드는 작은 발전소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 우리의 일부가 아니었다. 약 20억 년 전, 자유롭게 살던 한 박테리아가 다른 세포 안으로 들어가, 잡아먹히는 대신 함께 살기로 했다.⁵ 지금도 미토콘드리아는 자기만의 DNA를 간직한 채, 우리 세포 안에 거한다. 곧 복잡한 생명 — 우리를 포함한 모든 동식물 — 은 경쟁의 단독 승자가 아니라 서로 안에 거함의 산물이다. 생명은 잡아먹기만으로 도약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로 도약했다.
임신은 더 놀랍다. 어머니의 면역계는 본래 낯선 것을 공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유전적으로 절반이 타자인 태아를 거부하지 않고 품는다. 면역이 배제가 아니라 환대로 작동하는 자리다. 게다가 태아의 세포가 어머니 몸에 수십 년을 남고, 어머니의 세포도 아이에게 남는다. 한 몸이 다른 몸 안에 흔적으로 거하는 것 — 문자 그대로 서로 안에 거함이다.⁶ 우리 몸의 세포 가운데 절반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장 속의 무수한 미생물이 우리 안에 거하며 소화를 돕고 면역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들을 품어 먹인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다.
8장에서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지배는 자연의 법칙"이라 했다. 그러나 생명의 더 깊은 진실은 그 반대를 가리킨다. 생명은 약탈만으로가 아니라, 서로 안에 거함으로 도약했다. 大同은 자연을 거스르는 헛된 꿈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가장 깊은 문법을 사회로 옮겨 적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농의 추수 제사조차 이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옛 기록은 그 제사에서 "고양이를 맞이하니 들쥐를 잡아먹었기 때문이요, 범을 맞이하니 멧돼지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라 적었다.⁷ 추수의 감사가 사람을 넘어, 농사를 도운 짐승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먹이그물 전체로 번지는 감사 — 그것이 大同의 생태적 본바탕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계했다
그렇다면 大同은 저절로 오는가. 아니다. 그것은 신농의 제단에서도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탄식되었다. 서로 안에 거함은 자연의 문법이되, 사회에서는 의식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메디치가 부를 다루는 금융 시스템을 설계했듯이.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설계했다. 1948년 코스타리카는 내전을 끝낸 뒤 군대를 폐지했다. 군비로 쓰일 돈을 교육과 의료와 환경에 돌렸다. 힘으로 지배하지 않아도 나라가 설 수 있음을, 한 작은 나라가 70여 년간 증명해 왔다.⁸ 1956년 스페인 바스크의 한 신부는, 내전의 폐허 위에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협동조합을 설계했다. 몬드라곤 — 노동자가 곧 조합원이고,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지며, 최고와 최저 임금의 격차에 상한을 둔다. 사람을 비용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본 것이다.⁹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의 옛 마을에는 두레와 품앗이가 있었다. 노동과 수확을 시장의 거래가 아니라 서로에게 진 빚으로 나누던 호혜의 그물. 각 집의 살림은 그대로 두면서도, 일은 함께 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코스타리카에도 불평등이 있고, 몬드라곤도 시장의 압력 앞에서 흔들리며 비조합원 노동의 그늘을 안고 있고, 두레의 호혜는 마을 안에 머물러 바깥의 타자에게는 닫혀 있었다. 이들은 완성된 낙원이 아니다. 다만 약탈의 고통을 직접 겪은 뒤, 의식적으로 다른 길을 설계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그 시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서로 안에 거함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계되어야 한다 — 그리고 늘 미완이다.
그러나 깨지기 쉽다
마지막으로, 가장 정직한 사실을 적어 둔다. 이렇게 설계된 상생조차 깨지기 쉽다.
12세기에서 13세기, 스페인의 톨레도에는 한 번역원이 있었다.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 학자들이 한자리에서, 아랍어로 보존된 그리스의 지식을 라틴어로 옮겼다. 7장에서 본 그 환류 — 이슬람 세계가 지킨 고대의 앎이 유럽으로 돌아온 길목이 바로 여기였다. 세 종교가 협업해 지식을 흐르게 한 드문 자리. 그러나 그 공존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계가 분명한 공존이었고, 무엇보다 — 1492년, 유대인과 무슬림이 추방되면서 끝났다.¹⁰ 같은 해, 콜럼버스가 떠난 그해다. 한쪽 문이 열리던 그 해에, 다른 쪽에서는 한 공존의 세계가 닫혔다.
신농도 독초에 스러졌고, 톨레도의 공존도 추방으로 끝났고, 大同도 잃어버린 것으로 탄식되었다. 서로 안에 거함은 강하지 않다. 그것은 면역의 벽을 두르지 않기에, 늘 약탈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사회는 한번 이루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좋은 정부를 벽에 그려 두고도 끝내 그것을 잃은 한 도시가 있다. 다음 장에서 그 도시로 가 보자.
닫기 — 누구의 것도 아닌 조상
키안티의 식탁으로 돌아온다. 새 포도주가 한 순배 더 돌고 있었다.
나는 신농을 다시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신농이 어느 민족의 조상인가를 두고 더러 다툼이 인다. 신농(염제)을 동이(東夷) 계통으로, 나아가 한민족과 잇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는 입증된 학설이 아니라 일부의 주장이고, 무엇보다 신농은 애초에 신화적 인물이라 그 혈통의 귀속을 따지는 일 자체가 검증 너머에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다툼이야말로 大同의 정신과 어긋난다. 천하는 만인의 것(天下爲公) 이라는 비전이, 누구의 것으로도 가둘 수 없는 한 신화에서 나왔으니까. 大同이 천하를 사유화하지 말라 했듯, 신농도 한 민족의 것으로 사유화되지 않는다. 5장에서 보았듯,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흐름이다. 좋은 사회의 꿈도, 그것을 처음 말한 이도, 누구 하나의 소유가 아니다.
서쪽 토스카나의 한 벽에 좋은 정부가 그려져 있고, 동쪽의 한 글에 大同이 새겨져 있다. 두 문명이 서로 알지 못한 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 — 그것이 이 꿈이 한 사람의 환상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기억임을 말해 준다. 빼앗는 그물과 서로 잇는 그물. 인류는 두 가지를 모두 알았고, 둘 다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만들 수 있다.
포도밭 위로 어둠이 내렸다. 함께 거둔 포도가 한 잔의 술이 되어 식탁을 돌고 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의 저녁이었다.
¹ 『예기』 「예운」 첫머리(昔者仲尼與於蜡賓…): 공자가 사(蜡) 제사에 빈(賓)으로 참여한 뒤 누대에 올라 탄식했고, 제자 자유(子游, 言偃)가 까닭을 물었다. 사(蜡)는 연말에 농경의 여러 신에게 올리는 추수 감사제(八蜡)로, 그 중심에 농경의 시조신 선색(先嗇)이 있으며 흔히 신농으로 여겨진다. 다만 원문에 '神農'이라는 글자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 또한 「예운」 자체가 전국 말~진한 시기에 공자에게 가탁(托名)되어 정리된 것으로 보아, 大同은 공자의 직접 발언이라기보다 후대 유가가 공자의 입을 빌려 그린 이상이다. (정본 대조: ctext.org·위키문헌·홍콩 교육국 자료.)
² 大同 단락의 원문: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脩睦… 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예기』 「예운」)
³ 신농이 백 가지 풀을 맛보아 약초를 가렸다는 이야기(神農嘗百草)는 『회남자』 등 후대 문헌의 전승이며, 독초에 스러졌다는 죽음의 일화는 더 후대의 민간 전승이다. 의약서 『신농본초경』이 그의 이름에 가탁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 기원 서사로 다룬다.
⁴ 小康 단락: "今大道既隱, 天下爲家, 各親其親, 各子其子, 貨力爲己… 城郭溝池以爲固, 禮義以爲紀… 謀用是作, 而兵由此起… 是謂小康."(『예기』 「예운」)
⁵ 미토콘드리아·엽록체의 내공생 기원설은 린 마굴리스(1967)가 정립했다. 이들이 독자적 DNA를 간직한다는 점이 그 증거로 꼽힌다.
⁶ 임신 중 태아 세포가 모체에, 모체 세포가 태아에 이동·잔존하는 현상을 미세키메리즘(microchimerism)이라 한다. 태아 세포가 출산 후 수십 년간 어머니의 여러 조직에서 발견된 보고가 있다.
⁷ 『예기』 「교특생(郊特牲)」의 팔사(八蜡) 기록: "迎貓, 爲其食田鼠也; 迎虎, 爲其食田豕也."(고양이를 맞이함은 들쥐를 잡아먹기 때문이요, 범을 맞이함은 멧돼지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⁸ 코스타리카는 1948년 내전 후 호세 피게레스 정부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 재원을 교육·보건에 돌렸다. 니코야 반도는 세계적 장수 지역(블루존)의 하나로 꼽힌다.
⁹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1956년 바스크의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의 주도로 출발했다. 노동자 소유·1인 1표·임금 격차 상한이 특징이며, 시장 압력과 비조합원 고용 등 한계도 지적된다.
¹⁰ 톨레도 번역원의 다종교 협업은 12~13세기에 활발했고, 1492년 알람브라 칙령에 따른 유대인 추방(이어 무슬림 추방)으로 이베리아의 공존(콘비벤시아)은 막을 내렸다. '콘비벤시아'를 갈등 없는 이상향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정확하며, 위계와 긴장을 포함한 공존이었다.
시에나의 벽 — 좋은 정부를 그린 도시
엉뚱한 방
시에나의 푸블리코 궁(Palazzo Pubblico). 나는 그 안에서 처음에 엉뚱한 방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온통 금빛으로 화려한 방이었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들이 근엄하게 그려진, 위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픈 천장화.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찾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
안내를 받아 다시 걸어, 마침내 그 방을 찾았다. 화려한 천장의 방에 비하면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벽들이었다. 금빛도, 압도하는 장식도 없었다. 그저 세 벽에 빛바랜 프레스코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빛바랜 벽 앞에서 오래 서 있게 되었다. '평화의 방(Sala dei Nove)', 또는 '평화의 방(Sala della Pace)'이라 불리는 곳. 암브로조 로렌체티가 1338년에서 1339년에 걸쳐 그린, 서양 미술사 최초의 본격적인 정치 회화가 거기 있었다.¹
화려한 천장이 권력을 우러러보게 한다면, 이 소박한 벽은 권력을 마주 보게 했다. 그 차이가, 이 방의 전부였다.
세 개의 벽
방의 세 벽은 하나의 논증이다.
한 벽에는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가 있다. 가운데 공동선을 상징하는 위엄 있는 노인이 앉고, 그 곁에 정의·평화·절제·관용 같은 미덕들이 의인화되어 늘어서 있다. 결정적인 것은 한 가닥 끈이다. 정의의 여신에게서 풀려나온 끈이 시민들의 손을 지나 통치자에게로 이어진다. 통치자와 시민이 정의의 끈으로 서로 묶여 있는 것이다. 권력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끈으로 시민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정당하다는 선언이었다.
맞은편으로 돌면 그 좋은 정부가 낳은 효과가 펼쳐진다. 도시의 거리에서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상점이 번성하고, 학자가 가르치고, 일꾼이 지붕을 올린다. 성벽 밖으로는 잘 가꾸어진 들판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농부가 곡식을 거둔다. 하늘에는 '안전(Securitas)'이라는 여인이 날고, 도시의 문 위에는 '리베르타스(LIBERTAS)' — 자유 —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좋은 정부란 추상이 아니라, 춤추는 거리와 익어 가는 들판이라는 구체적 풍경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벽, 나쁜 정부. 옥좌에는 폭정(Tyrannis)이 뿔과 송곳니를 단 채 앉아 있다. 그 발치에는 정의의 여신이 결박된 채 쓰러져 있다. 도시는 황폐하고, 거리에는 폭력과 공포가 흐른다. 좋은 정부에서 풀려 시민을 묶던 그 끈이, 여기서는 정의 자신을 결박하는 사슬이 되어 있다.
이 세 번째 벽이, 세 벽 가운데 가장 많이 지워져 있었다. 보존 상태가 가장 나빠, 폭정의 얼굴은 흐릿하고 황폐한 도시는 군데군데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깐,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마치 시간이 약탈의 얼굴만은 흐릿하게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처럼. 물론 그것은 보존 환경의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이 춤추는 거리이고 가장 희미해진 것이 폭정의 얼굴이라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묘한 위안을 주었다.
같은 토스카나, 정반대의 설계
이 방 앞에서 나는 피렌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피렌체의 메디치는 권력을 한 가문에 집중시키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부를 후원으로, 후원을 인망으로, 인망을 세습 권력으로 전환하는 정교한 바퀴. 그것은 한 가문이 도시를 조용히 소유하는 설계였다.
같은 시대, 같은 토스카나의 시에나는 정반대의 설계를 실험하고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아홉 명의 정부(Governo dei Nove)'였다. 1287년부터 1355년까지, 시에나를 다스린 아홉 명의 위원. 그들은 귀족이 아니라 중산층 상인 가운데서 뽑혔고, 임기는 단 두 달이었다. 그리고 임기 중에는 이 청사 안에 격리되어, 바깥출입 없이 함께 먹고 자며 다스렸다.² 짧은 임기, 외부와의 격리, 끊임없는 순환 — 이 모든 장치는 한 가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권력이 누군가의 사익으로 굳는 것을, 부패가 뿌리내리는 것을, 구조 자체로 막는 것.
메디치가 권력을 집중하고 세습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면, 시에나의 아홉 명은 권력을 분산하고 순환시키고 격리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같은 땅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통치의 두 정반대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 옳았다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대조 자체가 무언가를 말한다. 시스템은 자연이 아니라 설계라는 것. 권력을 한 곳에 모으는 것도, 흩어 순환시키는 것도, 모두 인간이 선택해 만든 메커니즘이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스템을 설계할지 물을 수 있고, 다르게 물을 수 있다.
끈으로 묶인다는 것
그 좋은 정부의 벽을 다시 보면서, 나는 앞 장에서 이야기한 그 '연결'을 거기서 보았다.
좋은 정부의 핵심은 그 한 가닥 끈 — 통치자와 시민이 정의로 서로 묶여 있음 — 이었다. 누구도 누구를 도구로 환원하지 않고, 누구도 전체에 녹아 사라지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닿아 있는 관계. 서로 묶인 그 끈이야말로, 14세기의 화가가 그릴 수 있었던 '서로 잇기'의 시각적 형상이었다.
그리고 나쁜 정부의 벽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거기서 끈은 연결이 아니라 결박이었다. 정의를 묶어 쓰러뜨리는 사슬. 약탈의 시스템이 늘 그러하듯, 폭정은 먼저 관계를 끊고 — 정의를 묶어 무력화하고 — 그다음에 빼앗는다. 좋은 정부가 연결이라면 나쁜 정부는 분리였다. 상생과 약탈의 대비가, 그 마주 보는 두 벽에 그대로 있었다. 686년 전, 한 화가가 이미 그 둘을 한 방의 벽에 그려 두고, 통치자들이 매일 그 사이에 앉게 했던 것이다.
평화라는 메신저
이야기는 14세기에 끝나지 않았다. 시에나는 그 벽의 '평화(Pace)' 여인을 세상을 향한 메신저로 삼았다.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이 함께 작성한 유네스코의 「2000 선언(Manifesto 2000)」 — 폭력의 문화에서 평화의 문화로 옮겨 가자는 여섯 가지 약속 — 에, 시에나의 공직자와 시민이 서명했다.³
그 여섯 약속의 마지막이 무엇이었는지 알았을 때, 나는 잠시 멈췄다. "함께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만든다(creare insieme nuove forme di solidarietà)." 이 책에서 내가 더듬어 온 상생의 시스템과, 글자 그대로 같은 말이었다.
1338년 로렌체티가 벽에 그린 평화가, 662년을 건너 2000년의 선언으로 되살아나, 다시 "연대의 재발명"을 말하고 있었다. 같은 비전이 한 메신저처럼 시대를 건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토스카나의 밤에 적고 있는 이 글도, 어쩌면 그 긴 계보의 한 자락일지 모른다. 나는 그 생각을 오래 붙들지는 않았다. 다만 한 번, 조용히 그렇게 느꼈다.
무너질 수 있는 것
그러나 시에나를 이상향으로 미화하는 것으로 이 장을 닫을 수는 없다. 그러면 거짓이 된다.
'아홉 명'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인 과두정이었고, 귀족과 하층민은 그 아홉 자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좋은 정부의 벽이 그린 그 조화로운 도시 안에도, 보이지 않는 배제와 위계가 있었다.
더 아프게는, 그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프레스코가 완성되고 겨우 9년 뒤인 1348년, 흑사병이 유럽을 덮쳤다. 시에나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죽었고, 그 좋은 정부를 그린 화가 암브로조 로렌체티 자신도 그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13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입성과 함께 민중이 봉기해 아홉 명의 정부는 무너졌다.⁴ 좋은 정부를 벽에 새긴 도시가, 그 좋은 정부를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이다.
상생의 시스템조차 취약하다. 무너질 수 있다. 전염병에, 봉기에, 시간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시에나의 벽은 값싼 위안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 그늘이 있다. 1555년, 시에나는 오랜 포위 끝에 피렌체의 메디치 — 코시모 1세 — 에게 정복당했다. 권력을 분산하려던 도시가, 권력을 집중한 가문에게 끝내 삼켜진 것이다. 그 뒤로 시에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복당한 채, 시간이 멈춘 듯 박제되었다. 오늘날 시에나의 중세 거리가 그토록 온전히 남은 역설적 이유의 하나가 그것이다. 승리한 피렌체는 계속 변해 갔고, 패배한 시에나는 그 패배의 순간에 멈춰 섰다. 좋은 정부를 그린 벽은, 그 멈춘 도시 안에 함께 멈춰 보존되었다.
떠나며
나는 그 방을 나왔다. 화려한 천장의 방을 다시 지나, 시에나의 좁은 골목으로 내려왔다. 부채꼴로 펼쳐진 캄포 광장에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좋은 정부를 그릴 줄 알았던 도시. 그리고 그것을 끝내 잃은 도시. 시에나는 그 둘을 동시에 가르쳐 주었다. 상생의 시스템은 유토피아적 공상이 아니다. 인류는 이미 그것을 그렸고, 제도로 만들었고, 한 시대 동안 살아 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너질 수 있는, 지켜 내야 하는 취약한 것이다. 시에나의 벽은 희망의 근거이자 경고였다.
나는 어느 쪽도 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메디치의 화려한 승리도, 시에나의 정지된 이상도. 다만 한 가지만은 붙들고 싶다. 우리는 좋은 정부를 그릴 줄 알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안고, 나는 시에나를 떠나 키안티로 돌아왔다.
¹ 암브로조 로렌체티,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1338~1339), 시에나 푸블리코 궁 '아홉 명의 방(Sala dei Nove)'. 세속 정치를 주제로 한 서양 최초의 대규모 프레스코 연작으로 꼽힌다.
² 아홉 명의 정부(Governo dei Nove, 1287~1355)는 귀족이 아닌 중산층에서 선출된 9인으로, 임기는 2개월이었고 임기 중에는 청사를 떠나지 않고 격리되어 통치했다. (저자가 현지에서 '8일'로 들은 것은 부정확하며, 2개월이 맞다.) William M. Bowsky, A Medieval Italian Commune: Siena Under the Nine, 1287–1355 참조.
³ 「2000 선언(Manifesto 2000 for a Culture of Peace and Non-Violence)」은 틱낫한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일상의 언어로 다듬어 유네스코가 추진한 것으로(틱낫한 자신은 노벨상 수상자는 아니다), 전 세계 7천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한국에서도 100만 명 이상). 여섯 약속의 마지막이 "함께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만든다"이다.
⁴ 1348년 흑사병으로 시에나 인구의 약 절반이 사망했고, 화가 암브로조 로렌체티도 이해에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1355년 카를 4세의 입성과 함께 봉기가 일어나 아홉 명의 정부가 무너졌다. 1555년 시에나는 코시모 1세(메디치)의 피렌체에 정복되었다.
키안티의 밤
빈 벽감으로 돌아와
시에나에서 키안티로 돌아온 그 밤, 와인 한 잔을 다시 앞에 두고 나는 좋은 정부를 그린 그 벽을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행이 시작된 자리로 마음이 돌아갔다. 피렌체의 빈 벽감이다.
이 여행은 군주 예배당의,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재료로 뒤덮였으나 정작 주인공의 자리는 비워 둔 채 멈춘 그 방에서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 빈 벽감을 다르게 본다. 그것은 단지 돈이 떨어진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 활력을 잃은 시스템이 어떻게 멈추는지를 보여 주는 자리다. 활력이 있던 코시모와 로렌초는 돈을 미래에 — 예술가와 인재와 도시에 — 투자하며 바퀴를 굴렸다. 쇠락하던 후기 대공들은 돈을 과거에, 무덤을 치장하는 데 묻었다. 열려 있던 시스템이 닫히고, 흐르던 것이 고이고, 미래로 향하던 것이 과거로 돌아설 때 — 가문은 멈췄다.
메디치의 빈 벽감은, 그러니까, 그 연결이 막힌 자리다. 부를 후원으로, 후원을 인망으로, 인망을 권력으로 끝없이 전환하던 그 열린 순환이, 어느 순간 닫혀 버린 자리. 가장 화려한 약탈의 시스템조차, 열림을 잃으면 멈춘다는 것을 그 빈 벽감이 말없이 증언한다.
시에나의 벽이 가르쳐 준 것과 같은 진실이다. 좋은 정부도, 나쁜 정부도, 메디치의 바퀴도, 아홉 명의 순환도 — 모두 인간이 설계한 시스템이었고, 모두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다. 시스템은 설계되는 것이고, 설계는 바꿀 수 있다. 메디치가 부를 추출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면, 우리는 관계를 여는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다. 빈 벽감이 닫힘의 증거라면, 우리는 열림을 향해 다시 짤 수 있다.
새로운 갈림길 앞에서
그런데 시스템을 다시 짤 수 있다는 이 말은, 지나간 역사의 위안으로만 남지 않는다. 바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흐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다.
이 여행에서 나는 같은 패턴을 거듭 보았다. 무게중심이 옮겨갈 때, 흐름을 먼저 읽고 자기 모델을 다시 설계한 쪽이 일어섰고, 어제의 성공에 안주한 쪽이 주저앉았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축이 옮겨갈 때 피렌체가 그러했고, 인도양을 누비던 함대를 스스로 거둔 명이 그러했고, 값싼 에너지와 내연기관에 완벽히 최적화되었던 오늘의 독일이 그 시험대 위에 있다. AI는 그 목록에 새로 오른, 우리 시대의 1492년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여행이 가르쳐 준 더 깊은 교훈은 따로 있다. 흐름을 먼저 타는 것(능력)과, 그 힘을 어디에 쓰는가(방향)는 별개라는 것. 유럽은 대항해의 흐름을 먼저 탔지만, 그 힘을 약탈에 쓴 시스템은 결국 그 약탈이 자기에게 돌아와 곪거나 무너졌다. 앞서 보았듯, 성곽과 해자로 자기를 지키려는 세계는 끝내 스스로 꾀와 전쟁을 불러들인다(小康). 힘을 먼저 쥐는 것과, 그 힘을 상생의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AI도 두 방향으로 갈릴 수 있다. 한쪽은 약탈의 길이다 — 소수가 독점하고, 사람의 일을 대체해 밀어내고, 모두의 데이터를 한 방향으로 빨아들이는 길. 앞 장들에서 본 그 추출의 문법이, 이번에는 알고리즘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 다른 한쪽은 상생의 길이다 — 함께 쓰는 공유 자원으로, 사람의 능력을 밀어내지 않고 넓히는 도구로, 관계와 돌봄을 두텁게 하는 쪽으로. 같은 기술이 성곽과 해자가 될 수도, 닫지 않는 바깥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AI 앞에서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우리가 AI에서 이길 것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약탈의 문법 안의 물음이다. 진짜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가 AI를 어느 방향으로 설계할 것인가. 빼앗는 그물로 짤 것인가, 서로 잇는 그물로 짤 것인가.
정직하게 말하면, 그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다. 1492년 당시 누구도 대서양의 시대를 확신하지 못했듯, 우리도 이 전환의 끝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설계이고, 설계는 우리 손에 있다.
시에나의 그 '평화'의 여인이 662년을 건너 2000년의 한 선언으로 되살아났다고 앞서 적었다. 그 선언이 내건 여섯 약속의 마지막은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만든다'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AI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 연대의 재발명. 그리고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다. 인류는, 아니 생명은, 이미 그것을 오래 알아 왔으니까. 동쪽의 한 사람이 대동(大同)을 글에 새겼고, 서쪽의 한 화가가 좋은 정부를 벽에 그렸다. 미토콘드리아는 20억 년 전에 이미 서로 안에 거하기로 했고, 한 어머니의 몸은 지금도 타자를 품는다. 상생은 새로 발명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잊었던 것을 새 시대의 언어로 — 이번에는 알고리즘의 언어로 — 다시 쓰는 일이다.
두 여행이 서로 안에 거하다
키안티의 밤이 깊었다. 나는 이 토스카나의 여행과, 그 전에 다녀온 페루의 여행을 함께 떠올렸다.
페루에서 나는 아메리카의 해변에서 같은 파도를 보았다. 포토시의 은, 카리브해의 노예, 사라진 잉카의 문명. 그리고 그 파도의 정체를 배웠다 — 빼앗고 추출하는 논리. 토스카나에서 나는 유라시아의 해변에서 같은 파도를 보았다. 메디치의 시스템, 동서로 흐른 도자기와 은, 고구려의 매듭. 두 대륙, 두 해변, 그러나 같은 하나의 파도였다. 누구도 그 파도 바깥에 있지 않았다.
언젠가 이 두 여행을 하나의 기행문으로 엮으려 한다. 페루와 토스카나가, 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가, 한 권의 책 안에서 서로를 비추도록. 페루의 13장에서 아메리카의 은이 조선의 해안에 닿았다면, 토스카나의 이야기에서는 조선의 기술이 그 은을 만들어 일본으로 흘렀다. 두 이야기는 같은 사슬의 양쪽 끝이다. 그렇게 두 책이 서로 잇닿게 하고 싶다. 혼동되지 않으면서, 분리되지도 않으면서. 그것이야말로 서로 안에 거하는 일일 것이다.
이 여행이 가르쳐 준 것은 결국 하나다. 모든 문명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거대한 연결망의 매듭이었다는 것. 메디치도, 인쇄술도, 고구려도, 임진왜란도, 포토시의 은도 — 모두 하나의 그물 안에 있었다. 문제는 연결되어 있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그 연결이 약탈의 논리로 짜였느냐, 상생의 논리로 짜였느냐다.
그리고 그 논리는 — 메디치가 보여 주었고, 시에나가 그려 두었듯 — 설계할 수 있다. 우리가 만든 것이라면, 우리가 다시 만들 수 있다. 빼앗는 그물을, 서로 안에 거하는 그물로. 시에나의 그 화가가 686년 전 벽에 그려 둔 것처럼, 우리는 좋은 정부를 — 좋은 연결을 — 다시 그릴 수 있다.
와인 잔을 비우고 나는 토스카나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멀리 키안티의 언덕 위로 별이 돋고 있었다. 그 별빛은 수천 년 전 초원을 달리던 유목민도, 피렌체의 돌을 쌓던 석공도, 시에나의 벽에 평화를 그리던 화가도, 포토시에서 죽어 가던 광부도 보았을 같은 별빛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그물 안에 있었다. 그 그물을 어떻게 다시 짤 것인가 — 그 물음을 안고, 나는 이 여행을 닫는다.
페루 여행기가 티폰의 물소리로 닫혔듯, 이 여행은 토스카나의 별빛 아래에서 닫힌다. 두 소리, 두 빛, 그러나 하나의 하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