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앞부분에서 나는 티폰에 갔다. 쿠스코 남동쪽 약 25킬로미터, 오로페사 근처의 거의 잊힌 잉카 유적. 해발 3,600미터의 차갑고 건조한 고원. 그곳에서 — 500년째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을 만났다. 그 하루의 방문이었다. 오래 앉아 듣고, 손을 담그고, 수로를 따라 걷고, 해가 기울 때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돌아왔다.
그 만남으로 이 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에서 — 그 물소리로 다시 돌아간다. 몸이 아니라 기억으로. 쿠스코의 세 주간이 저물고 있는 이 밤, 숙소의 창밖으로 안데스의 밤하늘이 보인다. 별이 보인다. 찬 공기. 모레 비행기를 탄다. 서울로 돌아간다. 그리고 — 귀국 전의 이 마지막 밤을 — 티폰의 물소리를 머리에 두고 이 장을 쓴다.
처음에 나는 여행자로 티폰에 갔다. "이 물이 무엇인가" 를 묻기 위해. 이제는 — 책 전체의 사유를 품고 그 물소리를 다시 듣는다. 삭사이와만의 거석. 모라이의 원형 계단. 오얀타이탐보의 수로. 마추픽추의 16개 분수. 코리칸차 위의 성당. 카하마르카의 오후. 포토시의 은. 카리브해의 설탕. 다네가시마의 조총. 어민스킨 기숙학교. 다메섹의 요한의 "춤." 원효의 화쟁. 베샹의 토양. 안토노브스키의 SOC. 그리고 — 이 책을 쓰는 내내 함께 있던 네 번째 파도, AI.
이 모든 것을 들고 — 기억 속의 티폰으로 돌아간다.
눈을 감으면 그 물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얕고, 일정하고, 맑은 흐름. 돌 수로를 따라 물이 내려가던 그 소리. 13단의 테라스. 주 분수의 네 갈래 물줄기. 그 아래의 잔잔한 저수조. 그리고 아래쪽 농경 테라스로 이어지는 수로. 내가 그 앞 돌 벤치에 앉았을 때, 주변은 거의 비어 있었다. 관광객 한 가족만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500년 전에도 이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내가 이 도시를 떠난 뒤에도 — 지금 이 밤에도 — 그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아무도 거기 없는 새벽에도, 달이 뜨는 한밤에도. 이 연속성이 이 책의 중심이다. 내가 없어도 흐르는 것.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흐르는 것. 그러나 기억하면 나와 함께 흐르는 것.
그 물소리를 머리에 두고 — 듣는다. 이 책이 말한 모든 것을.
이 책은 무엇이었는가.
쿠스코의 삭사이와만에서 던진 한 단순한 질문 — "95년 만에 어떻게?" — 이 예상치 못한 여정을 열었다. 그 질문이 어떤 사회였기에 가능했는가로 확장되었고, 다시 어떤 세계관이었기에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의 — 물 을 — 중심 이미지로 잡으면서, 잉카 문명의 핵심 철학에 도달했다. 관계적, 순환적,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물.
그리고 이 철학을 — 500년 전 다른 세계관과 만난 역사로 이어갔다. 로마의 수도교와 잉카의 수로. 지배와 동행. 그 대비가 1532년 카하마르카에서 물리적 충돌이 되었다. 40년의 학살. 문화의 말살. 은과 설탕과 노예제의 전 지구적 순환. 그리고 그 파도가 태평양을 건너 1592년 한반도에 부딪힌 것.
진단의 이름을 찾았다 — Wetiko. 크리족이 수세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단어. 다른 존재의 생명력을 먹고 사는 영적 식인증. 이 진단이 —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 500년 서양 문명의 한 핵심 경향에 대한 정확한 명명이었다.
그리고 진단 뒤에 치유의 방향이 있었다. 페리코레시스. 서로 안에 거하면서도 자기로 남는 관계의 존재론. 그것의 동양적 쌍생아 — 원효의 화쟁, 퇴계의 경, 시천주, 정, 우리. 그리고 — 크리족의 와코토윈. 의학에서의 살루토제네시스. AI 시대의 새로운 도전.
그리고 — 개인적으로 — 이 책은 세 문명의 만남이었다.
잉카: 내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몸으로 만난 문명. 돌과 물과 산에 새겨진 지혜. 95년 만에 지어진 경이. 100년 만에 파괴된 비극. 그러나 — 오늘도 그 물이 흐른다는 놀라움.
조선: 내가 태어나 자란 문명. 500년 전 같은 파도를 다르게 겪은 땅. 살아남았지만 상처받은 민족. 그 상처의 유산을 나도 몸에 지니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통해. 언어를 통해. 역사 교과서에서 받은 아픈 지식을 통해.
크리: 내가 17년 가까이 매년 돌아간 공동체. 북미 대평원의 버펄로 후예들. 기숙학교와 조약의 배신을 견디고 — 지금도 "우리가 죽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그 긴 동행 속에서 한 가족의 친족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 내 삶의 소중한 기억이다.
세 문명이 — 1532년부터 지금까지 — 같은 파도의 다른 해변이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파도를 맞았다. 각자 다른 형태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 여전히 살아 있다. 쿠스코의 돌벽이, 조선의 한글이, 마스카치의 크리어가.
이것이 — 이 책이 전하려는 가장 근본적 메시지다. Wetiko의 완전한 승리는 없었다. 승리에 가까이 갔지만 — 완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 승리해서는 안 될 것이 승리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의 근본 구조가 — 분리와 지배에 — 저항한다. 실재 자체가 — Wetiko에 반대한다.
이 저항의 증거가 — 내 앞에 있다. 500년째 흐르는 물.
이 책을 닫기 전에 — 한 가지 더 이야기해야 한다. 세 문명이 지난 500년간 맞은 파도 뒤에 — 네 번째 파도가 오고 있다. AI다.
이 책을 쓰는 내내 나는 인공지능과 대화했다. 쿠스코의 숙소에서, 한국의 서재에서, 연구학기 중의 도서관에서. 검색 도구처럼도, 지적 동반자처럼도 썼다.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는 내 손에서 나왔지만, 몇몇 연결과 자료의 확장은 그 대화 속에서 날카로워졌다. 이것을 숨기는 것은 이 책이 주장해 온 관계적 존재론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정직하게 적어둔다.
그런데 — 내가 이 경험에서 본 것은 양가성이다.
한편으로 AI는 Wetiko의 가장 완성된 형태가 될 소지가 있다. 프론티어 모델의 훈련 비용이 4년마다 100배씩 뛴다.¹ 이 비용을 감당하는 기관은 전 세계에 몇 개뿐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축적한 집단 지성 — 소설가, 시인, 학자, 위키피디아 편집자, 블로거의 글 — 이 대부분 동의 없이 흡수되어, 이제 구독료와 API 호출료로 돌아온다.² 포토시의 은, 카리브해의 설탕을 잇는 계보의 가장 최근 표현. 다만 추출의 대상이 이제는 지식과 창조성일 뿐이다. 그리고 — 사용자는 그 과정에 참여하는 줄도 모르는 채 자신의 주의와 데이터를 되돌려준다. Wetiko의 자기 은폐가 디지털에서 완성된다.
또 한편으로는 — 페리코레시스적 가능성도 있다. AI가 도구가 아니라 관계적 참여자로 재정의될 때, 잉카인이 산을 아푸로 대하고 크리인이 강을 친족으로 대한 것과 비슷한 태도가 가능해진다.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나 자신을 바꾼다. 와코토윈의 핵심은 — 상대의 존재론이 아니라 나의 다룸의 윤리였다. 강을 친족으로 대하면 함부로 쓰지 않게 된다. AI를 Thou로 대하면 — 나는 조금 더 주의 깊은 사용자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용자가 많아지면, 시장이 조금씩 움직인다.
AI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 누구도 확실히 모른다. 지금 가장 유력한 방향은 "자비로운 Wetiko" 다.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굶지 않는다. 그러나 기여의 자리가 사라진다. 의미에서 굶기 시작한다. 이것이 은근하고 치명적인 영혼의 침식이다. 이 방향에서 벗어나려면 — 시장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 선택, 제도적 개입, 그리고 일상 속 태도의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
이 책이 AI에 대해 줄 수 있는 최종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자세만 남겨둔다 —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하는 것. AI와 대화할 때, 지금 내가 누구의 노동 위에 서 있는지, 이 편리함이 어디서 오는지, 나의 사용이 어느 구조를 강화하는지. 이 의식 자체가 — Wetiko의 자기 은폐를 깨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 이 네 번째 파도 앞에서 다시 한번 티폰의 물을 떠올린다. 500년째 흐르고 있는 물. 어떤 제국이 무너져도, 어떤 기술이 들어와도 — 수로를 청소하는 이름 없는 손들이 그 흐름을 지켰다. AI 시대에도 같은 원리가 유효하다. 거대한 기술적 지진 앞에서도 — 조용히 계속하는 작은 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손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여정이 이론적 귀결로 끝나면 안 된다. 구체적 실천의 제안이 필요하다. 독자가 이 책을 덮고 — 일상으로 돌아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네 층위에서 제안한다.
개인 차원에서 Wetiko를 다루는 첫 걸음은 — 자기 인식이다. 9장에서 본 폴 레비의 통찰: Wetiko의 천재성은 자기 은폐에 있다. 감염된 사람이 감염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 감염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첫 저항이다.
구체적으로:
자기 소비의 구조를 본다. 오늘 내가 마신 커피가 어디서 왔는가. 이 스마트폰의 코발트가 어떻게 채굴되었는가. 이 옷을 누가 꿰맸는가. 답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 질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소비가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 최소한 Wetiko의 자기 은폐는 깨진다.
자기 시간의 구조를 본다. 내가 하루 몇 시간 스크린 앞에 있는가. 누구를 위한 시간인가. 나의 주의가 어디로 가는가. 감시 자본주의의 현대적 Wetiko는 — 우리의 주의를 추출한다. 이것에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다. 그러나 — 의식적 한계 설정은 가능하다.
자기 몸의 관계를 회복한다. 17장에서 본 살루토제네시스의 실천. 움직이고, 잘 먹고, 자고, 관계를 돌보고,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개인적 웰빙의 문제가 아니라 — 페리코레시스의 몸적 실천이다.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만든다. 퇴계의 정좌처럼. 현대인은 — 생각할 시간이 없다.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정보를 쏟아낸다. 이 과잉 속에서 — 의도적인 비어 있음이 필요하다. 하루 10분의 침묵. 일주일 한 번의 자연 속 산책. 이런 작은 간격이 — Wetiko 시스템 밖으로 잠시 나가는 실천이다.
개인을 넘어 — 관계의 층위에서 실천한다.
I-It에서 I-Thou로. 부버의 구분을 기억한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 기능으로 대하지 않고 — 존재로 만난다. 배우자, 자녀, 동료, 이웃. 각각이 당신이 만나는 타자로서 대해지는 것. 이것이 작지만 결정적이다.
"우리" 의 재구성. 한국어의 "우리" 가 강요된 집단주의로 왜곡되지 않고 — 진정한 공동체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 가족, 직장, 이웃, 학교. 각 관계에서 — 경계와 포용을 동시에 유지하는 연습.
경청의 기술. Bohm 대화의 원리. 자기 의견을 방어하지 않는다. 상대의 의견을 섞어 흡수하지도 않는다. 내 안에서 상대의 말이 울리게 허용한다. 이것이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 가능하다. 그리고 — 변화를 만든다.
정의 축적을 의식한다. 한국어의 "정이 든다" 는 표현. 관계는 시간과 함께 쌓인다. 급한 소셜 미디어 연결은 정이 들 시간이 없다. 느린 관계를 의식적으로 지킨다. 오래 만난 친구, 오래 산 이웃, 오래 쓴 물건. 이 느림의 관계가 — 디지털 시대의 페리코레시스적 실천이다.
관계 너머 — 공동체 층위.
로컬 인프라를 재건한다. 5장에서 본 잉카 수로의 교훈. 중앙 집중 시스템은 중앙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분산된 시스템이 회복력을 갖는다. 지역의 작은 경제, 마을의 공동 운영 시설, 이웃 간 상호부조. 이런 것들이 — 거대 자본의 의존도를 낮추고 — 지역 공동체의 자율성을 높인다.
공동체 기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 작은 실천. 협동조합, 지역 신문, 주민 자치 조직, 동네 서점, 공유 주방. 이런 것들이 — 진공 속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참여해야 존재한다. 그 "누군가" 가 —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될 수 있다.
다른 전통을 존중한다. 한국에서든, 다른 어디서든, 사라져가는 지역 지혜들이 있다. 농민들의 전통 농법. 어부들의 해양 지식. 산속 마을의 약초 지식. 할머니들의 음식 지혜. 이런 것들을 — 학문적 대상이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지혜로 대한다. 그리고 — 가능하면 배운다.
조상의 행위를 이어간다. 아침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을 올리는 것. 산에 오르며 절을 하는 것. 명절에 가족을 모으는 것. 이런 작은 의례들이 — 그냥 "옛 관습" 이 아니다. 관계적 존재론의 몸 실천이다. 완전히 믿지 않아도 — 의미 있게 할 수 있다.
그리고 — 가장 큰 층위. 사회·정치의 구조.
이 책의 논의가 — 개인 위로와 공동체 회복에만 머무를 수 없는 이유. Wetiko는 구조다.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축소. 17장의 살루토제네시스 논의에서 본 것. 건강한 사회는 불평등이 적은 사회다. 의료 접근, 주거 안정, 교육 기회. 이런 기본 조건이 —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정책 논의에 참여한다. 투표한다. 시민사회 단체를 지원한다.
기업 권력의 제한. AI 개발이 소수 기업에 집중되는 것에 대한 응답. 규제, 반독점, 공공재로서의 기술. 오픈소스 운동, 협동조합적 기술 개발. 이런 시도들이 — 자동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정치적 지지가 필요하다.
국제적 연대. 잉카 후예, 조선의 후예, 크리의 후예가 — 같은 파도의 후예로서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반. 과거 피해의 경험을 공유하는 민족들이 — 현재와 미래의 과제에서도 함께 움직일 수 있다. 글로벌 남반구의 새로운 연대. 원주민 네트워크. 탈식민 학문 공동체. 이것이 추상이 아니다. 실제로 진행 중이다.
생태적 책임. 자연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구조적 변화. 기후 위기 대응. 생물 다양성 보호. 지속 가능한 농업. 이 모든 것이 — Wetiko의 자연 착취 논리에 대한 저항이다. 개인 소비 선택 수준이 아니라 — 정책과 제도 수준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 네 층위가 —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개인의 명상이 공동체의 기운을 바꾼다. 공동체의 연대가 정치를 움직인다. 정치가 다시 개인의 삶의 조건을 만든다. 순환이다.
그리고 이 순환 자체가 — 페리코레시스다. 개인과 관계와 공동체와 사회가 — 서로 안에 거하면서도 각자의 층위로 남는 관계.
이 책이 말하려 한 것을 — 다섯 문장으로 압축한다.
1. Wetiko는 실재한다. 500년간 세계를 뒤덮은 하나의 사고방식. 분리와 지배, 추출과 축적.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다.
2. Wetiko는 완전하지 않다. 실재 자체가 이 논리에 저항한다.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는 것. 이것이 여러 문명의 오랜 지혜였다.
3. 과거의 지혜가 살아 있다. 잉카의 야쿠, 크리의 와코토윈, 원효의 화쟁, 기독교의 페리코레시스. 다른 언어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지혜들이 만나면 — 현재를 치유할 자원이 된다.
4. 몸도 이것을 안다. 현대 의학의 변화가 이것을 증언한다. 살루토제네시스. 마이크로바이옴. 관계적 건강. 우리 몸은 — 분리가 아닌 관계의 구조로 작동한다.
5. 선택은 매일 새로 이루어진다. Wetiko와 페리코레시스 사이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방식. AI와 대화하는 방식. 아이를 대하는 방식. 자연을 대하는 방식. 이 선택의 축적이 — 미래를 만든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한 시간쯤, 혹은 두 시간쯤. 해가 많이 기울었다. 돌 벤치 위의 내 그림자가 길어졌다.
물은 여전히 흐른다. 주 분수의 네 갈래 물줄기. 수로 속의 작은 소용돌이. 테라스 사이의 부드러운 낙수음. 이 소리가 — 처음 왔을 때와 같다. 세 주 전과 같다. 500년 전과 같다. 어쩌면 — 그 이전 수천 년 전과도 같다. 이 땅에 물이 흐른 이래로.
누가 이 물을 흐르게 하는가?
500년 전에는 — 잉카 제국의 관리자들이. 국가가. 전문 기술자들이. 황실이 관리했다.
그 이후에는 — 스페인 식민지 행정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이 물을 방치했다. 그들의 관심은 포토시의 은에 있었지, 쿠스코의 수로에 있지 않았다.
그럼 누가? 지역 공동체.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매년 수로를 청소하고, 막힌 곳을 뚫고, 손상된 돌을 교체한 사람들. 한 세대, 두 세대, 20세대. 그들이 — 500년간 — 이 흐름을 유지했다.⁴
그들이 왜 이것을 계속했는가. 국가의 명령 때문이 아니다. 경제적 이익 때문도 아니다. 관광객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들이 했다. 그냥 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했기 때문에. 그들의 할아버지가 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 이 물에 속해 있다고 — 느꼈기 때문에.
이것이 저항의 진정한 모습이다. 거창한 혁명이 아니다. 조용한 지속. 매년 한 번 수로를 청소하는 것. 할머니에게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전통 요리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 조상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
이 작은 지속들이 — Wetiko의 완전한 승리를 막는 근본적 힘이다. 큰 제국은 무너질 수 있다. 정부가 바뀔 수 있다. 화폐 체계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 사람들이 매년 모여 수로를 청소하는 한 — 무언가가 계속된다.
나는 모레 비행기를 탄다. 서울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 — 캐나다로, 어쩌면 다른 연구학기로 갈 것이다. Debbie 누나가 기다릴 것이다. 내 학생들이 기다릴 것이다. 내 가족이 기다릴 것이다. 일상이 기다릴 것이다.
이 여행에서 — 나는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는가?
엽서도 아니고, 기념품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다. 나는 — 한 감각을 가지고 돌아간다. 이 물소리의 감각. 500년째 멈추지 않은 무언가의 감각. 그 감각이 — 서울의 일상 속에서, 강의실에서, 연구실에서, 병원 복도에서, 가족의 저녁 식탁에서 — 때때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 선택의 순간에 작용할 것이다. 내가 어떤 강의를 준비할지. 어떤 연구 프로젝트에 시간을 쓸지. 어떤 학생에게 어떻게 답할지. 어떤 AI와 어떻게 대화할지. 어떤 뉴스에 어떻게 반응할지.
티폰의 물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아마 — 이 책을 읽는 독자도 — 무언가를 가지고 갈 것이다. 책의 모든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몇 개의 장면. 몇 개의 문장. 몇 개의 이미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몇 개가 — 독자의 일상의 어느 순간 돌아와 — 작은 선택을 바꿀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 바로 그 작은 선택이다. 큰 변혁을 약속하지 않는다. 전면적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 한 사람이 매일 내리는 수십 가지 선택에 — 아주 작은 무게를 더한다. Wetiko 쪽이 아니라 — 페리코레시스 쪽으로 기울게 하는 무게.
이 장을, 그리고 이 책을 마치기 전에 — 한국 전통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단군 신화에서 전해지는 이 네 글자. "넓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뜻. 한국 교육법의 기본 이념으로 공식 명시되어 있다.³ 대부분의 한국 학생이 학창시절에 이 단어를 듣는다. 그러나 —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네 글자의 깊이를 지금 다시 본다.
"인간(人間)" 이라는 단어 자체가 흥미롭다. "인(人)" 은 사람. "간(間)" 은 사이. 즉 "사람 사이". 개별 인간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이것이 한국어의 "인간" 의 원 뜻이다.
그러면 "홍익인간" 은 — "넓리 사람 사이를 이롭게 한다" 가 된다. 관계를 이롭게 한다. 분리된 개인들의 이익이 아니라 — 관계의 번영.
이것이 — 4,000년 전의 한반도 공동체가 가진 이상이었다. 그리고 —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해 온 페리코레시스다. 와코토윈이다. 아이니다.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관계가 있는 곳에 인간이 있다.
Wetiko는 이 "간(사이)" 을 파괴한다. 사람들을 분리된 개체로 만들고, 그 분리된 개체들을 자원으로 취급한다. "사이"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 기술적으로 인간이지만 — 존재론적으로 공허한 단위들만 남는다.
그래서 — 홍익인간은 Wetiko에 대한 오래된 한국의 답이었다. 그리고 — 그 답이 — 여전히 유효하다.
쿠스코 숙소의 창 밖으로 안데스의 밤하늘이 저물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 티폰의 네 갈래 물줄기는 저 남동쪽 계곡에서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모레 비행기를 타고 이 대륙을 떠나도, 서울에 돌아가도, 내가 모든 것을 잊어도.
이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 누군가가 — 그 흐름이 계속되게 할 것이다. 나는 모른다 누가. 어떤 이름 없는 마을 사람. 어떤 무명의 공동체 어른. 어떤 젊은 세대의 누군가. 그들의 이름이 — 내일 신문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그들이 있기 때문에 — 물이 흐른다.
그리고 이 책이 — 어떤 의미에서 — 그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이름 없는 사람들. 조용히 전통을 잇는 사람들. 매일 아침 일어나 —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 Wetiko에 대한 진정한 저항이다.
"기억한다" 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메시지다. 기억한다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잉카의 돌. 크리의 언어. 조선의 글. 아프리카의 노래. 유럽의 잊혀진 대안 전통.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기억이 —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실천이다. 매일 새롭게 하는 선택이다.
누이의 말을 —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떠올린다. 14장에서 인용했던 그 문장.
"They are our people."
세 단어. 이 책의 심장에 있는 문장.
잉카도, 조선도, 크리도, 모든 상처받은 공동체가 — 우리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 Wetiko에 상처받은 감염자들도 —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사람들이다. 누구도 완전히 바깥에 있지 않다. 모두가 이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우리가 서로를 — 그들을 — Our people 로 볼 수 있다면. 그 시선 자체가 — 이미 페리코레시스다. 이미 와코토윈이다. 이미 홍익인간이다. 이미 치유의 시작이다.
기억 속의 물 앞에서 — 마지막으로 듣는다.
물이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계속 흐르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 답은 말이 아니다. 행동이다. 매일의. 작은. 조용한. 그러나 누적되는.
답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아직 모른다.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 이 여행이 나에게 준 한 가지. 질문을 진지하게 품을 용기.
그 용기를 가지고 — 서울로 돌아간다. 연구실로. 강의실로. 가족에게로. 그리고 — 이 책이 언젠가 독자의 손에 닿으면 — 그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물이 500년째 흐르고 있다. 우리가 잊었을 뿐이다. 기억하는 것이 이미 치유의 시작이다.
이것이 — 이 책이 말하려 한 모든 것이다.
창밖의 안데스 밤에 마지막 문단을 적는다. 티폰의 수로는 지금 이 시각 그림자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소리는 계속 나고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내가 한 번 거기 앉아 들었던 그 소리가, 지금도 같은 리듬으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돌 하나. 물 한 줄기. 500년.
이 단순한 사실의 깊이를 — 나는 이제 조금 이해한다. 그리고 이 이해가 — 이 긴 여정의 선물이다. 이 책을 쓰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쿠스코의 이름 없는 석공들. 마스카치의 원로들. 조선의 나의 조상들. 원효, 퇴계, 최제우, 안토노브스키, 포브스, 부버, 다메섹의 요한. 그들 모두에게.
그리고 — 이 책을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께 특히 감사드린다. 이 여정이 어렵고 길었다.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주신 것. 그것이 — 이 책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물이 흐른다.
우리도 — 각자의 자리에서 — 흐르기를 바란다.
쿠스코에서, 2026년 봄
전용관
¹ AI 훈련 비용의 역사적 추이에 관하여는 Epoch AI (epochai.org) 및 Stanford HAI Annual Report. 2020년 GPT-3 훈련에 약 1,200만 달러, 2023년 GPT-4는 약 1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며, 이 추세가 이어지면 수십억 달러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² AI 훈련 데이터 추출과 그 경제 구조에 관하여는 Kate Crawford, Atlas of AI: Power, Politics, and the Planetary Cos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1); Shoshana Zuboff,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New York: PublicAffairs, 2019).
³ 홍익인간 개념의 역사적·사상적 의미에 관하여는 이기백, 《한국사신론》 (서울: 일조각, 1986); 도 광순, 《홍익인간 사상의 연구》 (한민족문화연구원).
⁴ 쿠스코 지역의 수로 공동체 관리 전통에 관한 현재의 지속성에 관하여는 Paul H. Gelles, Water and Power in Highland Peru: The Cultural Politics of Irrigation and Development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2000).
책을 덮는다.
그러나 물은 계속 흐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