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Perichoresis — 서로 안에 거함의 존재론

도입: 한 단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14장을 마친 다음 날 아침, 나는 쿠스코 숙소의 창가에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지난 세 주간 걸어온 사유의 지형을 되돌아봤다.

삭사이와만의 거석에서 시작된 질문. 모라이의 원형 계단. 티폰의 500년 흐름. 코리칸차 위의 스페인 성당. 카하마르카의 학살. 포토시의 은. 영국 노동자의 차와 설탕. 임진왜란의 폭풍. 그리고 세 문명의 운명 비교로 마무리된 긴 진단.

긴 진단이었다. Wetiko의 형태와 작동 방식과 역사적 결과를 해부하는. 500년의 상처를 하나씩 펼쳐보는. 때로는 무거워서, 때로는 숨이 막혀서, 때로는 분노해서, 이 장들을 쓰는 동안 여러 번 멈춰야 했다.

그러나 — 이 책은 진단에서 끝나면 안 된다.

진단이 치유의 조건이지만, 진단이 치유는 아니다. 질병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병이 낫지 않는다. 다른 길이 필요하다. Wetiko의 대척점에서 작동하는 존재의 방식이 있어야 한다. 그 방식이 있다는 것을 — 이론적으로뿐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것을 — 보여야 한다.

그것이 4부의 과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제의 첫 번째 길잡이로 한 단어를 선택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이 단어는 8세기 비잔틴 신학에서 왔다. 정확히는 —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의 기술적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신학 안에 가두어둘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 20세기와 21세기 여러 사상가들 — 신학자, 물리학자, 심리학자, 페미니스트, 생태학자 — 이 이 단어를 다시 발견했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그리고 놀랍게도 —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가져왔다.

이 수렴이 이 장의 주제다. 페리코레시스가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되살아나는지. 그리고 — 왜 오늘 이 책에서 — Wetiko의 반대 방향으로 이 개념이 필요한지.

내가 이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세 분의 목사님과의 사석에서였다. 홍원표, 구본우, 진희경 목사님. 어느 저녁, 나는 Wetiko 개념을 길게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존재의 생명력을 먹고 사는 영적 식인증이 어떻게 500년의 세계사 위에 작동했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가 그 구조 안에서 얼마나 깊이 병들어 있는지. 내 말은 진단에 머물러 있었다. 병의 해부는 정교해져 갔지만 — 병의 반대 방향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세 분의 목사님이 한 단어를 내게 건네주셨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처음 듣는 단어였다. 발음하기 어렵고, 뜻이 추상적이고, 일상과 멀어 보였다. 그러나 세 분이 이 개념을 풀어 설명하시는 동안 — 무언가가 내 안에서 맞아 들어갔다. Wetiko가 "서로를 먹는 구조" 라면 — 페리코레시스는 "서로 안에 거하면서 자기로 남는 구조" 였다. 정확한 대칭. 진단의 반대편에 놓일 치유의 언어가, 이미 8세기에 만들어져 1,300년 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저녁이 — 엄청난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세 분이 인용하신 한 구절이 특히 내 몸에 남았다. 8세기 신학자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의 문장.

"세 위격은 서로 안에 거한다. 섞이지 않으면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완전히 서로 통과한다. 마치 춤추는 자들처럼."¹

마치 춤추는 자들처럼. 이 표현이 내 몸에 남았다.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 이미지로.

그 이후, 이 단어가 내 안에서 계속 자라왔다. 여러 책을 찾아 읽고, 학문적으로 개념을 정립하고, 강연과 글에서 이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Wetiko의 대척점에 페리코레시스를 두는 구도가 점점 뚜렷해졌다. 그리고 북미 평원의 공동체에서 — 전통 의식의 원형 대열에서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춤을 추는 것을 볼 때마다, 8세기 다메섹의 요한이 떠올랐다. 그가 이 두 풍경이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 마치 춤추는 자들처럼.

이 장은 그 춤을 기록하려는 시도다.

페리코레시스의 원어적 의미

두 개의 희랍어 뿌리

먼저 단어 자체를 풀어보자. Perichōrēsis(περιχώρησις). 두 개의 희랍어에서 왔다.²

Peri(περί): "둘레에", "주위에" — 영어 "peripheral", "perimeter"의 어원.

Chōreō(χωρέω): 여기서 의미가 이중적이 된다. 같은 철자를 가진 두 단어가 있다.

두 어원이 합쳐져 페리코레시스의 의미를 구성한다. "둘레를 통과하다" + "함께 춤추다" = "서로 통과하며 함께 춤추는 움직임".

이 두 어원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는 고대부터 논쟁이 있었다. 라틴어 번역은 여러 형태로 시도되었다. "circumincessio"(둘레를 지나다), "circuminsessio"(둘레에 앉다), "perichoresis"(원어 그대로). 그러나 가장 풍부한 의미는 — 두 어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서로 통과한다. 동시에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 관계 자체가 춤이다.

이 개념은 처음부터 단순한 기하학이 아니었다. 이것은 관계의 형이상학이었다.

삼위일체 신학에서의 용법

페리코레시스가 신학 개념으로 정립된 것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 의 저작 『정통 신앙에 관하여(De Fide Orthodoxa)』 에서다.³ 이 책은 비잔틴 정교 신학의 백과사전적 종합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다메섹의 요한은 삼위일체 교리의 어려운 지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체계적으로 사용했다.

문제는 이러했다. 기독교 신앙은 "한 분 하나님""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 을 동시에 주장한다. 이것이 어떻게 모순이 아닌가.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인가.

4~5세기의 카파도키아 교부들(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등)이 이 문제에 "우시아와 히포스타시스"(본질과 위격) 의 구별로 답했다. 하나님은 한 우시아(본질) 를 가지신다. 그러나 그 본질이 세 히포스타시스(위격) 로 나타난다. 이 구별로 어느 정도의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었다. 세 위격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분리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셋이다. 하나로 녹아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중간이 필요했다. 다메섹의 요한이 그 중간을 페리코레시스로 이름 지었다.

세 위격은:

이 구조는 — 단순히 논리적이지 않다. 거의 시적이다. 신학자들조차 이것을 논리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이 개념은 언어의 한계 지점에서 작동한다. 일상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관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 이 개념이 왜 중요한가. 신학적 난제를 해결한 것이 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가. 답은 — 페리코레시스가 신학 너머의 무언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20세기와 21세기에 재발견된 이유이기도 하다.

페리코레시스의 세 가지 구조적 특성

이 개념의 깊이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핵심 특성을 봐야 한다.

특성 1 — 융합이 아닌 상호내주

페리코레시스의 첫 번째 특성은 "두 존재가 서로 안에 있으면서도 각자로 남는다" 는 역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계 유형을 주로 경험한다. 분리 또는 융합. 두 사람이 따로 있다(분리). 또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융합). 이 두 가지가 가능한 관계의 전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의 두 얼굴이다. 분리된 개체들은 외부에서 관계를 맺는다. 융합된 존재는 개체성을 잃고 관계를 잃는다. 어느 쪽도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제3의 길이다. 두 존재가 서로 안에 있다. 각자로서 남는다. 이것이 동시에 가능하다.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이나 일부 원주민 사상에서 이런 관계가 설명되기도 한다(뒤에 다시 본다). 그러나 서양 주류 사유에서는 이 관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양은 주로 분리의 모델(주체-객체)이나 전체주의적 융합의 모델(개인이 전체에 흡수됨)로 사유해왔다.

페리코레시스는 이 둘을 모두 피한다.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침투. 이것이 가능한가? 이것이 가능한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특성 2 — 운동으로서의 존재

두 번째 특성은 "존재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 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존재를 정적으로 생각한다. "이 탁자는 있다." "그 사람은 있다." "나는 있다." 존재는 상태처럼 여겨진다. 영어의 "be 동사" 의 과거 분사(been)이 과거형으로 쓰이는 것이 이 정적 개념을 반영한다. "It has been..." — 과거의 한 상태로서.

페리코레시스는 존재를 운동으로 본다. 세 위격이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통과하는 움직임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의 춤의 어원이 이것을 정확히 포착한다. 춤은 정적이 아니다. 춤추는 자가 잠시 멈추면 춤이 아니다. 계속 움직여야, 관계 속에 있어야, 춤이다.

이 관점을 넓히면 — 모든 존재가 관계의 운동이 된다. 존재는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다른 존재와 서로 통과하며 춤추는 움직임. 분리된 주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먼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주체들이 계속 생성된다.

이 관점이 현대 과학의 일부 발견과 놀랍게 공명한다. 양자장 이론에서 입자는 더 이상 "작은 공"이 아니다. 장의 특정 진동 양상이다. 생물학에서 유기체는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에너지를 교환하는 열린 시스템이다. 신경과학에서 자아는 뇌의 여러 영역과 신체 전체가 관계 맺는 동적 과정이다. 모든 과학이 — 각자 다른 영역에서 —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 라는 통찰로 수렴하고 있다.

특성 3 — 사랑으로서의 존재 구조

세 번째이자 가장 도전적인 특성. 페리코레시스는 단순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다.

다메섹의 요한과 후대 신학자들에게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 단순한 구조적 관계가 아니라 완전한 상호 사랑의 관계다. 각 위격이 다른 위격을 완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이 — 어떤 부족이나 결함도 없이 — 끊임없이 상호 교환된다.

이 점이 결정적이다. 페리코레시스는 냉정한 구조가 아니라 뜨거운 관계다. 그리고 이 관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

이것을 현대 세속 언어로 번역하면 — "존재의 근본 구조는 사랑이다" 라는 주장이 된다. 우주가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물질이 아니라 — 기본적으로 관계적이고 사랑적이라는 주장. 이것은 큰 주장이다.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 많은 문명의 깊은 지혜 전통이 이 주장을 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요한1서 4:8). 불교의 자비(慈悲). 힌두교의 박티(bhakti, 헌신). 유대교의 헤세드(hesed, 신실한 사랑). 수피즘의 마하바(mahabba, 사랑). 각 전통이 — 다른 언어로 — 관계의 우선성을 말한다.

이 통찰이 맞다면 — Wetiko는 존재의 근본 구조를 왜곡한 것이다. 관계를 거래로, 사랑을 효용으로, 상호내주를 지배로 환원한 것. 즉 Wetiko는 실재에 맞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 유지될 수 없다. 실재의 저항에 부딪힌다.

이것이 왜 500년의 Wetiko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지의 깊은 이유일 수 있다. 실재의 구조가 Wetiko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잉카 후예들이 여전히 파차마마에게 치차를 뿌리고, 크리 할머니들이 강에 담배를 뿌리고, 한국 어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는 것 — 이 작은 몸짓들이 — 실재의 깊은 구조에 맞춘 행위들이다. Wetiko는 이 행위들을 비합리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 Wetiko가 실재에 대해 비합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네 프레임의 지도 — Wetiko · Pathogenesis · Salutogenesis · Perichōrēsis

이 대목에서 한 번 지도를 그려두는 것이 유용하다. 내가 운동의학자로서 이 책의 주제를 오래 가르치고 쓰는 동안 — 네 개의 프레임을 하나의 비교 테이블로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각 프레임은 인간과 건강과 사회를 해석하는 서로 다른 문법이다. 그리고 — 그 문법들을 나란히 놓고 볼 때, 페리코레시스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네 프레임은 이렇다.

비교 테이블

비교 축 Wetiko (toxic culture의 인식) Pathogenesis (질병 기원/질병 중심) Salutogenesis (건강 기원/건강 생성) Perichōrēsis (상호내재·비혼합적 연합)
핵심 질문 "어떻게 이겨서 살아남나?" "무엇이 잘못됐나 (원인/병변)?" "무엇이 건강을 만들고 유지하나?" "존재는 어떻게 함께 성립하나?"
인간/타인 관점 타인 = 수단·장애물·자원 (사물화) 환자 = 문제/리스크의 담지자 (관리 대상) 사람 = 자원과 역량을 가진 주체 타인 = 나와 함께 존재를 이루는 '관계적 존재'
세계관 제로섬, 서열, 생존 모드 결함-수정 모델, 위험 요인 제거 자원-생성 모델, 회복·적응 강화 비혼합적 연합: 다름을 유지하며 함께 됨
관계의 의미 경쟁/거래 (신뢰 비용↑) 치료 관계 (의료자 주도) 로 축소되기 쉬움 지지/연결이 건강 자원 (GRR) 관계는 '부가물'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
건강의 정의 건강은 승자의 특권 (성공=건강 착시) 건강 = 질병/증상 부재 (또는 정상 수치) 건강 = 연속선 상의 과정 (조절·적응·회복) 건강 = 몸–마음–관계가 상호내재하며 공동 생성되는 과정
질병의 정의 약자의 실패/무능 (낙인) 병리 (병변)·원인·위험요인의 결과 자원 고갈/조절 실패의 결과 연결 붕괴 (단절의 고착) 로 보는 '관계적 붕괴'
핵심 메커니즘 사물화 → 불신·고립 → 만성 스트레스 위험요인 → 병리 → 치료/교정 자원 (GRR) → SOC → 적응/회복 상호내재·비위계·공동생성 (되기)
핵심 자원/지표 경쟁력, 성과, 비교 우위 바이오마커, 진단, 병기, 합병증 SOC (이해가능·관리가능·의미), 기능, 회복력 연결의 질, 경계의 유연성, 공동 리듬
시간 감각 "지금 이겨야 한다" (만성 긴급성) 급성 사건/발병 중심 (사후 대응) 생애과정·누적·회복의 시간 '되어감 (becoming)' — 지속적 조율
시스템 결과 번아웃, 고립, 양극화, 건강격차 확대 의료비 상승, 과잉의료/사후치료 편향 예방·자기효능·커뮤니티 회복, 비용 효율 사회적 면역/회복력 강화 (관계 인프라)
개입 스타일 통제·선발·서열화 강화 진단 → 치료, 위험요인 제거 중심 자원 확충 + 환경 설계 + 교육 연결 복원 설계 (시간·공간·리듬·인정)
개인에게 주는 메시지 "남을 밟고 올라가라" "아프면 고쳐라 (문제 해결)" "건강을 생성하라 (과정 관리)" "다름을 유지하며 함께 살아라 (연결의 윤리)"
대표 실패 양상 공감 소실, 타인 도구화 lifestyle을 개인 책임으로 환원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지속 어려움 '침투'를 동일화/경계붕괴로 오해 가능
한국적 표현 (예) 입시/승진/성과 서열의 내면화 치료·검진 중심, 예방은 구호에 그침 일상 리듬 (움직임·식사·수면·관계) 복원 "상호내재적 건강" (몸–마음–사회–미래의 연결)

페리코레시스의 세 표지 — 상호 내주, 상호 침투, 상호 비혼합

이 테이블을 오래 바라보면 —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페리코레시스 열은 다른 세 열과 범주 자체가 다르다. Wetiko·Pathogenesis·Salutogenesis는 모두 현상에 대한 해석이다. 건강이 무엇인지, 병이 무엇인지, 경쟁이 무엇인지. 그러나 페리코레시스는 — 그 이전의 층에 있다. 존재 자체가 어떤 구조로 서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이 층에서 페리코레시스의 표지는 세 가지로 나뉜다. 내가 이 개념을 정립하면서 가장 강조해 온 세 축.

첫째, 상호 내주(相互 內住, mutual indwelling). 존재가 서로 안에 거한다. 나의 존재가 네 안에 있고, 너의 존재가 내 안에 있다. 이 거함은 비유가 아니라 구조다. 장내 미생물이 내 장 안에 있지만 그것들의 대사 산물이 내 뇌 안에 있다 — 이것이 상호 내주의 한 작은 예다. 나와 미생물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 거한다.

둘째, 상호 침투(相互 浸透, interpenetration). 상호 내주가 정적인 거함이라면, 상호 침투는 동적인 통과다. 내 안의 네가 움직인다. 네 안의 내가 움직인다. 두 움직임이 서로를 통과한다. 다메섹의 요한이 "마치 춤추는 자들처럼" 이라 말한 것이 이 차원이다. 고정된 자리바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서로를 지나가는 운동.

셋째, 상호 비혼합(相互 非混合, non-confusion). 이것이 페리코레시스의 가장 독특한 표지다. 상호 내주하고 상호 침투하면서도 — 섞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나로 남고, 너는 여전히 너로 남는다. 용해도 아니고, 병합도 아니고, 흡수도 아니다. 다름을 유지하는 연합. 이것이 없으면 페리코레시스는 허무주의적 융합이 된다. 이 세 번째 표지가 있기 때문에 — 페리코레시스는 전체주의적 "우리" 의 강요와도 다르고, 낭만적 합일의 환상과도 다르다.

Wetiko의 세계에서는 이 세 표지가 모두 무너져 있다. 상호 내주 대신 상호 외재화(타자를 바깥에 두고 자원으로 취급). 상호 침투 대신 일방 추출(내가 너를 통과하여 가져간다). 상호 비혼합 대신 흡수 아니면 배제(섞어 없애거나, 쫓아내거나).

페리코레시스의 회복은 — 이 세 표지를 다시 구조로 세우는 일이다. 개인 관계에서, 공동체에서, 의학에서, 사회 정책에서, 그리고 — AI 시대의 인간됨에서.

페리코레시스 개념이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이 수렴이 이 장의 중심 주장이다.

신학 — 지지울라스와 몰트만

먼저 신학 내부에서의 부활.

존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 1931~2023). 그리스 정교 신학자. 메트로폴리탄(대주교). 그의 1985년 저작 『친교로서의 존재(Being as Communion)』 가 현대 신학에 혁명을 일으켰다.⁴

지지울라스의 핵심 주장: "존재가 관계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 이것은 서양 철학의 오랜 전제를 뒤집는다. 서양 철학은 대개 실체(substance) 를 우선시했다. 먼저 개별 실체들이 있고, 그 다음에 그들 사이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이 구조다.

지지울라스는 비잔틴 교부 신학 에서 다른 모델을 찾았다.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다메섹의 요한이 삼위일체를 이해한 방식. 거기서는 — 관계가 근원적이다. 성부와 성자는 관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 페리코레시스.

지지울라스는 이 통찰을 인간 존재 전반으로 확장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관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혼자 있는 인간은 — 인간이 아니다. 최소한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더 넓게는 자연·우주와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인간이 된다. 이 주장이 — 서양 개인주의의 핵심 전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의 1980년 저작 『삼위일체와 하느님의 나라(The Trinity and the Kingdom)』 에서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정치 신학으로 확장했다.⁵

몰트만의 도발적 주장: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 구조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다. 성부가 위에 있고 성자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 위격이 완전한 평등 속에서 상호내주한다. 그렇다면 — 이 신학이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하나님 자신이 위계적이지 않다면, 위계적 인간 사회가 "하나님의 질서" 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왕정, 교회 내 성직 위계, 남성 중심 가부장제 —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 신학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는 평등한 관계의 모델이다.

이것이 신학에서 페리코레시스가 정치 비판의 자원이 된 순간이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 페미니스트 신학, 생태신학 모두가 —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자기 도구로 채택했다.

크로아티아-미국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1956~) 가 이 계보를 더 이어갔다. 그의 1996년 저작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 에서 페리코레시스를 민족 갈등 해결의 모델로 제시했다.⁶ 볼프는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다. 민족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전쟁의 본질이었다. 그 반대가 포용(embrace) —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자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 구조다.

볼프의 공식: "정체성과 타자성이 양립해야 한다." 크로아트가 크로아트로 남되, 세르비아인도 보스니아인도 자기 안에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가능한가? 볼프는 — 가능해야만 한다고 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끝없는 배제의 전쟁으로 남는다.

물리학 — 데이비드 봄

신학에서 페리코레시스가 부활하던 시기 — 전혀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통찰이 떠올랐다. 양자물리학.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1992).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와 동시대인. 그가 1980년에 출간한 『전체와 함축된 질서(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 는 현대 과학철학의 고전이다.⁷

봄의 문제 의식은 이랬다. 양자역학의 기이한 현상들 — 비국소성(non-locality), 얽힘(entanglement), 파동-입자 이중성 — 이 기존의 물리학 세계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고전 물리학은 분리된 개체들이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세계를 설명했다. 뉴턴의 세계. 그러나 양자역학은 — 세계가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봄의 해결책: 두 수준의 질서를 구별하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전개된 질서(explicate order)" 는 현상의 표면이다. 그 아래에 "함축된 질서(implicate order)" 가 있다. 이 함축된 질서에서는 —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접혀 있다. 분리된 개체라는 개념 자체가 근사치다. 실제로는 전체 우주가 각 지점에 접혀 있다.

이 설명이 형이상학적으로 들리지만, 봄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 홀로그래피의 원리로 설명했다. 홀로그램 이미지는 필름 조각 전체에 전체 이미지가 담겨 있다. 필름의 어느 부분이든 그 부분만 레이저로 조명하면 — 흐리게지만 전체 이미지가 나타난다. 부분이 전체를 담고 있다. 이것이 홀로그래피의 원리.

봄은 우주가 이와 같다고 본다. 각 지점이 전체를 담고 있다. "나" 라는 존재는 우주의 한 구역에 함축된 전체의 특정 전개다. 분리된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전체의 여러 표현이 있다.

이것이 페리코레시스의 물리학적 버전이다. 각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를 자기 안에 담고 있다. 그러나 — 녹아 있지 않다. 구별되어 있다.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상호내주의 원리가 우주 구조에 박혀 있다.

봄은 기독교 신학과 무관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 놀랍도록 페리코레시스와 닮았다. 과학과 신학이 서로 독립적으로 같은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봄의 또 다른 기여: 대화(dialogue) 개념. 그는 만년에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연구했다. 그가 제안한 "봄 대화" 모델은 — 페리코레시스의 실천적 적용이다. 대화의 참여자들이 자기 의견을 고수하지도, 다른 의견에 녹아들지도 않는다. 서로의 의견이 자기 안에서 공명하도록 허용한다. 그 공명 속에서 — 새로운 이해가 함께 생성된다. 이것이 춤으로서의 대화다.⁸

심리학 — 알프레트 아들러

세 번째 수렴 지점은 심리학. 특히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의 작업.⁹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융의 동시대인이었다. 세 사람은 한때 함께 일했지만, 이론적 차이로 결별했다. 프로이트가 성적 욕망과 무의식을 인간 동력의 중심으로 본 반면, 아들러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에 두었다.

아들러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게마인샤프츠게퓔(Gemeinschaftsgefühl) 이다. 독일어. 문자 그대로는 "공동체 감정" 이지만 — 번역이 어렵다. 영어로는 "social interest" 또는 "community feeling" 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이 개념은:

이 네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상태. 이것이 게마인샤프츠게퓔이다.

아들러에 따르면, 건강한 인간은 이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 정신 질환이 많은 경우 — 이 능력의 결핍 또는 왜곡에서 온다. 극단적 자기중심주의, 사회적 고립, 타인에 대한 적대감 — 이 모든 것이 게마인샤프츠게퓔의 부재다. 치료의 목표는 약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파헤치는 것도 아니고 — 이 능력을 다시 키우는 것이다.

이 개념의 놀라움: 페리코레시스 구조와 동일하다. "타인 안에 들어가면서도 자기로 남는다." 이것이 게마인샤프츠게퓔의 정의다. 그리고 이것이 — 심리적 건강의 핵심이라는 아들러의 주장.

아들러는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배경은 유대교였지만 세속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통찰은 — 다메섹의 요한과 본질적으로 같다. 아들러는 이 구조가 정신 건강의 핵심이라고 봤다. 지지울라스는 이 구조가 존재의 핵심이라고 봤다. 봄은 이 구조가 물리적 실재의 핵심이라고 봤다. 세 명이 — 서로 무관하게 — 같은 것을 건드렸다.

왜 수렴하는가

이 삼중 수렴이 일어났는가.

나의 가설은 이것이다. 20세기는 서양 사유의 주류 — Wetiko의 사상적 기반 — 가 자기 한계에 부딪힌 세기였다. 두 번의 세계 대전. 홀로코스트. 핵무기. 환경 위기. 정신 건강의 붕괴. 의미의 상실.

이 위기들이 공통으로 드러낸 것은 — 분리와 지배의 사유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데카르트 이원론, 로크의 소유 이론, 칸트의 자율적 주체, 뉴턴의 기계적 우주, 프로이트의 고립된 개인 — 이 모든 것이 서양을 특정 방향으로 밀어왔고, 그 방향의 궁극적 결과가 20세기의 재앙이었다.

반응으로 — 여러 분야의 사상가들이 다른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그리고 놀랍게도 —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관계가 먼저다. 상호내주가 존재의 구조다. 분리는 환상이다.

이것이 신학에서는 페리코레시스의 재발견으로, 물리학에서는 홀로그래픽 우주 모델로, 심리학에서는 관계적 자아 이론으로, 생태학에서는 심층 생태학으로, 철학에서는 탈구조주의적 관계주의로 나타났다. 모든 것이 — 다양한 이름으로 — 같은 본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 수렴이 21세기의 중요한 지적 전환이다. 아직 주류가 되지 못했다. 대학의 기본 교과 과정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가르친다. 기업의 조직 원리는 여전히 기계적이다. 정치 담론은 여전히 개체주의적이다. 그러나 —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 속으로 새로운 관계적 사유가 들어오고 있다.

페리코레시스의 위험한 얼굴 — 권력과 정의의 문제

여기서 중요한 경고를 해야 한다. 페리코레시스는 낭만화되기 쉬운 개념이다. "우리가 서로 안에 있다." "우리가 하나다." "우리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말들은 —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맥락에 따라 — 위험하다.

상호내주가 지배의 가면이 될 때

페리코레시스의 언어가 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몇 가지 사례.

결혼 관계: "우리는 하나다" 라는 말이 — 종종 아내의 개별성이 남편에게 흡수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왔다. 아내가 자기 의견을 가지는 것이 "분리" 로 비난받았다.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 이 오용을 비판해왔다.¹⁰

식민 관계: 유럽 선교사들이 원주민 공동체에 들어갈 때 — "우리가 형제다" 라는 기독교적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형제애" 는 한 방향이었다. 선교사가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주는" 관계지, 원주민이 선교사에게 무언가 "주는" 관계가 아니었다.

기업 문화: "우리는 한 가족이다" 라는 회사 문화가 — 종종 노동 착취의 가면이 된다. "우리가 가족이니 야근을 해라." "우리가 하나니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마라." 이 언어가 실제 권력 비대칭을 은폐한다.

민족주의: "우리는 한 민족이다" 라는 언어가 — 내부 소수자를 배제하는 도구가 된다. 동시에 외부에 대한 적대를 정당화한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이 언어로 시작되었다.

이 모든 오용이 공통으로 하는 일은 — 페리코레시스의 구조를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지배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상호내주" 의 가면을 쓴 일방적 흡수.

정의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이 문제에 대해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이 결정적 비판을 제공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엘사 타메즈(Elsa Tamez) 등의 작업.¹¹

그들의 핵심 통찰: 정의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두 존재가 "서로 안에 거한다" 는 말이 — 권력 비대칭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공허하다. 아프리카 노예와 백인 주인이 "서로 안에 거한다" 고 말할 수 있는가? 카하마르카의 스페인 정복자와 잉카 포로가 "친교 속에 있다" 고 말할 수 있는가? 삭사이와만을 해체하는 스페인 감독관과 그 돌을 옮기는 원주민 노동자가 "페리코레시스 관계" 에 있는가?

명백히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페리코레시스의 언어가 오용되는 것이다. 진정한 페리코레시스는 — 권력 비대칭이 최소화된 상태 에서만 가능하다.

이 통찰이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더 강하게 만든다. 페리코레시스는 단순히 "서로 사랑하자" 는 도덕 권고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 관계의 조건에 대한 주장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 구조적 정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 정치적 과제

이 점이 페리코레시스를 정치적 개념으로 만든다. 우리가 서로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 단순히 개인적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 부족하다. 구조를 바꿔야 한다.

평등한 페리코레시스 관계를 방해하는 것들:

이 모든 구조적 문제가 — 페리코레시스를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하는 작업의 대상이다. 이것은 추상 철학이 아니라 일상 정치의 문제다.

그래서 페리코레시스는 — 좌파적 함의를 가진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페리코레시스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등을 향한 투쟁이 곧 페리코레시스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동시에 — 페리코레시스는 분리주의에도 반대한다. 그냥 각자 따로 살자, 는 해결책도 아니다. 상호내주의 이상은 관계의 밀도를 요구한다. 실제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고, 함께 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주의자유주의의 대립을 넘어선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연대가 —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 함께 깊어져야 한다.

이 정치적 비전이 현재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 지향점으로서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지혜 전통들이 — 페리코레시스든, 크리의 와코토윈이든, 동양의 도(道)든 — 모두 이 지향점을 향한 다른 언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공동의 어휘를 발견할 수 있다.

의학적 공명 — 몸의 페리코레시스

이 장에서 한 가지 개인적 고백을 해야 한다. 내가 페리코레시스 개념에 끌린 이유 중 하나는 — 의학 연구자로서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운동의학과 생리학을 공부해왔다. 30년 가까이. 그리고 이 기간 동안 — 인체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을 직접 목격했다. 그 전환이 페리코레시스 개념과 놀랍게 공명한다.

20세기의 분리 모델

내가 운동의학 분야에 발을 들인 1980년대 후반, 의학은 분리 모델이 지배적이었다. 인체를 여러 "시스템" 으로 나눴다. 심혈관계, 호흡기계, 소화기계, 내분비계, 근골격계, 신경계, 면역계. 각 시스템을 따로따로 연구했다. 교과서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각 장이 한 시스템을 다뤘다.

이 모델은 효율적이었다. 연구자가 전문 분야로 훈련될 수 있었다. 특정 시스템의 병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20세기 의학의 많은 성취 — 항생제, 백신, 외과 수술, 장기 이식 — 이 이 모델에서 가능해졌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만성 질환이 그 한계를 드러냈다. 당뇨, 심혈관 질환, 자가면역 질환, 우울증, 암. 이 병들은 — 한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시스템이 얽혀 있다. 그리고 — 몸 외부의 사회적·환경적 요인들과도 얽혀 있다. 분리 모델로는 이 복잡성을 포착할 수 없었다.

21세기의 시스템 생물학

21세기에 — 조용한 혁명이 일어났다. 시스템 생물학(systems biology). 인체를 분리된 시스템의 합이 아니라 —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

핵심 발견들:

장-뇌 축(gut-brain axis). 장내 미생물이 신경전달물질을 생산한다. 그것이 뇌의 기분, 인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뇌의 상태가 거꾸로 — 미주신경을 통해 — 장 기능을 조절한다. 두 기관이 서로 안에 거한다.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¹²

정신신경면역학(PNI). 마음의 상태가 면역계에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약화시킨다. 감염이 우울증을 유발한다. 마음과 몸이 — 이분법이 아니라 — 하나의 연속체로 작동한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 환경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엄마의 스트레스가 — 태어날 아이의 유전자 발현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 할머니의 기아 경험이 — 손자의 대사 질환 위험으로 이어진다. 세대를 건너 환경과 유전자가 서로 안에 거한다.

미생물총(microbiome). 우리 몸 안에는 — 우리 세포 수만큼 많은 미생물 세포가 있다. 그들이 우리 면역, 소화, 대사, 심지어 기분을 조절한다. 우리는 — 혼자가 아니다. 수조 마리의 다른 생명체가 우리 안에 살고, 우리가 그들을 통해 산다.

이 모든 발견이 — 하나의 통일된 메시지로 수렴한다. 인체는 분리된 시스템의 합이 아니다. 시스템들이 서로 안에 거한다. 그리고 몸 자체가 환경 안에 거하고, 환경도 몸 안에 거한다.

이것이 페리코레시스다. 의학의 언어로 표현된.

살루토제네시스로 가는 다리

이 의학적 패러다임 전환이 살루토제네시스로 직접 이어진다. 이어지는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는 다만 — 페리코레시스가 의학에서도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의학자로서 이 전환을 보면서 느낀 것은 — 이것이 단순한 과학적 진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 전환이 — 잉카의 야쿠 철학, 크리의 와코토윈, 동양의 기(氣) 사상 — 이 모든 "전근대" 전통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새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되찾고 있는 것이다.

Perichoretic breakdown — 오늘 한국이 앓고 있는 것

이 개념이 추상에 머물면 가치가 반감된다. 페리코레시스의 진짜 힘은 —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을 진단할 언어가 된다는 데 있다. 내가 의학 현장과 연구에서 본 가장 절박한 적용이 여기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질병은 개인의 선택 실패가 아니라, 페리코레시스가 구조적으로 무너진 상태 — toxic culture — 의 결과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라 진단이다. 한 문장으로:

대한민국의 상당수 질병은 스트레스 하나가 아니라, 생활·관계·문화·미래 불안이 서로 얽혀 '건강 생성 시스템(salutogenic system)'을 붕괴시키는 복합적 toxic culture의 결과다.

Toxic culture를 구성하는 여섯 축

이 독성 시스템은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여섯 축이 서로를 강화하면서 작동한다.

① 신체활동 부족 (Movement deprivation). 학원 중심 생활이 아이들의 이동과 놀이와 자율적 신체활동을 비의도적으로 좌식화시킨다. 근감소, 인슐린 저항성, 자율신경 불균형, 정서 조절 능력 저하. 운동 부족은 단순한 "행동 문제" 가 아니라 뇌–정서–대사 전체의 조절 실패다.

② 초가공식품 중심 식환경 (Ultra-processed food exposure). 가정식의 붕괴, 편의점·배달·학원 식사의 확산. 혈당 변동성 상승, 장내 미생물 다양성 감소, 염증성 톤 증가, 보상회로 과활성. 식품은 영양이 아니라 신경·호르몬·면역 신호다.

③ 가정 식사의 붕괴 (Loss of family meal). "집에서 밥을 먹지 않음" 의 의미는 단순한 식사 실종이 아니다. 리듬·정서적 안전·사회적 상호내재의 교차점이 사라지는 것. 결과: 섭식 조절 실패, 정서적 고립, 스트레스 회복 경로 상실. 가정식은 생리적·사회적 건강의 교차점이다.

④ 경쟁 내재화 교육 (Competition-internalizing education). 학원 중심 시스템이 상생보다 우위 선점을, 협력보다 비교를, 실패를 탈락으로 가르친다. 만성 긴장, 자기 가치 = 성과, 타인 = 경쟁자. 이 문화는 심리 문제를 넘어 사회적 면역(social immunity) 을 무너뜨린다.

⑤ AI 시대의 일자리 불안 + 청년 실업. "노력해도 대체될 수 있다" 는 인식. 미래 예측 불가능성. 만성 불안, 계획 능력 저하, 의미 상실, 번아웃. 이것은 개인의 적응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적 예측 실패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⑥ 만성 스트레스 —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자 증폭기. 앞의 다섯 요인이 공통으로 수렴하는 지점이 만성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근본 원인" 으로 지목하는 담론은 틀렸다. 스트레스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자 증폭기다.

통합 기전 — 세 경로

여섯 축이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세 경로가 함께 작동한다.

생물학적 경로: 만성 스트레스 + 운동 부족 + 초가공식품 → 미토콘드리아 기능 저하 → 염증성 상태 고착 → 대사·심혈관·정신질환 위험 증가.

신경·정서 경로: 보상회로 과활성 + 전전두엽 조절 저하 → 충동성 상승, 우울/불안 상승.

사회적 경로: 관계 단절 + 경쟁 내재화 → 회복 자원 감소 → 질병의 만성화.

페리코레시스 관점의 진단

이 그림을 페리코레시스 언어로 바꾸면, 구조가 드러난다.

몸–마음–관계–미래가 서로 상호내재하며 건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시스템은 이 연결을 하나씩 끊고 있다.

이것이 perichoretic health가 perichoretic breakdown으로 전환된 상태다. 상호 내주·상호 침투·상호 비혼합의 세 표지가 동시에 무너진다. 자기 돌봄은 자기 착취로, 관계는 거래로, 가정은 기능으로, 미래는 공포로 변환된다.

관점 전환의 요청

이 진단은 질문 자체를 바꾸자고 요청한다.

그리고 해답도 따라서 바뀐다.

대한민국의 많은 질병은 개인의 선택 실패가 아니라, 신체활동 결핍·초가공식품 환경·가정과 공동체의 붕괴·경쟁 중심 교육·AI 시대의 미래 불안이 서로 상호강화되는 toxic culture의 결과다. 따라서 해결 역시 개인 처방이 아니라, 생활·관계·문화·의미를 동시에 복원하는 살루토제네시스적 시스템 전환이어야 한다.

이 전환이 — 페리코레시스가 의학·정책·교육의 언어로 번역될 때 — 구체적으로 어떤 개입이 되는가. 운동·식사·관계·의미를 하나의 설계 안으로 묶는 페리코레시스적 개입 모델(perichoretic intervention model). 이것이 내가 학자로서 계속 다듬고 있는 작업 중 하나이며, 이 책의 범위를 넘어 별도의 작업이 필요한 주제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 이 진단 자체가 이미 치유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무엇 속에 있는지를 보는 것. Wetiko의 자기 은폐를 깨는 것. 그리고 — 그 안에서 관계를 하나씩 복원하는 작은 선택들을 시작하는 것.

한 짧은 여운 — 북미 평원의 이름

페리코레시스와 구조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문명이 다른 이름으로 말해왔다. 크리어 **와코토윈(Wahkohtowin)**¹³ 은 "모든 것이 친족으로 연결되어 있다" 는 존재론이다. 사냥, 채집, 물 긷기, 약초 채취 — 그 모든 행위 앞에 감사와 허락의 몸짓이 선행한다. 친족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 감각이 — 페리코레시스의 세 표지(상호 내주·상호 침투·상호 비혼합)를 일상의 실천으로 번역한 형태다.

북미 원주민 의식의 한 공통 요소인 원(circle)의 춤 도 같은 구조의 몸짓이다. 둥글게 둘러서고, 북이 울리고, 사람들이 차례로 원 안으로 들어간다. 원형 자체가 메시지다. 처음도 끝도 없는 연결, 누구도 중심에 고정되지 않는 구조. 한 사람이 원 안에 들어서면 모두가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춤춘다. 상호 내주 속의 자기됨. 다메섹의 요한이 8세기에 "마치 춤추는 자들처럼" 이라 말했던 것이 — 이런 공동체의 실제 몸짓 속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되고 있었다.

다른 문명이 페리코레시스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름이 달랐을 뿐이다.

결론: 치유의 방향

이 장을 썼다. 쉽지 않았다. 페리코레시스는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글로 옮기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 근본적으로 살아내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 3부에서 펼친 Wetiko의 진단이 치유의 방향 없이 남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Wetiko의 대척점이 있어야 한다. 그 대척점의 이름이 — 여러 가능성 중에서 — 페리코레시스다. 비잔틴 신학자의 단어이지만 — 전 세계 다양한 지혜 전통의 공통 어휘가 될 수 있는 단어.

이 단어가 주는 것:

이 다섯 가지가 합쳐지면 — Wetiko와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Wetiko가 분리하고 지배한다면, 페리코레시스는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한다. Wetiko가 타자를 먹는다면, 페리코레시스는 타자 안에 거한다 — 그리고 자기로 남는다.

다음 장 — 동양의 화답

그러나 이 장이 끝이 아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서양에서 발견된 개념이다. 서양 기독교 신학의 산물. 그리고 — 이 개념이 전 세계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 다른 문명의 지혜 전통과 대화해야 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동양의 응답을 듣는다. 원효의 화쟁(和諍). 퇴계의 경(敬).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한의학의 음양(陰陽) 교합. 그리고 — 한국 특유의 관계적 개념들 — 정(情), 우리(Uri).

이 동양 개념들이 페리코레시스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그리고 — 때로는 어떻게 다른지. 특히 위계적 유교 전통이 "관계성" 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어떻게 정당화해왔는지. 이 그림자까지 포함해서.

동양 사상이 페리코레시스를 단순히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양도 — 자기 나름의 Wetiko 적 왜곡을 겪었다. 그러나 — 동양 전통의 뿌리에 있는 관계적 지혜는 여전히 풍부하다. 그 지혜를 다시 들여다볼 차례다.

그리고 — 우리 모두에게 — 이 춤이 기다리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형태로. 안데스의 축제에서든, 한국의 강강술래에서든, 일상의 식탁에서든. 우리가 그것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각주

¹ 다메섹의 요한의 이 인용문은 De Fide Orthodoxa의 페리코레시스 설명을 저자가 종합한 것이다. 원전은 John of Damascus, An Exact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trans. S.D.F. Salmond, in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9 (Peabody, MA: Hendrickson, 1994), Book I, Chapter 8 및 Book III, Chapter 5 참조.

² 페리코레시스의 어원에 관하여는 Geoffrey W. H. Lampe, A Patristic Greek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61), 1077-1078의 항목.

³ John of Damascus, De Fide Orthodoxa (c. 743). 현대 비평판: Expositio Fidei, ed. Bonifatius Kotter, Die Schriften des Johannes von Damaskos, vol. 2 (Berlin: De Gruyter, 1973).

⁴ John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Studies in Personhood and the Church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85).

⁵ Jürgen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The Doctrine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독일어 원판 1980).

⁶ Miroslav Volf,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⁷ David Bohm,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 (London: Routledge, 1980).

⁸ David Bohm, On Dialogue (London: Routledge, 1996).

⁹ 알프레트 아들러의 게마인샤프츠게퓔 개념에 관하여는 Alfred Adler, Social Interest: A Challenge to Mankind, trans. John Linton and Richard Vaughan (London: Faber and Faber, 1938).

¹⁰ 페미니스트 신학의 페리코레시스 재해석에 관하여는 Elizabeth A. Johnson, She Who Is: The Mystery of God in Feminist Theological Discourse (New York: Crossroad, 1992).

¹¹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정의와 사랑의 통합에 관하여는 Gustavo Gutié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rev. ed. (Maryknoll, NY: Orbis Books, 1988);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Maryknoll, NY: Orbis Books, 1988).

¹² 장-뇌 축에 관한 최근 종합은 Emeran Mayer, The Mind-Gut Connection (New York: Harper Wave, 2016).

¹³ 크리족의 와코토윈 개념에 관하여는 Fyre Jean Graveline, Circle Works: Transforming Eurocentric Consciousness (Halifax: Fernwood, 1998), 제3장; Neal McLeod, Cree Narrative Memory: From Treaties to Contemporary Times (Saskatoon: Purich, 2007).

『페루-쿠스코-마추피추 여행기』 집필 중 · 생성: 2026. 4. 20. PM 8:2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