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잉카는 멸망했고 조선은 살아남았다 — 운명을 가른 것

도입: 두 고향의 저녁

쿠스코의 숙소에서 창밖을 본다. 해가 저물고 있다. 안데스의 저녁 공기가 차다. 시계를 본다. 캐나다 앨버타주의 마스카치(Maskwacis)는 지금 — 시차를 계산해보면 — 거의 같은 오후. 한국 서울은 이미 한밤중. 세 개의 시간대가 내 머릿속에서 포개진다.

세 시간대, 세 고향. 내가 태어난 한국. 나의 학문이 자란 캐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페루. 각각이 다른 시간에 다른 해를 맞이한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 같은 저녁이다.

마스카치는 — 캐나다 앨버타주 중부에 있는 평원 크리(Plains Cree, nêhiyawak) 의 땅이다. 네 개의 퍼스트 네이션이 모여 있다. 삼슨(Samson), 어민스킨(Ermineskin), 루이 불(Louis Bull), 그리고 — 몬타나(Montana). 이 네 번째 공동체, 몬타나 퍼스트 네이션은 크리어로 아카미흐크(Akâmihk) 라 불린다. "강 건너편" 이라는 뜻. 지리적 특징을 그대로 이름에 담았다.

나는 1997년 처음 이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 이후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약 10일씩 그곳에 가 선교 활동과 공동체 방문을 이어갔다. 공동체의 일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 시간의 축적이 나에게 의미 있다. 17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같은 사람들을 해마다 다시 만났다는 사실.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청년이 되어 있는 것을 본다는 사실. 누군가의 장례식을 함께 치렀다는 사실.

그 긴 관계 안의 한 지점에서 — 지금으로부터 23~24년 전 — 한 가족이 나를 친족으로 받아들였다. 그 가족의 한 여성이 나의 누이가 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그녀를 Debbie 라 부른다. 그녀의 실명이지만 — 그녀가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락했다.

이 입양이 내 정체성을 재구성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먼저 한국인이다. 크리어에 유창하지 않다. 크리 의례의 모든 층위를 아는 것도 아니다. 입양은 내가 크리가 되었다는 선언이라기보다 — 긴 시간의 관계를 공동체의 언어로 공식화한 표현에 가깝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형식적 인정이 아니라, 해마다 돌아가 함께 보낸 시간 자체다. 관계가 먼저 있었고, 그 관계를 기리는 순간이 뒤에 있었다.

이 관계의 정확한 법적·의식적 형식이 어떠했는지 — 나는 이 책에서 상세히 풀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와 그 공동체 사이의 일이다. 독자가 알아야 할 것은 — 실질이다. 17년 가까이 매년 돌아간 관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친족감.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 한국인인 내가 크리의 삶의 한 결을 곁에서 몸으로 배운 경험.

이 관계가 이 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이 장을 필연적으로 만든다.

나는 Debbie 누나에게 이 책의 집필을 이야기했다. 특히 이 장 — 세 문명을 비교하는 이 장 — 이 그녀와 그녀의 공동체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점. 그녀의 동의 없이는 쓸 수 없는 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어른들과 상의한 뒤 — 써도 된다고 답했다. 다만 "진실을 써라" 는 조건으로.

이 장은 그 요청에 대한 답이다. 진실에 최대한 가깝게 쓰기. 허구적 장면을 지어내지 않고. 개인적 에피소드를 감정적 효과를 위해 과장하지 않고. 사실만을, 그 사실의 무게만을 기록하기.

그리고 그 사실들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 이 장의 축으로 놓는다. 수년간 누이와 이 잉카 여행에 대해 나눈 여러 대화 속에서, 그녀가 했던 한 표현이 내 안에 남았다. 그것은 공동체 어른들이 역사적 고통을 겪은 다른 민족에 대해 말할 때 쓰는 표현과 닮아 있었다.

"They are our people."

우리의 사람들. 안데스의 잉카도, 대평원의 크리도, 한반도의 조선도 — 같은 파도를 맞은 사람들은 서로의 친족이다. 이 감각이 이 장의 축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 이 책 전체의 축이다.

이 장이 해야 할 일

이 장에서 나는 세 문명의 운명을 비교하려 한다. 잉카, 조선, 그리고 크리. 세 문명 모두 Wetiko의 파도를 맞았다. 결과가 달랐다. 하나는 멸망했다. 하나는 살아남았다. 하나는 — "절멸 정책" 의 정밀한 표적이 되었지만 — 지금도 살아 있다.

이 비교가 왜 중요한가. 몇 가지 이유.

첫째, 운명론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비롯한 많은 대중적 서술은 원주민 문명의 몰락을 불가피한 결과로 제시한다. 기술 격차, 질병, 지리. 이 설명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 세 문명의 상이한 결과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총, 균, 쇠" 를 경험한 세 문명이 왜 다른 운명을 맞았는가. 이 질문이 기술 결정론을 넘어서게 한다.

둘째, 저항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조선이 왜 살아남았는지, 크리가 왜 지금도 살아 있는지 이해하면 — 같은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조건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라 현재의 긴급한 질문이다. 21세기에도 같은 구조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가 이 비교에 있다.

셋째,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가장 개인적으로 중요한 이유 — 나는 두 문명의 경계에서 오래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랐고, 17년 가까이 매년 크리 공동체를 찾아가며 그들의 삶을 곁에서 보았다. 그 과정에서 한 가족의 친족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먼저 한국인이다. 다만 두 세계 사이를 오래 걸어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세 번째 문명의 흔적을 만났다. 잉카. 이 세 문명이 나라는 한 통로에서 만난다. 그 만남을 증언하는 것이 — 이 책의 특별한 자리다.

Debbie는 전화 끝에 이렇게 말했다. "내 형제야, 잊지 마. 이것을 잘 써. 우리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녀의 말을 노트에 적었다. 이 장은 그 문장을 기억하며 쓰여진다.

잉카의 멸망 — 1533년부터 1572년

무너진 것과 무너지지 않은 것

앞에서 이미 카하마르카의 오후부터 투팍 아마루의 처형까지 40년간의 학살을 재구성했다. 여기서는 그 역사를 "운명의 관점" 에서 다시 본다. 잉카는 왜 멸망했는가. 그리고 — 사실은 얼마나 멸망했는가.

잉카 제국의 공식 종말은 1572년 9월 24일,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서 투팍 아마루가 참수된 순간이다. 이 날부터 잉카 국가(Tawantinsuyu, "네 지역") 는 법적·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왕통이 끊겼다. 빌카밤바의 신-잉카 국가가 소멸했다.

그러나 "멸망" 이라는 단어는 정확한가. 더 정확히는 — 무엇이 멸망했고, 무엇이 살아남았는가.

멸망한 것들:

살아남은 것들:

이 목록을 보면 — 잉카 멸망의 구조가 보인다. 엘리트 수준은 무너졌고, 민중 수준은 살아남았다. 황실, 귀족, 제국 관료제는 사라졌다. 농부, 장인, 어머니, 공동체의 지혜는 남았다. 이것은 모든 제국적 파괴의 일반 패턴이다. 권력 피라미드의 상부가 잘려나가고 하부가 유지된다. 완전한 소멸은 드물다.

그러나 "민중 수준에서 살아남았다" 는 사실이 — 상부의 파괴를 상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제국의 상부가 가졌던 것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기록 체계. 전국적 인프라 관리. 엘리트 예술. 체계적 천문·의학·공학 지식.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 민중이 계승할 수 있는 자원이 극적으로 줄어든다.

오늘 케추아 농민이 감자 3,000종을 재배한다. 훌륭한 유산이다. 그러나 같은 농민의 조상이 거대한 제국적 농업 체계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 이제 기억으로만 남는다. 실천 가능한 것으로는 남지 않는다. 이 격차가 잉카 멸망의 진짜 무게다.

왜 잉카가 무너졌는가 — 다섯 요인

6장에서 세 가지 비대칭(전염병, 분열, 인간성의 비대칭)을 제시했다. 여기서는 이를 확장해 다섯 가지 요인을 본다. 각 요인이 기여했고, 합쳐져 잉카의 운명을 결정했다.

요인 1 — 전염병의 선행. 천연두가 스페인군보다 먼저 도착(15241526). 인구의 3050% 사망. 지휘부 붕괴. 와이나 카팍 황제와 그의 후계자 니난 쿠요치의 사망이 후계 분쟁을 촉발. 스페인 도착 시점에 이미 잉카는 깊이 상처받은 상태.

요인 2 — 내부 분열.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내전(1527~1532). 아타우알파의 승리 직후 피사로가 상륙. 스페인이 활용할 분열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요인 3 — 강력한 중앙 집중의 역설. 잉카 제국은 극도로 중앙 집중적이었다. 모든 정통성이 쿠스코의 황제에게서 나왔다. 황제가 생포되면 — 전체 시스템이 마비된다.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포로가 된 순간, 잉카 제국 전체가 사실상 마비되었다. 지방 군대는 중앙의 명령을 기다렸다. 명령이 오지 않으니 행동하지 못했다.

요인 4 — 피정복 민족의 원한. 잉카 제국의 급속한 팽창(95년) 이 많은 민족을 강제 편입했다. 카냐리, 우앙카, 차차포야스 등이 잉카에 깊은 원한을 가졌다. 스페인이 이 원한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실제 병력이었다.

요인 5 — 신학적·존재론적 비대칭. 스페인은 잉카인을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 인식이 —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아타우알파의 몸값을 받고도 처형한 것. 망코 잉카를 꼭두각시로 썼다가 모욕한 것. 사이리 투팍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독살한 것. 이 모든 배신이 가능했다. 그 아래의 존재론이 — 완전한 인간에게 하지 않을 일반쪽 인간에게는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다섯 요인이 함께 작동했다. 어느 하나만 제거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전염병이 없었다면 — 잉카군 수가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내전이 없었다면 — 통일된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중앙 집중이 덜했다면 — 아타우알파 생포로 제국이 마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피정복 민족 원한이 없었다면 — 스페인이 동맹군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성의 비대칭이 없었다면 — 배신의 반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섯 요인 중 네 개는 잉카 내부의 약점이었다. 전염병만이 외부 요인이었다. 나머지는 — 제국의 구조적 취약성이었다. 급속한 팽창의 대가, 중앙 집중의 취약성, 피정복 민족의 상처. 잉카 제국 자체가 정복을 통해 성립한 제국이었기 때문에, 그 폭력이 다시 잉카에게 돌아왔다.

이것은 잉카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다는 사실의 인정이다. 잉카는 이상화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도 제국이었다. 다른 민족을 정복했다. 강제 이주(미티마) 정책을 썼다. 이 그림자가 그들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그럼에도 — 스페인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잉카도 제국이었으니 멸망해도 된다" 는 논리가 아니다. 잉카의 구조적 약점이 있었다 해도, 스페인의 학살은 그 자체로 잔혹한 폭력이었다. 이 둘은 양립한다. 가해자의 잔혹성과 피해자의 내부 문제가 동시에 인정될 때에만 — 진실된 역사가 가능해진다.

조선의 생존 — 1592년의 그 여름

같은 파도, 다른 결과

60년 후 한반도에서 같은 파도가 다른 결과를 냈다.

13장에서 나는 1492년부터 1592년까지 100년의 사슬을 추적했다. 콜럼버스, 포토시, 다네가시마, 이와미 은광, 고니시 유키나가, 세스페데스 신부. 그리고 그 사슬의 종착점이 — 1592년 4월 부산 앞바다의 일본군 상륙이었다. 임진왜란.

이 전쟁에서 조선은 국토의 약 1/3 인구를 잃었다고 추정된다.¹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불탔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곡창지대가 초토화되었다. 수만 명의 도공과 장인이 일본으로 납치되었다. 사회 구조가 흔들렸다. 이후 조선은 거의 100년간 경제 회복에 매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 조선은 살아남았다. 왕조가 유지되었다. 언어가 보존되었다. 문화가 지속되었다. 잉카와 같은 의미의 "멸망"은 없었다. 일본군은 결국 1598년에 철수했다.

무엇이 달랐는가. 다섯 가지 요인을 본다.

요인 1 — 이순신과 해상 방어

이순신 장군과 그가 이끈 조선 수군의 승리가 전쟁의 전략적 방향을 바꿨다. 옥포, 사천, 한산도, 부산, 명량. 일련의 해전 승리가 일본군의 해상 보급선을 차단했다. 13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대로.

이 성공이 얼마나 중요했는가. 임진왜란은 일본이 본격적 장기 전쟁을 처음 수행한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한반도 깊숙이 들어가면서 보급 문제에 부딪혔다. 현지 조달이 어려웠다. 의병의 게릴라 공격이 육로를 위협했다.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이 바다로부터의 보급도 끊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은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해상 방어가 가능했던 것은 — 13장에서 본 대로 — 조선의 판옥선, 거북선, 화포 기술 덕분이었다. 즉 조선 과학기술의 세계적 수준이 전쟁의 한 국면을 바꾼 것이다.

요인 2 — 의병과 승병의 자발적 저항

임진왜란 초기 조선 정규군이 무너진 뒤, 전국에서 의병이 자발적으로 봉기했다. 양반 지식인들이 사재를 털어 군대를 조직했다. 농민들이 자원했다. 그 수가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²

주요 의병장들:

또한 승병. 불교 승려들이 무기를 들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 가 70대 노인이 되어 승병장이 되었다.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惟政) 가 전국 사찰에서 승려들을 조직했다. 1,000명 이상의 승병이 전투에 참여했다.³

이 저항의 자발성이 결정적이었다. 정부가 동원한 것이 아니라 — 민간이 스스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의 수평적 연대가 기능했다는 증거다. 잉카 제국에서는 이런 것이 없었다. 잉카 황제가 포로가 되거나 도망가면, 지방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저항군을 조직하는 전통이 없었다. 모든 행동이 중앙의 명령을 기다렸다.

조선은 달랐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신하고 조정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도 — 지방에서는 계속 저항이 이어졌다. 왜 이것이 가능했는가. 이 장의 핵심 질문 중 하나다.

요인 3 — 민족적·언어적 통합성

조선은 단일 언어·단일 문자·단일 민족 국가였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다.

잉카 제국은 다민족·다언어였다. 케추아어가 제국 공용어였지만, 아이마라어, 무치카어, 아토카어 등 수십 개 언어가 공존했다. 이 언어적 다양성이 정치적 분열 가능성을 만들었다. 스페인이 분열을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편 가를 내부 세력을 찾을 수 없었다. 카냐리족 같은 "일본 편" 을 만들 수 없었다. 일부 지방관이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 구조적 내부 분열은 없었다. 조선의 민족적 통합성이 외부 침투가 비집고 들 균열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이 통합성은 어디서 왔는가. 1443년 한글 창제와 그 이후 200년간의 문화적 통합 과정의 결과다. 한글이 모든 계층의 언어가 되면서 — 양반과 평민이 공유된 문자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제한적이지만). 과거제를 통해 공통의 유교 교양이 전국에 퍼졌다. 수백 년의 공유된 역사 의식(고려-조선의 왕조 계승)이 형성되었다.

결과 — 16세기 말 조선에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비교적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충청도 농민과 경상도 양반이 "우리는 같다"고 느낄 수 있는 기반. 이 기반 위에 의병과 승병의 자발적 연대가 가능했다.

요인 4 — 명나라의 참전

1592년 말,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했다. 이여송(李如松) 이 이끈 4만 명 규모의 명군이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후 명군은 전쟁 내내 조선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견제했다.⁴

명의 참전 결정이 왜 이루어졌는가. 사대관계의 작동이었다. 조선은 명의 책봉 체제 내에 있었고, 조선이 위기에 처하면 명이 지원할 공식적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 의무에 그치지 않았다. 명나라의 안보 자체가 조선에 달려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면 — 다음 목표는 중국 본토였다. 히데요시가 명시적으로 그 야망을 선언했다. 명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조선을 지켜야 했다.

이 명나라 참전은 — 잉카에게 없었던 것이다. 잉카는 외부에서 원군을 받을 수 없었다. 안데스는 유라시아 대륙 시스템에서 격리되어 있었다.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근처의 비슷한 규모의 문명이 없었다. 반면 조선은 동아시아 국제 시스템의 일부였다. 명과의 조공 관계, 일본과의 외교 관계, 여진과의 국경 관계. 이 국제 네트워크가 — 위기 때 도움이 되었다.

이것은 국제적 고립 vs. 국제적 연결의 차이다. 연결된 문명이 더 생존력이 높다. 이 교훈이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요인 5 — 지리와 지형

한반도의 지리가 조선을 도왔다. 반도는 좁고 길다. 일본군이 북쪽으로 진격할수록 보급선이 늘어났다. 추운 겨울이 왔다. 일본군은 혹한에 익숙하지 않았다. 함경도까지 올라간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부대가 특히 고전했다.

반면 잉카 제국은 광대한 공간에 걸쳐 있었다. 스페인이 침투하기 더 쉬웠다. 그리고 안데스의 고산 지형이 이중적이었다. 잉카에게는 친숙했지만, 스페인의 말과 대포도 — 일단 산을 넘어가면 — 꽤 잘 작동했다. 조선의 중간 규모의 반도 지형이 장기 점령에 더 불리했다.

그리고 — 히데요시의 죽음(1598). 전쟁의 물적 기반이 히데요시 개인의 야망이었다. 그가 죽자 일본 지배 세력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신속히 철수했다. 이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전쟁이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 조선도 상처를 입었다

다섯 요인이 조선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긴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이것을 "승리" 라 부르기 어렵다. 차라리 "살아남음" 이다. 국가가 사라지지 않은 것. 언어가 지속된 것. 왕조가 유지된 것. 이 의미에서는 잉카와 다르다. 그러나 상처는 깊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이후 400년의 한국사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크리의 경험 — 또 다른 운명

평원 크리 — 들판의 사람들

이제 세 번째 문명으로 간다. 평원 크리(Plains Cree, nêhiyawak).

네히야와크는 크리어로 "사람들(people)" 또는 "진짜 사람들(the real people)" 을 뜻한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 대부분의 원주민 민족이 자기를 이런 식으로 부른다 — "그냥 사람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에게 자기 민족은 "인류 그 자체" 였다는 의미. 다른 민족은 별도의 분류가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크리족은 거대한 언어 그룹이다. 북미 대륙 중부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해 있다. 캐나다의 앨버타, 서스캐처원, 매니토바, 온타리오, 퀘벡 등. 방언에 따라 여러 하위 집단으로 나뉜다:

이 중 평원 크리가 가장 큰 집단이었다. 19세기까지 약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전통 경제는 버펄로(북미 들소) 사냥이었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유목 수렵 문화.

Debbie 누나가 속한 몬타나 퍼스트 네이션은 평원 크리 전통의 계승자 중 하나다. 마스카치에 있는 네 개 평원 크리 민족 중 하나.

마스카치 — 곰의 언덕

마스카치(Maskwacis) 는 크리어로 "곰의 언덕(Bear Hills)" 이라는 뜻이다. 앨버타주 중부, 에드먼턴에서 남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 낮은 구릉과 소나무 숲. 캐나다 서부의 전형적 평원-삼림 경계 지대.

이곳에 네 개의 크리 퍼스트 네이션이 모여 있다:

이 네 공동체가 Treaty 6(조약 6호, 1876년) 의 서명자들이다. 캐나다 연방 정부가 평원 원주민과 체결한 일련의 조약 중 하나. 정확한 이름은 "Treaty No. 6" 이다.

1876년 — Treaty 6

1876년 8월, 현재의 서스캐처원 포트 카라 튼(Fort Carlton) 과 포트 피트(Fort Pitt) 에서, 캐나다 정부 대표단과 여러 평원 크리 추장들이 모였다.⁶ 며칠간의 협상 끝에 Treaty 6가 서명되었다.

조약의 공식 내용은 — 캐나다 정부의 관점에서 — 원주민이 자기 영토에 대한 권리"양도" 하고, 대신 정부가 보호구역 할당, 연간 현금 지급, 교육, 의료, 농업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서면 조약은 영어로 작성되었다. 크리어 통역이 있었지만, 완전한 번역은 아니었다.

원주민 관점에서의 조약은 전혀 달랐다.⁷ 크리 전통에서 조약은 "평화의 약속" 이었다. 두 민족이 — 동등한 주권자로서 — 공존과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것. "땅을 양도한다" 는 개념이 크리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땅은 생명 이었고, 생명은 양도될 수 없다.

크리 추장들이 조약에 서명한 것은 — 상황의 압박 때문이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들의 생존 조건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조약이 그 지원을 제공한다고 약속했다. 추장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조약 — 평화와 상호 지원의 약속 — 에 서명한 것이다. 캐나다 정부가 그 문서를 토지 양도로 해석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번역의 격차가 결정적이다.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발베르데의 "요청 선언"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은 구조다. 권력 가진 측의 언어가 기록된 공식 문서를 만들고, 그 문서가 이후 수세기 동안 구속력을 갖는다. 이것이 법적 비대칭의 작동 방식이다.

버펄로 대학살 — 계산된 기아

조약 이전에 — 그리고 조약이 필요하게 만든 것이 — 버펄로 대학살이었다.

북미 대평원에는 한때 약 6,000만 마리의 버펄로(북미 들소)가 있었다.⁸ 대평원 원주민 문명 — 평원 크리, 블랙풋, 시우,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등 — 의 전체 생존 기반이 이 거대한 짐승에 있었다. 버펄로에서 그들은 고기, 가죽, 뿔, 뼈, 힘줄 — 생활의 거의 모든 필요 물품을 얻었다.

1850년경까지 버펄로는 여전히 수천만 마리가 있었다. 1870년대에 — 급격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⁹

  1. 상업적 수요: 버펄로 가죽이 동부 미국의 공장 벨트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
  2. 새 무기: 후장식 대구경 소총(Sharps rifle)이 효율적 학살을 가능케 함.
  3. 철도: 대륙 횡단 철도가 사냥꾼들을 대평원 깊숙이 운반.
  4. 그리고 — 결정적으로 — 정부 정책.

마지막 요인이 중요하다. 미국 군부와 캐나다 정부는 버펄로 학살을 적극 장려했다. 이유: 원주민을 굴복시키기 위해. 버펄로가 없어지면 원주민은 보호구역에 가둘 수 있다. 자기 자원 기반을 잃은 원주민이 정부가 배급하는 식량에 의존하게 된다.

1870년대의 미국 장군 필립 셰리단(Philip Sheridan) 의 유명한 발언: "버펄로 사냥꾼들은 지난 2년간 우리가 10년간 한 것보다 인디언 문제를 더 많이 해결했다. 그들은 이제 원주민의 창고를 파괴해야 한다. 버펄로가 멸종될 때까지 그들이 사냥하도록 보내라."¹⁰

이 정책이 성공했다. 1890년경 버펄로는 사실상 멸종 직전이었다. 수천 마리만 남았다. 대평원 원주민의 전체 생활 양식이 붕괴했다. 그들은 굶기 시작했다. 보호구역으로 몰렸다. 정부 배급에 의존하게 되었다.

캐나다 역사학자 제임스 다슈크(James Daschuk) 가 2013년 저작 『들판을 비우기(Clearing the Plains)』 에서 이 과정을 정밀하게 기록했다.¹¹ 그의 부제가 결정적이다: "질병, 기아의 정치, 그리고 원주민 생명의 상실(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그의 주장: 캐나다 정부는 의도적으로 기아를 정치 도구로 사용했다. 원주민을 약하게 만든 뒤 조약에 서명시켰다. 그리고 보호구역 내에서도 식량 배급을 제한해 복종을 유지했다. 이것은 "불가피한 비극"이 아니라 계산된 정책이었다.

이 논리를 보자 — 카리브해에서 스페인이 원주민 노예를 혹사시키던 논리같다. 포토시에서 원주민을 수은으로 죽이던 논리같다. 카리브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를 소모시키던 논리같다. 지리와 시간이 달라도 — 구조는 동일하다. 같은 논리가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어민스킨 기숙학교

버펄로가 사라지고, 원주민이 보호구역에 갇힌 후 — 시스템의 다음 단계가 왔다. 문화적 말살.

캐나다 정부는 1876년 인디언법(Indian Act) 을 제정했다. 이 법이 이후 150년간 원주민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게 된다. 그 중 한 조항이 기숙학교 시스템이었다.¹²

원주민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강제로 분리해 정부·교회 운영 기숙학교에 보낸다. 거기서 영어(또는 프랑스어) 만 쓰게 하고, 크리어 사용을 금지한다. 전통 의복을 벗기고 유럽식 옷을 입힌다. 긴 머리를 자른다. 영어 이름을 부여한다. 기독교 교리를 주입한다.

목표: "인디언을 아이에게서 죽이기(Kill the Indian in the child)." 이 문장이 공식 정책으로 쓰였다.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서.

기숙학교는 1884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되었다. 캐나다에 총 139개 학교가 있었다. 약 15만 명의 원주민 아동이 이 학교를 거쳤다. 그 중 수천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 질병, 영양실조, 학대, 자살, 탈출 시도 사망으로.

이 시스템의 가장 큰 학교 중 하나가 — 어민스킨 인디언 기숙학교(Ermineskin Indian Residential School) 였다. 마스카치에 위치. 즉 Debbie 누나의 공동체에 세워진 학교.¹³

1895년 개교. 가톨릭 운영(오블라트 수도회). 1975년 공식 폐교. 80년 운영. 수천 명의 마스카치 크리 아동들이 이 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언어를 잃고, 전통을 잃고, 가족과의 연결을 잃었다.

내가 Debbie 누나와 대화하는 중에 이 학교 이름이 나올 때,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그녀의 어머니, 고모들, 이모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가 —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세대 간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것. 이것은 심리학적 용어로 그치지 않는다. 마스카치의 현재 문제 — 알코올 의존, 자살률, 빈곤 — 의 상당 부분이 이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2022년 — 교황의 방문

21세기에 이 역사가 다시 조명되었다. 2015년 캐나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가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시스템을 "문화적 제노사이드(cultural genocide)" 로 공식 규정했다.¹⁴

2021년부터 여러 기숙학교 부지에서 무명 무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표 투시 레이더로 확인된 수천 개의 어린이 무덤들. 이 발견이 캐나다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2022년 7월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스카치를 방문했다. 어민스킨 기숙학교 부지에서 — 공식 사과를 했다. "나는 겸손히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당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해. 이 악행은 복음 전파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지만, 실은 복음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¹⁵

이 사과의 의미는 복잡하다. 많은 원주민에게 이것은 너무 늦었다. 충분하지 않았다. 사과만으로는 잃어버린 것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 그것이 있었다는 것 은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 역사상 교황이 식민 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드문 일이다.

많은 기숙학교 생존자들이 사과를 듣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 대신 그 사과의 자리에 섰다. 이것이 세대 간 정의의 특수한 형식이다. 한 세대의 상처가 다음 세대의 치유 과정에서 다뤄진다. 이 지연이 — 이 구조 특유의 시간 성격이다.

2014년 — 호비마에서 마스카치로

그리고 한 가지 더 — 이름의 회복.

마스카치는 19세기부터 2014년까지 "호비마(Hobbema)"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이름은 — 19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 1638~1709) 의 이름에서 왔다. 1891년 당시 캐나다 태평양 철도 사장이 이 지역에 기차역을 세우며, 이유 없이 — 자기 취향에 따라 — 이 이름을 붙였다.¹⁶

원주민들에게 왜 유럽 화가의 이름을 붙였는가. 누구도 묻지 않았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한 지역의 이름이 — 외부에서 부과되었다. 100년 이상 그 이름으로 불렸다.

2014년 1월 1일, 마스카치의 네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원래 이름인 마스카치 — "곰의 언덕" — 로 돌아가겠다. 캐나다 연방 정부가 이를 인정했다. 지도가 바뀌었다. 도로 표지가 바뀌었다. 우편 주소가 바뀌었다.¹⁷

이것이 작은 승리인가? 작은 것이다. 이름 하나가 바뀐다고 역사적 불의가 청산되지 않는다. 버펄로가 돌아오지 않는다. 기숙학교의 사망자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세대 간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것이 아니다. 이름은 자기 결정의 행위다. 외부에서 부과된 정체성을 거부하고, 내부에서 자기를 호명하는 것. 이것이 탈식민 과정의 기본 단위다. 그리고 — 이것이 크리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만약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었다면, 누가 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내릴 사람이 있었다. 공동체 회의가 있었다. 결정 과정이 있었다. 모두 살아있다.

크리는 살아 있다

이 섹션을 마치며 중요한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크리는 살아있다.

인구 수만 봐도 — 현재 캐나다의 공식 크리족 인구는 약 35만 명.¹⁸ 이것은 캐나다 원주민 중 가장 큰 집단이다. 다양한 하위 집단을 포함하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크리로 정체화하는 사람의 수가 이 정도다.

언어 — 크리어(nêhiyawêwin 등 방언들)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원주민 언어 중 하나. 약 10만 명 이상이 여전히 이 언어를 쓴다. 모든 세대가 계속 쓴다 — 일부 젊은이들은 영어에 편중되어 있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크리어가 들린다.¹⁹

문화 — 전통 의식이 지속된다. 파이프 의식, 스웨트 로지, 선댄스, 포틀래치(각 지역 변형 존재). 많은 공동체가 이런 의식을 공식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금지되었던 것들이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허용되고 복원되었다.

정치 — 각 크리 네이션이 자치 정부를 유지한다. 추장과 의회. 자체 교육, 자체 사회 복지, 자체 경제 개발. 여전히 캐나다 연방 정부와의 관계에서 많은 제약이 있지만 — 자기 결정의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 가장 혹독한 400년의 식민 공세를 겪고도 살아남은 것이다. 잉카가 군사적 몰락을 겪었다면, 크리는 장기간의 점진적 해체 정책을 겪었다. 그러나 해체는 완전하지 않았다. Debbie 누나의 목소리가 그 증거다. 그녀는 크리어로 기도한다. 그녀의 손자들도 크리어를 배운다. 곰의 언덕의 이름이 되돌아왔다.

"우리가 죽지 않았다는 것" — 그녀가 내게 말한 것. 이것이 이 섹션의 결론이다.

세 문명을 가른 것 — 구조적 비교

다섯 기준의 비교

세 문명의 경험을 구조적으로 비교해보자. 다섯 가지 기준.

기준 1 — 정치 구조

문명 구조 취약성/회복력
잉카 중앙 집중 제국 중앙 붕괴 시 전체 마비
조선 중앙 왕조 + 지방 자치 중앙 위기에도 지방이 기능
크리 부족 연합 중앙이 없어 타격 지점 부재

잉카의 극도의 중앙 집중이 취약성이었다. 카하마르카에서 황제 한 명이 포로가 되자 제국이 마비되었다. 조선은 중앙 왕조가 있었지만, 향촌의 자치가 발달했다. 왕이 도망가도 지방 양반과 의병이 조직되었다. 크리는 원래 중앙 집중 권력이 없었다. 이 구조가 — 역설적으로 — "타격 지점" 자체가 부재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정부는 각 부족과 개별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이 과정이 길고 느렸다. 완전한 파괴가 불가능했다.

기준 2 — 내부 통합성

문명 상태 결과
잉카 내전 중(우아스카르 vs 아타우알파) 스페인이 분열 활용
조선 민족적·언어적 통합 일본이 편 가를 내부 세력 부재
크리 부족 내 단결 정부가 개별 부족 간 분열 시도 (일부 성공)

기준 3 — 언어와 기록

문명 상태 결과
잉카 다언어, 문자 없음(키푸) 키푸 소각으로 기록 손실
조선 단일 언어, 한글+한자 문자 기록이 지속되어 문화 보존
크리 크리어(구전 중심), 후에 음절문자 구전 전통 취약, 그러나 장기적 회복

기준 4 — 기술 격차

문명 대(對) 침략자 결과
잉카 결정적 기술 격차 정면 대결 불가
조선 화포·수군 기술 유사 또는 우위 해전에서 역전 가능
크리 결정적 기술 격차 직접 군사 저항 제한

기준 5 — 정복 방식

문명 방식 특징
잉카 군사 + 종교 (즉각적) 빠른 국가 붕괴
조선 군사 침공 (단기) 단기간, 국가 보전
크리 조약 + 기아 + 기숙학교 (점진적) 장기간, 문화 위기

이 표가 보여주는 것. 정복 방식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잉카는 빠른 군사적 붕괴를 겪었다. 조선은 강렬한 단기 충격을 받았다. 크리는 세대에 걸친 점진적 해체를 겪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나쁜가" 는 비교하기 어렵다. 셋 다 재앙이었다. 그러나 형태가 달랐고, 결과가 달랐다.

결정적 통찰 다섯 가지

이 비교에서 나는 다섯 가지 교훈을 추려낸다. 모두 21세기 오늘에도 유효한 교훈이다.

교훈 1 — 내부 통합성의 결정적 역할.

잉카의 내전 vs. 조선의 통합. 외부 침투는 내부 균열이 있을 때 들어온다. 완전히 통합된 사회는 — 외부 침투에 저항한다. 물론 완전한 통합은 환상이지만, 최소한의 공유된 정체성이 저항의 기본 조건이다.

이 교훈이 현재의 한국에도 유효하다. 우리가 내부 분열을 키우면 — 외부가 그것을 활용한다. 국민 간의 갈등 선동, 세대 간 대립 조장, 지역 갈등 확대 — 이 모든 것이 침투의 입구를 만든다. 통합이 약해지면 침투가 쉬워진다.

교훈 2 — 기술의 상대적 위치.

절대적 기술 격차는 치명적이다. 그러나 완전 격차가 없으면 저항이 가능하다. 조선의 해군 기술이 세계적 수준이었기에 이순신의 승리가 가능했다. 크리는 총과 철도 앞에서 직접 군사 저항이 제한되었다.

21세기에 — 이것은 기술 자립의 문제다. 한국이 반도체, AI, 바이오에서 세계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생존 전략이다. 기술 없는 문명은 — 기술 있는 문명의 종속물이 된다.

교훈 3 — 문자와 기억의 보존.

한글이 조선 문화의 회복력에 기여했다. 크리의 구전 전통은 취약했지만, 19세기에 개발된 크리 음절 문자(Cree syllabics, ᓀᐦᐃᔭᐍᐏᐣ) 가 중요해졌다. 이 문자로 성경 번역본, 신문, 편지가 쓰여졌다. 완벽하지 않지만 — 기록할 수단이 있었다.

21세기에 — 이것은 디지털 기록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가. 누구 서버에 저장되는가. 자국 언어가 인터넷에서 얼마나 살아있는가. 이 질문들이 문명 생존의 기술적 토대를 결정한다.

교훈 4 — "조약"의 양면성.

조약 = 법적 관계의 수립. 표면적으로는 평화적. 그러나 권력 비대칭 속에서의 조약은 기만이 된다. Treaty 6는 크리족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조선의 강화도 조약(1876), 을사늑약(1905), 한일병합 조약(1910) 도 같은 구조였다. 일본은 이것을 "합법적 조약" 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그 합법성의 기반이 강제와 불평등이었다.

평화의 얼굴을 한 지배. 이것이 가장 위험한 형태 중 하나다. 왜냐하면 저항의 언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력 침략이면 저항이 명백하다. 그러나 "조약"이라는 틀은 — 저항을 "법을 어기는 것" 으로 만든다.

교훈 5 — 운명은 결정론이 아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세 문명의 운명이 달랐다. 잉카와 크리가 비슷한 구조적 취약성(중앙 집중 부재의 크리, 팽창 제국의 잉카)을 가졌지만, 결과는 달랐다. 조선이 어떤 면에서는 덜 준비된 상태였지만(조총 도입 지체, 200년 평화의 부작용), 살아남았다.

구조는 강력하지만, 완전하지 않다. 구조 안에서 개인과 집단의 선택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 이순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랐을 것이다. 망코 잉카가 다른 전술을 선택했다면 오얀타이탐보 이후 역사가 달랐을 것이다. Debbie 누나 같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킨 것이 크리가 지금도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다.

구조와 선택은 함께 작동한다. 어느 한쪽에만 집중하면 역사를 오해한다.

곁에 선 자의 시선 — 두 세계 사이에서

이제 가장 개인적인 섹션으로 간다. 이 장의 전체를 지탱해온 — 나의 위치에 대해서.

한 정체성, 하나의 긴 동행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교육받았다. 한국어가 나의 모국어다. 나의 조상은 — 짐작건대 — 임진왜란을 겪었고, 병자호란을 겪었고, 일제 강점기를 겪었으며, 한국 전쟁을 겪었다. 그들의 상처가 유전적, 문화적, 개인적 기억으로 나에게 전해졌다. 이것이 내가 선 땅이다.

그리고 그 땅 위에 — 1997년부터 17년 가까이 — 북미 대평원의 한 공동체와의 긴 동행이 포개져 있다. 매년 10일씩. 선교로 시작된 방문이 세월에 따라 관계가 되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축하하고, 함께 슬퍼했다. 공동체의 언어를 일부 배웠고(유창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의식에 참여했고, 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앉았다. 어느 해에 한 가족이 나를 친족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Debbie가 나의 누이가 되었다. 그 받아들임은 내가 한국인이기를 그만두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한국인인 채로 그들의 친족이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정체성은 여전히 한국인이다. 다만 나의 삶 안에 또 하나의 공동체가 있다. 내가 그들을 대변할 수 없고, 그들이 나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 있다. 그러나 — 17년 가까운 동행이 만든 곁의 관계가 있다. 그 관계가 내가 이 장을 쓰는 이유다.

곁에 서서 본 것

나는 사실 크리 공동체에서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Debbie 누나의 가족은 조건 없이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왜 원주민 공동체에 관여하느냐" 는 질문을 가끔 받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존재의 식민성이 내 몸에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을 정직하게 밝혀 둔다.

그러나 바로 그 곁에 서 있었기 때문에 — 질문의 구조 자체가 무기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받은 질문이 아니라, 내 누나와 조카들이 평생 받아 온 질문들. "너는 충분히 크리인가", "너는 왜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가", "너의 언어는 왜 사라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미 하나의 답을 전제하고 있다. 정상성은 질문하는 자 쪽에 있고, 증명 의무는 질문받는 자에게 얹힌다. 이것이 바야돌리드 법정에서 원주민이 서 있던 구조다. 500년이 지나 이름만 바뀌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내가 곁에 서서 본 것이 이 구조였다. 크리 공동체에서도, 안데스의 원주민 마을에서도, 일본의 전후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같은 문법, 다른 언어.

이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한국 사회 안쪽에 있다. 학계 안쪽에 있다. 서구 학문 언어 안쪽에 있다. 이 위치에서 — 내가 속한 사회의 질문 구조를 내부에서 드러내는 일 — 그것이 곁에 선 자의 몫이다. 원주민을 대신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내가 속한 세계 안에서, 그 세계가 타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어떤 함정을 품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 그것이 이 장이 하는 일이고, 나아가 이 책 전체가 하는 일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람들이다

Debbie 누나의 "They are our people." 이 한 문장이 이 장의 시작이었고 — 이 섹션의 마무리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 말을 할 때 — 그녀는 잉카인을 포함했다. 크리와 한국인이 "형제" 라는 것을 그녀와 나는 16년간의 관계로 알고 있다. 그녀가 이제 — 안데스의 잉카 후예도 "우리의 사람들" 이라 부른다. 왜?

그녀의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서로 친족이다. 같은 파도를 맞은 사람들. 같은 종류의 고통을 견딘 사람들. 같은 종류의 생존을 한 사람들. 이들은 —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 친족이다. 이것이 크리의 "친족 관계" 개념이다. Wahkohtowin. "모든 것이 친족으로 연결되어 있음."

이 개념이 나에게는 — 책 전체의 숨겨진 중심이었다. 내가 왜 쿠스코에 왔는지, 내가 왜 이 책을 쓰는지, 내가 왜 잉카와 조선과 크리를 함께 이야기하는지 — 모두 Wahkohtowin 때문이다. 다른 형태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모두 같은 행위다. 다른 언어로 표현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러나 구조는 동일하다.

그리고 Wetiko — 이 행위들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시스템, 이 행위들을 "미신" 이라 규정하는 시스템, 이 행위들을 하는 사람들을 "덜 문명화된 자" 로 분류하는 시스템 — 이 시스템이 세 문명의 공통 적이었다.

"They are our people." 그들은 우리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 동시에 — 우리는 그들의 사람들이다.

쿠스코 광장의 한 오후 — 살아있는 증거

이 장을 쓰는 도중, 나는 펜을 놓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아르마스 광장으로 걸어갔다. 쿠스코의 중심. 500년 전 투팍 아마루가 이 광장 한복판에서 네 말에 묶여 사지가 찢겼고, 참수되었다. 잉카 마지막 왕통이 끊어진 자리. 식민지 행정의 공식 의례가 매일같이 열린 자리. 지금은 관광객과 주민이 뒤섞여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평범한 광장이다.

내가 도착한 오후 —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축제였다. 페루 젊은이들 여러 그룹이 전통 춤을 추고 있었다. 다채로운 폴레라 치마, 깃털 장식, 마스크, 케나 피리와 차랑고 현악기. 어른들이 광장 가장자리에서 박수를 치고, 할머니들이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관광객들도 어느새 둘러서서 함께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광장 한편 돌 벤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알아차렸다 — 이 광장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엔 비비르(Buen Vivir)의 네 축이라는 것을.

아이니(Ayni) — 상호성. 춤추는 자와 보는 자, 연주하는 자와 박수 치는 자. 어느 쪽도 일방이 아니다. 춤이 박수를 불러오고, 박수가 다시 춤을 밀어올린다. 주고받음이 끊이지 않는다.

밍카(Minka) — 공동 작업. 이 춤은 한 사람의 공연이 아니다. 수십 명이 함께 짠다. 의상을 준비한 사람, 리허설을 이끈 사람, 악기를 나른 사람, 광장 시간을 조율한 사람 — 모두 보이지 않게 함께 만든 공간.

파차마마(Pachamama) — 대지와의 관계. 이 광장의 돌, 위로 보이는 안데스 산의 윤곽, 차가운 공기 — 춤이 이 모두와 함께 있다. 실내 극장이 아니라 땅 위에서 추는 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한 번의 기도가 반복된다.

팅쿠이(Tinkuy) — 만남. 노인과 젊은이, 현지인과 관광객, 케추아어 사용자와 스페인어 사용자, 페루 사람과 한국에서 온 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접점. 팅쿠이는 케추아어로 "서로 다른 흐름이 합류하는 지점" 을 뜻한다. 광장은 문자 그대로 그런 지점이 되고 있었다.

500년 전 이 자리에서 잉카의 왕이 처형되었다. 그 자리에서 지금 — 잉카의 후예들이 자발적으로, 즐겁게, 수많은 구경꾼 앞에서 자기 문화를 춤추고 있었다. 허가를 받아서가 아니다. 기념식이어서가 아니다. 그냥 오후에, 평상복처럼, 그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

나는 이 광경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한 장면이 이 장 전체의 논증을 뒤엎기 때문이다. 숫자와 통계로 보면 원주민은 패배했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북쪽 대평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매스카치의 파우와우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정확히 같은 네 축 — 상호성, 공동 작업, 대지, 만남 — 이 다른 언어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구조로 반복된다.

"우리가 죽지 않았다." Debbie 누나의 문장이 이 광장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잉카의 후예들은 죽지 않았다. 조선의 후예들은 죽지 않았다. 크리의 후예들은 죽지 않았다. 세 문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광장에 서 있었다.


결론: 밤하늘 아래 세 땅

이 장을 쓰고 나서 — 나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쿠스코의 밤. 안데스 고원의 찬 공기. 산들의 검은 윤곽이 멀리 보였다. 그 너머 북쪽으로 — 파나마, 멕시코, 미국 로키 산맥을 건너 — 캐나다 대평원이 있다. 그리고 그 서쪽 가장자리에 — 마스카치가 있다.

그리고 안데스와 평원 사이 어딘가에 — 내 또 다른 고향이 있다. 태평양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가, 한반도. 서울. 내가 태어난 도시.

같은 밤하늘 아래, 세 땅이 있다. 쿠스코. 마스카치. 서울. 이 세 곳이 — 위도와 경도로 보면 — 지구의 서로 다른 지점이다. 그러나 역사의 파도로 보면 — 같은 흐름 위의 다른 해변이다. 같은 시스템이 다른 얼굴로 도달한 세 곳.

그리고 — 각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아이를 기르고, 조상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죽는다. 그들이 만드는 일상이 — 세 땅 모두에서 — Wetiko에 대한 조용한 저항의 연속이다. 그들은 기념비적이지 않다.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 자기 공동체의 언어로 자기 조상을 기억하는 매일의 행위가 — 이 시스템의 완전한 승리를 막는다.

그들은 우리의 사람들이다.

이 문장을 다시 쓴다. 이 장의 제목 밑에 새겨두고 싶다.

진단에서 치유로

이 장을 마지막으로 진단은 여기까지다. 500년의 상처 아래에서도 다른 길이 있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그 다른 길 — 서로 안에 거하는 법, 흐름과 연결된 법 — 을 만난다. 이 길들은 잊혀진 것이 아니다. 묻혀 있었을 뿐이다. 다시 파내면, 거기 있다.

Debbie 누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 Wahkohtowin. 모든 것이 친족으로 연결되어 있음. 크리의 이 개념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각주

¹ 임진왜란의 인구 피해 추정에 관하여는 이태진, 〈임진왜란과 조선사회〉, 《역사학보》 157 (1998): 179-210. 인구의 30~40% 감소 추정이 일반적이나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² 임진왜란 의병의 규모에 관하여는 Samuel Hawley, The Imjin War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제5장.

³ 임진왜란 승병에 관하여는 최완수, 《석전집: 서산대사 휴정》 (서울: 지식산업사, 2001).

⁴ 명군 참전에 관하여는 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⁵ 크리족의 하위 구분에 관하여는 James G. E. Smith, "Western Woods Cree," in Handbook of North American Indians: Subarctic, vol. 6, ed. June Helm (Washington, D.C.: Smithsonian Institution, 1981), 256-270.

⁶ Treaty 6 체결 과정에 관하여는 Sharon Venne, "Understanding Treaty 6: An Indigenous Perspective," in Aboriginal and Treaty Rights in Canada, ed. Michael Asch (Vancouver: UBC Press, 1997), 173-207.

⁷ 원주민 관점의 Treaty 6 해석에 관하여는 Harold Cardinal and Walter Hildebrandt, Treaty Elders of Saskatchewan: Our Dream Is That Our Peoples Will One Day Be Clearly Recognized as Nations (Calgary: University of Calgary Press, 2000).

⁸ 19세기 초 북미 버펄로 개체수 추정은 Dale F. Lott, American Bison: A Natural Hist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⁹ 버펄로 학살의 원인 복합성에 관하여는 Andrew C. Isenberg, The Destruction of the Bison: An Environmental History, 1750-192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¹⁰ 셰리단 장군의 발언은 여러 역사적 자료에 인용된다. 정확한 원문은 David D. Smits, "The Frontier Army and the Destruction of the Buffalo: 1865-1883," Western Historical Quarterly 25 (1994): 312-338.

¹¹ James Daschuk, Clearing the Plains: 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Regina: University of Regina Press, 2013).

¹² 캐나다 인디언법과 기숙학교 제도에 관하여는 John S. Milloy, A National Crime: The Canadian Government and the Residential School System, 1879 to 1986 (Winnipeg: University of Manitoba Press, 1999).

¹³ 어민스킨 인디언 기숙학교의 역사에 관하여는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 Canada's Residential Schools: The History (Montreal and Kingston: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15), 제4부.

¹⁴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 Honouring the Truth, Reconciling for the Future: Summary of the Final Report of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 (Ottawa: TRC, 2015).

¹⁵ 프란치스코 교황의 2022년 마스카치 방문 및 사과 성명은 바티칸 공식 자료로 공개되어 있다. Pope Francis, "Meeting with Indigenous Peoples: First Nations, Métis and Inuit," Maskwacis, Canada, 25 July 2022.

¹⁶ 호비마 이름의 기원에 관하여는 캐나다 지명 위원회 기록 참조. Canadian Geographical Names Data Base.

¹⁷ 마스카치로의 공식 명칭 복원(2014.1.1)에 관하여는 Maskwacis Cree Nations의 공식 발표 자료 참조.

¹⁸ 캐나다 크리족 인구 통계는 Statistics Canada, 2021년 인구 센서스.

¹⁹ 크리어 사용자 수에 관하여는 Statistics Canada, Aboriginal Languages in Canada (2016 Census).

『페루-쿠스코-마추피추 여행기』 집필 중 · 생성: 2026. 4. 20. PM 8:2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