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같은 파도의 다른 해변 — 1492와 1592, 조선이 받은 충격파

도입: 시장에서 마주친 일본인 관광객

쿠스코 중앙 시장, 산 페드로 시장(Mercado San Pedro). 오후의 햇살이 지붕 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오고, 향신료와 과일과 구운 옥수수의 냄새가 섞여 있다. 나는 알파카 스웨터를 파는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색색의 전통 무늬가 들어간 스웨터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바로 옆 가게 앞에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이 있었다. 예닐곱 명 정도. 가이드를 따라 사진을 찍고, 서로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익숙한 관광객의 표정이었다 — 신기함, 약간의 피로, 카메라 뒤에 숨어 있는 편안함.

나는 한국인이다. 그들은 일본인이다. 우리 모두 이 땅의 외부자다. 페루에서 — 잉카의 후손이 사는 이 고원에서 — 우리는 모두 손님이다. 몇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아시아의 두 이웃 나라에서 온 방문객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감각이 나에게 왔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이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500년 전, 그러니까 1543년 —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했을 때 — 그 순간부터 일본은 유럽 식민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되었다. 조총을 받아들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상인들을 받아들였다. 50년 후인 1592년, 그 일본이 십자가 문양의 깃발을 들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조선을 침략했다.

나는 조선의 후예다. 이 일본 관광객들은 그 침략자들의 후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 500년 전 포토시에서 채굴된 은과 연결된 세계사의 흐름의 일부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을 가능케 한 일본의 부가 — 상당 부분 —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나왔고, 그 이와미 은광의 기술은 — 조선에서 유출된 연은분리법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지구의 한쪽에서 포토시의 원주민이 수은 중독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 지구 반대쪽에서 조선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이 — 1592년 한반도의 해안에서 만났다.

이 한 문단을 쓰기까지 나는 오래 생각했다. 이 연결이 사실인지 확신하기 위해.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감정적 투사가 아니라 실제 사건의 사슬인지 검증하기 위해. 검증은 가능했다. 이 장은 그 검증의 결과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내부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1492년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첫 세계화의 한반도 타격이었다. 이 명제가 이 장의 중심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장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학교에서 임진왜란을 배웠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라는 이분법적 사건으로 배웠다. 이 이분법은 정확하지만 — 불완전하다. 그것은 훨씬 큰 구조의 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보면, 임진왜란이 지금의 한국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드러난다.

나는 시장에서 스웨터를 하나 샀다. 케추아 여성이 직접 짠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웨터를 건네주었다. 나는 돈을 건넸다. 이 작은 교환이 — 500년 전부터 연결된 거대한 세계 경제 시스템의 한 부스러기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100년의 연쇄 — 1492에서 1592까지

사건의 사슬

이 장의 주장을 증명하려면, 먼저 1492년부터 1592년까지 100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연쇄를 봐야 한다. 단순한 목록이 아니다. 각 사건이 다음 사건의 조건이 되는 인과 사슬이다.

이 100년은 하나의 이야기다.

단일한 인과 사슬로 압축하면:

  1.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가고, 은이 발견되었다 (1492, 1545).
  2.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 인도 → 동남아 → 중국으로 해상 제국을 확장했다.
  3. 포르투갈이 일본에 도달해 조총과 기독교를 전파했다 (1542, 1549).
  4. 일본은 포르투갈을 통해 유럽 군사 기술을 흡수했다.
  5. 동시에 일본의 이와미 은광이 세계 은 생산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1530년대 이후).
  6. 일본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고 — 명나라의 은 경제 재편(일조편법, 1580s) 을 뒷받침했다.
  7. 일본 내부에서 이 은과 조총을 기반으로 다이묘들의 군사적 강화가 일어났다.
  8. 히데요시가 이 과정을 통일했다 (1590).
  9. 통일된 일본은 다음 목표로 — 대륙 침략을 선택했다 (1592).

이 사슬의 각 단계가 그 다음을 가능케 했다. 콜럼버스 없이 포토시가 없고, 포토시 없이 세계 은 시장이 없고, 일본 은광 없이 유럽 조총 구매가 없고, 조총 없이 히데요시의 군사력이 없고, 히데요시 군사력 없이 임진왜란이 없다.

임진왜란은 첫 세계화의 한반도 폭발이다. 더 이상 이 주장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

조총의 의미 — 다네가시마에서 한산도까지

1543년의 표류

1543년(혹은 1542년) 여름, 포르투갈 상인들이 탄 중국 정크선이 일본 큐슈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 에 표류했다.¹ 폭풍 때문이었다. 배에 탄 포르투갈인은 안토니우 다 모타(António da Mota), 프란시스코 제이모토(Francisco Zeimoto), 안토니우 페이쇼투(António Peixoto) 등 수 명이었다.

이들이 지방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 에게 선보인 것 중 하나가 — 화승총(火縄銃, matchlock arquebus) 이었다. 이것이 일본에 전래된 최초의 총기였다.²

도키타카는 이 무기의 군사적 가치를 즉각 알아보았다. 그는 포르투갈인에게 총을 두 자루 구입했다 —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금 1천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값에. 그리고 자기 영지의 무기 장인 야이타 킨베(八板金兵衛) 에게 이 총을 복제하라고 명령했다.

야이타는 총의 구조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연구했다. 대부분의 구조는 복제 가능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총신 뒤쪽을 막는 나사 마개가 풀리지 않았다. 이것이 풀려야 총신을 청소할 수 있고,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 이것은 다소 신빙성이 낮지만 문화적 상징성이 있다 — 야이타는 자기 딸 와카사(若狭) 를 포르투갈 상인에게 혼인시키기로 했다. 그 대가로 나사 마개 풀기 기술을 얻었다. 와카사는 배를 타고 포르투갈 상인과 떠났다. 혹은, 일부 연대기에서는 그녀가 가짜 혼인 후 기술만 빼내어 돌아왔다고도 한다.³ 어쨌든 — 1년 만에 야이타는 총을 완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조총 산업

이후 일본의 조총 복제와 생산은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었다. 야이타의 기술이 다른 장인들에게 전수되었다. 사카이(堺, 오사카 근처), 쿠니토모(國友, 시가현), 히노(日野) 등 일본 각지에 조총 생산 센터가 생겼다.⁴

50년 만에 — 즉 1590년경 — 일본은 세계 최대의 조총 생산국이자 사용국이 되었다. 정확한 수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여러 추정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에는 30만~50만 정의 조총이 있었다. 동시대 유럽 대륙 전체의 조총 수보다 많았다.⁵

왜 일본이 이렇게 빠르게 조총을 수용했는가. 당시 일본은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1467~1600) 였다. 100여 개의 지방 다이묘가 끊임없이 싸우는 내전의 시대. 각 다이묘는 군사적 우위를 얻기 위해 어떤 기술이든 채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총은 결정적이었다. 사무라이의 검술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였다.

1575년 나가시노(長篠) 전투가 상징적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가 이끈 서부 다이묘 연합이 3천 정의 조총3열 교대 발사 방식으로 사용해,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의 전통적 기병대를 대파했다.⁶ 이 전투는 일본 전쟁사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기록된다. 조총이 창칼을 이긴 것이 아니라, 산업적 무기 생산 체계장인적 무술 전통을 이긴 것이다.

이 전환을 이끈 것이 노부나가였고, 그를 이은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였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 일본 통일 후 — 다음 정복 대상을 찾았다. 그의 선택이 조선명나라였다.

조선의 상대적 지체

조선도 조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1589년경 대마도에서 조선에 조총 두 정을 선물한 기록이 있다.⁷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무기의 결정적 의미를 과소평가했다.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조선의 전쟁 경험 부족. 조선은 건국(1392) 이후 200년간 큰 전쟁이 없었다. 북방의 여진족 소규모 침입 외에는. 일본과는 왜구 문제가 있었지만 전면전이 아니었다. 이 평화의 시기가 군사 혁신에 대한 긴급성을 약화시켰다.

둘째, 유교적 문반 우위. 조선 사회에서 무관은 문관보다 낮게 평가되었다. 군사 기술 혁신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부족했다. 조총은 "기술자의 일"로 여겨졌고, 조정의 고위 결정권자들이 그 전략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더뎠다.

셋째, 화포 중심의 전통. 조선은 세종대부터 화포 기술을 독자 발달시켜왔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 다양한 구경의 화포가 있었다. 조선의 군사 전통은 대형 화포에 중심이 있었지, 개인 휴대 화기에 있지 않았다. 이 전통이 조총 도입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이다 — 조선의 화포 기술은 결코 일본보다 뒤지지 않았다. 특히 해전용 화포에서 조선은 월등했다.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의 결과를 설명한다.

한산도와 명량

일본군은 1592년 4월 부산 앞바다에 상륙했다. 약 15만 8천 명의 병력. 조총병 비율이 높았다. 육상 전투에서 조선군은 일본의 화력에 압도당했다. 부산이 함락되었다. 4월 30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불과 20일만에. 5월에 평양이 위태로워지고,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신했다.⁸

해상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전라좌수사. 그가 이끈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싸운 기록이 세계 해전사의 전설이 되었다.

1592년 5월 옥포 해전: 이순신의 첫 승리. 일본 함선 26척 격파. 1592년 6월 사천 해전: 거북선 최초 사용. 1592년 7월 한산도 대첩: 학익진 전술로 일본 함대 73척 중 59척 격파. 임진왜란의 전환점. 1597년 9월 명량 해전: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와 싸워 결정적 승리. 세계 해전사의 기적.⁹

이순신의 성공 비결은 여러 가지다. 탁월한 전술 감각. 엄격한 규율.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인격. 그러나 기술적 기반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 수군의 두 무기였다.

판옥선(板屋船): 조선의 주력 전함. 갑판 위에 별도의 구조물(판옥)을 세운 2층 구조. 높은 화력 배치. 일본의 평평한 갑판 함선에 비해 화포 사격 각도와 안정성에서 우월했다. 그리고 선체 자체가 더 튼튼해서 — 충돌 전투에서도 유리했다.

거북선(龜船, 귀선): 이순신이 실전 배치한 특수 전함. 갑판 위에 지붕을 덮고 철판이나 쇠못을 설치해 적의 상륙을 막는 구조. 사방에 화포. 전면에 용 머리 모양의 화포 배출구. 초기 돌격선으로 활용되어 적의 진형을 깨뜨렸다.¹⁰

그리고 이 두 함선에 실린 화포. 앞서 말한 조선의 대형 화포 체계. 천자총통이 약 300~500미터의 사거리. 일본 조총의 100~200미터 사거리를 훨씬 상회한다. 거리가 충분히 있을 때,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화력으로 압도했다.

즉 임진왜란 수군 전투에서 조선이 이긴 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술 우위였다. 조선의 과학기술이 일본보다 낮았다는 대중적 인식은 부정확하다. 분야에 따라, 특히 해전 기술과 화포 기술에서 조선은 세계적 수준이었다.

이 승리가 임진왜란의 전체 전략적 방향을 뒤집었다. 일본군은 병력을 한반도에 계속 공급할 수 없었다. 보급선이 끊겼다. 점령한 지역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고(1593), 의병과 승병이 봉기했다.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고, 결국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조선은 이겼는가. 이런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인구가 감소했다. 기술 장인들이 대량 납치되었다. 문화유산이 불탔다(경복궁 포함). 그러나 국가가 살아남았다. 왕조가 유지되었다. 이것은 잉카 문명이 겪은 것과는 다른 결과다.

14장에서 이 차이를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 조선 수군의 승리가 조선 과학기술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그리고 이 과학기술의 한 부분이 조선의 은 정련 기술이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술이 일본으로 가서 이 침략의 자금을 만들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세스페데스 신부 — 조선에 온 가톨릭

키리시탄 다이묘

임진왜란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 다. 일본군 제1번대 사령관. 부산 상륙의 선봉. 그러나 그를 단순히 "일본의 장수"로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¹¹

고니시의 가문 배경부터 보자. 그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부로(小西立佐) 는 원래 사카이의 상인 출신이었다. 명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은 상인 계층. 그가 포르투갈 가톨릭 선교사를 만나 개종했고, 자식들에게도 세례를 받게 했다. 유키나가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gostinho).

그의 어머니 와쿠사(若狭, 세례명 막달레나)독실한 가톨릭이었다. 유키나가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16세기 후반 일본에는 이런 키리시탄 다이묘(기독교 영주) 가 여럿 있었다. 큐슈 지역 영주들이 특히 많았다 — 오토모 소린,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등. 이들은 포르투갈 선교사의 영향과 유럽 무역의 이익을 함께 추구했다. 1580년대에는 일본 전역에 기독교 신자가 30만 명에 달했다고 추정된다.¹² 인구 약 1,200만 명의 일본에서 2.5%. 적지 않은 비율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도 이 흐름 속에 있었다. 그의 군대의 깃발 중 일부는 붉은 십자가 문양이었다.¹³ 그의 군대에는 일본인 가톨릭 병사가 많았다. 그리고 — 가장 놀랍게도 — 유럽 선교사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 예수회 신부. 그가 한반도 땅을 밟은 최초의 유럽인이었다.¹⁴

세스페데스는 1577년 일본에 도착해 10년 넘게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키리시탄 공동체의 신임을 받았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친분이 깊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 고니시의 군영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기독교 신자 병사들의 신앙 관리였다. 한반도에는 신부가 없었다. 고해성사, 미사, 병자 성사 등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 일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니시가 요청했다 — 신부 한 명을 전선에 파견해달라고.

예수회 일본 관구장은 세스페데스를 파견했다. 그와 함께 일본인 수사 한칸 레온(Han Kan Leon). 두 사람은 1593년 12월 말 또는 1594년 1월 초, 웅천(熊川, 현 진해) 의 일본군 진영에 도착했다.¹⁵

세스페데스는 약 1년간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주로 일본군 진영 내에서 신앙 활동을 했다. 일본인 가톨릭 병사들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전사자를 위한 장례 미사를 올렸다. 편지를 마닐라의 상급자에게 보냈다 — 그 편지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 한반도에서의 그의 경험을 전한다.

그의 편지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1594년, 일본에서 멀지 않은 고마쿠라(Komakura, 조선) 의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의 추위는 일본보다 훨씬 심하다. 바람이 대륙에서 불어온다. 밤에 우리의 손발이 얼어붙어 성경을 넘길 수 없다."¹⁶

그가 한반도의 기후와 풍경을 묘사하는 이 문장들이 — 유럽인이 한반도에서 남긴 최초의 직접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 민간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 진영 내부에서만 활동했다. 그의 선교 대상은 일본군 이었지 조선 백성이 아니었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역사의 역설이다. 조선 땅에 온 최초의 유럽 기독교인이 — 조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침략군에게 성사를 집전했다. 조선의 기독교는 세스페데스와 무관하게, 200년 후인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 북경을 통해 시작되었다. 세스페데스의 방문은 조선 종교사에는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

피사로-발베르데와 고니시-세스페데스

그러나 구조적 평행이 있다. 60년의 시간을 건너.

6장에서 나는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의 오후를 재구성했다. 피사로가 168명으로 잉카 광장에 들어갔을 때, 그의 옆에는 도미니코 수도사 비센테 데 발베르데가 있었다. 발베르데가 기도서를 든 채 아타우알파 앞에 섰다. "요청 선언"을 읽었고, 아타우알파가 책을 떨어뜨리자 "성서 모독"을 선포했다. 그 직후 학살이 시작되었다.

피사로-발베르데. 군사 지휘관과 수도사의 짝. 정복과 선교의 결합.

고니시-세스페데스. 일본 장군과 예수회 신부. 조선 침략과 선교의 결합.

60년의 시간 차이. 지구 반대편. 그러나 구조가 동일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16세기 유럽 식민지 군사 원정의 표준 구성이 이것이었다. 군대와 함께 성직자가 간다. 정복이 곧 선교의 기회이고, 선교가 곧 정복의 정당화다. 피사로와 발베르데가 한 것이 카리브해에서 반복되었고, 필리핀에서 반복되었고, 일본에서 반복되었으며, 이제 한반도에서 — 약간 형태를 바꿔 — 반복되었다.

물론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일본군 내부의 신앙 관리였다.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 유럽 식민 네트워크가 한반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본이 포르투갈-스페인 가톨릭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이 조선의 해안까지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 핵심적으로 — 고니시의 군대가 조총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 상인과의 50년간의 무기 거래 덕분이었다. 그 무기 거래는 일본의 으로 결제되었다. 그 은의 상당 부분이 — 조선 기술에 기반해 채굴된 것이었다.

이 사슬을 보면, 임진왜란이 단순한 한일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유럽 제국주의, 가톨릭 네트워크, 세계 은 경제, 동아시아 내부 정치 의 복합 교차점이 한반도에서 폭발한 것이다.

연은분리법 유출 — 비극적 아이러니

김감불과 김검동

이제 이 장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조선의 은 정련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된 사건. 이 유출이 없었다면, 일본은 세계적 은 생산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임진왜란의 자금도 없었을 것이다.

1503년, 조선 연산군 9년. 양반이 아닌 중인 또는 평민 기술자였던 김감불(金甘佛)김검동(金儉同) 이라는 두 사람이 새로운 은 정련 방법을 개발했다.¹⁷ 이것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한자로 회취법(灰吹法) 이라고도 불린다.

이 기술은 혁신적이었다. 납과 은이 섞인 광석에서 은만 분리하는 방법.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납이 섞인 은광석을 녹여 납 합금을 만든다.
  2. 이 납 합금을 다공성 재(灰) 위에서 가열한다.
  3. 납은 산화되어 재에 흡수된다 (일산화납, PbO).
  4. 은만 순수한 상태로 남는다.

이 방법은 전통적 방식보다 훨씬 높은 순도의 은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처리 속도도 빨랐다. 조선 조정에 이 기술이 보고되었고, 연산군은 관심을 가졌다. 단천 은광 등에서 시험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 조선 조정은 이 기술의 대규모 활용을 망설였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¹⁸

첫째, 중국과의 외교 문제. 조선의 은 생산이 크게 늘면, 명나라의 은 수탈 요구도 커질 것이 우려되었다. 공물 증액.

둘째, 사회적 혼란 우려. 은이 쉽게 생산되면 사회 경제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보수적 판단. 유교적 사회관 — 본업은 농업, 상업은 보조 — 이 영향을 미쳤다.

셋째, 기술자 계층에 대한 경계. 연은분리법은 중인/평민 기술자에 의해 개발되었다. 조선 양반 엘리트는 이들의 신분이 오르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조선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시기에는 금지하기도 했다. 은광 운영이 중단되고, 기술자들은 일거리를 잃었다.

1533년 — 기술의 유출

여기서 결정적 일이 일어났다.

1533년경, 두 명의 조선인 기술자 종 김주 조(宗旨朝)금적(金跡) 또는 기록에 따라 다른 이름들 — 이 일본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谷寿禎) 에 의해 일본으로 데려가졌다.¹⁹ 이들이 일본 이와미(石見) 의 은광 기술자들에게 연은분리법을 전수했다.

정확한 상황은 연구자에 따라 재구성이 다르다. 일부는 자발적 이주 였다고 한다. 일부는 납치 또는 매수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과 일본 간에 반공식적 인적 왕래가 있었고, 기술자가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간 경우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 결과는 명확하다. 1533년 이후 일본 이와미 은광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수십 배. 그리고 이 기술은 이와미에서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

이와미 은광의 부상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은 일본 서부 시마네 현에 있다. 소규모 채굴은 12세기부터 있었지만, 연은분리법이 들어온 후 — 전혀 다른 차원의 생산이 시작되었다.²⁰

16세기 중반, 이와미는 세계 은 생산의 약 1/3을 차지하게 되었다. 포토시 다음으로 중요한 은 생산지였다. 정확한 수치:

이 은은 어디로 갔는가. 중국으로. 일본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 은을 명나라에 팔았다. 대신 중국산 비단, 도자기, 무기를 받았다. 일부는 국내 정치 권력에 집중되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은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이와미 은 = 포르투갈 무역을 통한 군사 기술 구매 + 국내 정치 자금. 이 두 용도가 합쳐져, 일본을 군사적으로 통일하고 유럽식 전쟁 기술로 무장시키는 결정적 자원이 되었다.

그리고 — 이 모든 것의 기반에 조선의 연은분리법이 있었다.

비극적 아이러니

조선의 기술이 조선을 침략한 무기의 자금이 되어 돌아왔다.

이 문장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1503년 김감불과 김검동이 연은분리법을 개발했다. 조선은 이 기술을 활용하지 않았다. 억압하기도 했다. 1533년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갔다. 일본 이와미 은광이 세계적 규모로 커졌다. 일본은 이 은으로 포르투갈 조총을 샀다. 일본 내부 통일이 이루어졌다. 히데요시가 등장했다. 1592년, 그 은으로 무장한 조총 부대가 부산 앞바다에 상륙했다. 그들이 가져온 총은 유럽에서 왔고, 유럽에서 그 총을 사게 한 돈은 — 조선이 버린 기술이 만든 은이었다.

이 사슬이 역사의 가장 잔혹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조선이 지키지 않은 자신의 보물이, 60년 후 조선을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교훈은 매우 현대적이다. 한 국가가 자기 기술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다른 국가가 그것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 기술이 — 심지어 자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20세기와 21세기 한국이 기술 보호와 기술 자립 에 그토록 민감한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16세기의 이 경험이 — 집단 무의식 어딘가에 — 남아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임진왜란 = 첫 세계화의 한반도 타격

종합적 해석

이제 이 장의 중심 주장을 정리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작동한 세계 시스템의 요소들을 나열해 보자.

1.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 일본에 조총과 기독교를 전파.

2. 아메리카 은. 마닐라 갤리온을 통해 아시아 경제 재편. 명나라 은본위 체제가 가능해진 배경.

3. 명나라의 은 수요. 동아시아 전체 경제 변동. 이 수요가 일본 은 생산에 대한 유럽 자본의 투자를 정당화.

4. 일본 은 생산. 조선 연은분리법 유출을 통해 가능해진 이와미 은광의 폭발적 성장.

5. 일본 내부의 정치적 통합. 센고쿠 시대의 수세기 내전 끝에 노부나가-히데요시의 통일. 이 통일이 가져온 잉여 군사력의 처리 문제.

6. 기독교 네트워크. 예수회의 아시아 진출과 키리시탄 다이묘의 군사력. 고니시와 세스페데스의 조합.

7. 조선의 전쟁 준비 부족. 200년 평화의 부작용. 조총의 의미 과소평가.

이 모든 요소가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내부 사건이 아니다. 일본이 그냥 갑자기 쳐들어온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 자본과 기술과 종교의 흐름이 수십 년간 축적되어 한반도에 집중된 결과다. 그리고 그 흐름의 시작점은 1492년 콜럼버스였다.

이 해석이 한국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임진왜란을 수동적 피해자의 역사로 기억해왔다. 일본이 갑자기 쳐들어왔고, 우리는 견뎠고, 이겼거나 살아남았다. 이 서사는 부정확하지 않지만 — 불완전하다. 그것은 조선을 세계사의 외부자로 위치시킨다. 마치 조선이 세계와 연결되지 않은 고립된 왕국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조선은 세계화의 외부자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1500년대 초부터 세계 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조선의 기술이 일본으로 흘러갔다.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로, 명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럽의 물품과 정보와 접촉했다. 조선도 작지만 첫 세계화의 행위자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 조선이 이 세계 시스템의 폭력을 처음 직접 경험한 사건이었다. 그 이전까지 조선은 비교적 평화롭게 세계 시스템의 주변부에 있었다. 1592년 이후에는 — 직접적 타격의 현장이 되었다.

이 경험이 조선의 집단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이후 400년의 한국사 — 병자호란, 개항,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개발 독재, 민주화 — 이 모든 것이 첫 세계화의 파도가 가져온 충격에 대한 반응의 연속이다.

이것은 반일 서사가 아니다

한 가지 짚어야 한다. 이 해석은 반일 감정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일본도 — 이 시스템의 능동적 참여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다. 일본 농민들은 히데요시의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많은 일본 병사가 한반도에서 죽었다. 전쟁은 일본 내부 정치도 흔들었다(1598년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 →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후 박해받았다(17세기 키리시탄 박해).

그리고 일본이 수용한 유럽 기술과 종교는 — 일본을 근대화의 궤도에 올렸지만, 동시에 근대적 식민주의 욕망도 심어주었다. 이 욕망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을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자로 만들었다. 조선, 대만, 중국, 동남아시아에 미친 피해. 일본 자신은 이 궤적의 종착점에서 원폭과 점령을 경험했다.

즉 — 일본이 조선에 가한 폭력은 일본의 고유한 악이 아니다. 그것은 Wetiko가 일본을 통해 작동한 결과다. 같은 Wetiko가 유럽을 통해 아메리카에 작동했고, 영국을 통해 인도에 작동했으며, 20세기에는 미국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작동했다. Wetiko는 국가를 선택하지 않는다.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 꽃핀다.

이 관점이 한국인에게도 해방적이다. 우리의 피해자 서사를 민족적 원한으로만 읽지 않고, 세계사적 구조의 산물로 이해하면 — 미래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일본에 대한 원한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인정). Wetiko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

이 관점이 14장에서 — 잉카, 조선, 크리 세 문명의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세 문명이 모두 Wetiko의 파도를 맞았다. 결과가 달랐다. 왜 달랐는지가 14장의 질문이다.

결론: 시장의 끝에서

시장에서 알파카 스웨터를 산 뒤, 나는 시장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쿠스코의 좁은 골목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 돌바닥에 오후의 긴 그림자가 졌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어디에 갔을까. 아마 그들도 다른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저녁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쿠스코의 시장에서 스쳐 지나간다. 우리 사이에는 공유된 역사가 있다. 공유된 상처와 공유된 책임이 있다. 그리고 공유된 연결 — 500년 전부터 이어진 — 이 있다.

이 연결을 의식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이 연결을 의식하는 일본인도 드물다. 양쪽 모두 서로를 이웃 국가의 국민으로만 본다. 민족주의적 원한, 혹은 민족주의적 우월. 둘 중 하나의 렌즈로.

그러나 — 우리 둘 다 더 큰 파도 속에 있다. 500년 전 대서양에서 시작해 태평양을 건너온 파도. 포토시의 원주민과 카리브해의 노예와 일본의 키리시탄과 조선의 백성들 — 우리 모두의 조상이 이 파도의 일부였다. 어떤 이는 파도 안쪽에, 어떤 이는 파도에 쓸려나갔다. 그러나 누구도 파도 바깥에 있지 않았다.

이 인식이 — 민족주의적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유한 역사가 있듯이, 한국인과 페루 원주민이 공유한 역사도 있다. 일본인과 필리핀인, 일본인과 베트남인, 일본인과 중국인도 각각 공유한 역사가 있다. 이 모든 연결을 가해자-피해자의 단순 구도로만 읽으면 —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대신 — 모두 Wetiko 시스템의 일부였다는 인식. 그 시스템을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 이것이 21세기에 필요한 시선이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 — 다른 경로로 이 시스템에 휘말렸지만, 결국 같은 시스템의 다른 표현이었던 역사.

다음 장 — 세 운명의 비교

그러나 — 같은 파도를 맞았다고 해서 운명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문명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어떤 문명은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았다. 어떤 문명은 완전한 소멸은 피했지만 깊은 상처를 안았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세 문명의 운명을 비교한다. 잉카. 조선. 그리고 — 내가 16년간 가까이 살아온 캐나다 평원의 크리.

세 문명 모두 Wetiko의 파도를 맞았다. 결과가 달랐다. 왜?

이 질문이 책 전체의 정서적 절정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 — 내가 이 책 처음부터 암시해온 개인적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누이 Debbie. 마스카치. 몬타나 퍼스트 네이션. 1997년부터 2013년까지 거의 매년 10일씩 이어진 선교와 공동체 방문. 그 긴 동행 안에서 한 가족의 친족으로 받아들여진 한국인의 시선으로, 세 문명을 곁에서 증언하는 이야기.

책 전체가 이 순간을 향해 걸어왔다. 다음 장이다.


각주

¹ 다네가시마 조총 전래의 연대는 1542년과 1543년 사이에 사료별로 차이가 있다. 본서는 다수설인 1543년을 따른다. Olof G. Lidin, 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Copenhagen: NIAS Press, 2002).

² 위의 책, 제2장.

³ 야이타 킨베와 그의 딸 와카사의 이야기는 일부 일본 전승에 나타나지만, 역사적 확증은 제한적이다. Lidin (2002), 제3장.

⁴ 일본 조총 산업의 확장에 관하여는 Noel Perrin, Giving Up the Gun: Japan's Reversion to the Sword, 1543-1879 (Boston: David R. Godine, 1979).

⁵ 16세기 말 일본 조총 수 추정은 위의 책 제1장.

⁶ 나가시노 전투에 관하여는 Stephen Turnbull, Nagashino 1575: Slaughter at the Barricades (Oxford: Osprey, 2000).

⁷ 대마도의 1589년 조선 조총 선물에 관하여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 7월 기사.

⁸ 임진왜란 초기 전황에 관하여는 Samuel Hawley,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⁹ 이순신의 주요 해전에 관하여는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서울: 청어람미디어, 2004).

¹⁰ 판옥선과 거북선에 관하여는 이원식, 《한국의 배》 (서울: 대원사, 1990).

¹¹ 고니시 유키나가의 생애에 관하여는 송상현, 〈고니시 유키나가 재평가〉, 《역사비평》 (2005, 가을호).

¹² 16세기 일본의 기독교 신자 수 추정은 George Elison, Deus Destroyed: The Image of Christianity in Early Modern Japa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¹³ 고니시 군대의 기독교 상징에 관하여는 Hawley (2005), 제2장.

¹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의 생애와 한반도 방문에 관하여는 박철, 《세스페데스: 한국 방문 최초 서구인》 (서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3).

¹⁵ 세스페데스의 웅천 도착에 관하여는 위의 책, 제3장.

¹⁶ 세스페데스의 편지는 여러 연구자들이 번역·인용했다. 본문의 인용은 저자의 종합 번역.

¹⁷ 연은분리법 개발에 관하여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9년(1503) 5월 기사.

¹⁸ 조선이 연은분리법을 적극 활용하지 않은 이유에 관하여는 이태진, 〈16세기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팽창과 조선의 반응〉, 《한국사론》 43 (2000): 1-47.

¹⁹ 1533년경 조선 기술자의 일본 유출에 관하여는 위의 논문, 그리고 일본 측 자료로 소노다 이치로(園田一郎), 《석견 은산 사》(石見銀山史, 동경, 1974).

²⁰ 이와미 은광의 역사에 관하여는 타무라 우메오(田村梅夫), 《석견 은산》(石見銀山, 동경: 국립 역사 민속 박물관, 2007).

²¹ 이와미 은 생산량 추정은 위의 책, 그리고 Dennis O. Flynn and Arturo Giráldez, "Born with a 'Silver Spoon': The Origin of World Trade in 1571," Journal of World History 6, no. 2 (1995): 201-221.

『페루-쿠스코-마추피추 여행기』 집필 중 · 생성: 2026. 4. 20. PM 8:2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