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잉카 박물관의 2층, 식민지 시대 전시실. 한 유리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 오래된 은화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지름 약 4센티미터, 두께 약 2밀리미터. 한 면에는 스페인 왕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PLVS VLTRA(더 멀리)" 라는 글귀가 있다. 해라클레스의 기둥은 지중해 서쪽 끝 — 고대 세계의 경계 — 를 상징했다. "더 멀리"는 스페인 제국의 모토였다. 그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간다는 선언.
가장자리에 새겨진 작은 글자들 중 "POTOSI" 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1760년이라는 날짜. 이 동전은 포토시 은광에서 캐낸 은으로 주조된 8레알(8 reales) 은화였다. 스페인어로는 "페소(peso)", 그리고 이 동전의 무게를 따서 "페소 데 오초(peso de ocho)" 또는 영어권에서 "피스 오브 에이트(piece of eight)" 라 불렸다.
이 작은 쇠붙이 하나가 18세기 세계 경제의 기축 통화였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다시 아메리카로, 이 동전이 지구를 돌았다. 마르코 폴로의 베네치아 상인들이 썼고, 에도 시대 일본 무사들이 가졌으며, 중국 명나라 상인들이 결제에 사용했고, 필라델피아 식민지 정착자들이 세금으로 냈다. 세계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화폐였다.
그리고 이 은화 하나에는 — 원주민의 피 한 방울이 섞여 있다.
이것은 시적 과장이 아니다. 이 동전의 은은 포토시라는 이름의 볼리비아 고원의 산에서 왔다. 해발 4,090미터의 차갑고 건조한 고산. 그 산의 지하에서, 1545년부터 약 280년간, 약 4만 5천 톤의 은이 추출되었다.¹ 그리고 그 추출 과정에서 — 역사학자들의 보수적 추정으로도 — 약 800만 명의 원주민이 죽었다.²
한 동전에 담긴 은의 양은 약 27그램. 그 양의 은을 추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했는가. 얼마나 많은 폐가 수은 중독으로 망가졌는가. 얼마나 많은 가족이 분리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동전의 반짝이는 표면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 있다.
이 장은 그 은의 전 지구적 여정을 추적한다. 포토시의 지하에서 시작해 — 스페인의 세비야를 거쳐 —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중국까지. 그 여정이 만든 것이 인류 최초의 진정한 세계화였다. 1980년대의 어떤 논문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19세기 자유무역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1571년, 한 무역선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로 출항한 해. 그 때부터 지구가 처음으로 하나의 경제 시스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연료는 원주민의 고통이었다.
1545년, 볼리비아 중남부 안데스 고원. 디에고 구알파(Diego Gualpa) 라는 원주민 양치기가 있었다. 그는 고원의 한 봉우리 — 원주민 언어로 "쿠물리 우루쿠(qullqi urqu, 은의 산)"라 불렸던 — 에서 라마 떼를 몰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는 강풍을 피해 바위에 몸을 붙였다. 그 순간 바위가 기울었고, 그 아래 붉은 빛을 띤 광맥이 드러났다. 구알파는 스페인 정착지에서 광부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 붉은 빛이 무엇인지 알았다. 은맥이었다.³
그는 이 발견을 한동안 혼자 간직했다. 그러나 결국 스페인 정착자 한 명에게 알렸다. 소문이 퍼졌다. 1545년 4월, 스페인 정복자 후안 데 비얄로엘(Juan de Villarroel) 이 공식적으로 이 산을 스페인 왕실의 이름으로 등록했다. 그 산의 이름이 바뀌었다. "세로 리코(Cerro Rico)" — "풍요의 산".
세로 리코의 지질학적 조건은 극단적이었다. 해발 4,090미터. 연 평균 기온 영하에 가깝고, 산소가 희박하며,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고원. 인간이 장기 거주하기에 최악의 조건 중 하나. 그러나 그 산의 지하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은 광맥이 있었다.
1545년 발견 직후, 정착자들이 몰려왔다. 스페인 본국에서, 다른 식민지에서, 원주민 마을에서. 첫 해에 수백 명이, 이듬해에는 수천 명이, 10년 내에 수만 명이 모였다. 포토시는 급속히 도시로 성장했다.
규모의 증가 속도가 놀랍다.⁴
1611년의 인구 약 15만 명.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비교해보자.
즉 포토시는 당시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해발 4,000미터의 사막 고원에. 식량도, 물도, 나무도 자연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곳에.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 은. 은이 충분한 경제적 인력을 만들어 인간 모든 것을 외부에서 수입할 수 있게 했다.
포토시 시내의 풍경은 기묘했다. 호화로운 스페인식 저택, 거대한 교회, 극장, 투우장이 해발 4,000미터에 지어졌다. 세비야와 리스본에서 수입한 비단옷을 입은 스페인 귀부인들. 중국 광동에서 온 도자기 그릇.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 올리브유. 포토시의 스페인 엘리트는 전 세계의 상품을 누렸다. 이 사치가 가능한 것은 — 산 아래의 원주민 노동 때문이었다.
포토시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도시를 두 부분으로 나눠 보아야 한다.
산 위 — 세로 리코 자체. 광부들이 일하는 갱도. 해발 4,000~4,800미터. 겨울에는 영하 20도 이하. 일 년 내내 산소 농도가 낮아 숨이 찬다. 갱도는 좁고, 어둡고, 먼지로 가득하다. 어린아이도 들어갈 만한 틈새를 통해 광부들이 광맥을 따라 파고든다. 램프의 기름 연기가 폐를 채운다. 광맥에서 나오는 수은 증기가 공기에 섞인다.
산 아래 — 포토시 시내. 스페인 정착자들의 세계. 해발 4,000미터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저택 벽난로에서 불이 타고, 식탁에 따뜻한 요리가 올라오며,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한다. 광부들이 캐어 올린 은이 아말감 공정소로 가서 정제되고, 왕실 조폐소에서 은화로 주조된다. 매일 수십 마리의 라마가 정제된 은을 싣고 태평양 연안 항구로 출발한다.
이 두 세계는 같은 포토시에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산 위의 인간은 존재의 극한에서 일한다. 산 아래의 인간은 세계 제국의 풍요를 누린다.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은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20만 명의 사람을 해발 4천 미터의 고원에 살게 한다.
이 구조가 곧 Wetiko의 경제적 구현이다. 한쪽의 극단적 추출이 다른 쪽의 극단적 소비를 유지한다. 둘 중 어느 쪽도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묶여 있다. 그리고 시스템의 존속을 위해 이 비대칭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1장에서 나는 잉카 제국의 미타(mita) 시스템을 자세히 소개했다. 순환적 공동 노동. 케추아어로 "차례"를 뜻하는 말. 국가가 음식, 술, 의복을 제공했고, 건설 현장이 축제와 겹쳤으며, 노동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95년의 잉카 제국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그 시스템.
1533년 스페인 정복 후, 잉카 국가는 사라졌다. 그러나 미타라는 이름은 남았다. 스페인은 이 제도를 자기 식으로 이어받았다. 형식은 유지했다. 이름도 유지했다. 그러나 내용을 완전히 바꿨다.
결정적 순간은 1573년, 페루 총독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의 법령이었다.⁵ 7장에서 우리는 톨레도를 이미 만났다. 1572년 투팍 아마루를 처형한 그 총독. 그는 잉카의 정치적 저항을 끝낸 다음, 잉카의 제도를 자기 목적에 맞게 재편했다.
톨레도 법령의 핵심:
논리적으로 이것은 잉카 미타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순환적이고, 의무적이며, 모든 성인 남성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잉카 미타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제도가 정반대의 일을 했다. 이것이 Wetiko의 교묘한 작동이다. 관계적 전통을 그 형식만 빌려서 추출의 도구로 변환한다.
포토시 광산의 노동 자체가 극심했지만, 특히 아말감 공정(amalgamation) 이 가장 치명적이었다.⁶
은광석에서 은을 분리하는 데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제련법(광석을 녹여 은을 추출)과 아말감법(광석을 수은과 섞어 은만 결합시키는 방법).
1554년, 스페인 광부 바르톨로메 데 메디나(Bartolomé de Medina) 가 멕시코에서 아말감법을 개선했다.⁷ "파티오 프로세스(patio process)"라 불리는 이 방법은 광석을 수은과 섞고, 소금을 추가한 뒤, 원주민들이 맨발로 밟아 섞는 과정을 포함했다. 수 주 동안 이 반죽을 밟고 섞은 후,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키면 순수한 은이 남는다.
이 공정이 왜 치명적인가. 수은은 강한 신경독이다. 맨발 피부로 흡수된다. 증발한 수은 증기는 폐로 들어간다. 가열 과정에서 작업자들은 수은 증기에 완전히 노출된다. 수은 중독은 되돌릴 수 없는 뇌 손상, 신경계 파괴, 근육 경련, 치아 탈락, 신장 기능 상실을 일으킨다. 말기 단계의 수은 중독자들은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스페인 연대기는 이런 사람들을 "모쿠로소(mocuroso)" 라 불렀다. "움직이지 않는 자", 또는 더 잔인한 번역으로 "걸어다니는 시체".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여러 기록이 — 포토시 광부들의 말기 수은 중독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스페인어 원어로 "모쿠로소(mocuroso)" 라 불린 사람들의 모습: 손발이 떨리고, 혀가 붓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자기 이름조차 잊는다. 임종 직전에야 성사를 받지만 — 많은 경우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은 포토시에서 이름 없이 죽었다.⁸
당대 선교사들의 이름은 일부 남아 있다. 그들이 묘사한 광부들의 이름은 —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정확한 수치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기록이 부실하기도 하고, 죽음의 원인(광산 사고, 수은 중독, 기아, 질병, 과로)을 구분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대략적 추정을 시도했다.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는 1971년 『라틴아메리카의 열린 혈관(Las venas abiertas de América Latina)』에서 약 800만 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했다.⁹ 이후 연구자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보수적 추정은 300만~500만 정도.
그러나 최소 추정치만 잡아도 — 300만 명의 죽음은 20세기 대학살에 비교할 만한 규모다. 홀로코스트(600만), 르완다 대학살(80만), 관동대학살(수십만 명)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포토시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왜? 가해자가 공식 기록을 썼고, 피해자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숫자를 하루 단위로 환산해보면 더 구체적이다. 300만 명이 280년간 죽었다면, 하루 평균 약 29명. 해발 4,000미터의 어느 갱도에서, 매일, 새로운 29명이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사고로, 중독으로, 탈진으로. 그리고 그 자리를 매일 새로운 29명이 채웠다. 280년간, 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름이 있었다. 가족이 있었다. 고향의 밭이 있었다. 그들이 두고 온 아내와 자녀와 부모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 세로 리코의 어둠 속에서 — 사라졌다.
내가 박물관의 은화 앞에 오래 서 있던 이유가 이것이다. 이 한 개 동전에 — 수십 명의 생명이 녹아 있을 수 있다. 그 생명들의 이름은 우리가 모른다. 그러나 이 동전이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 그들이 있었다는 침묵의 증언이다.
1571년, 세계사의 한 결정적 전환점이 생겼다.
스페인 탐험가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02~1572) 가 이끄는 탐사대가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해 정착지를 세웠다.¹⁰ 마닐라는 곧 태평양 횡단 무역의 허브가 되었다.
노선은 단순했지만 혁명적이었다. 멕시코 아카풀코 → 마닐라 → 광동(廣東, 중국 남부). 그리고 반대 방향. 이 항로를 "갈레온 데 마닐라(Galeón de Manila)" 라 불렀다. 스페인어로 "마닐라 갤리온". 대형 범선이 연 1~2회 이 태평양을 횡단하며 세계 경제를 통합했다.
1573년부터 1815년까지 242년간, 이 항로가 지속되었다.¹¹ 250척 이상의 갤리온이 아카풀코와 마닐라 사이를 왕복했다. 각 갤리온의 적재량은 약 1,000~2,000톤. 태평양 횡단 항해에는 평균 6개월이 걸렸고, 사망률이 높았다. 많은 배가 난파되거나 해적에게 약탈당했다.
그러나 이 무역의 이익은 거대했다. 왜냐하면 — 교환 비율이 극도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갤리온이 운반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포토시에서 캐낸 은. 그리고 아메리카산 카카오, 담배, 색소.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중국에서 온 비단, 도자기, 차, 향신료, 칠기.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면직물, 보석, 아편.
핵심 교환은 은과 중국 상품이었다. 그리고 이 교환이 세계 경제의 축을 재편했다.
왜 중국이었는가. 이것이 이 장의 핵심 질문이다.
1567년, 중국의 명나라는 중대한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¹² 일조편법(一條鞭法) 이라 불리는 이 개혁의 핵심은 — 세금과 공물을 모두 은으로 납부하도록 통일한 것. 이전에는 현물(곡식, 직물, 노동)로도 세금을 낼 수 있었지만, 이제 은만 받는다.
이 개혁이 시행되면서, 중국의 은 수요가 폭발했다. 수천만 명의 농민이 갑자기 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국내의 은 생산은 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은이 수입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수입원이 — 포토시였다.
이때부터 세계 은의 40~60%가 최종적으로 중국으로 흘러들었다.¹³ 포토시에서 캐낸 은이 세비야로 갔다가, 다시 마닐라 갤리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가, 마닐라에서 중국 상인에게 팔린 후, 광동을 거쳐 중국 내륙으로 들어갔다. 또는 포토시에서 직접 아카풀코 → 마닐라 → 중국으로 갔다.
이 흐름이 지구 규모의 무역 불균형을 만들었다. 유럽은 중국에 팔 것이 없었다. 중국은 자급자족적이었고, 유럽의 직물이나 제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반면 유럽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를 원했다. 교환의 균형을 맞추는 유일한 방법이 — 은이었다. 그래서 세계 은의 상당 부분이 중국으로 흘러들었고, 그 대가로 중국 상품이 유럽으로 나갔다.
이 무역 패턴이 2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패턴이 19세기 아편 전쟁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영국이 중국의 차를 수입하기 위해 은을 지불하다가 무역 적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해 은을 되찾으려 했다. 그 결과가 1840년 아편 전쟁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 장의 범위 바깥이다.
서양 역사 교과서는 오랫동안 16~18세기를 "유럽 우위의 시작" 으로 묘사해왔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이 서사는 부정확하다.
1998년, 미국 경제사학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1929~2005) 가 혁명적 저작을 출간했다. 제목은 『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¹⁴ "ReOrient"는 "방향을 다시 잡다" 와 "동방을 재조명하다" 의 이중 의미를 담은 제목이다.
프랑크의 핵심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16~18세기의 세계 경제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의 근거:
프랑크의 주장은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일부 학자는 그가 과장했다고 비판했고, 일부는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핵심 통찰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유럽 중심 서사는 실제 경제 흐름을 왜곡한다. 1800년 이전의 세계 경제에서 유럽은 중심이 아니었다. 가장자리였다.
그렇다면 왜 19세기 이후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별개의 질문이고, 답은 복잡하다. 산업혁명(기술 비대칭), 아편 전쟁과 식민화(정치 비대칭), 금융 시스템(자본 비대칭) 등이 결합된 결과. 그러나 1500~1800년의 300년간, 중국이 경제적 중심이었고 유럽은 그 주위를 돌았다. 포토시의 은이 그 중력을 증명한다.
이 사실이 한국 독자에게 특별한 울림을 가진다. 왜냐하면 — 조선도 이 은의 세계 시스템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16세기 말~17세기 초, 명나라와의 교역에서 은을 주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했다.¹⁵ 대명 사대관계의 공식 조공뿐 아니라, 국경 무역에서도 은이 지불 수단이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캐낸 은 — 평안도 단천 은광 등 — 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일부는 일본산 은이 조선을 경유해 중국으로 갔다.
특히 중요한 것이 연은분리법(灰吹法) 이다. 이 기술을 1503년 조선의 양대산 기술자 김감불과 김검동이 발명했다. 납을 사용해 은을 정련하는 혁신적 방법. 그런데 1533년경, 이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일본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谷寿禎) 가 조선 기술자들을 일본 이와미(石見)으로 데려갔다.¹⁶ 이후 일본의 이와미 은광은 이 기술 덕분에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려, 16세기 후반 세계 은 생산의 약 1/3을 차지하게 된다. 그 은이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힘을 키웠고 — 1592년 임진왜란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의 기술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고, 그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 이 비극적 아이러니는 13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 조선이 이 세계적 은 시스템의 외부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포토시와 조선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세계 경제사에서 1571년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정립한 것은 미국 경제사학자 데니스 플린(Dennis O. Flynn) 과 스페인 경제사학자 아르투로 히랄데스(Arturo Giráldez) 였다. 1995년 『Journal of World History』에 실린 그들의 논문 — 제목이 "Born with a 'Silver Spoon': The Origin of World Trade in 1571"(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세계: 1571년 세계 무역의 기원) — 은 세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다.¹⁷
플린과 히랄데스의 핵심 주장: 1571년은 세계사의 진정한 전환점이다.
왜 1571년이 특별한가. 그 해에 마닐라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닐라의 건설로 인해 태평양이 처음으로 정규 무역 노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세계 무역"은 사실상 분리된 교역망들의 합이었다. 지중해 무역, 인도양 무역, 동아시아 무역, 대서양 무역. 각각이 존재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한 지역의 가격 변동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571년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포토시 은광의 생산량이 증가하면 — 마닐라 갤리온의 적재량이 증가하고 — 중국의 은 유입이 늘어나며 — 중국 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생긴다. 반대로 중국이 세금 개혁을 철회하면 — 은 수요가 감소하고 — 마닐라에서 은 가격이 떨어지며 — 스페인의 은 수출이 덜 이익이 되고 — 포토시 광산 투자가 줄어든다.
즉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서로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다. 1571년 이전에는 이것이 없었다. 15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세계화의 초기 효과 중 하나가 유럽의 가격혁명(Price Revolution) 이다.¹⁸
16세기 전반부터 유럽 전체에서 물가가 급격히 올랐다. 150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평균 물가가 약 6배 상승했다. 이것은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이었다.
원인은 논쟁적이지만, 주요 요인 하나가 아메리카 은의 대량 유입이었다. 포토시와 멕시코의 은광에서 쏟아져 나온 은이 유럽에 도달하면서 — 은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졌다. 즉, 같은 양의 상품을 사려면 더 많은 은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화폐 인플레이션이다.
이 인플레이션이 유럽 사회를 흔들었다. 고정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떨어졌다. 고정 지대를 받는 귀족의 힘이 약해졌다. 반면 상인과 자본가는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았다. 이 변화가 봉건제의 쇠퇴와 자본주의의 등장을 가속시켰다는 것이 일부 경제사학자의 주장이다.¹⁹
한편, 은의 상당 부분은 유럽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갔다. 이 흐름이 중국 명나라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은 공급의 급격한 증가가 중국 일부 지역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무역 도시들에서. 그리고 은 공급의 변동이 명나라 재정에 충격을 주었다. 17세기 중반 은 유입이 감소하면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1644년 명나라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²⁰
즉 포토시 광산의 변동이 중국 왕조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것이 1571년 이후의 세계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지구 반대편의 사건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익숙한 21세기의 경험이지만, 그 기원이 450년 전에 있다.
포토시 은의 세계 흐름은 또 다른 흐름과 얽혀 있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이다.
포토시와 멕시코의 원주민 광산 노동이 극한의 착취였지만, 그럼에도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면서(인플루엔자, 천연두, 과로, 학살의 복합 효과), 노동력 수요를 다른 곳에서 채워야 했다. 그 답이 아프리카였다.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은 아프리카 노예를 신대륙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규모였지만, 17세기부터 점점 대량화되었다. 이것이 대서양 삼각무역의 시작이다. 다음 장(12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 포토시 은과 대서양 노예제는 하나의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은이 유럽으로 흘렀고, 유럽의 자본이 아프리카로 흘렀으며, 아프리카 노예가 아메리카로 흘렀고, 아메리카에서 다시 은과 설탕과 담배가 유럽으로 흘렀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의 순환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순환의 중심 동력이 포토시였다. 포토시 은 없이 이 시스템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포토시 은 없이 이 시스템은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백만 원주민의 죽음이 지구적 경제 시스템의 연료였다.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왜냐하면 포토시는 역사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세로 리코의 갱도에서 광부들이 일한다. 은은 거의 고갈되었지만, 주석과 아연과 기타 광물이 여전히 채굴된다. 광부들의 수는 약 15,000명.²¹ 대부분이 가난한 볼리비아 원주민. 일부는 어린이. 유엔의 아동노동 보고서가 포토시를 반복적으로 지목한다.²²
작업 조건은 16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갱도는 여전히 좁고, 어둡고, 먼지로 가득하다. 산소 농도는 해발 4,000미터에서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떨어진다. 광부들은 코카잎을 씹으며 허기와 피로를 달랜다. 폭발물을 직접 다룬다. 많은 광부가 35~45세 사이에 규폐증(실리코시스, silicosis)으로 죽는다. 돌가루가 폐에 쌓여 서서히 숨을 막는 병.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어려운 질환.
볼리비아의 공공 보건 자료와 현지 NGO 보고서들은 포토시 광부의 현실을 반복적으로 증언해왔다. 광부의 평균 기대 수명은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며,²³ 이것은 21세기의 수치가 아니라 거의 1세기 전의 수치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도 포토시에서 살고, 일하고, 죽는다.
1987년, 유네스코는 포토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공식 사유는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도시 계획의 걸작". 실제로 포토시 시내에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식민지 시대 건축물이 많다. 성당, 저택, 광장. 관광 명소다.
그러나 이 "문화유산" 지위는 이중적이다. 포토시의 아름다움은 800만 명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식민지 건축의 걸작" 이라 부르는 것은 — Wetiko의 자기 은폐의 현대적 형태다.
최근 포토시의 일부 주민과 학자들이 이 유산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의 유산(Heritage of Shame)" 이라는 개념이 제안되었다. 즉 포토시는 보존되어야 하지만 — 자랑으로서가 아니라 기억으로서. "이런 일이 있었다" 를 후대에게 가르치기 위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폴란드에서 보존되는 방식과 비슷하게.
그러나 아직 이 관점은 주류가 아니다. 오늘도 관광객들은 세로 리코의 식민지 시대 건물들을 사진 찍고, 입장료를 내고 광산 내부 투어를 한다. "광부의 삶 체험" 으로 마케팅되기도 한다. 관광 상품이 된 원주민의 고통.
Wetiko는 관광 상품이 된다. 이것이 21세기의 독특한 형태다.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은화 하나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작은 쇠붙이. 27그램. 그러나 그 안에 — 포토시 지하의 어둠, 수은 중독자들의 이름 없는 죽음, 태평양을 건너는 갤리온의 파도, 마닐라 항구의 거래, 명나라 농민이 내는 세금, 조선의 사신 일행이 받은 하사품 — 이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한 동전에 지구가 담겨 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첫 번째 얼굴이다. 1571년 이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1571년 이후 — 지난 450년간 — 세계는 이런 동전들이 돌며 하나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달러도, 유로도, 원화도, 모두 이 동전의 후손이다. 모두가 누군가의 노동을 추상화된 숫자로 변환하고, 그 숫자를 지구 규모로 순환시킨다.
그리고 그 순환의 연료는 — 여전히 누군가의 땀과 피다. 500년 전에는 포토시의 원주민 광부였다. 오늘은 콩고의 코발트 광부, 방글라데시의 의류 노동자, 아마존의 택배 기사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 구조는 지속된다.
이것이 경제적 Wetiko의 본질이다. 추출과 집중의 기하학. 많은 사람의 작은 희생이 모여 몇 사람의 큰 풍요가 되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가 지구 규모로 작동하면서, 피해자와 수혜자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 추상화가 양심의 책임을 증발시킨다(9장).
이 장의 마지막에 한 가지를 예고한다. 포토시가 Wetiko의 추출적 형태의 원형이었다면, 그것 혼자만으로는 전 지구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았다. 은의 흐름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상품이 필요했다. 생산적 플랜테이션의 원형. 이것이 설탕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밭으로 간다. 거기서 1,2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강제로 대서양을 건넜다. 그리고 그 사탕수수 밭이 — 시드니 민츠의 충격적 주장처럼 — 현대 공장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다. 영국 노동자의 티 타임의 설탕 한 스푼에 담긴 역사가, 포토시 은화 하나에 담긴 역사와 쌍을 이룬다.
은과 설탕. 이 두 상품이 첫 세계화의 양 기둥이었다. 그리고 두 기둥 모두 — 피로 세워졌다.
¹ 포토시 은 생산량 4만 5천 톤의 추정치는 Peter Bakewell, Miners of the Red Mountain: Indian Labor in Potosí, 1545-1650 (Albuquerqu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1984)와 Kris Lane, Potosí: The Silver City That Changed the Worl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9)를 참조.
² 포토시 사망자 수 추정치는 연구자에 따라 큰 편차가 있다. 약 800만이라는 수치는 Eduardo Galeano, Las venas abiertas de América Latina (Mexico City: Siglo XXI, 1971)에서 제시된 것이고, 보수적 추정은 300~500만 정도. 정확한 숫자는 기록의 부실로 확정하기 어렵다.
³ 디에고 구알파의 포토시 발견 이야기에 관하여는 Lewis Hanke, The Imperial City of Potosí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56), 제1장.
⁴ 포토시 인구 성장에 관하여는 Lane (2019), 제2장.
⁵ 톨레도 총독의 1573년 미타 법령에 관하여는 Jeffrey A. Cole, The Potosí Mita, 1573-1700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5).
⁶ 포토시의 아말감 공정에 관하여는 Bakewell (1984), 제4장.
⁷ 바르톨로메 데 메디나의 파티오 프로세스에 관하여는 Alan Probert, "Bartolomé de Medina: The Patio Process and the Sixteenth Century Silver Crisis," Journal of the West 8 (1969): 90-124.
⁸ 이 인용은 예수회 선교사 알론소 산체스(Alonso Sánchez)의 1580년대 기록에 기반한다. 저자가 내용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것.
⁹ Galeano (1971), 앞의 책. 한국어 번역본: 《라틴아메리카의 혈관은 지금도 열려 있다》, 박광순 역, 까치, 1988.
¹⁰ 마닐라 건설과 레가스피의 역할에 관하여는 John Leddy Phelan, The Hispanization of the Philippines: Spanish Aims and Filipino Responses, 1565-1700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59).
¹¹ 마닐라 갤리온 무역의 역사에 관하여는 William Lytle Schurz, The Manila Galleon (New York: E. P. Dutton, 1939).
¹² 명나라 일조편법에 관하여는 Ray Huang, Taxation and Governmental Finance in Sixteenth-Century Ming Chin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¹³ 세계 은의 중국 유입 비율에 관한 추정은 Richard Von Glahn, 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¹⁴ Andre Gunder Frank, 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¹⁵ 조선의 대명 은 교역에 관하여는 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 (서울: 한길사, 1988).
¹⁶ 연은분리법의 일본 전파에 관하여는 이태진, 〈16세기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팽창과 조선의 반응〉, 《한국사론》 43 (2000): 1-47.
¹⁷ Dennis O. Flynn and Arturo Giráldez, "Born with a 'Silver Spoon': The Origin of World Trade in 1571," Journal of World History 6, no. 2 (1995): 201-221.
¹⁸ 유럽의 가격혁명에 관하여는 Earl J. Hamilton, American Treasure and the Price Revolution in Spain, 1501-1650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34)이 고전적 연구.
¹⁹ 가격혁명이 봉건제 쇠퇴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는 Immanuel Wallerstein, The Modern World-System I (New York: Academic Press, 1974).
²⁰ 명나라 멸망과 은 공급 변동의 관련에 관하여는 William S. Atwell, "International Bullion Flows and the Chinese Economy, circa 1530-1650," Past and Present 95 (1982): 68-90.
²¹ 현재 포토시 광부 수의 추정은 볼리비아 광업부 공식 자료(2020).
²² UN 아동노동 관련 보고서: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Child Labour in Mining and Globalization (Geneva: ILO, 2007).
²³ 이 인용은 볼리비아 의사 협회의 포토시 건강 보고서에 기반한 저자의 재구성.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덧붙인다. 규폐증과 수은 중독은 21세기에 예방 가능한 질환이다. 적절한 환기, 마스크, 노동 시간 제한, 정기 건강 검진으로 대부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포토시에서는 이것들이 제공되지 않는다. 왜? 이 광부들이 채굴하는 광물의 국제 시장 가격이 낮기 때문이다. 안전 장비를 제공하는 비용이 광물 가격보다 비싸면, 광부의 목숨이 먼저 절약 대상이 된다. 이것이 현대적 Wetiko의 경제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