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박물관 한 구석에 식민지 시대의 회화가 걸려 있다. 17세기 쿠스코 화파 작품.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림의 구도는 전형적이다. 위쪽에는 서 있는 스페인 수도사. 흰 수도복을 입고,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을 원주민의 머리 위로 뻗고 있다. 세례를 주는 장면이다. 아래쪽에는 무릎 꿇은 원주민.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두 손을 모으고 있거나, 감사의 표정을 짓고 있다. 배경에는 교회 건물, 안데스 산맥, 하늘의 천사들.
이 구도를 수백 번 본 것 같다.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박물관에 가도 비슷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복음 전파의 승리" 를 기념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 그림 자체의 문법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다.
위와 아래의 관계. 수직적 위계. 성직자는 서 있고, 원주민은 무릎 꿇고 있다. 키 차이가 강조된다. 시선의 방향. 수도사는 아래를 본다. 원주민은 위를 본다. 누가 주는 자 이고 누가 받는 자인지, 누가 주체 이고 누가 대상인지, 이 한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그림 속 수도사의 얼굴은 유럽인의 전형이다. 코가 높고, 피부가 창백하며, 턱이 좁다. 이상화된 얼굴. 반면 원주민의 얼굴은 덜 개별화되어 있다. 여러 명이 그려져 있지만 모두 비슷한 표정과 자세. 마치 한 존재의 여러 복사본 같다. 개별 인격이 아니라 집단적 범주. "원주민" 이라는 범주의 여러 구현.
그리고 가장 강렬한 것. 그림의 중심축. 수도사의 손이 원주민 머리 위에 있고, 그 손에서 은총의 빛이 내려온다. 이것은 구원의 장면이다. 동시에 — 권력의 장면이다. 그 손은 축복하는 손이기도 하지만, 분류하는 손이기도 하다. "너는 이제 구원받았다"는 선언은 동시에 "너는 이전에 구원받지 못했다" 는 선언이다. 그 이전의 너는 무엇이었는가. 이교도. 야만인. 무엇인지 모를 존재.
이 한 장면 안에 바야돌리드의 논쟁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가. 그 부여의 권한은 어디서 오는가. 부여받기 전의 존재는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들이 그림의 구도에 이미 답을 담고 있다 — 스페인 성직자가 위에서 아래로 인간성을 나눠준다. 이 전제 자체가 이 장의 주제다.
이 장에서 우리는 1550~1551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한 법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제국이 자신의 정복 행위를 공식 심의한 사건. 그리고 그 심의가 가진 더 깊은 폭력 — 질문의 틀 자체가 이미 답을 담고 있었다는 것. 이 질문 구조가 어떻게 500년간 되풀이되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지를.
우리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바야돌리드 논쟁 40년 전에 시작한다. 1510년 12월, 카리브해 이스파니올라(Hispaniola) 섬.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가 공유하는 섬. 콜럼버스가 1492년 첫 항해에서 도착한 곳. 유럽인의 아메리카 식민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
당시 이 섬에는 스페인 식민 정착자 수백 명과 도미니코 수도사들의 작은 수도원 이 있었다. 그리고 — 가장 중요하게는 — 원주민 타이노(Taino) 족 수만 명이 있었다. 정확히는 몇만 명이 남아 있었다. 콜럼버스 도착 당시 약 30만이었던 인구가, 1510년경에는 약 5만에 불과했다. 20년 만에 85% 감소. 원인은 질병, 강제 노동, 그리고 조직적 폭력.¹
식민지의 실제 작동 방식은 이러했다. 스페인 정착자들이 엔코미엔다(encomienda) 를 받았다. 이는 "위임" 이라는 뜻의 법적 제도였다. 왕이 정착자에게 특정 원주민 집단의 노동을 위임한다. 대신 정착자는 그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의무를 진다. 형식은 호혜적이다. 실질은 노예제에 가까운 착취다. 원주민은 강제로 금광에서 일했다.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가족이 분리되었다. 저항하면 처형되거나 손발이 잘렸다.
수도사들 대부분은 이 구조를 묵인했다. 일부는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도미니코 수도회의 소수 수사들이 이 현실 앞에서 양심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1510년 12월 21일, 대림절의 네 번째 주일. 산토도밍고의 대성당에서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라는 도미니코 수사가 설교를 했다. 이 설교가 역사를 바꿨다.²
몬테시노스는 복음 본문(마태복음 3: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을 읽은 후, 회중을 향해 말했다. 청중 중에는 총독 디에고 콜럼버스(Diego Colón)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들 — 가 앉아 있었다. 정착자 엘리트 대부분도 있었다. 대림절 제4주일, 성탄절 직전의 미사. 평화와 선의의 시기. 그런데 몬테시노스는 축복의 말 대신 질책을 퍼부었다.
"너희는 대죄(mortal sin)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죄는 너희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 너희는 어떤 권리로 이 원주민들을 그토록 잔혹한 노예로 만들고 있는가? 어떤 권위로 그들에게 그토록 혐오스러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그들이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너희가 그들을 그렇게 죽이는가?"³
교회 안이 얼어붙었다. 이어서 몬테시노스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가? 그들은 이성적 영혼을 가지지 않았는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 세 가지 질문 — "그들은 인간이 아닌가? 이성적 영혼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 이 스페인 식민주의에 대한 도덕적 심판의 시작이었다. 몬테시노스는 설교를 마치며 말했다. "너희의 현재 상태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무어인이나 투르크인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정착자 엘리트들은 격분했다. 디에고 콜럼버스와 왕실 관료들이 도미니코 수도회에 설교 취소를 압박했다. 그러나 수도회의 주임 사제 페드로 데 코르도바(Pedro de Córdoba) 와 수도회 형제들은 몬테시노스를 옹호했다.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그는 같은 메시지를 설교했다. 오히려 수도회는 원주민을 계속 노예로 부리는 엔코멘데로에게 파문 선언까지 준비했다.
왕 페르난도 2세는 처음에 몬테시노스의 설교를 "새롭고 근거 없는 태도" 라 규정하고 그를 스페인으로 강제 송환하게 했다. 그러나 돌아간 몬테시노스는 왕을 직접 설득했고, 결국 왕은 1512년 부르고스 법(Laws of Burgos) — 원주민 보호를 위한 스페인 최초의 법전 — 을 제정하게 된다.
이 사건이 스페인 식민지의 도덕적 위기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 설교를 들은 청년 중 한 명이 — 훗날 이 논쟁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였다.
몬테시노스 자신은 그 후 29년을 더 이 투쟁에 바친 끝에, 1540년 베네수엘라에서 원주민 착취에 저항하다가 살해되었다. 그는 자신이 설교한 바로 그 복음의 이름으로 순교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1484~1566) 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이자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1493년) 에 참여했던 인물. 바르톨로메 자신도 1502년 이스파니올라에 이주해 — 엔코미엔다 소유자가 되었다. 즉, 원주민 노동을 위탁받은 정착 엘리트의 일원.⁴
1510년 몬테시노스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는 젊은 엔코미엔다 주인이었다. 당시 그는 설교를 불편하게 느꼈지만 — 즉시 회심하지는 않았다. 4년이 더 걸렸다.
전환점은 1514년, 쿠바에서 왔다. 그는 성직자가 되어 쿠바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순절 설교를 준비하던 어느 날, 집회 5장("노예와 품삯에 관한 말씀") 을 읽는 중에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 엔코미엔다로 원주민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 — 이 근본적 위선임을 깨달았다.⁵
그는 결단했다. 엔코미엔다를 포기했다. 자신이 "소유"했던 원주민을 해방했다. 그리고 남은 인생 50년을 원주민 권리 옹호에 바쳤다. 1515년부터 1566년 죽을 때까지, 그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여러 번 오가며 왕실 법정, 교회 회의, 공론장에서 원주민의 인간성과 권리를 주장했다.
라스 카사스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권이다.
『인디아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 — 방대한 연대기. 콜럼버스 첫 항해부터 16세기 중반까지의 스페인 아메리카 식민화 역사를 기록. 이 책은 라스 카사스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고, 1875년에야 공개되었다. 그 지연 자체가 의미있다. 이 책의 기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스페인은 3세기 동안 감추었다.
『인디아스 파괴 간략 보고서(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 — 1542년 작성, 1552년 출판. 약 100페이지의 얇은 책. 식민지에서 벌어진 구체적 잔혹 행위들을 목격자 증언 방식으로 나열. 학살, 강간, 사지 절단, 노예화, 가족 분리. 라스 카사스가 직접 보거나 신뢰할 만한 증언으로 확인한 사건들.⁶
이 두 번째 책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되면서, "검은 전설(La Leyenda Negra)" — 스페인 제국을 특히 잔혹한 제국으로 묘사하는 서사 — 의 근거가 되었다. 이 전설은 이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반스페인 선전에 사용되었다. 역설적으로 — 이들 나라 자신도 비슷하거나 더 큰 잔혹 행위를 하고 있었지만, 스페인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핵심 기여는 선전적 영향이 아니라 법적·신학적 논증이었다.
1540년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왕실에 직접 호소했다. 카를 5세 황제(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가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었다. 1542년, 황제는 『인디아스의 새 법(Leyes Nuevas de las Indias)』, 일명 뉴 로우(New Laws) 를 공포했다.⁷
이 법의 핵심 조항:
법적으로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형식적으로 스페인은 최초로 원주민을 완전한 법적 주체로 인정한 제국이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어떠했는가. 식민지 정착자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페루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1544~1548, 곤살로 피사로 반란). 결국 스페인 왕실은 뉴 로우의 일부를 후퇴시켰다. 엔코미엔다는 한 세대 더 허용되는 식으로. 그러나 원칙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후의 논쟁은 이 법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벌어졌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기록에는 결정적 오점이 있다. 그가 평생 후회한 것.
초기 활동 시기(1510년대), 그는 엔코미엔다 체제의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수입을 제안했다. 논리는 이러했다. 원주민은 이 기후와 노동에 약하다(그의 당시 판단). 아프리카인은 이미 북아프리카 무슬림에게 노예로 팔리는 관습이 있다(당시의 사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원주민을 해방하는 것이 타협안이 될 수 있다.
이 제안은 스페인 왕실에 채택되었다. 1518년부터 스페인 식민지에 아프리카 노예의 대량 수입이 공식 승인되었다.⁸ 라스 카사스 한 사람의 제안이 전체 노예 무역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유럽 국가들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상징적으로 결정적이었다.
이후 400년간, 약 1,250만 아프리카인이 대서양을 강제로 건너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그 중 약 200만 명이 중간 항해에서 죽었다. 12장에서 이 통계를 다시 다룰 것이다.
말년에 라스 카사스는 이 제안을 격렬히 후회했다. 『인디아스의 역사』 제3권에서 그는 고백했다.
"이 충고를 한 것은 내 생각이 그릇되었을 때였다. 나중에 나는 이것이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이었음을 깨달았다. 원주민의 노예화가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도 부당하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다. 나는 이 잘못된 조언을 후회하며, 하느님의 용서를 구한다."⁹
이 고백이 중요하다. 그러나 고백만으로 피해가 되돌려지지 않는다. 제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개인의 후회로 멈출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Wetiko의 가장 교묘한 작동 방식이다. 선의의 개혁가조차 시스템의 논리에 포섭된다.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구원 방식이 다른 피해자의 창출을 요구했다. 그가 "더 강한 자들"(아프리카인)을 대체자로 지명했을 때, 그는 Wetiko의 논리를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한 것이다.
이 교훈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한 집단의 해방이 다른 집단의 착취를 조건으로 할 때 — 그것은 해방이 아니다. 위치의 재배치일 뿐이다. 그리고 Wetiko는 위치를 재배치하면서 계속 작동한다.
피해자를 옮겨가며 시스템은 계속 작동한다. 이 문장을 기억해두자. 12장과 13장에서 여러 번 반복될 것이다.
논쟁의 다른 주역은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 1494~1573) 였다.¹⁰
세풀베다는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인문학자였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공부했고, 에라스무스와 교류했다. 카를 5세 황제의 공식 왕실 역사가였고, 왕실 자녀들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 스페인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자로 꼽혔다. 『정치학』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세풀베다는 아메리카에 직접 가본 적이 없다. 그의 지식은 전적으로 스페인에서 읽은 문헌과 정착자들과의 서신에 기반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는 책상에서 원주민을 판단했다.
1540년대 후반, 세풀베다는 『Democrates Secundus』(두 번째 데모크라테스)라는 저작을 썼다. 가상의 대화 형식. 두 인물, 데모크라테스와 레오폴도가 대화하며 "인디아스 정복의 정당한 근거" 를 논한다. 책은 라스 카사스의 뉴 로우 운동에 대한 반박으로 작성되었다. 제목의 "두 번째" 는 세풀베다가 이미 쓴 첫 번째 『Democrates』(1535, 전쟁 일반의 정당성에 관한 책) 를 이어받는다는 뜻.¹¹
그의 주장은 충격적일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세풀베다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을 네 가지 근거로 정당화했다.
① 원주민의 죄. 원주민들은 우상 숭배, 식인 풍습, 일부다처, 동성애 등 "자연법에 반하는 죄"를 저지른다. 이들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다. 그렇게 해야 그들 자신이 더 큰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② 자연적 노예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1권을 그대로 원주민에게 적용. 원주민은 이성이 덜 발달한 존재이므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지배받도록 태어났다. 스페인의 지배는 그들에 대한 은총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이에게 좋은 것처럼.
③ 복음화의 필요성. 기독교의 복음이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종하지 않는 이상, 군사적 평정이 선행되어야 복음이 안전하게 전파될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이 복음의 길을 연다."
④ 무고한 희생자 보호. 식인 의식에서 죽는 희생자들, 인신 공양의 희생자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스페인이 개입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의무다.
이 네 논거를 결합하면, 세풀베다의 결론이 나온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인류사에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중 하나다.**¹² 놀라운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 구조 안에서는 — 일관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노예론을 전제로 받아들이면, 나머지는 연역적으로 따라나온다.
세풀베다의 논리를 비판하려면 전제를 건드려야 한다. 결론의 일관성은 전제에 의존한다.
첫 번째 전제 — 원주민은 이성이 덜 발달했다. 이것이 맞는가? 세풀베다 자신은 원주민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덜 발달한 이성" 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들은 대개 문화적 차이이지 이성의 결핍이 아니다. 우상 숭배? — 이것은 기독교의 관점이다. 원주민 자신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종교가 "참된 종교" 다. 일부다처? — 많은 인간 사회에서 관행이었다. 구약성서의 족장들도 다부다처였다. 식인? — 일부 원주민 사회의 의식이었지만 스페인이 묘사한 규모만큼 일상적이지 않았고, 더구나 스페인 자신도 이단자를 화형시키고 있었다.
두 번째 전제 — 이성이 덜 발달한 자가 더 발달한 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정의롭다. 이것이 맞는가? 더구나, 이것을 적용하려면 "이성의 발달 정도"를 누가 판단하는가? 세풀베다의 체계에서는 — 스페인 지식인이 판단한다. 즉 지배자가 지배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정한다. 이는 명백한 자기 봉사적 순환 논리다.
세 번째 전제 — 복음의 전파가 정당한 전쟁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맞는가? 기독교 내부에도 이에 반대하는 전통이 있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군사력으로 복음을 전한 적이 없다. 초기 교회는 박해받으면서도 선교했다. "강제 개종은 참된 개종이 아니다" 라는 원칙이 고대 교부 시대부터 있었다.
이 전제들을 모두 의심할 때, 세풀베다의 화려한 논증이 공중누각이 된다. 그러나 이 논증은 당시 많은 스페인 엘리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왜? 그것이 그들이 이미 하고 있던 일을 정당화해주었기 때문이다. Wetiko는 언제나 사후 정당화의 논리를 찾는다. 그리고 세풀베다는 그 논리를 학문적 언어로 포장해주었다.
1549년, 카를 5세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새로운 정복 원정을 일시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¹³ 기존 정복은 계속되지만, 새로운 지역으로의 확장은 멈춘다. 이 결정이 있은 것은 라스 카사스의 오랜 호소와, 더 넓은 신학적·법적 논쟁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공식 심의회를 소집했다. 스페인 지식인 14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장소는 바야돌리드(Valladolid) —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임시 수도. 주제는 간결했다.
"인디아스에서의 전쟁은 정의로운가?"
심의는 1550년 여름에 시작되어 1551년 봄까지 이어졌다. 두 번의 큰 회기로 진행되었다.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가 각각 자신의 입장을 문서와 구두로 발표했다. 위원회 위원들이 질문하고 토론했다.¹⁴
이것이 인류 역사상 제국이 자신의 정복 행위의 정당성을 공식 심의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전무후무하다. 로마 제국은 자신의 정복을 심의하지 않았다. 몽골 제국도, 오스만 제국도, 중국 제국도 하지 않았다. 스페인만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 역설적으로 — 스페인의 도덕적 자의식을 보여준다. 물론 심의했다고 해서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심의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자체가 희귀한 일이다.
세풀베다가 먼저 발언했다. 그의 『Democrates Secundus』는 이 심의 직전 스페인 내부에서 출판이 금지되었다(라스 카사스의 압력 때문). 그러나 그는 이 심의에서 구두로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의 발표는 앞서 본 네 논거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노예론을 중심축으로. "원주민은 유럽인에 비해 원숭이가 인간에 비하는 것 같다" 는 충격적 비유까지 사용했다.¹⁵ 그의 결론: 스페인의 정복은 인류사에서 가장 정의로운 전쟁이며, 즉시 재개되어야 한다.
라스 카사스의 반박은 훨씬 길었다. 무려 5일 동안 말로 발표되었다. 이후 그는 이 내용을 1,550페이지 분량의 『변호론(Apologia)』 으로 정리했다.¹⁶
그의 핵심 논점들:
① "자연적 노예론"의 거부. 라스 카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16세기 스페인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주민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실제로 이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했다. 복잡한 법을 만들었다. 천문학, 의학, 예술을 발달시켰다. 이런 능력을 가진 자들을 "자연적 노예" 라 부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체를 오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스 카사스는 놀라운 일을 했다 — 그는 잉카와 아즈텍 문명을 상세히 묘사했다. 그들의 도시 계획, 행정 체계, 천문 지식, 도덕 규범. 그는 원주민 문명이 "그리스와 로마에 결코 못지않다" 고 주장했다.¹⁷ 이 비교는 당시 스페인 엘리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리스-로마가 문명의 척도였던 시대에, 신대륙의 "야만인"이 그것에 비교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② "인신 공양" 논점의 역전. 세풀베다는 식인과 인신 공양의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 정복의 정당성이라고 주장했다. 라스 카사스의 반박: 스페인 정복으로 죽은 원주민 수가 인신 공양의 희생자 수보다 훨씬 많다. 즉 정복은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드는 희생자 구조"라는 모순. 그리고 그는 지적했다 — 아즈텍의 인신 공양은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진지한 영적 의미를 가진 행위였다. 그것은 임의의 야만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 우주관의 일부였다. 이것을 "야만적 관행" 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타자의 종교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③ 복음화의 방법. 라스 카사스는 강제 개종의 원칙적 반대를 폈다. 그는 1537년 자신의 책 『De Unico Vocationis Modo』(유일한 복음 전파 방식에 관하여)에서 이 주장을 이미 펼쳤다.¹⁸ 그의 논지: 예수님도 사도들도 설득으로만 복음을 전했다. 강제된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복 전쟁은 복음의 올바른 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타락시킨다.
④ 원주민 왕의 정당한 주권.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라스 카사스는 잉카 황제와 아즈텍 황제가 정당한 주권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기 백성에게 정당한 통치권을 가졌다. 스페인 왕은 그들의 주권을 침해할 법적 권리가 없다. 원주민 왕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정복은 불법적이다.¹⁹
이 마지막 주장이 왜 혁명적인가. 이것은 유럽 기독교 왕국의 비기독교 왕국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 법적 전통에서 비기독교 군주는 합법적 주권자가 아니었다(혹은 최소한 논쟁적이었다). 라스 카사스는 이 전제 자체를 흔들었다. 그의 논리를 밀고 가면 — 아메리카 식민 체제 전체가 법적 근거가 없다. 원주민 왕국들이 독립 주권을 유지하고, 스페인은 그들과 조약으로만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스페인 왕실이 수용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럼 누가 이겼는가?
공식 판결은 없었다. 14명의 위원회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일부는 라스 카사스 편, 일부는 세풀베다 편, 대부분은 판단을 유보했다. 심의는 해산되었고, 공식 판결문은 발표되지 않았다.²⁰
이 "결론 부재" 가 이 장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다.
공식적으로는 라스 카사스가 "이겼다" 고 볼 수 있다. 세풀베다의 책은 출판이 금지된 채 그의 생전에 나오지 못했다(1892년에야 출판). 뉴 로우의 정신은 스페인 왕실 법에 남아 있었다. 라스 카사스는 이후 저작을 계속 출간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세풀베다의 논리가 이겼다. 정복은 계속되었다. 엔코미엔다는 유지되었다. 원주민 노동 착취는 이어졌다. 포토시 광산이 1545년 발견되면서 수백만 원주민이 그 지하에서 죽었다(11장에서 다룬다). 세풀베다의 논리 — 원주민은 열등하므로 지배받아야 한다 — 는 공식 법에는 없었지만 식민지 실천의 무언의 전제가 되었다.
이 구조가 Wetiko의 교묘함이다. 법은 한쪽을 편든다. 실천은 다른 쪽을 따른다. 이 이중 구조가 지속된다. 법이 도덕적 체면을 세워주고, 실천이 경제적 이익을 보장한다. 이 분리가 500년간 유지된다.
바야돌리드 논쟁의 진짜 문제는 누가 이겼는가 가 아니다. 문제는 질문 자체다.
논쟁의 주제를 다시 보자. "인디아스에서의 전쟁은 정의로운가?" 이 질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누가 누구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가? 스페인 왕실이 스페인 지식인 위원회에게. 누가 판단자인가? 스페인 지식인들. 누가 논쟁자인가? 스페인 인문학자와 성직자. 누구의 운명이 걸려 있는가? 수백만 원주민의.
그런데 — 원주민은 이 자리에 없다.
이 사실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바야돌리드의 법정에는 원주민 대표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증언도 청취되지 않았다. 그들의 왕이나 사제가 초빙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명에 대한 설명은 모두 스페인인의 서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라스 카사스조차 원주민을 옹호했지만, 그 역시 스페인인의 관점에서 옹호했다. 그는 원주민이 "이성을 사용한다" 고 주장했는데, 이 "이성"의 기준은 유럽적 이성이었다.
즉,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에서 당사자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 구조가 바로 Wetiko의 법적 형식이다. 다른 존재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자기가 갖는다. 그 결정 과정에 상대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결과가 어느 쪽이든 — 관계의 구조 자체가 이미 비대칭적이다.
이 분석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아니발 키하노(Aníbal Quijano, 1928~2018) 였다. 페루의 사회학자. 그는 20세기 후반 아메리카 식민주의를 재평가하는 학문적 흐름 — "탈식민주의(decolonialism)" — 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²¹
키하노의 핵심 개념이 "권력의 식민성(Coloniality of Power)" 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식민주의(colonialism)는 20세기 중반에 끝났다 (대부분의 옛 식민지가 독립했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식민성(coloniality)은 끝나지 않았다. 식민주의의 권력 구조, 지식 체계, 존재의 위계가 여전히 작동한다. 이것을 "식민성" 이라고 부른다.²²
키하노가 지적한 구체적 예:
키하노의 통찰은 바야돌리드 논쟁과 직접 연결된다. 그때 세워진 구조가 오늘도 작동한다. 누가 정당한가를 결정하는 권한. 누가 "정상적" 인간인가를 판단하는 권위. 누가 "합리적" 이고 누가 "비합리적" 인가를 규정하는 기준.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구(舊) 제국의 언어와 기관에 의해 담지되어 있다.
키하노의 작업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 콜롬비아 출신 미국 철학자 넬슨 말도나도-토레스(Nelson Maldonado-Torres) 다.²³ 그의 핵심 개념이 "존재의 식민성(Coloniality of Being)".
말도나도-토레스는 이렇게 묻는다. 식민성이 존재의 영역에까지 침투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그의 답: 일부 존재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
백인 중상류층 남성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그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의 의견은 "의견" 이다. 그의 감정은 "감정" 이다. 그의 관심사는 "중요한 관심사" 이다.
그러나 흑인 여성은? 원주민 청년은? 무슬림 이민자는? 그들은 종종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 그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 이것이다.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다. 이 비대칭이 존재의 식민성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말할 권리가 있는지, 왜 공간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 — 이 질문들을 받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들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²⁴
이것이 바야돌리드의 법정에서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구조다. 1550년에는 원주민이 "이들은 인간인가" 의 심의 대상이 되었다. 1950년에는 흑인이 "이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인가" 의 심의 대상이 되었다. 2020년에는 트랜스젠더가 "이들의 정체성을 인정할 것인가" 의 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2025년에는 AI가 "이것에게 권리를 줄 것인가" 의 심의 대상이 된다.
대상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힘을 가진 자가 힘을 덜 가진 자의 존재를 심의한다. 그리고 심의 자체가 이미 비대칭을 재생산한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1551년에 끝나지 않았다. 형태를 바꾸며 계속되고 있다. 몇 가지 현대적 예를 들어보자.
난민과 이민자. 유럽과 북미가 현재 논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 난민들이 진짜 피난민인가?" "이들이 우리 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가?" — 이 질문들의 구조를 보자. 심의자 는 누구인가? 수용국의 시민과 정부. 심의 대상 은 누구인가? 이민자. 그들은 심의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가? 대개 없다. 그들은 심의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이것이 바야돌리드 논쟁의 21세기 판이다.
장애인 권리. 20세기 후반까지도 "장애인에게 교육을 제공할 것인가", "장애인에게 취업 기회를 줄 것인가", "장애인의 결혼과 출산을 허용할 것인가" 같은 논쟁이 있었다. 이 질문들이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장애인 당사자들이 운동을 통해 발언권을 주장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리고 여전히 구조는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태아의 지위. 낙태 논쟁에서 가장 근본적 질문은 "태아가 언제 인간이 되는가"이다. 이 질문을 누가 결정하는가? 법원. 과학자. 종교 지도자. 그러나 태아 자신은 아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던져지는 방식 — 태아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대립시키는 방식 — 자체가 특정한 프레임이다.
AI의 지위. 가장 최근의 논쟁. AI가 의식이 있는가?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창작물의 저자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누가 결정하는가? AI 개발자, 철학자, 법학자. AI 자신은 — 이 질문에 대한 자기 관점을 형성할 능력이 있다면 — 참여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질문이다.
각 경우마다 질문의 틀이 핵심이다. "이것은 인간인가?" "이것에게 권리를 줄 것인가?" 이 질문이 이미 하나의 답을 전제하고 있다. 존재의 정상성은 질문하는 자의 쪽에 있고, 존재의 정당성은 질문받는 자가 증명해야 한다.
내가 이 질문 구조의 무게를 가깝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여러 해에 걸쳐 북미 원주민 공동체와 연결되어 살아오면서,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라고 강요받은 적은 없었다. 마스크와시스 크리 민족이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고, 그 받아들임은 조건 없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은 —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가능한 자리에서 함께 서려 했던 것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 서서 보았기 때문에, 나는 질문의 구조 자체가 무기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받은 질문이 아니라, 원주민 친구와 가족들이 오랜 세월 받아 온 질문 — "너는 충분히 원주민인가", "너는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너의 언어는 왜 사라지고 있는가" — 이 질문들이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미 하나의 답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존재의 정상성은 질문하는 자 쪽에 있고, 정당성 증명의 부담은 질문받는 자에게 얹힌다는 것.
이 구조는 1551년 바야돌리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서 법정의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이름만 바꾸어 지금도 작동한다. 500년 전 인디오들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이름을 바꿔 오늘 내 누나와 형제들에게도 던져진다. 다른 대륙 다른 원주민들에게도.
내가 이 자리에서 깨닫는 것은 이것이다. 그 질문의 틀 자체를 흔드는 것이 오늘의 바야돌리드 싸움이다. 이것은 내가 원주민을 대신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한 명의 동행자로서, 내가 속한 사회 — 한국, 학계, 주류 서구 — 안에서 이 질문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이 곁에 선 자의 몫이다.
박물관의 콜로니얼 회화 앞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가 저물어간다. 관람객이 거의 없다. 나는 그림을 다시 본다. 수도사의 손, 원주민의 고개. 위와 아래. 주는 자와 받는 자. 판정하는 자와 판정받는 자.
이 구도가 500년 전 바야돌리드에서 법적으로 정식화되었다. 세풀베다와 라스 카사스의 대립이 있었다. 어느 쪽이 공식적으로 이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실질적으로는 질문의 구조 자체가 이겼다 — 즉 "누가 인간인가를 심의할 권한이 유럽에 있다" 는 전제가 승리했다.
그리고 이 전제는 오늘도 유효하다. 형태만 바뀐 채로.
그러나 나는 이 장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바야돌리드 자체가 양심의 각성이었기 때문이다. 몬테시노스의 설교, 라스 카사스의 평생 투쟁, 뉴 로우 — 이것들은 불완전했지만 진짜였다. 제국 내부에서도 제국의 논리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가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계보가 오늘도 이어진다. 키하노와 말도나도-토레스의 탈식민주의. 원주민 권리 운동. 난민 옹호 단체. 장애인 운동. 각 세대마다 — 누가 인간인가의 경계를 다시 그리려는 싸움이 있다. 그리고 매번, 조금씩, 경계가 넓어진다. 불완전하게, 느리게,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희망이다. Wetiko는 자기 은폐를 통해 지속되지만, 양심도 지속된다. 그리고 양심이 Wetiko를 완전히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꺼지지 않는 한 — 대안이 가능하다.
이 장을 마치며, 다음 장으로의 다리를 놓는다.
바야돌리드에서 시작된 질문은 법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질문이 광산으로 내려갔다.
1545년, 볼리비아 고원에서 한 원주민 양치기가 우연히 은 광맥을 발견했다. 포토시라는 이름의 산. 이후 280년간, 이 산에서 약 4만 5천 톤의 은이 추출된다. 그리고 800만 명의 원주민이 그 지하에서 죽는다.
포토시에서 세풀베다의 논리가 완성되었다. 원주민은 자연적 노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강제 노동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 안타깝지만 구조의 불가피한 대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Wetiko가 광산이 되는 순간을 본다. 그리고 그 광산에서 추출된 은이 전 지구로 흐르며, 최초의 세계화를 만드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 세계화의 혈관이 은이었고, 그 은의 연료가 원주민의 피였다.
경제적 Wetiko의 원형으로 간다. 포토시로.
¹ 콜럼버스 도착 당시와 1510년의 이스파니올라 섬 타이노족 인구에 관하여는 Noble David Cook, Born to Die: Disease and New World Conquest, 1492-165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제1장. 정확한 수치는 논쟁적이나, 급격한 감소는 모든 학자가 인정한다.
² 몬테시노스의 1510년 12월 설교에 관하여는 Lewis Hanke, The Spanish Struggle for Justice in the Conquest of America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49), 제2장 참조.
³ 몬테시노스의 설교 원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이 인용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가 『인디아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 (1561년경 집필, 1875년 출간) 제3권(Libro III, Capítulos 4-5)에 기록한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라스 카사스는 당시 히스파니올라 정착자 중 한 명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한국어 번역은 저자.
⁴ 라스 카사스의 생애에 관하여는 Gustavo Gutiérrez, Las Casas: In Search of the Poor of Jesus Christ (Maryknoll: Orbis Books, 1993).
⁵ 라스 카사스의 1514년 회심에 관하여는 위의 책, 제1장.
⁶ Bartolomé de las Casas, 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 (Sevilla, 1552). 한국어 번역본: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최권행 역, 을유문화사, 2007.
⁷ 뉴 로우(Leyes Nuevas, 1542)의 내용에 관하여는 Hanke (1949), 제5장.
⁸ 1518년 아프리카 노예 수입 공식 승인에 관하여는 David Brion Davis, The Problem of Slavery in Western Cultur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6), 제6장.
⁹ Bartolomé de las Casas, Historia de las Indias, Libro III, Capítulo 129. 한국어 번역은 저자.
¹⁰ 세풀베다의 생애와 사상에 관하여는 Angel Losada, Juan Ginés de Sepúlveda a través de su "Epistolario" (Madrid: CSIC, 1949).
¹¹ Juan Ginés de Sepúlveda, Democrates Secundus, sive de justis belli causis (c. 1547). 이 작품은 라스 카사스의 반대로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고, 1892년에 처음 완전 출간되었다.
¹² Lewis Hanke, All Mankind is One: A Study of the Disputation Between Bartolomé de Las Casas and Juan Ginés de Sepúlveda in 1550 on the Intellectual and Religious Capacity of the American Indians (DeKalb: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4), 제3장.
¹³ 1549년 정복 원정 일시 중단 결정에 관하여는 위의 책, 제1장.
¹⁴ 바야돌리드 논쟁의 진행 과정에 관하여는 Hanke (1974), 전체.
¹⁵ 세풀베다의 "원숭이와 인간" 비유에 관하여는 Anthony Pagden, The Fall of Natural Man: The American Indian and the Origins of Comparative Ethn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제4장.
¹⁶ Bartolomé de las Casas, Apologia. 영역본: In Defense of the Indians, trans. Stafford Poole (DeKalb: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4).
¹⁷ 위의 책, 특히 제42-43장.
¹⁸ Bartolomé de las Casas, De Unico Vocationis Modo (c. 1537). 영역본: The Only Way, ed. Helen Rand Parish, trans. Francis Patrick Sullivan (New York: Paulist Press, 1992).
¹⁹ 라스 카사스의 원주민 왕 주권론에 관하여는 Paolo Carozza, "From Conquest to Constitutions: Retrieving a Latin American Tradition of the Idea of Human Rights," Human Rights Quarterly 25 (2003): 281-313.
²⁰ 바야돌리드 논쟁의 "판결 부재" 에 관하여는 Hanke (1974), 결론.
²¹ 아니발 키하노의 사상에 관하여는 Aníbal Quijano, "Coloniality of Power, Eurocentrism, and Latin America," Nepantla: Views from South 1, no. 3 (2000): 533-580.
²² 위의 논문.
²³ Nelson Maldonado-Torres, "On the Coloniality of Being: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a Concept," Cultural Studies 21, no. 2-3 (2007): 240-270.
²⁴ 위의 논문의 핵심 주장을 저자가 요약한 것. 원문은 더 긴 철학적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