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단어를 처음 만난 것은 모닥불 옆이 아니었다. 책이었다.
어느 해, 『농경사회의 ADHD』 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적응적이었을 특질이 — 왜 농경과 산업 사회에서는 장애로 분류되는지를 다루는 책. 그 안의 한 대목이 나를 붙들었다. "Wetiko 시대의 ADHD는 자칫 실패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Wetiko. 낯선 단어였다. 저자가 굳이 이 단어를 쓴 이유가 궁금했다. 찾아보기 시작했다. 잭 포브스. 폴 레비. 크리족 전통. 알곤킨 어족. 식인 괴물. 문명 비판의 도구. 자료를 따라가다 보니 점점 단어가 무거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 내 크리족 누나 데비(Debbie)에게 물었다. 나는 1997년부터 2013년까지 거의 매년 그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 긴 시간의 한 지점에서 — 지금으로부터 23~24년 전 — 마스크와시스(Maskwacis) 크리 민족의 한 가족이 나를 친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누나라 부른다. 입양이 내 정체성을 재구성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먼저 한국인이다. 다만 그 해의 기억과 의미는 내 안에 남아 있다. "Wetiko 라는 단어, 크리어로 무슨 뜻이야?"
누나는 짧게 답했다.
"많이 먹는 것."
그 대답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어떤 거창한 신학적 해설도, 학술적 정의도 아니었다. 크리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 아이가 과자를 너무 많이 집어 먹을 때, 누군가가 공동체의 몫을 과하게 가져갈 때 — 그럴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표현. "많이 먹는 것."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함이 경고였다. 크리 공동체는 이 위험을 특별한 철학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일상 언어에 새겨 두었다.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밥상에서, 사냥터에서, 공동체의 모든 순간에. 그것이 병으로 자라지 않도록.
내가 포브스와 레비의 무거운 책들에서 읽은 그 모든 이야기 — 영적 식인, 자기 은폐, 끝없는 허기 — 는 결국 누나의 그 한마디로 귀결된다. 많이 먹는 것. 욕구의 한계를 모르는 것. 필요 이상을 취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축적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장은 그 평범한 경고가 어떻게 문명 전체의 진단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크리족이 일상에 새겨 둔 지혜가 어떻게 20세기 원주민 지식인들에 의해 학문적 범주로 확장되었는지. 그것이 왜 지난 500년의 서양 역사를 정확히 짚는 언어인지. 그리고 — 오늘 우리에게 이 이름이 왜 필요한지.
간단한 배경부터 정리하자.
Wetiko (위티고, 위티코). 또는 지역 방언에 따라 Wendigo(원디고) 등 여러 형태로 전해지는 개념. 알곤킨 어족(Algonquian)에 속한 여러 민족 — 크리(Cree), 오지브웨(Ojibwe), 이누(Innu), 아니시나베(Anishinaabe) 등 — 의 공통된 전통 개념이다.¹
원래 이 개념은 — 초자연적 민담의 존재로 전해져 왔다. 북부 삼림 지역의 긴 겨울,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 극도의 배고픔과 고립이 한 사람을 인육을 먹는 상태로 내몰 수 있다는 공포의 형상화. 일단 인육을 먹기 시작한 자는 —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Wetiko 가 된다.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먹고 사는, 끝없는 허기의 영혼. 그리고 — 한 번 먹은 자는 계속 먹고 싶어지고, 그 허기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크리·오지브웨 공동체에 오랫동안 전해진 데에는 실용적 이유가 있다. 북부 삼림은 — 자원이 제한된 환경이다.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 소비의 한계를 아는 지혜가 필수다. 자기가 얼마나 많이 가져가는지 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Wetiko 이야기는 — 이 성찰을 세대에 걸쳐 전승하는 교육적 장치였다. "너무 많이 먹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Wetiko가 될 수 있다."
그러나 — 20세기 후반 원주민 지식인들이 이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들이 본 것: Wetiko는 단순한 초자연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 사회적·문명적 질병의 이름이기도 하다. 한 공동체 전체가, 한 문명 전체가 — Wetiko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태에 빠진 문명이 — 다른 공동체를 먹어 들어갈 수 있다.
이 재해석이 — 이 개념을 학문적 범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변환의 결정적 인물이 — 다음 섹션에서 만날 잭 포브스(Jack Forbes) 였다.
Wetiko.
Wetiko 개념을 학술 세계에 들여온 것은 잭 D. 포브스(Jack D. Forbes, 1934~2011) 였다.¹ 파워하탄-레나페(Powhatan-Lenape) 혈통의 미국 학자. 그는 평생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유럽 식민주의의 본질을 연구했다. UC 데이비스의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학과를 공동 설립했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콜럼버스와 다른 식인자들(Columbus and Other Cannibals)』 이다. 1979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2008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² 부제가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한다: "착취, 제국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의 Wetiko 질병(The Wetiko Disease of Exploitation, Imperialism, and Terrorism)".
포브스의 핵심 주장은 단호하다. 콜럼버스 이래 유럽 문명의 본질은 Wetiko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진단이다. 크리족의 Wetiko 개념이 가리키는 것 — 다른 존재의 생명력을 먹고 사는 영적 질병 — 이 지난 500년간 서양 문명의 핵심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어떻게 가능한가. 포브스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포브스는 Wetiko를 영적 식인증(spiritual cannibalism) 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신체적 식인은 다른 인간의 몸을 먹는 것이다. 역사상 여러 문화에서 제한적으로 발생했다(기근 시의 극단적 생존, 의식적 식인, 전쟁 관행 등). 이것은 대개 예외적이고 한정적인 행위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 — 오랫동안 인간을 먹는 사회는 자기 인구 자체가 고갈된다.
영적 식인은 다르다. 다른 존재의 영혼, 생명력, 시간, 가능성, 꿈을 먹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하루 8시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 한 공동체의 자원을 빼앗아 다른 곳에서 소비하는 것. 한 문명의 예술을 녹여 자기 화폐로 만드는 것. 한 아이의 어린 시절을 공장 노동으로 바꾸는 것. 한 숲의 수백 년된 생명을 한 달치 매출로 환산하는 것.
이것들이 영적 식인이다. 육체를 먹지는 않지만, 그 존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취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이익으로 전환한다.
포브스의 핵심 통찰은 이것이다. 영적 식인은 신체적 식인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집단을 영적으로 먹어치우고, 다음 집단으로 옮겨간다. 그 과정에서 먹히는 자는 살아 있다. 다만 그의 생명력이 조금씩, 꾸준히 추출된다. 그는 고갈되어 간다. 그리고 고갈되면 버려진다. 다른 곳에 새로운 먹이가 있다.
이것이 500년간 작동한 시스템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먹고, 아프리카 노예를 먹고, 아시아 식민지를 먹고, 이후에는 서양 자기 내부의 노동자를 먹고, 지금은 지구의 자연을 먹는다. 먹이의 목록은 바뀌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포브스가 책 제목에 콜럼버스를 놓은 것은 상징적이다. 콜럼버스는 영웅이 아니라 Wetiko의 얼굴이다. 그의 일기에서 인용된 문장 하나가 결정적이다. 1492년 11월 27일, 아라와크 원주민을 만난 지 약 한 달 후:
"이 사람들은 대단히 고분고분하고 겁이 많다. 그들은 무기가 없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준다. 쉰 명만 있어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정복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³
이것이 유럽이 아메리카를 만난 첫 번째 목격 기록이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가 아니라 "이 친절한 사람들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을까" 가 첫 생각이었다. 이 한 문장에 Wetiko의 핵심이 있다. 만남을 약탈의 기회로 본다. 다른 존재의 친절함을 먹이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포브스는 이 순간이 역사의 전환점이었다고 본다. 유럽의 기존 Wetiko 경향 — 십자군, 마녀사냥, 내전 — 이 전 지구적 스케일로 확장되는 순간. 이 순간 이후 같은 논리가 아메리카 전역으로,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퍼진다. 세계가 먹이사슬의 한쪽 끝이 되었다.
포브스의 책은 출간 당시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미국 학계의 주류는 그것을 무시했거나 "급진적" 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포브스의 통찰은 여러 후속 저자들에 의해 확장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폴 레비(Paul Levy) 의 작업이다.
레비는 미국의 융 심리학자이자 티베트 불교 수행자다. 그는 2013년 『Wetiko 걷어내기(Dispelling Wetiko: Breaking the Curse of Evil)』 를 출간했다.⁴ 포브스의 Wetiko 개념을 심리학적 프레임워크로 확장한 작업이다.
레비는 Wetiko를 "악성 자아병증(Malignant Egophrenia, ME disease)" 으로 재명명했다. "자아병증(egophrenia)"은 조현병(schizophrenia)과 짝을 이루는 그의 신조어다. 조현병이 자아의 분열이라면, 자아병증은 자아의 팽창과 경직이다. 자아가 너무 커져서 다른 모든 존재를 자기 확장의 도구로 보게 되는 상태.
레비의 핵심 자원은 카를 융(Carl Jung, 1875~1961) 의 심리학이다. 융은 "그림자(Shadow)" 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모든 개인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의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폭력성, 탐욕, 공포, 원한. 이것들은 억압되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에 축적되고,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표출되거나 투사(projection) 된다.
투사는 자기 안의 어둠을 다른 사람에게 보는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내 폭력성을 이웃이나 외국인이나 다른 인종에게 본다. 그래서 그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정당화된다. 사실은 그 적대감의 원천이 내 안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림자는 집단적이기도 하다. 한 사회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는 어두운 면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집단 그림자(collective shadow) 다. 그리고 집단 그림자가 집단 투사를 낳으면 — 대규모 폭력의 조건이 마련된다. 홀로코스트, 마녀사냥, 인종 청소, 식민 학살. 이 모든 것은 집단 그림자의 외부 투사로 이해될 수 있다.
레비의 통찰은 이것이다. Wetiko는 집단 그림자의 원형적 이름이다. 크리족이 "식인 영혼" 이라는 이야기 형태로 알고 있었던 것을, 융은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 로 학술화했다. 두 언어는 같은 것을 가리킨다.
레비가 추가한 결정적 통찰은 Wetiko의 자기 은폐 성격이다.
Wetiko의 가장 치명적 특징은 무엇인가. 폭력성? 탐욕? 아니다. 자기가 병에 걸렸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레비의 핵심 주장이다.⁵
다른 질병은 증상을 통해 자신을 알린다. 발열, 통증, 무력감. 환자는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치료를 구한다.
Wetiko는 다르다. 증상이 오히려 자기를 강화하는 경험으로 느껴진다. 부를 축적하는 것. 권력을 확대하는 것. 영토를 확장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공" 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Wetiko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번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자기 인식이 있는 한 — 치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Wetiko는 자기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유지한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Wetiko의 "천재성" 이다. 그것은 피해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인다.
이 역학이 왜 중요한가. 이것은 Wetiko와 싸우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직접 대결로는 Wetiko를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Wetiko는 자기가 대결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외부의 비판은 공격으로 인식되고, 방어 기제는 더 강해진다.
Wetiko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인식이다. 감염자 스스로가 "아, 내가 Wetiko에 걸려 있었구나" 라고 깨닫는 순간. 그 순간 처음으로 치유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왜 이 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 붙이기. 질병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치유의 첫 걸음이다.
Wetiko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분해 보자. 나는 네 가지 핵심 메커니즘을 제시하려 한다.
사물화는 살아있는 존재를 "것(thing)"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체를 대상으로 환원한다.
이 책의 앞 장들에서 본 여러 예가 있다. 잉카 장인들이 수십 년 걸려 만든 황금 예술품이 금괴로 녹아내린 것(7장). 이것은 형상에서 질량으로의 환원 — 의미를 가진 대상에서 단순한 물질로의 환원이다. 노동자가 공장의 "인적 자원" 으로 분류되는 것(8장). 사람이 자원이 된다. 자원은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대상이다. 소비자가 "타겟 고객군" 으로 분석되는 것. 인간의 욕망이 광고의 재료가 된다.
사물화의 철학적 뿌리는 8장에서 본 데카르트 이원론에 있다. 주체(생각하는 것)와 대상(연장된 것)의 이분법. 모든 존재는 이 두 범주 중 하나로 분류되어야 한다. "주체"의 목록은 좁다 — 전통적으로 유럽인 남성 기독교인. 나머지는 모두 "대상" 의 범주로 떨어진다. 여성, 비유럽인, 아동, 동물, 자연. 일단 대상이 되면 — 조작 가능한 것이 된다.
사물화의 일상적 표현은 언어에 있다. "사람들을 활용하다(utilize people)". "시간을 투자하다". "관계를 관리하다". 이런 표현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 안에 담긴 존재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쓸 때마다 —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를 대상으로 재분류하고 있다.
추상화는 구체적 존재를 숫자, 범주, 통계로 환원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약 6천만 명이 죽었다." 이 문장에 공포는 없다. 왜냐하면 6천만이라는 숫자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유명한 말로 알려진 것(실제 그가 말한 것인지는 논쟁)과 관련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추상화의 힘은 거리를 만드는 데 있다. 드론 조종사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컴퓨터 화면에서 "타겟을 제거"한다. 그 타겟이 한 아버지였고, 그의 아들이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은 화면의 픽셀이 된다. 증권 거래사가 "공매도 포지션을 잡는다". 그 매도가 수천 가구의 일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경영 컨설턴트가 "인력 감축 30%" 를 권고한다.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스프레드시트의 숫자가 된다.
추상화는 Wetiko가 대규모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다. 소규모의 직접적 잔혹성은 인간의 도덕적 감각이 비교적 견뎌낸다. 그러나 대규모의 추상적 잔혹성은 훨씬 쉽다. 왜냐하면 얼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가 아이히만 재판을 분석한 후 만든 개념 —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 — 이 이것을 가리킨다.⁶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서류 더미를 처리하는 관료였다. 각 서류에는 수천 명의 운송 명령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 그것은 숫자였지 얼굴이 아니었다. 추상화가 그를 잔혹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추상화가 홀로코스트의 규모를 가능하게 했다.
분리는 나와 너, 인간과 자연, 몸과 마음의 경계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8장에서 본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이것의 철학적 완성형이다. 정신과 물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과 동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본질적 차이" 의 주장들이 하나씩 벽을 세운다.
경계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자아와 타자의 구별이 없으면 관계도 없다. 문제는 경계를 절대화하는 것이다. 투과할 수 없는 벽으로 만드는 것. 내 안에 너의 무엇도 들어올 수 없고, 네 안에 내 무엇도 흘러가지 않는다는 환상.
이 환상 속에서 — 착취가 도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 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아니다. 너의 몰락이 나의 몰락이 아니다. 따라서 너를 사용해 내 이익을 취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1976년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에서 분석한 것이 이것이다.⁷ 현대 사회는 "존재 양식(being mode)" 에서 "소유 양식(having mode)" 으로 이행했다. 존재 양식에서는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소유 양식에서는 내가 세계와 분리되어 있고, 그 세계의 일부를 내가 소유하려고 한다. 사랑조차 소유의 대상이 된다. 경험조차 축적의 대상이 된다.
분리는 자기 안에서도 일어난다. 몸과 마음의 분리. 생각과 감정의 분리. 일과 삶의 분리. 이 모든 분리가 내면의 Wetiko를 만든다. 나의 일부가 나의 다른 일부를 착취한다. 이것이 한병철이 진단한 자기 착취(8장 참조)의 뿌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이자 가장 치명적인 메커니즘. Wetiko의 자기 은폐.
앞서 레비의 분석에서 보았듯이, Wetiko는 자기가 Wetiko임을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문명화하고 있다." —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자기 정당화. "우리는 원주민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있다." — 캐나다 기숙학교의 공식 임무. "우리는 시장 효율을 높이고 있다." — 21세기 신자유주의의 언어. "우리는 인류의 생산성을 혁신하고 있다." — 오늘 실리콘밸리의 수사.
이 이야기들은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이라면 오히려 간단하다. 그것들은 부분적 진실이다. 그리고 부분적 진실이기에 더 강력하다. 실제로 원주민 아이들 중 일부는 기숙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실제로 시장 논리는 어떤 면에서 효율을 높였다. 이 부분적 진실이 전체적 파괴를 가린다.
Wetiko는 선의를 통해 작동한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식민 관료 중 많은 수가 진정으로 "원주민을 돕는다"고 믿었다. 선교사 중 많은 수가 진정으로 "영혼을 구한다"고 믿었다. 현대의 테크 리더 중 많은 수가 진정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그들의 선의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선의가 구조적 파괴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Wetiko의 본질이다.
악이 악의 얼굴을 하면 오히려 방어하기 쉽다. 악이 선의 얼굴을 할 때 — 방어가 훨씬 어렵다. 피해자조차 자기가 피해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독일-오스트리아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는 1923년 짧은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제목은 『나와 너(Ich und Du)』.⁸ 약 150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20세기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부버의 주장은 간결하다. 인간은 두 가지 근본적 관계 양식을 가진다. I-It(나-그것) 관계와 I-Thou(나-너) 관계.
I-It 관계는 대상과의 관계다. 내가 무언가를 사용, 분석, 경험, 소유할 때의 관계. 이 관계에서 "It(그것)"은 나에게 대상이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이용한다. 필요하면 버린다. 이 관계에서 나는 주체로 남아 있고, 그것은 대상에 머문다. 경계가 명확하다.
I-Thou 관계는 만남의 관계다. 내가 다른 존재를 마주할 때의 관계. 이 관계에서 "Thou(너)"는 내 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관찰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있다. 측정하지 않고 참여한다. 이 관계에서 나와 너의 경계가 녹는다. 나는 내가 되고, 너는 네가 되지만,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된다.
부버는 두 관계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I-It 없이는 과학도 기술도 사회도 불가능하다. 어떤 활동은 대상화를 요구한다. 문제는 현대 세계가 모든 관계를 I-It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It의 세계에는 하나의 You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인은 You를 보는 눈을 잃었다."⁹
Wetiko는 모든 관계를 I-It으로 환원하는 경향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Wetiko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Wetiko는 I-Thou 관계의 억압이다. 살아있는 존재를 살아있는 존재로 만나지 못하게 막는 것. 대신 대상으로, 자원으로, 도구로 환원시키는 것.
이 환원이 완성되면 — 어떤 착취도 도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It(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연필을 "착취"하지 않는다. 나는 연필을 사용한다. 같은 논리가 노동자에게, 자연에, 심지어 가족에게도 적용되면 — 식인이 일상이 된다.
부버의 통찰은 이것이다. I-Thou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성 자체를 잃는다. 왜냐하면 인간됨은 다른 존재를 Thou로 마주할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소멸하면, 우리는 — 기술적으로 인간이지만 — 영적으로는 자동인형이 된다.
부버가 이 글을 쓴 것은 홀로코스트 이전이다. 그는 자기 책의 예언적 무게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I-It의 세계가 결국 가스실을 낳았다. 수백만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이 그야말로 "It"으로 처리되었다. 서류 번호. 운송 할당. 선별 범주. 그들은 그야말로 그것이 되어 죽었다.
부버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살아남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그의 메시지는 더욱 긴급해졌다. 그리고 오늘 21세기에도 — 여전히 긴급하다. 왜냐하면 Wetiko는 형태를 바꾸어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은 현재로 돌아온다. Wetiko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한국은 이 현상의 극단적 사례다. OECD 최고 자살률. 세계 최저 출산율.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노동자. 이 통계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번아웃(burnout). 자기 생명력을 자기가 먹는 것.
한병철의 『피로사회』(2010)가 진단한 구조를 기억하자(8장). 과거의 규율 사회는 외부 강제로 작동했다. 공장 감독관, 사회의 도덕 주입, 국가 권력. 신자유주의 사회는 자기 강제로 작동한다. 아무도 당신에게 더 일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스로 더 일하도록 만든다. "당신은 성취해야 한다." "당신은 더 나아질 수 있다." "당신의 가능성을 낭비하지 마라."
이것이 내면화된 Wetiko다. 외부의 주인이 없기 때문에 반항할 대상이 없다. 나 자신이 나의 주인이자 노예다. 쉬지 않는다. 쉬면 스스로에게 죄의식을 느낀다.
이 상태가 몇 년, 몇 십 년 지속되면 — 몸과 마음이 소진된다. 이것이 번아웃이다. 그리고 번아웃은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온다. 한국 대학생의 상당 부분이 이미 번아웃 증상을 보인다. 중학생도.
의학자로서 덧붙이면, 번아웃은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상태다. 만성 스트레스가 면역계를 약화시킨다. 염증 지표가 높아진다. 노화가 가속된다. 암 발병 위험이 증가한다. 심혈관계 질환이 증가한다. 우울증과 불안이 일상이 된다. 자기 착취의 대가는 몸에 찍힌다.
그런데 이 증상을 개별 환자의 "스트레스 관리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현대 의료의 습관이다. 명상을 권하고, 운동을 권하고, 휴식을 권한다. 이것들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건드리지 않는다. 근원은 구조다. 사회가 사람을 쉴 수 없게 만드는 구조. 의료가 이 구조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의료는 Wetiko의 공모자가 된다. 증상만 다루면서 구조적 착취가 계속되도록 돕는 것이다.
17장 살루토제네시스에서 이 주제로 돌아올 것이다.
번아웃과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현대적 증상이 외로움(loneliness) 이다.
최근 연구들이 외로움을 공중 보건 위기로 다루기 시작했다.¹⁰ 영국은 2018년 "외로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 을 공식 임명했다. 미국 연방 의료장관(Surgeon General)은 2023년 외로움에 대한 경고문(advisory)을 발표했다. 그 문서의 결론: "사회적 연결 결핍이 하루에 담배 15개를 피우는 것과 건강에 동등한 해를 끼친다."
왜 외로움이 이렇게 증가했는가. 한 가지 답은 관계의 시장화다. 우정이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 로 바뀌었다. 사랑이 "데이팅 앱" 으로 바뀌었다. 공동체가 "고객 커뮤니티" 로 바뀌었다. 이 각 치환은 관계의 표면을 유지하면서 깊이를 제거한다.
이것이 Wetiko의 섬세한 작동이다. 관계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무 노골적이다. 대신 관계를 거래로 바꾼다. 거래는 I-It 관계다. 당신은 나에게 가치를 주고, 나는 당신에게 가치를 준다. 계산이 맞으면 관계가 지속된다. 맞지 않으면 종료된다. 이것이 오늘 많은 관계의 실체가 되었다.
그리고 외로움은 이 치환의 부작용이다. 거래 속에는 Thou가 없다. 존재로서의 만남이 없다. 나는 수백 명의 친구가 있어도 — 혼자 남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의 Thou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큰 규모의 Wetiko: 기후 위기와 생태 붕괴.
지구의 생명력이 추출되고 있다. 화석연료로, 산림 파괴로, 해양 남획으로, 토양 악화로. 이 추출의 속도가 지질학적 시간 단위의 비율로 일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이 현재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 로 명명했다. 인간 활동이 지구의 기본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시대.
기후 위기의 기술적 해법이 많이 논의된다. 태양광, 풍력, 전기차, 원자력. 탄소 포집. 생태 복원. 이것들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 해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는 자연을 Thou가 아니라 It으로 대한 문명의 필연적 귀결이다. 자연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났다면 우리는 지금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자연을 무한한 자원 창고로 보았다. 버려도 되는 쓰레기통으로 보았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기술적 해법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계의 회복이 필요하다. 즉 — 파차마마를 다시 기억하는 것(4장). 야쿠를 다시 친족으로 부르는 것. 아푸에게 다시 제물을 바치는 것. 문자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그 정신을 회복하는 것.
이것은 미신의 권장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적 생존 전략이다. 자연을 Thou로 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21세기의 특별한 Wetiko 형태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 가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 가 2019년 동명의 책에서 분석한 개념.¹¹
감시 자본주의의 구조는 간단하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틱톡 같은 플랫폼이 무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신 사용자의 행동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매한다. 핵심 상품은 미래 예측 — 사용자가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살 것인지, 누구를 믿을 것인지.
이 비즈니스 모델의 표면은 편의다. 당신은 무료로 서비스를 받는다. 그러나 그 뒤에는 당신 자신이 상품이다. 당신의 주의, 당신의 감정, 당신의 관계, 당신의 꿈 — 이 모든 것이 추출되고 분류되고 판매된다.
이것이 Wetiko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적 에너지(주의, 시간, 욕망)가 다른 사람의 이익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환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다. 자기 은폐의 교묘함.
오늘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컴퓨터를 켜는 순간부터 — 내 주의의 작은 조각들이 여러 방향으로 새어 나간다. 이메일 알림. 소셜 미디어 체크. 뉴스 헤드라인. 각각 1분, 2분. 하지만 합치면 하루 몇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추출되었다. 내 시간이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Wetiko 전통의 핵심에 있는 경고를 다시 떠올려본다.
"너도 Wetiko가 된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이 문장이 이 장의 가장 무거운 진실이다.
Wetiko는 "그들" 의 문제가 아니다. 포브스도 레비도 부버도 이 점을 강조한다. Wetiko는 전염병이다. 그리고 이 전염병은 수백 년간 지구를 휩쓸었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감염되어 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행위조차 — 어떤 면에서 — Wetiko의 작동이다. 나는 잉카의 이야기를 내 책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크리족 원로의 가르침을 내 학술적 분석으로 변환하고 있다. 이것들은 선의에서 나온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끊임없이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재료 삼고 있는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있는가. 경계가 늘 흐릿하다.
이것이 Wetiko의 가장 겸손한 인식이다. 우리는 감염자다. 그러나 —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첫 치유다. 크리 원로는 말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한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Wetiko를 알아보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알아보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알아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의 주제다.
먼저, Wetiko가 역사에서 어떻게 정식화되었는지를 본다(10장 바야돌리드). 그 다음, 어떻게 경제로 물질화되었는지를 본다(11장 포토시, 12장 설탕). 어떻게 동아시아로 확산되었는지를 본다(13장 1492와 1592). 어떻게 세 문명의 운명을 갈랐는지를 본다(14장). 이것이 3부의 나머지.
그 후, 4부에서 치유를 향해 간다. 페리코레시스(15장). 동양의 응답(16장). 살루토제네시스(17장). 그리고 마지막 — AI 시대의 물음을 품은 채 티폰의 물소리 앞으로 돌아가는 18장.
그러나 지금, 이 장을 덮으며, 하나의 단어를 되새긴다.
Wetiko.
크리 원로가 가르쳐준 단어. 수천 년의 지혜가 담긴 이름. 지난 500년의 세계사를 정확히 진단하는 개념. 그리고 — 오늘 내가,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서, 너에게서 찾아내야 할 병의 이름.
이름을 안다는 것이 이미 무언가다.
¹ 잭 포브스의 전기적 정보에 관하여는 UC 데이비스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학과의 공식 자료 참조.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Apache, Navaho and Spaniard (1960), Aztecas del Norte (1973), Africans and Native Americans (1988) 등이 있다.
² Jack D. Forbes, Columbus and Other Cannibals: The Wetiko Disease of Exploitation, Imperialism, and Terrorism, rev. ed.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2008; orig. 1979).
³ Christopher Columbus, The Log of Christopher Columbus, trans. Robert H. Fuson (Camden, ME: International Marine Publishing, 1987), 1492년 11월 27일 항목. 번역은 저자가 다듬었다.
⁴ Paul Levy, Dispelling Wetiko: Breaking the Curse of Evil (Berkeley, CA: North Atlantic Books, 2013).
⁵ 위의 책, 특히 제2장 "Wetiko as Psychic Blindness."
⁶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New York: Viking, 1963). 한국어 번역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
⁷ Erich Fromm, To Have or To Be? (New York: Harper & Row, 1976). 한국어 번역본: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역, 까치글방.
⁸ Martin Buber, Ich und Du (Leipzig: Insel Verlag, 1923). 영역본: I and Thou,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Scribner, 1970). 한국어 번역본: 《나와 너》, 표재명 역, 문예출판사, 2001.
⁹ 위의 책, 제1부. 번역은 저자.
¹⁰ 외로움의 공중 보건적 함의에 관하여는 U.S. Surgeon General, Our Epidemic of Loneliness and Isolation: The U.S. Surgeon General's Advisory on the Healing Effects of Social Connection and Community (Washington, D.C.: 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2023).
¹¹ Shoshana Zuboff,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New York: PublicAffair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