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돌 위에 돌을 얹다 — 정복의 문화적 완성

도입: 코리칸차의 이중 구조

아르마스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걸어서 10분. 나는 코리칸차(Coricancha) 앞에 서 있다.

정확히는 코리칸차의 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이 건물은 두 겹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잉카의 석벽. 위는 스페인의 성당. 이 도시에서 가장 농축된 식민 역사의 공간이다.

성당의 공식 이름은 산토도밍고 수도원(Convento de Santo Domingo) 이다. 벽은 하얗게 회칠되어 있고, 바로크 양식의 창과 종탑이 안데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스페인 풍의 아치, 그 안에 성모 마리아의 그림. 겉으로 보면 평범한 식민지 시대의 가톨릭 수도원이다. 쿠스코 시내에 이런 건물이 수십 개 있다.

그러나 건물의 아래쪽을 보면 — 전혀 다른 것이 나타난다. 회칠이 칠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난 거대한 안산암 블록의 벽. 다각형으로 완벽하게 맞물린 돌들. 삭사이와만에서 본 것과 같은 석조 기법. 모서리가 둥글려져 있고, 틈이 없다. 500년 된 벽이 어제 지어진 것처럼 깨끗하다.

이것이 원래의 코리칸차다. 잉카 제국 최고의 신전. "황금의 뜰"이라는 뜻이다.

나는 손을 대본다. 돌의 표면이 차갑고 매끄럽다. 손끝으로 돌과 돌 사이의 틈을 더듬는다. 틈이 없다. 500년간 비바람과 지진을 견디고도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다.

그리고 바로 위, 이 잉카 석벽 위에 스페인의 아치가 얹혀 있다. 하얀 회칠과 붉은 기와. 두 문명의 돌이 한 벽 속에 포개져 있다. 아래는 500년간 침묵한 잉카, 위는 500년간 소리를 낸 스페인.

여러 번의 지진

이 건물에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1650년, 1950년, 1986년 — 쿠스코는 세 번의 큰 지진을 겪었다. 각각 매그니튜드 6.0 이상.¹ 그때마다 스페인이 쌓아 올린 수도원의 위층이 무너지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회칠이 떨어지고, 기와가 깨지고, 종탑이 기울었다. 스페인 건물은 재건축되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차례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잉카의 아래층은 멀쩡했다.

1950년 5월 지진 때 찍힌 사진이 있다. 수도원 위층이 폭격 맞은 것처럼 깨졌는데, 아래의 잉카 석벽은 단 한 개의 돌도 이탈하지 않았다.²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잉카 석조의 지진 내성으로 설명한다. 돌이 서로 맞물려 있고, 작은 흔들림에 오히려 더 단단히 조여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반면 스페인 건물은 회반죽으로 돌을 붙인 방식이라 흔들림에 약하다.

이 대비가 너무 선명해서, 쿠스코에서는 이것이 상징적 이야기가 되었다. 식민의 구조물은 흔들리면 무너진다. 잉카의 돌은 흔들려도 남는다.

이 장은 이 상징을 풀어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식민 지배가 공간 위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장치로 작동했음을 드러낸다. 하나는 잉카의 건물을 뜯거나 그 위에 덮어쓰는 방식. 또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스페인식 건물을 세우되 그 내부 예술을 원주민 장인의 손에 맡기는 방식. 전자는 공간의 강탈이고, 후자는 퓨전의 식민이다. 두 장치는 시기도 다르고 논리도 다르다. 그러나 같은 제국의 동시 작동이었다.

이 장에서 나는 두 장치를 차례로 걷는다. 먼저 코리칸차 — 파괴와 덮어쓰기. 다음으로 쿠스코에서 차로 40분 떨어진 마을 안다와일리야스(Andahuaylillas) — 새로 지은 교회 안쪽에 원주민 장인들이 남긴 혼종 예술. 돌 위에 돌을 얹어도 아래 돌이 남고, 스페인 건물 안에 안데스가 숨어 노래한다. 두 장소가 함께 식민의 실체를 드러낸다.


코리칸차 — 황금을 녹인 성전

원래의 모습

코리칸차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다행히도 여러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이 생생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들 자신이 눈앞에서 본 것들이기 때문이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은 1540년대에 쿠스코를 방문했다. 그가 본 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약탈된 상태의 코리칸차였지만, 일부 잉카 귀족들이 증언해준 원래 모습을 그는 기록했다.

"신전의 벽 전체가 황금판으로 덮여 있었다. 두께는 손가락 한 마디, 너비는 한 뼘, 높이는 사람의 키. 이런 판이 수백 장 있었다. 금으로 만든 태양이 있었다. 너무 커서 신전 벽 하나 전체를 채웠다. 정원에는 실물 크기의 황금 옥수수 줄기가 있었다. 잎까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은으로 만든 라마도 있었다. 새끼까지 달린 어미 라마. 모두 정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녁 햇빛이 신전 안에 비치면, 온 벽과 정원이 불타는 것 같았다."³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의 기록은 더 상세하다. 그는 잉카 공주와 스페인 정복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쿠스코에서 잉카 귀족 친척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가 전한 것은:

태양의 방: 신전의 중심. 벽 하나에 거대한 황금 태양이 걸려 있었다. 그 얼굴은 인간의 모습이었고, 태양 광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이 태양 앞에 매일 대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올렸다.

달의 방: 태양의 방 옆. 은으로 만든 달이 있었다. 잉카 왕비들의 미라가 여기 안치되어 있었다. 죽은 왕비들이 달의 보호 아래 쉰다고 믿었다.

번개의 방: 쿠이치(Cuychi). 번개와 천둥과 무지개의 신.

별의 방: 쿠일러(Coillur). 별들이 달의 시녀로 여겨졌다.

조상의 방: 역대 잉카 황제들의 미라가 안치되어 있었다. 미라들은 살아있을 때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받았다. 축제 때는 광장에 모셔 나와 다른 왕실 구성원들과 함께 자리했다. 죽음이 삶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정원. 코리칸차의 바깥에 있는 의례용 정원. 이것이 가장 경이로웠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옥수수 밭이 금으로. 감자 뿌리가 은으로. 알파카가 금으로. 새들이 은으로. 심지어 벌레와 나비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잉카 장인들이 얼마나 정교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⁴

이 모든 것이 1533년 이후 녹여졌다.

형상에서 질량으로

아타우알파의 몸값을 모으는 과정에서, 쿠스코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카하마르카로 보내졌다. 그중 상당 부분이 코리칸차에서 왔다. 피사로의 부하들은 코리칸차의 황금판을 하나씩 뜯어내어 북쪽으로 운반했다.

1533년 이후, 피사로 본대가 쿠스코를 점령하자 잔여 약탈이 이루어졌다. 코리칸차에 남아 있던 모든 금속 예술품이 거둬졌다. 미라들도 광에서 끌려 나왔다. 거기 장식된 금과 은이 뜯겼다.

모든 것이 금괴와 은괴로 재주조되었다. 형상을 질량으로 환원하기. 잉카 장인의 손끝 지혜가 균일한 금속 덩어리로 용해된다. 이것이 근대성의 본질이다.

잉카 장인이 수십 년 걸려 만든 황금 옥수수 — 그 잎맥 하나까지 새겨 넣은 정교한 예술품 — 이 10분 만에 용광로에서 녹아 균일한 금괴가 된다. 그것이 스페인으로 실려 가서, 왕실 재정으로 들어가고, 유럽 은행가들의 금고를 채우고, 네덜란드와 제노아로 유통되어, 결국 식민지 확장의 자금이 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투자되고, 더 많은 식민지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 한 경제 사슬 전체가 잉카 장인의 손끝 지혜를 말소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경제 시스템이 된 어떤 논리의 시작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 문명의 예술은 돈이 되는 순간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사라진 예술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당이 얹히다

코리칸차의 건물 자체는 처음에 해체되지 않았다. 왜? 잉카 석벽이 너무 완벽해서 부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페인 건축가들이 시도해봤지만, 석공 수십 명의 며칠 작업으로도 돌 하나를 빼내기 힘들었다. 비용이 너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잉카 벽을 기단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그 위에 스페인 건물을 얹는 것.

1534년부터 산토도밍고 수도원 건설이 시작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가 관리했다. 코리칸차의 상층부가 철거되었고 — 정확히는 황금이 뜯긴 후 남은 석조물이 일부 해체되었고 — 그 위에 유럽식 아치와 회랑과 성당이 올라갔다. 1540년대에 완공되었다.

이 구조에 담긴 상징적 메시지는 명백하다. 기독교가 잉카 신앙을 덮는다. 잉카의 신전은 파괴되었지만, 그 땅의 영적 권위는 남아 있다. 가장 신성한 곳에 새로운 신을 모시면, 그 영적 권위를 가로챌 수 있다. 잉카 사람들이 왜 이 자리에 와서 기도했는가. 왜 이 지점이 우주의 중심이라 여겨졌는가. 그 권위를 교회가 이용한 것이다.

이것은 카하마르카의 논리의 연장이다. 아타우알파의 왕관을 망코 잉카에게 넘겨 정통성을 빌렸듯이, 코리칸차의 기단 위에 성당을 세워 영적 정통성을 빌렸다. 파괴하면서 동시에 흡수하는 전형적 기법이다.

삭사이와만 — 요새에서 채석장으로

해체의 정책

1536년 망코 잉카의 대반란 이후, 스페인의 정책이 달라졌다. 그들은 삭사이와만을 전략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반란 동안 잉카군이 이 요새를 사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대반란 진압 이후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총독은 명령했다 — 삭사이와만을 조직적으로 해체하라.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잉카 군사력의 상징 제거. 둘째, 식민 도시 쿠스코 건설의 자재 확보.

16세기 내내, 삭사이와만은 채석장이 되었다. 매일 스페인 감독관의 지휘 아래 원주민 노동자들이 거석을 해체했다. 가장 큰 돌들은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남겨졌다. 그러나 작은 돌들 — 그러나 "작은"의 기준이 잉카적이어서, 여전히 수 톤 단위의 돌들 — 은 조직적으로 운반되었다.

어디로? 쿠스코 시내로. 성당, 수도원, 대저택, 공공 건물. 16세기 식민 쿠스코의 주요 건축물 대부분이 삭사이와만의 돌로 지어졌다.⁵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Catedral de Cuzco) — 1559년 착공, 1654년 완공 — 이 대표적 예다. 이 성당의 기단과 하층부 벽은 삭사이와만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했다. 대성당 옆의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예수회 교회)도 마찬가지. 로레토 거리의 오래된 저택들, 카사 델 인카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 이 모든 곳에 삭사이와만의 돌이 들어가 있다.

한 세기 만에 원래 요새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학자들은 본래 규모의 절반에서 많게는 삼분의 이 이상이 이 해체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추정한다.⁶ 우리가 1장에서 본 거대한 삭사이와만은 그 중에서도 해체되지 못하고 남은 20~50퍼센트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내가 삭사이와만에 올라가 거석 앞에서 말을 잃었던 그때, 나는 원래 삭사이와만의 절반 이하를 보고 있었다. 온전한 삭사이와만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쿠스코의 아름다움이라는 역설

오늘날 쿠스코는 관광객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로 불린다. 식민지 시대의 바로크 건축이 안데스의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 붉은 기와 지붕과 하얀 회칠 벽. 돌길과 아치. 사진으로 담기면 유네스코 홍보 포스터 같다.

이 아름다움에는 역설이 있다.

쿠스코 식민 건축의 많은 돌은 잉카 건축에서 나왔다. 벽 하단의 다각형 석재 — 관광객들이 "잉카 유산"으로 사진 찍는 바로 그 돌들 — 중 상당수는 원래 다른 장소의 잉카 구조물에서 옮겨진 것이다. 삭사이와만에서, 해체된 잉카 귀족 저택에서, 부서진 신전에서.

그래서 이런 말이 가능해진다. "스페인 쿠스코의 아름다움은 잉카 쿠스코의 시신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물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말하면 관광업 종사자들은 불편해한다. 쿠스코의 정체성은 "식민 + 잉카의 조화" 로 포장된다. "두 문명의 만남이 만든 독특한 도시"라는 서사. 그러나 이 서사는 만남의 실체를 감춘다. 그 만남은 폭력이었다. 한쪽이 다른 쪽을 해체하고 흡수하는 방식의 "만남."

이 구조를 명확히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구조가 현재에도 반복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한국적 병치 —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한국 독자에게 한 병치가 즉시 떠오를 것이다.

1926년, 일제는 경복궁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했다. 광화문을 해체해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거대한 유럽식 석조 건물을 세웠다. 이 배치는 의도적이었다. 경복궁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그 앞을 일제 행정 건물이 가로막는다.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총독부를 거쳐야 한다. 시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조선이 일본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매일 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구조였다.⁷

이것은 코리칸차 위에 산토도밍고 수도원을 세운 것과 같은 논리다. 한쪽의 신성한 장소 위에 다른 쪽의 권위를 얹는다. 해체하지 않고 흡수한다. 매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위계를 새긴다.

그리고 1995년, 한국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이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었다. "돌을 되찾는 행위" 였다. 상징의 공간을 회복하는 정치적 선택.

그러나 여전히 남은 것이 있다. 서울대학교 본관은 원래 경성제국대학 건물이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구 본관)도 일제강점기 건축. 한국 관공서와 학교와 기업의 여러 건물이 일제의 유산 위에 세워져 있다.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한국은 이 유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해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운 근대 건축" 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쿠스코가 같은 질문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식민 경험 국가들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돌 아래의 돌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시작이다.

우상 근절 운동 — 체계화된 말살

1572년 이후의 정책

투팍 아마루의 처형(1572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총독은 잉카의 정치적 저항을 끝낸 다음, 영적 저항을 겨냥했다. 그의 정책은 우상 근절(Extirpación de Idolatrías)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⁸

우상 근절은 단순히 "이교도 개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장기간에 걸친 문화 말살 프로그램이었다.

대상은 다양했다. 첫째, 와카(huaca) — 잉카 종교에서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 물건, 존재들. 여기에는 특정 샘, 바위, 산, 나무, 조상의 미라, 천문학적 지표물 등이 포함된다. 쿠스코 주변에만 수백 개의 와카가 있었다. 둘째, 미라 — 잉카 귀족 가문의 조상 미라들. 이들은 특정 날짜에 광장에 모셔져 의식에 참여했다. 가족 구성원으로 취급되었다. 셋째, 예술품 — 도자기, 직물, 금속 공예품, 의례용 그릇. 넷째, 의식 도구 — 악기, 제기, 점치는 도구. 다섯째, 구전 전통 — 노래, 기도, 신화, 족보.

이 모든 것이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기록

놀라운 것은 이 파괴가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자랑스럽게 남았다는 점이다.

예수회 신부 파블로 호세 데 아리아가(Pablo José de Arriaga) 는 1621년 『페루의 우상 근절(La extirpación de la idolatría en el Perú)』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얼마나 많은 우상을 파괴했는지 자세히 적었다. 페루 중부 한 지역에서만 수년 동안:

"우리는 5,694개의 우상을 파괴하였다. 그중 3,418개가 말라키(malqui, 조상 미라) 였다. 또 477개의 금은 예술품을 불태웠거나 녹였다. 603개의 의식용 그릇을 깨뜨렸다."⁹

이 숫자는 단 한 지역의, 수년간의 기록이다. 이 운동이 페루 전역에서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파괴된 것의 총량은 가늠이 어렵다. 연구자들은 보수적 추정으로도 수만 개의 와카, 수십만 점의 예술품이 파괴되었다고 본다.

미라들

특히 마음 아픈 것이 미라의 처리다.

잉카에서 조상 미라는 살아있는 가족 구성원이었다. 후손들은 미라를 안치한 방에 음식과 옥수수술(치차)을 바쳤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미라의 "의견"을 묻는 의식을 치렀다. 축제 때는 광장에 모셔 나와 다른 가족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죽음이 삶의 연장이었고, 조상은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이것을 "우상 숭배의 극치"로 보았다. 그들은 미라를 불태우거나 묻어버렸다.¹⁰

이것은 단순한 "예술품 파괴"와 다르다. 이것은 가족을 빼앗는 것이다. 후손들에게 "너희의 할머니, 너희의 증조할아버지가 악마의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제거한다.

내가 쿠스코 잉카 박물관에서 두개골 천공 수술 흔적이 있는 두개골들을 보았을 때 — 그 방에 있던 모든 두개골들은 본래 안치된 장소에서 떠난 것들이었다. 가족의 집에서, 공동체의 신전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박물관에 온 것들. 일부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부는 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과거의 선교사들은 악마를 제거한다고 믿었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문화유산을 보존한다고 믿는다. 의도는 다르다. 그러나 구조는 같다. 타인의 가족을 그들의 동의 없이 옮기는 것. 그 가족에게 무엇이 신성한지 외부에서 결정하는 것.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의 미라를 볼 때마다, 나는 이 구조적 폭력을 느낀다.

비교할 데가 없는 상실

얼마나 많은 우상이 파괴되었는가를 집계하려는 선교사들의 자랑은, 역설적으로 당시 잉카 문화의 밀도를 드러낸다. 5,694개의 우상이 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그 지역이 얼마나 깊이 신성으로 채워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가톨릭 성화가 놓였다. 새로운 이름의 성인들이 숭배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소실은 유럽이 기억하는 비극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지적 유산이 재로 변한 순간. 그러나 페루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만 개의 와카와 수십만 점의 예술품이 체계적으로 파괴된 100년의 운동은 — 누가 기억하는가?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소실"과 비교할 만한, 혹은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인류사적 지적 재앙이다. 그러나 한국에도, 서구에도, 이 사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거의 없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는가는 누가 역사를 쓰느냐에 달려 있다.

키푸의 소각

1583년 제3차 리마 공의회

키푸(quipu) — 매듭과 색과 꼬임으로 정보를 기록하는 잉카의 언어. 하버드의 게리 어튼의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 키푸는 단순한 숫자 장부가 아니라 서사적 기록까지 담을 수 있는 고차원 정보 체계였다.

그 키푸가 어떻게 사라졌는가. 이 이야기는 문화 말살의 가장 결정적 사건 중 하나다.

스페인 정복 초기, 정복자들은 키푸의 유용성을 알아챘다. 잉카 행정 체계가 이미 키푸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그 체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조공 징수, 노동 동원, 인구 파악 — 모두 키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기 식민지 행정관들은 키푸카마욕(quipucamayoc) 에게 기록을 맡겼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583년, 제3차 리마 공의회(Third Council of Lima)가 소집되었다.¹¹ 가톨릭 교회의 페루 최고 의회였다. 이 공의회는 식민지 교회의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 그중 하나가 키푸였다.

공의회의 결정은 단호했다. 키푸는 "우상 숭배의 도구" 이다. 왜냐하면 키푸를 통해 잉카 전통이 전승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교리, 조상의 기억, 종교 의식의 절차 — 이 모든 것이 키푸에 담길 수 있다. 따라서 키푸는 기독교 개종을 방해하는 도구다. 그리고 공의회는 명령했다 — 모든 키푸를 파괴하라.

대량 소각

명령이 내려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대량 소각이 이루어졌다. 방법은 단순했다. 마을에서 키푸를 발견하는 대로 즉시 태웠다. 숨기는 자가 발견되면 처벌했다. 키푸카마욕들은 자신의 매듭을 대대로 물려주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키푸가 불탔는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스페인은 파괴된 와카의 숫자는 자랑스럽게 세어두었지만, 키푸의 숫자는 세지 않았다. 그만큼 하찮게 여겼거나, 아니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거나.

연구자들은 수만 개가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어쩌면 수십만 개. 잉카 제국 전역에 걸쳐 축적된 모든 종류의 기록 — 행정, 인구, 법률, 역사, 종교, 아마도 문학과 시 — 이 잿더미가 되었다.¹²

오늘날 남아 있는 키푸는 약 1,400개로 집계된다. 대부분은 박물관과 사적 수집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미해독 상태다. 키푸카마욕의 세습이 단절된 후, 그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해석자가 사라지면, 기록 자체가 침묵한다.

무엇을 잃었는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잉카의 역사를 잉카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다. 우리가 읽는 거의 모든 잉카 연대기는 스페인인이 썼거나, 스페인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도, 펠리페 과만 포마 데 아얄라(잉카 혈통의 기록자)도, 모두 스페인어로 스페인 독자를 위해 썼다. 잉카인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기록 도구로, 자신을 설명한 텍스트는 — 거의 없다.

내가 쿠스코 잉카 박물관에서 키푸를 보며 가장 아프게 느꼈던 것이 이것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의 그 매듭 묶음에는 분명히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인구 통계일 수도 있고, 수확량 보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느 여인의 이름일 수도, 어쩌면 아름다운 노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을 묶은 사람, 그것을 읽을 줄 알았던 사람들 — 모두 사라졌다.

우리가 잃은 것은 유물이 아니다. 사유 방식이다.


안다와일리야스 — 40분의 거리, 다른 세계

차로 이동

나는 쿠스코에서 차를 빌렸다. 남동쪽으로 40분. 구불구불한 안데스 계곡 길. 해발 3천 미터의 옥수수 밭을 지나, 강을 한 번 건너고, 작은 흙벽 마을을 몇 개 지나면 안다와일리야스(Andahuaylillas) 에 도착한다. 인구 5천의 작은 마을. 광장은 소박하고, 주민들은 시장을 오가고, 닭이 돌길을 가로지른다.

그 광장 한쪽에 낡은 어도비 벽의 교회가 서 있다. 겉만 보면 안데스 시골의 평범한 식민지 교회다. 흰 회칠, 붉은 기와, 두 개의 종탑. 여느 작은 본당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숨이 멎는다.

사진 1 (파사드 전체) 위치 — 캡션: 안다와일리야스 성당(1580~1620년경 건립) 외관. 소박한 어도비 외벽 안에 안데스 바로크의 정수가 숨어 있다. 아치 둘레 라틴어 "BENEDICTA DOMUS DEI..."(축복받은 하나님의 집) 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안데스의 시스티나"

안다와일리야스 성당(Iglesia de San Pedro Apóstol de Andahuaylillas) 은 예수회가 세운 작은 본당이다. 건축 시기는 코리칸차 위 산토도밍고 수도원보다 반세기 늦다. 1580년부터 17세기 초까지의 건립기. 즉, 정복 초기의 파괴와 덮어쓰기 단계가 아니라, 식민 체제가 안정화되어 문화적 통치 단계로 접어든 시기의 산물이다.

이 시기의 스페인 교회 전략은 달라졌다. 초기처럼 잉카 건물을 허물거나 그 위에 포개는 것이 아니라 — 이미 충분히 파괴되었기에 — 완전히 새 건물을 세운다. 스페인식으로. 그러나 그 내부를 채울 예술과 장식은 원주민 장인들에게 맡긴다. 교화의 효율 때문이었다. 원주민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언어로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벽화와 제단과 천장이 모두 원주민의 손을 거친다.

그 결과가 이 성당이다. 학계가 "안데스의 시스티나(Sistine Chapel of the Andes)"라 부르는 공간.

사진 3 (본당 전경) 위치 — 캡션: 안다와일리야스 성당 본당. 무데하르(mudéjar) 격자 천장, 쿠스코 화파 벽화, 황금 제단이 한 공간에 응축되어 있다. 무어인의 건축 양식 + 스페인 바로크 + 안데스 상징의 삼중 융합.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천장부터 본다. 격자 목재 천장. 이것은 스페인 남부의 무데하르(mudéjar) 양식 —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무슬림) 장인들이 수 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양식이다. 스페인이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무어인을 추방하면서, 그들이 남긴 건축 양식은 오히려 가톨릭 교회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양식이 대서양을 건너와, 안데스의 예수회 본당 천장에 다시 새겨져 있다. 한 제국이 집어삼킨 타자의 예술이 또 다른 타자의 손으로 반복된다.

퓨전의 증거들

벽을 둘러본다.

사진 2 (성 베드로 벽감과 천사 머스킷병) 위치 — 캡션: 성 베드로 벽감과 천사 머스킷병(ángel arcabucero). 유럽 도상 안에 안데스 전사의 잔영이 깃들어 있다. 천사가 화승총을 든다는 것은 유럽 전통에 없었다. 안데스에서만 발달한 독특한 도상이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천사 머스킷병(ángel arcabucero) 은 이 지역에만 있는 도상이다. 유럽 천사는 평화의 존재다. 칼이나 창은 미카엘 같은 군천사가 가끔 들긴 해도, 화승총을 든 천사는 전례가 없다. 그런데 안데스에서는 천사들이 머스킷을 들고, 귀족 군복을 입고, 깃털 머리장식을 쓴다. 이것이 안데스 전사 영혼이 기독교 천사의 형식으로 번역된 결과다.

사진 4 (황금 제단) 위치 — 캡션: 안다와일리야스 주제단. 포토시 광산에서 강제 노동으로 채굴된 금이 잉카 태양신 인티(Inti)의 빛을 환기하는 형식으로 돌아왔다. 정복자들이 코리칸차의 황금판을 모두 녹였을 때 그들은 황금을 가져갔다고 믿었다. 500년이 지난 이 제단에서 그 황금은 다른 형식으로 돌아와 있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황금 주제단을 본다. 반짝이는 금박 위에 성모와 성인과 천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 금은 대부분 포토시(Potosí) 은광에서 나왔다 — 원주민 노동으로 채굴된 은과 금이 공물로 흘러와 교회 장식이 되었다. 잉카가 수백 년에 걸쳐 만든 인티(태양신) 의 황금판은 녹아 없어졌지만, 황금 그 자체는 대륙을 돌아 다른 형식으로 이 제단 위에 돌아와 있다. 정복자가 "우리가 그들의 금을 가져갔다"고 믿었을 때, 실제로는 황금이 자기 자리에 되돌아오는 더 긴 순환 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5 (사제석의 성모와 사이렌) 위치 — 캡션: 사제석 벽. 성모 마리아는 삼각형 드레스를 입고 있다 — 안데스 산(아푸)의 형상. 그녀의 발밑, 벽화 한 켠에 가슴이 반쯤 드러난 안데스 사이렌이 그려져 있다. 마마 코차(호수의 어머니)의 후예. 가톨릭 가장 깊은 곳에서 안데스가 노래한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사제석을 본다. 성모 마리아의 드레스가 삼각형으로 펼쳐져 있다. 안데스의 산(아푸)의 형상. 성모의 아래, 벽화 한 편에 가슴이 반쯤 드러난 사이렌이 그려져 있다. 악기를 들고 있다. 가톨릭 성당의 사제석에 사이렌이? 이것은 유럽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배치다. 그러나 여기에는 있다. 왜냐하면 이 여성은 유럽의 세이렌이 아니라 마마 코차(Mama Cocha) — 호수의 어머니 — 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원주민 장인은 자기 세계의 여신을 가톨릭 성모 아래에 숨겨 두었다. 교회 당국은 "장식적 모티프" 로 넘어갔다. 원주민 신자들은 자기 어머니를 보았다.

두 갈래 길 — 교화의 역설

성당 내부 가장 유명한 벽화는 입구 양쪽에 마주 보며 그려진 두 갈래 길 이다. 화가 Luis de Riaño(c.1596~1667) 와 원주민 조수들의 공동 작품.

사진 6 (넓은 길, Via Lata) 위치 — 캡션: "Via Lata(넓은 길)" 벽화. 지옥으로 가는 행렬 속에 스페인 귀족 부부가 호화로운 복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 깃털 모자, 비단 망토. 그들은 자기들이 지옥으로 가는 줄 모르고 있다. 가톨릭 교화의 도구가 식민 엘리트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사진 7 (좁은 길, Via Angusta) 위치 — 캡션: 같은 성당의 "Via Angusta(좁은 길)". 천국으로 가는 좁은 다리 옆에 식민지 부유층의 잔치가 펼쳐져 있다. 식탁 위의 음식·포도주·식기는 정복 후 페루의 풍요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풍요가 영혼의 발목을 잡는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저자 촬영, 2026년 4월 19일)

이 두 벽화는 성당의 원래 교화 목적대로라면 "원주민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는" 시청각 자료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 넓은 길에서 지옥으로 걸어가는 행렬의 선두에 스페인 귀족 부부가 있다. 깃털 달린 모자, 비단 망토, 금은 보석. 그들은 웃고 있다.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 줄 모른 채.

좁은 길 옆의 식탁도 마찬가지다.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 — 정복 후 페루의 부유한 엘리트의 잔치. 이 풍요가 영혼의 발목을 잡는다.

누구를 경고하는가? 원래 의도는 물론 원주민 교화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 속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식민 지배층 이다. 화가가 의도적이었는지, 후원자가 묵인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화가가 자기 주변에서 본 부자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쓴 것인지 —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결과는 분명하다. 교화의 도구가 교화를 받는 자의 얼굴을 하지 않고, 교화하는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 학설과 "복잡한 협상"

이런 혼종 예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학계는 오랫동안 세 갈래 해석을 놓고 논쟁했다.

학설 1 — 의식적 저항: 원주민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안데스 상징을 삽입했다. 가톨릭의 외피 아래 자기 종교를 지키는 지하 저항.

학설 2 — 무의식적 혼합: 원주민 화가들이 가톨릭 도상을 배우면서 자기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했다. 저항이 아니라 번역. 산을 그리라면 자기가 아는 산, 즉 아푸를 그린다. 여자를 그리라면 자기가 아는 여성 신성, 즉 파차마마를 그린다.

학설 3 — 복잡한 협상(현대 주류): 어떤 작품은 의식적 저항이고, 어떤 작품은 무의식적 혼합이며, 어떤 작품은 스페인 후원자가 원주민 친화 이미지를 주문했다 — 교화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단일 설명은 불가능하다. 작품마다, 화가마다, 후원자마다, 시기마다 다르다.

Carolyn Dean, Gauvin Alexander Bailey, Ananda Cohen Suarez 같은 연구자들이 이 세 번째 입장으로 수렴한다. 안다와일리야스는 저항도 아니고 항복도 아니다.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여러 목소리의 공존 이다. 어떤 화가는 무기로, 어떤 화가는 번역으로, 어떤 후원자는 전략으로. 각자의 이유로 손이 움직이고, 그 손들이 모여 이 성당을 이룬다.

이것이 식민 경험의 대부분이다. 극적 저항도 아니고, 완전한 굴복도 아니다. 변형된 형태로 지속하는 일상의 협상.


쿠스코 화파의 지평 — 그리고 오늘까지

안다와일리야스는 한 본당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안의 도상들 — 삼각 드레스의 성모, 머스킷 든 천사, 옥수수 든 아기 예수, 배경의 라마와 알파카 — 은 쿠스코 중심으로 17-18세기 안데스 전역에 퍼진 **쿠스코 화파(Escuela Cuzqueña)**¹³ 의 공통 어휘였다. 한 마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수백의 본당 벽에 반복되었다. 검열의 틈새가 좁아도, 붓은 계속 움직였다.

이 화파는 18세기 말부터 쇠퇴했지만, 더 넓은 의미의 안데스 지속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매년 6월 "태양의 축제"(인티 라이미, Inti Raymi) 가 쿠스코에서 열린다. 원래 잉카의 가장 큰 연중 축제였다. 정복 후 금지되었지만, 20세기 중반에 부활했다. 공식적으로는 "역사적 재현" 이지만, 실제로는 살아있는 영적 행위다. 수만 명의 케추아 사람들이 참여한다.

매년 8월 1일파차마마의 날이다. 안데스 전역에서 사람들이 땅에 술을 뿌리고 코카 잎을 바친다. 가톨릭 달력에 없는 날이다. 그러나 가톨릭 본당 앞마당에서도 이 의식이 치러진다. 두 전통이 나란히 존재한다.

케추아어는 여전히 약 800만 명이 사용한다.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공식 언어 중 하나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가정의 주 언어다.

잉카의 농법 — 티폰의 수로 관리, 모라이의 실험 — 도 여전히 안데스 농민 공동체에서 실천된다. 파에나와 밍카, 공동체의 집단 노동 관습도 남아 있다. 아이유의 구조도 많은 시골 마을에서 지속된다.

완전한 파괴는 불가능했다.

결론: 두 장소가 서로를 응시한다

해가 저물고 있다. 나는 다시 코리칸차 앞으로 돌아왔다.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잉카 석벽을 비춘다. 돌의 결이 선명해진다. 다각형의 모서리들. 틈 없는 맞물림. 5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모습.

그 위의 산토도밍고 수도원은 하얀 회칠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기와 몇 개가 비뚤어져 있다. 다시 보수해야 할 때가 됐다. 이 건물은 주기적으로 보수한다. 그래야 유지된다.

아래의 돌은 보수가 필요 없다. 500년간, 인간의 손 없이도, 자기 자리에 있다.

40분 떨어진 안다와일리야스의 성당에서는 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페인은 자기의 건물을 세웠다. 완전히 스페인식으로. 그러나 그 안을 채울 때 원주민 장인의 손을 빌렸다. 그리고 그 손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그려 넣었다. 삼각 드레스의 성모, 머스킷 든 천사, 제단 아래의 사이렌.

두 장소가 서로를 응시한다.

코리칸차에서는 정복자가 말한다 — "우리가 너희의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우리 신전을 세웠다. 우리가 이겼다." 잉카의 돌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돌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계속 거기 있다.

안다와일리야스에서는 정복자가 말한다 — "우리가 너희에게 가톨릭을 가르쳤고 너희는 그 언어로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이겼다." 원주민 장인의 붓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붓은 계속 움직였다. 다만 그 움직임 안에 다른 세계가 함께 들어와 있었다.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어느 쪽도 완전한 패배가 아니다.

코리칸차에서 정복자들은 돌을 뜯어냈다. 안다와일리야스에서 피정복자들은 물감을 칠했다. 두 장소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이겼다"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너희가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다"고 응답한다. 이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시스템, 그러나 균열이 있는

이 장에서 본 모든 것 — 코리칸차의 용해, 삭사이와만의 해체, 우상 근절, 키푸의 소각, 안다와일리야스의 혼종 예술 — 은 서로 다른 장치지만 하나의 제국적 시스템의 작동이다. 파괴로 가든, 흡수로 가든, 목적은 하나였다. 다른 문명을 자기의 언어로 번역하거나 삭제하는 것.

이 시스템에는 이름이 있다. 나도 이 단어를 만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어느 책을 읽다가 낯선 단어 하나에 걸려 멈췄다.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결국 내 크리족 누나에게 물었다.

Wetiko.

이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는지,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지는 이어지는 장에서 다룬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장소 사이에서 이 장을 마친다. 코리칸차의 돌과 안다와일리야스의 벽화. 하나는 침묵으로, 다른 하나는 숨은 노래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잃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 구분이 중요하다.


각주

¹ 쿠스코 지역의 주요 지진에 관하여는 Leonidas Ocola et al., "Seismic Activity in Cusco, Peru," Tectonophysics (2005).

² 1950년 5월 21일 쿠스코 지진 후 코리칸차의 상태에 관하여는 Luis A. Pardo, Historia y arqueología del Cuzco (Lima, 1957), 사진 자료 참조.

³ 코리칸차의 원래 모습에 관한 기록은 Pedro Cieza de León, Crónica del Perú, Segunda Parte (1553), 제27장. 본문의 인용은 저자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⁴ 코리칸차 정원의 금속 예술품에 관하여는 Garcilaso de la Vega,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 (1609), 제3부 제20장.

⁵ 삭사이와만 해체 과정에 관하여는 John Hemming, The Conquest of the Incas (New York: Harcourt Brace, 1970), pp. 222-225; 그리고 Brian S. Bauer, Ancient Cuzco: Heartland of the Inka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4), 제6장.

⁶ 삭사이와만 원형 규모의 추정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보수적 추정으로도 절반 이상이 해체된 것으로 본다. Bauer (2004), 앞의 책.

⁷ 조선총독부 건물의 배치와 상징성에 관하여는 김정동,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서울: 대원사, 2000), 특히 제2장.

⁸ 우상 근절 운동의 역사에 관하여는 Kenneth Mills, Idolatry and Its Enemies: Colonial Andean Religion and Extirpation, 1640-1750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⁹ Pablo José de Arriaga, La extirpación de la idolatría en el Perú (Lima, 1621). 본문에 인용된 숫자는 저자가 원문에서 종합한 것이다.

¹⁰ 미라 파괴에 관하여는 Sabine MacCormack, Religion in the Andes: Vision and Imagination in Early Colonial Peru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제2장.

¹¹ 제3차 리마 공의회의 키푸 소각 결정에 관하여는 Sabine Hyland, Gods of the Andes: An Early Jesuit Account of Inca Religion and Andean Christianity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11).

¹² 현존 키푸 약 1,400개라는 추정은 하버드 대학교 키푸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Khipu Database Project)의 집계에 근거한다. Gary Urton 외의 지속적 연구.

¹³ 쿠스코 화파의 안데스적 요소에 관하여는 Gauvin Alexander Bailey, Art of Colonial Latin America (London: Phaidon, 2005), 제3장; 그리고 Carolyn Dean, Inka Bodies and the Body of Christ: Corpus Christi in Colonial Cuzco, Peru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9).

『페루-쿠스코-마추피추 여행기』 집필 중 · 생성: 2026. 4. 20. PM 8:2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