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카하마르카에서 빌카밤바까지 — 정복이라 불린 학살

도입: 아르마스 광장에서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은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이다. 사방에 대성당과 식민지 시대의 저택이 서 있고, 광장 중앙에는 분수가 있으며, 주변 카페 테라스에는 여행자들이 커피를 마신다. 안데스의 햇살이 밝고, 상인들이 알파카 목도리와 손뜨개 모자를 들고 다가온다. 바쁘고 평범한 관광지다.

나는 그곳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 광장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와카이파타(Huacaypata, "울음의 광장") 이 있고, 쿠시파타(Cusipata, "기쁨의 광장") 도 있었다. 잉카 시대 쿠스코의 심장부.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행해졌고, 계절 축제가 열렸으며,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는 자리였다. 태양의 아들이 태양에 제사를 올리던 곳. 잉카의 4대 지역(수유, suyu)의 길이 모두 이 광장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533년 11월 15일, 168명의 남루한 유럽인이 이 광장에 말을 탄 채 들어왔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그의 군대.¹

나는 지금 그 돌바닥 위에 앉아 있다. 500년 전 그들이 말발굽 소리를 처음 내던 바로 그 위에. 광장 주변의 성당과 저택들은 삭사이와만의 돌로 지어졌다는 것을 이제 안다. 잉카가 세운 신전을 스페인이 해체하고, 그 돌로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다. 한 문명의 시신 위에 다른 문명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는 1533년 11월 15일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보다 정확히 1년 전, 북쪽의 작은 고원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시작한다.

그날 오후, 두 세계관이 처음 물리적으로 마주 섰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그 후 500년의 세계가 만들어질 방향이 결정되었다.

168명의 남자가 800만 명의 제국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었는가.

이 물음이 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 중 하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1997년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 그 답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 기술, 질병, 문자.²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많은 독자에게 잉카 멸망을 "운명적 비대칭"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중요한 것을 놓친다.

이 장에서 나는 다른 세 가지 비대칭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세 번째가 가장 결정적이다. 그러나 먼저 그날 오후 카하마르카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카하마르카의 덫 — 1532년 11월 16일

모든 것이 어긋난 시점

역사는 종종 좁은 타이밍의 창문 위에 지어진다.

1532년 11월,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68명의 병력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말은 62마리, 보병 106명. 숫자가 너무 작아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거의 자살 임무처럼 보인다. 그 시점 잉카 제국의 인구는 약 1,200만. 아타우알파 황제가 카하마르카 온천에 주둔시킨 군대만 약 8만 명이었다.³

피사로가 이 시점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다.

첫째, 전염병의 선행. 1524년경 파나마 쪽에서 건너온 천연두가 안데스 북부에 퍼졌다. 이 병은 스페인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잉카 제국을 휩쓸었다. 와이나 카팍 황제(파차쿠텍의 증손자)가 1525년경 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니난 쿠요치도 곧 죽었다. 제국 최고 귀족 수천 명이 죽었다.⁴

둘째, 내전. 와이나 카팍의 죽음으로 두 아들이 왕좌를 두고 싸우게 되었다. 우아스카르(Huáscar) 는 쿠스코의 정통파를, 아타우알파(Atahualpa) 는 키토의 북부 세력을 대표했다. 5년에 걸친 내전이 1532년에 아타우알파의 승리로 막 끝난 참이었다. 피사로가 상륙한 그 시점에.

즉 피사로가 만난 잉카는 이미 전염병으로 인구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내전으로 제국이 양분되어 있던, 역사적으로 가장 취약한 순간의 잉카였다. 이 우연이 없었다면 168명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초대

아타우알파는 피사로 일행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전 해안에 상륙했고, 정찰대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저지하지 않은 이유는 — 그들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68명의 수염 난 외국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타우알파는 호기심이 있었다. 이 이상한 사람들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래서 그는 피사로의 회담 요청을 받아들였다. 11월 16일 오후, 그는 수천 명의 수행원과 함께 카하마르카 중앙 광장을 방문했다. 정확한 인원은 사료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5,000에서 6,000명 정도로 추정된다.⁵ 대부분은 무장하지 않은 의식용 수행원 — 깃털 장식의 머리장식, 금색 의복, 의전용 막대기를 든 자들이었다.

광장에는 세 개의 큰 건물이 둘러싸고 있었다. 피사로는 그 건물들 뒤에 기병을 숨겨두었다. 포수도 숨겨두었다. 그는 이것이 회담이 아니라 매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경과 대포

아타우알파가 광장에 들어섰다. 그의 가마는 수십 명이 들어 올린 것이었고, 순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황제는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광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때 도미니코 수도사 비센테 데 발베르데(Vicente de Valverde)브레비아리우스(기도서) 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통역관 펠리페(Felipillo) — 해안 출신의 어린 원주민으로 스페인어와 케추아어를 어설프게 구사하던 소년 — 를 통해 "요청 선언(Requerimiento)" 을 읽기 시작했다.⁶

요청 선언이란 1513년 스페인 왕실이 만든 법적 문서였다. 정복자가 원주민에게 기독교 개종과 스페인 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공식 선언. 이 선언을 낭독한 후 원주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 따른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사실상 정복을 정당화하는 종이 한 장이었다.

펠리페가 이 선언을 케추아어로 통역했다. 얼마나 정확히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아이였고, 경험이 짧았으며, 신학 용어를 잘 몰랐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 후안 데 베탄소스(Juan de Betanzos)의 기록에 따르면, 펠리페의 통역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⁷

선언이 끝나자 발베르데가 아타우알파에게 기도서를 내밀었다.

이 순간이 이야기의 정점이다.

아타우알파는 책을 손에 쥐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 처음 보는 물건 중 하나였다. 잉카에는 문자가 없었다. 책이라는 사물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몇몇 사료는 그가 책을 귀에 대어보았다고 전한다 — 스페인 사람들이 이 물건을 "신의 말씀"이라 하니, 그는 그것이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 했다. 말이 없었다. 그는 실망한 듯 책을 땅에 떨어뜨렸다.

발베르데가 외쳤다. "이교도가 성서를 모독했다! 정의로운 복음의 이름으로!"

그리고 피사로가 신호를 보냈다.

몇 시간의 학살

숨겨져 있던 대포 2문기병 62명, 화승총 12정이 광장을 덮쳤다. 대포가 포연 속에서 쏘아진 첫 발에 수십 명이 쓰러졌다. 기병이 돌격했다 — 잉카인들은 말을 처음 보았다. 인간과 짐승이 하나의 괴물처럼 느껴지는 존재. 말 위의 사람이 창과 칼로 찌르고 베는 동안, 잉카 수행원들은 대부분 무장이 없었다. 의식용 막대기와 깃털 장식뿐.

광장은 좁았다. 도망갈 길이 막혀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밀치다가 한쪽 벽이 무너졌다. 무너진 벽을 통해 도망가려는 사람들 위로 기병이 돌진했다. 피사로가 직접 아타우알파의 가마로 돌격해 그의 수행원들을 베어 쓰러뜨리고, 황제를 끌어내렸다.

몇 시간 만에 약 7,000명이 학살되었다.⁸

스페인군 사상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마저도 피사로 자신이었는데, 아타우알파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자기 부하가 휘두른 칼에 손을 약간 베인 것이었다. 잉카 측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몇 시간 만에, 한 제국의 황제가 포로가 되었고, 7,000명의 국민이 죽었으며, 정복자의 사상자는 없었다.

아타우알파는 감금되었다.

이 장면에 담긴 네 요소

지난 장에서 나는 두 세계관의 대비를 개념적으로 펼쳤다. 로마의 도미니움과 안데스의 아이니. 자연 지배와 자연 동행.

카하마르카의 오후는 그 대비가 실제 역사의 현장으로 터져 나온 순간이다. 그리고 이 짧은 장면 하나에 — 이후 500년간 지구 여러 대륙에서 반복될 구조적 요소 네 가지가 이미 모두 담겨 있다.

① 선교의 외피를 쓴 함정. 발베르데의 요청 선언은 종교적 형식이었다. 기도서를 건네는 몸짓은 평화로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형식 자체가 이미 덫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받아들이면 복종, 거부하면 전쟁. 선교의 형식이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 이후 중요한 대목에서 언급하겠지만 — 당대의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 자신도 강하게 비판한 문제였다. 10장에서 다룰 라스 카사스가 대표적이다.

② 종교적 정당화. 아타우알파가 책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성서 모독"이 선포되었다. 이 선포가 이후 몇 시간의 학살을 정의로운 복음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자기 행위에 선한 이름을 붙이는 것 — 이 구조는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문명이 팽창할 때 같은 일을 한다. 로마도, 이슬람 정복도, 몽골도, 그리고 20세기의 여러 이념도.

③ 압도적 기술 격차의 활용. 대포, 기병, 철제 무기는 잉카의 청동과 면방패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이 격차는 정면 대결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매복과 기습에서 쓰였다. 기술을 정당한 전쟁이 아닌 학살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④ 약속 이전의 배반. 아타우알파는 "회담"에 초대받았다. 그는 수행원에게 무장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다. 평화로운 만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이용해 그들이 광장 한가운데서 학살되었다. 약속 자체가 무기가 된다 — 이것이 이후 수세기의 식민 관계에서 가장 깊이 반복될 특징 중 하나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앞으로 이 책의 여러 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할 것이다. 포토시 은광, 카리브해 노예 무역, 캐나다 기숙학교, 일제의 "보호"와 "병합". 형식은 다르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카하마르카의 오후는 그 구조의 원형(archetype) 이다.

그리고 캐나다 원주민 친구들에게서 들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정복자들의 역사책은 정복자들이 썼다." 카하마르카 이후의 모든 스페인 연대기는, 바로 그 광장에서 학살을 지휘한 자들과 그 동료들이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을 영웅으로 그렸다. 아타우알파를 배반자로 그렸다. 학살을 정의로 그렸다. 오늘 우리가 읽는 역사가 그 틀 위에서 만들어졌다.

황금의 방

협상과 약속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스페인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 .

그는 거래를 제안했다. 자신이 갇혀 있는 방 — 가로 약 7미터, 세로 약 5미터, 높이 약 2.5미터 — 을 자기 키 높이(약 2.7미터)만큼 금으로 가득 채우고, 그 두 배만큼 은으로 채우겠다는 것.⁹ 대가로 자신을 풀어달라.

피사로는 동의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잉카 제국 전역에서 금과 은이 카하마르카로 모여들었다. 신전의 벽 장식, 왕궁의 집기, 귀족의 장신구, 조상의 미라에 바쳐진 제물, 정원의 금빛 옥수수와 은빛 라마. 잉카 문명이 수세기에 걸쳐 축적한 예술품이 녹여지기 위해 모였다.

약 8개월 동안 모인 양은 금 약 6,000킬로그램, 은 약 12,000킬로그램으로 추정된다.¹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달러 상당의 금속.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술적 가치다. 이 금속들은 대부분 잉카 장인의 손을 거쳐 의례용품과 예술품으로 가공되어 있었다. 녹여지기 전에 그것들을 본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조차 "이런 기술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감탄했다.¹¹

그러나 스페인은 녹였다.

모든 것이 금괴와 은괴로 다시 주조되었다. 왕실에 보낼 1/5(퀸토 레알)과 병사들에게 분배할 몫을 나누기 위해서. 예술품은 사라지고 금속의 질량만 남았다.

5장에서 본 로마의 원형이 여기서 극적으로 반복된다. 형상(form)을 질량(mass)으로 환원하는 것. "이 황금 옥수수는 예술품인가 금덩이인가?" 스페인의 대답은 후자였다. 언제나 후자였다. 이것이 근대성의 본질이다.

배반

약속이 이행되자 스페인은 아타우알파를 재판에 회부했다. 죄목은 네 가지였다.

  1. 우상 숭배: 기독교가 아닌 신을 섬겼다.
  2. 일부다처: 여러 아내를 두었다 (잉카 왕실 관행이었다).
  3. 형제 살해: 내전 중 우아스카르를 처형했다 (감금 중 내린 명령으로).
  4. 반란 기도: 갇혀 있는 상태에서 군대를 불러 모으려 했다는 혐의.

이 죄목들을 스페인 왕실 법정이 인정할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었다. 잉카 황제는 스페인의 신민이 아니었다. 스페인 왕에게 충성 의무가 없었다. 그의 행위 대부분은 자기 제국 내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재판은 진행되었고, 유죄가 선고되었다.

1533년 7월 26일,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처음에는 화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세례를 받으면 화형 대신 교살로 바꿔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받아들였다. 화형은 잉카 신앙에서 영혼이 내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례명 후안(Juan) 으로 세례를 받고, 목이 졸려 사망했다.¹²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아타우알파가 몸값으로 낸 금은 스페인으로 갔고, 그의 목숨도 그들이 가져갔다. 이것이 피사로의 첫 번째 주요 배반이다. 많은 스페인 동료들조차 이 처형에 항의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결단했고, 실행했다.

같은 문법이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약속은 수단이지 원칙이 아니다. 이용 가치가 있을 때는 약속한다. 이용이 끝나면 파기한다. 이 논리가 카하마르카에서 시작되어, 이후 500년간 수천 번 반복될 것이다.

쿠스코 점령과 정통성 조작

꼭두각시 황제

아타우알파 처형 후 피사로는 쿠스코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1533년 11월 15일, 그는 쿠스코에 입성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광장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의 말이 발굽 소리를 냈다.

그러나 피사로는 영리했다. 그는 잉카 국가를 즉시 해체하지 않았다. 대신 꼭두각시 황제 전략을 썼다. 잉카 왕실의 한 후계자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그를 통해 정통성을 빌려 통치한다는 것.

첫 번째 꼭두각시는 투팍 우알파(Túpac Huallpa). 아타우알파의 형제였다. 그러나 그는 옹립된 지 몇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아마도 우아스카르파의 독살로 추정된다. 내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는 망코 잉카 유팡키(Manco Inca Yupanqui). 와이나 카팍의 아들이자 우아스카르의 이복동생. 우아스카르파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다. 피사로는 1534년 1월 그를 잉카 황제로 공식 옹립했다. 스페인 의례에 따라. 잉카 왕관이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 순간 쿠스코의 잉카 귀족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해했다.

쿠스코 귀족들은 스페인의 도착을 왕조 교체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과거 잉카사에서도 외부의 도움으로 왕이 바뀐 적이 있었다. 새 왕조는 기존 제도와 문화를 대체로 유지했다. 이번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다른 것을 원했다. 그들은 잉카 국가의 정통성을 자기들의 지배에 흡수하고자 했다. 망코 잉카는 왕관을 썼지만 실권이 없었다. 그는 피사로의 허가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모욕당하고, 위협받고, 때로는 납치되었다. 그의 아내 중 한 명이 스페인 병사들에게 강간당하기도 했다.¹³

그리고 스페인은 잉카의 내부 분열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오랫동안 잉카에 강제 편입되어 있던 카냐리족, 우앙카족, 차차포야스족 등에게 접근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스페인에 협조했다. 잉카의 지배에서 해방될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168명 대 800만"이라는 서사는 오해를 낳는다. 실제로는 168명 +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 대 분열된 제국의 구도였다. 피사로의 진정한 힘은 자기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내부 원한을 전쟁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있었다.

합병이라는 은폐

여기서 한국 독자에게 한 가지 병치를 권한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합병(合倂)" 했다고 공식 기록했다. 합병이라는 단어는 두 국가가 자발적으로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는 군사적 점령이었고 외교적 강제였다. 그러나 언어는 "합방(合邦)", "병합(倂合)" 같은 단어들로 실체를 감쌌다. 그리고 일본은 그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완용 등 한국 관료를 법적 서명자로 내세웠다.

카하마르카의 망코 잉카 옹립도 같은 구조다. 잉카 황제의 왕관을 씌워 정통성을 빌리고, 그 이름으로 제국 해체의 실질을 은폐한다. 형식과 실질의 괴리 — 이것이 식민 지배의 전형적 기법이다.

"정복(conquest)"이라는 단어도 은폐 장치다. 이 단어는 군사적 결판을 연상시킨다. 두 군대가 싸우고, 한쪽이 이긴 결과. 그러나 실제 일어난 것은 수십 년에 걸친 학살과 식민화였다. 단일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과정이었다. 스페인어 "콘키스타(conquista)" 도, 영어 "컨퀘스트(conquest)" 도, 한국어 "정복" 도, 모두 그 구조적 과정을 깔끔하게 포장한다.

이 장의 제목에 "정복이라 불린 학살"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가 감추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대반란과 빌카밤바 — 40년의 저항

망코 잉카의 각성

2년이 지났다. 망코 잉카는 점점 더 분명히 자신이 꼭두각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잉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스페인을 "새 왕조"로 받아들였던 환상이 깨졌다. 스페인은 왕조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

1536년 4월, 망코 잉카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종교 의식을 위한 원정 허가를 받아내고, 쿠스코를 벗어났다. 일단 도시를 벗어나자 그는 제국 전역에 전령을 보냈다. 봉기의 시간이다. 차스키 전령들이 카팍 냔 도로망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약 20만 명의 군대가 집결했다.¹⁴

1536년 5월, 이 대군이 쿠스코를 포위했다. 도시 안에는 스페인군 약 190명, 원주민 동맹군 수천 명이 있었다. 포위는 장장 10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오얀타이탐보의 승리

포위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오얀타이탐보에서 일어났다.

쿠스코를 구하러 온 스페인 증원군이 에르난도 피사로(프란시스코의 동생) 지휘 아래 오얀타이탐보로 진격했다. 1537년 1월. 그곳에서 망코 잉카는 몸소 지휘했다.

오얀타이탐보의 지형은 급경사의 계단식 요새였다. 망코는 이 지형을 활용했다. 그리고 수로를 무기로 썼다. 잉카 기술자들이 우루밤바 강의 물길을 돌려 계곡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스페인 기병의 말이 진흙에 빠졌다. 그 위로 잉카군이 돌과 화살을 쏟아부었다. 에르난도 피사로 부대는 대패했다. 거의 전멸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쿠스코로 돌아갔다.

3장에서 티폰의 수력 공학을 이야기했다. 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대하는 그 철학이 이 순간에는 무기가 되었다. 잉카의 수로 기술이 유럽의 기병을 무력화시켰다.

오얀타이탐보에서 본 그 거대한 석조 건축물, 그리고 그 옆을 흐르는 수로 — 내가 며칠 전 손을 담갔던 그 수로가, 500년 전 이 전투의 결정적 무기였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역사는 돌과 물에 새겨져 있다.

키조 유팡키의 비극

같은 시기에,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망코 잉카는 여러 전선에 군대를 보냈다. 쿠스코 포위, 오얀타이탐보 방어, 그리고 리마 공격. 리마를 공격하러 간 사령관이 키조 유팡키(Quizo Yupanqui) 였다.¹⁵

키조는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안데스 고원 지대에서 스페인 증원군 몇 개를 잇따라 격파했다. 협곡에서 매복하고, 좁은 산길에서 기병의 약점을 활용해 이겼다. 산악 전술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치명적 실수를 했다.

망코 잉카의 명령으로 그는 평지인 리마로 진격했다. 해안의 평지는 기병의 무대다. 산악 전술이 통하지 않는다. 키조는 이것을 알았다. 그러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1536년 9월, 리마 근교의 평지에서 키조의 군대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본대와 만났다. 지형의 불리함과 기병의 위력 앞에 잉카군은 무너졌다. 키조는 전사했다. 그와 함께 리마 수복의 마지막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 비극에는 한 가지 교훈이 담겨 있다. 명령 체계의 경직성이 전술적 판단을 이긴다. 키조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평지 진격의 위험성을 알았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따랐다. 14장에서 이순신 장군의 사례와 대비할 것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어리석은 명령을 거부했다. 잉카의 장군은 그럴 수 없었다. 이 문화적 유연성의 차이가 문명의 운명을 가르는 한 요인이 된다.

빌카밤바로의 후퇴

결국 쿠스코 포위는 실패했다. 1537년, 스페인 본대가 칠레에서 돌아왔고, 또 다른 증원군이 페루 북쪽에서 왔다. 잉카군은 10개월의 포위를 지속할 수 없었다. 식량이 바닥났고, 일부 동맹 부족은 전선에서 이탈했다.

망코 잉카는 철수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쿠스코에서 북서쪽 아마존 밀림 쪽으로 들어갔다. 그 깊숙한 산악 지대에 빌카밤바(Vilcabamba) 라는 새 수도를 세웠다. 신-잉카 국가(Neo-Inca State) 가 탄생한 것이다. 1537년.¹⁶

빌카밤바는 36년간 지속되었다.

이 36년은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잉카는 카하마르카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아타우알파 처형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쿠스코 점령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2세대에 걸쳐 저항했다. 깊은 산속에서 새 도시를 세우고, 새 왕통을 이어가며, 게릴라 전투로 스페인을 괴롭혔다.

네 명의 왕

빌카밤바 신-잉카 국가에는 네 명의 왕이 이어 즉위했다.

망코 잉카(재위 1537~1544): 대반란의 주도자. 1544년 자신의 궁에 망명해 있던 스페인인 7명에게 암살당했다. 내부 권력 다툼의 결과였다.

사이리 투팍(Sayri Túpac, 재위 1544~1560): 망코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 1560년 스페인과 협상하여 쿠스코 근교의 영지를 받고 빌카밤바에서 나왔다. 그러나 약 1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독살 의심.

티투 쿠시 유팡키(Titu Cusi Yupanqui, 재위 1563~1571): 망코의 또 다른 아들. 그는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 스페인과 협정을 맺으려 했고, 기독교 개종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그러나 1571년 의문의 죽음.

투팍 아마루(Túpac Amaru I, 재위 1571~1572): 망코의 막내아들. 형의 죽음 이후 황위에 올랐지만, 스페인의 본격적 공세가 시작되었다. 1572년 페루 총독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가 빌카밤바 점령을 명령했고, 마침내 신-잉카 국가가 함락되었다.

투팍 아마루는 포로가 되었다. 1572년 9월 24일,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광장에서 — 공개 처형되었다. 참수형. 그의 목이 광장 중앙에 효시되었다. 잉카 왕통의 마지막 공식 상속자가 이 자리에서 죽었다.¹⁷

40년에 걸친 저항이 이 순간 공식적으로 끝났다. 1532년 11월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생포된 날부터, 1572년 9월 투팍 아마루가 처형된 날까지.

잉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5년에 걸쳐 세운 것을, 40년에 걸쳐 방어했다.

무엇이 정말 이겼는가 — 세 가지 비대칭

다이아몬드 테제의 한계

40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잉카는 결국 무너졌다. 왜였는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세 가지 요인을 제시했다. (군사 기술의 격차), (전염병), (금속과 문자가 만든 체계적 우위). 이 설명은 많은 독자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운명론적 시야" 를 제공했다. 잉카 멸망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지리적·생물학적 필연이었다는 위안.

그러나 이 설명에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기술과 질병이 주된 요인이었다면, 왜 40년이 걸렸는가? 165년이 걸린 빌카밤바의 저항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키조 유팡키의 군사적 성취는? 오얀타이탐보의 승리는? 이 모든 것들은 다이아몬드의 모델 안에서 이상 현상이 된다. 그의 모델은 잉카 멸망의 속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저항의 지속성은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다른 세 가지 비대칭을 제안한다. 각각이 결정적이고, 마지막 것이 가장 근본적이다.

① 전염병의 시간차

첫째는 다이아몬드의 논점과 겹친다. 다만 더 정밀하게.

전염병은 스페인군보다 먼저 도착했다. 천연두는 파나마에서 출발해 파견대가 오기 전에 안데스에 퍼졌다. 15241526년경 이 병이 북부 잉카 제국을 휩쓸며 **인구의 3050퍼센트를 죽였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더 높은 비율을 제시한다.¹⁸

이 전염병은 지휘부를 붕괴시켰다. 황제 와이나 카팍, 후계자 니난 쿠요치, 주요 귀족들의 상당수가 죽었다. 이로 인해 후계 분쟁이 발생했다.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내전이 그 결과였다. 피사로가 상륙한 1532년, 잉카는 이미 내부적으로 깊이 상처받은 상태였다.

즉, 질병의 시간차가 정치적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외부 침입의 창문을 열었다. 전염병 자체가 아니라 전염병이 만든 정치적 취약성이 결정적이었다.

② 분열의 활용

둘째는 더 주의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잉카 제국은 짧은 시간에 급속히 팽창한 제국이었다. 1장에서 본 대로 파차쿠텍 즉위 이후 95년 만에 200만 평방킬로미터를 장악했다. 이 팽창은 정복을 통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민족이 강제 편입되었다. 카냐리, 우앙카, 차차포야스, 치무. 이들 중 일부는 잉카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특히 카냐리족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초 잉카는 카냐리족의 저항을 진압하면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카냐리의 집단 기억에 이 상처가 생생했다.¹⁹

피사로는 이 상처를 무기화했다. 그는 카냐리족에게 "너희를 잉카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수천 명의 카냐리 전사가 스페인 측에서 싸웠다. 우앙카족도 마찬가지였다. 키조 유팡키의 리마 원정을 격파한 전력의 상당 부분이 스페인군이 아니라 원주민 동맹군이었다.

즉,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168명의 스페인 +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군이었다. 이것을 "스페인의 정복"이라 부르는 것은 부정확하다. 더 정확히는 "스페인이 주도한 다민족 연합이 잉카 지배에 저항한 전쟁" 이다.

이 분석이 스페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러내는 것은 정복 시스템의 일반적 작동 방식이다. 침략자는 언제나 내부의 원한을 활용한다. 캐나다에서 영국이 이로쿼이 연맹과 휴런 연맹을 분열시켜 이용한 것도 같은 방식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식민자들이 부족 간 분쟁을 조장한 것도 같다. 분열이 없다면 외부 침투는 깊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회에는 분열의 씨앗이 있다.

③ 약속을 지킬 필요 없는 존재론

그리고 세 번째 비대칭.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덜 인정되는 것.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인을 "완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타우알파는 진정한 황제가 아니었다(기독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잉카 귀족들은 진정한 귀족이 아니었다(유럽 혈통이 아니었으므로). 잉카 평민들은 인간과 짐승 사이의 무엇이었다(이성이 덜 발달했다고 여겨졌으므로).

이 인식이 결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인식이 있어야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간에게는 약속해야 한다. 반쪽 인간에게는 약속했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동물에게 "약속"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논리다.

아타우알파의 몸값이 지불되었는데도 그를 죽인 것. 망코 잉카를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모욕하고 약탈한 것. 사이리 투팍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독살한 것. 이 모든 것이 스페인 법적 관점에서는 "원주민과의 관계에는 일반 법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했다.

이 전제는 어디에서 왔는가. 바야돌리드의 법정에서 정식화된다. 10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550년 스페인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심의했다 — "원주민은 완전한 인간인가?"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결론 부재 자체가 정복을 지속하게 했다.

기술의 격차가 결과를 빠르게 했을 뿐이다. 결과를 결정하지 않았다. 잉카가 유럽과 비슷한 기술을 가졌더라도, 이 인간성의 비대칭이 있는 한 결국 비슷한 운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대칭이 무엇이든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약탈, 학살, 배신, 노예화 — 모든 것이 "반쪽 인간에게는 괜찮은 것"이 된다.

이것이 — 이 책이 뒤에서 더 자세히 이름 지을 — 가장 깊은 작동 방식이다. 타자를 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음. 보지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결론: 이 돌바닥이 기억한다

해가 기울고 있다.

광장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관광객들은 카페로 들어가거나 숙소로 돌아간다. 상인들은 천막을 접는다. 아르마스 광장이 오후의 고요 속으로 잠긴다.

나는 여전히 앉아 있다. 이 돌바닥 위에.

1572년 9월 24일, 이 광장에서 투팍 아마루가 참수되었다.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 군중 중에는 저항 세력을 배신한 잉카 귀족도 있었을 것이다. 울부짖는 케추아 농민도 있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기록을 하는 스페인 관료도 있었을 것이다. 톨레도 총독은 맨 앞에 섰을 것이다. 그의 명령이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날 투팍 아마루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케추아어로.²⁰

"콜카파, 카이파, 츄이파 카이 빌파, 쿠얌 카사 쿠망 카츠칸카이이(Collasuyu, Chinchasuyu, Antisuyu, Cuntisuyu, 내 형제들이여 들으라.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잉카 제국의 네 지역을 부르고, 끝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목이 잘렸다.

그 후 450년이 지났다. 이 광장은 이제 평범한 관광지다. 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고 기념품을 사는 곳. 관광객은 이 돌바닥에서 누군가 참수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안내판에도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쿠스코의 관광 기업은 이 광장을 "아름다운 식민지 시대 광장"으로 홍보한다. 잉카의 광장이라는 사실도 잊혀지고, 참수의 광장이라는 사실도 잊혀진다.

그러나 돌은 기억한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돌은 말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여기 있다. 투팍 아마루가 밟았던 돌이, 그의 피가 떨어졌던 돌이, 이 광장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진이 와도, 식민지 시대의 여러 번의 재개발에도 불구하고, 잉카의 기단은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아래, 어쩌면 투팍 아마루가 마지막으로 밟은 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이 장을 이 돌에게 바치려 한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잉카인에게. 그들의 침묵의 증언에.

그러나 정복은 사람만 죽이지 않았다

40년의 학살이 끝났다. 투팍 아마루의 머리가 광장에 효시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신전을 부수고, 돌을 뜯어가고, 기록을 태웠다. 잉카 문명의 물질적·영적 흔적을 조직적으로 지워나갔다. 이것이 문화적 정복 또는 더 정확히는 문화적 말살(memoricide) 이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 두 번째 정복의 현장을 본다. 바로 이 광장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 곳. 한때 잉카 제국의 심장이었고, 지금은 그 위에 세워진 식민 성당이 있는 곳. 코리칸차(Coricancha).

돌 위에 돌을 얹는 자들의 이야기다.


각주

¹ 피사로의 쿠스코 입성 날짜는 1533년 11월 15일이다. John Hemming, The Conquest of the Incas (New York: Harcourt Brace, 1970), p. 144.

² Jared Diamond, Guns, Germs, and Steel: The Fates of Human Societies (New York: W.W. Norton, 1997), 특히 3장 "Collision at Cajamarca."

³ 피사로 병력의 구성과 카하마르카 도착 시 아타우알파 군 규모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p. 32-39. 잉카 군 규모는 사료에 따라 차이가 크며, 본서는 중간값을 사용한다.

⁴ 천연두의 안데스 전파 시점과 와이나 카팍의 죽음에 관하여는 Noble David Cook, Born to Die: Disease and New World Conquest, 1492-165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⁵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 광장에 데려간 수행원 수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p. 40-42.

⁶ 요청 선언(Requerimiento)의 역사와 내용에 관하여는 Patricia Seed, Ceremonies of Possession in Europe's Conquest of the New World, 1492-164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3장.

⁷ 펠리페의 통역의 질에 관한 동시대 증언은 Juan de Betanzos, Suma y narración de los incas (1551)에 수록되어 있다. 영역본: Narrative of the Incas, trans. Roland Hamilton and Dana Buchanan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6).

⁸ 카하마르카 학살의 사망자 수 추정은 Hemming (1970), p. 45. 스페인 측 사상자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은 모든 주요 사료가 일치한다.

⁹ 아타우알파의 몸값 방의 치수와 약속된 금·은의 양에 관하여는 Kim MacQuarrie, The Last Days of the Incas (New York: Simon & Schuster, 2007), pp. 94-98.

¹⁰ 실제로 모인 금과 은의 양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p. 73-75.

¹¹ 잉카 예술품의 정교함에 대한 스페인 연대기 작가의 감탄은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Pedro Cieza de León, Crónica del Perú (1553), Segunda Parte.

¹² 아타우알파의 처형 날짜와 방법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p. 79-80.

¹³ 망코 잉카가 스페인 지배 아래에서 겪은 모욕에 관하여는 Titu Cusi Yupanqui, An Inca Account of the Conquest of Peru (1570), trans. Ralph Bauer (Boulder: University Press of Colorado, 2005).

¹⁴ 1536년 대반란 시 집결한 군대 규모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 189. 추정치는 사료에 따라 편차가 있다.

¹⁵ 키조 유팡키의 생애와 리마 원정에 관하여는 MacQuarrie (2007), pp. 221-240.

¹⁶ 빌카밤바 신-잉카 국가의 역사에 관하여는 Vincent R. Lee, Forgotten Vilcabamba: Final Stronghold of the Incas (Jackson, WY: Sixpac Manco Publications, 2000).

¹⁷ 투팍 아마루의 처형에 관하여는 Hemming (1970), pp. 448-454.

¹⁸ 16세기 초 안데스 전염병 피해 규모에 관하여는 Cook (1998), 여러 장. 연구자에 따라 30~70% 사이의 추정.

¹⁹ 잉카의 카냐리 진압에 관하여는 Frank Salomon, Native Lords of Quito in the Age of the Inca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²⁰ 투팍 아마루의 마지막 말에 관한 기록은 여러 연대기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의 인용은 Titu Cusi Yupanqui (위 각주 13)와 후대 구전의 종합이다.

『페루-쿠스코-마추피추 여행기』 집필 중 · 생성: 2026. 4. 20. PM 8:2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