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책상 위에 두 장의 사진을 펼쳐놓았다.
한 장은 수년 전 프랑스 남부에서 찍은 퐁 뒤 가르(Pont du Gard). 기원후 50년경 로마가 지은 수도교다. 높이 약 48미터, 길이 약 275미터. 3층으로 쌓인 아치가 가르 강의 좁은 계곡을 가로지른다. 맨 아래층은 큰 아치 6개, 중간층은 11개, 맨 위층은 35개의 작은 아치. 돌은 연한 석회암이어서, 해질녘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으로 변한다.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수도교 아래 강가에 서 있었고,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찍힌 건축물은 인간이 만들었다기에 너무 거대했다.
다른 한 장은 며칠 전 오얀타이탐보에서 찍은 수로 사진이다. 돌계단 옆에서 손바닥 두 개 폭의 물길이 흐르고 있다. 돌은 단단한 안산암, 표면은 500년 풍화로 매끄럽다. 물은 맑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사진 프레임 안에는 아치도, 거대 구조물도, 드라마틱한 선도 없다. 그저 돌과 물.
같은 "물을 나르는 시설"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가.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처음 떠오른 직관은 단순했다. 하나는 위로, 다른 하나는 따라서. 로마의 수도교는 중력을 이기고 계곡을 건너뛴다. 잉카의 수로는 중력에 순응하며 지형을 따라간다. 로마는 직선, 잉카는 곡선. 로마는 수직성, 잉카는 수평성.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기법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두 건축물은 두 개의 세계관이 물질화된 것이다. 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앞 장에서 나는 티폰의 물이 500년째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본론으로 삼았다. 그때 함께 언급했던 사실 하나를 이 장에서 본격적으로 풀어야 한다. 같은 시대에 지어진 로마의 수도교들은, 서로마가 무너지자 대부분 1,500년간 멈췄다. 두 문명이 모두 인류사의 위대한 수력 성취를 남겼지만, 그 성취가 제국을 넘어 살아남은 방식은 달랐다.
이 차이가 이 장의 주제다. 그리고 이 차이가, 앞으로 이 책 전체를 관통할 두 원형의 대립을 예고한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은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통합의 물질적 증거 중 하나가 수도교(aqueduct) 였다. 로마는 절정기에 약 500개의 도시에 수도교를 건설했다고 추정된다.¹ 로마 시 자체에는 11개의 주요 수도교가 있었고, 이들의 총 길이는 약 500킬로미터에 달했다.²
로마 수력 공학의 핵심은 세 가지 기술이었다.
아치교(arcade). 계곡이 있으면 다리를 놓는다.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그 위에 물길을 얹은 다리. 퐁 뒤 가르의 3층 아치가 전형이다. 위쪽의 물길은 경사가 극도로 정밀하다. 전체 50킬로미터를 흐르는 동안 약 17미터만 내려간다. 기울기로 환산하면 약 0.034퍼센트 — 현대 GPS 측량 없이 인간의 눈과 도구만으로 이 정도 정밀도에 도달한 것은 놀랍다.³
사이펀(siphon). 아치교로 건너기에는 너무 깊거나 너무 긴 계곡이 있다. 이때 로마는 역사이펀을 썼다. 내리막으로 물을 급강하시키고, 압력을 이용해 반대쪽 언덕 위로 다시 밀어 올린다. 물리학으로 보면 단순하지만, 이 원리를 거대한 규모로 구현하려면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하다. 압력을 견디는 밀폐 관로, 기포를 빼는 배출구, 수질을 관리하는 정수 장치.
납관(fistula plumbea). 도시 내부에 물을 분배할 때, 로마는 납으로 만든 관을 썼다. 납은 가공이 쉽고 밀폐가 완벽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 납 중독. 고대 로마에서 상류층에 신경계 이상이 많았던 이유를 이 납관에서 찾는 학자들이 있다.⁴ 편의를 위해 독을 감수하는 논리가 여기서도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다.
로마 수도교 관리의 공식 문서로 전해지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Sextus Julius Frontinus, 40~103년) 의 『수도교에 관하여(De Aquaeductu Urbis Romae)』다.⁵ 기원후 97년경 집필된 이 책은 당시 로마 수도 공급 체계의 기술 관료가 쓴 실무 보고서다.
프론티누스의 문장 중 특히 유명한 것이 있다. "이렇게 많은 수도교로 필수 용수를 공급하는 이 건물들의 거대함을, 그리스의 쓸모없는 피라미드나 유명하지만 무익한 그리스인들의 건축물과 비교해보라."⁶
한 문장에 세 가지가 담겨 있다. 자부심. 기능주의. 그리고 다른 문명에 대한 경멸.
이 문장은 로마의 세계관을 압축한다. 피라미드는 의식적 구조물이다. 그리스 신전은 종교적·미학적 건축이다. 이들은 "유용하지 않다." 반면 로마 수도교는 "필수 용수를 공급한다." 유용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다. 그리고 그 유용성이 다른 문명을 폄하하는 근거가 된다.
프론티누스가 모르고 있었던 것 — 그의 시대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수력 시스템이 건설되고 있었다는 것. 당시 안데스에는 티와나쿠 문명의 관개가 돌아가고 있었고, 이후 900년 후 잉카가 그 전통을 이어 4만 킬로미터의 도로와 수로망을 완성할 것이었다. 프론티누스가 만약 그것을 볼 수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아마 그것조차 피라미드처럼 "무익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의 척도 바깥에 있으니까.
로마 수도교가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의 핵심 개념이 도미니움(dominium) 이다.
도미니움은 로마법의 중심 개념이다. 절대적 소유권. 땅에 대해, 물건에 대해, 때로는 사람에 대해. 도미니움을 가진 자는 그 대상에 대해 사용(usus), 수익(fructus), 처분(abusus) 의 권리를 갖는다. 즉 마음대로 쓰고, 이익을 취하고, 파괴하거나 팔 수도 있다.
이 법적 개념은 자연과의 관계에도 적용되었다. 로마 황제와 귀족은 특정 강의 물에 대한 도미니움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물을 멀리 떨어진 도시로 끌어오는 것이 수도교 건설이었다. 물은 소유될 수 있었고, 수송될 수 있었고, 팔릴 수도 있었다. 물은 자원이었다.
이와 짝을 이루는 또 다른 개념이 임페리움(imperium) 이다. 절대적 통치권. 황제가 영토에 대해 갖는 권한. 도미니움이 소유의 개념이라면, 임페리움은 지배의 개념이다. 두 개념이 결합되면, 자연에 대한 소유권은 곧 자연에 대한 통치권이 된다.
이 문법이 로마 수도교의 물질적 형태에 새겨져 있다. 아치교는 계곡을 정복한다. 사이펀은 중력을 제압한다. 납관은 물을 분배한다. 모든 것이 상위에서 하위로 명령하는 구조다. 수원에서 도시로. 황제 궁으로 먼저, 그 다음 공중목욕탕, 그 다음 공공 분수.
그리고 로마는 하수도를 발명했다.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거대한 하수도." 기원전 6세기경 로마의 저지대 늪을 배수하기 위해 건설되기 시작해 이후 수세기에 걸쳐 확장된 지하 하수 시스템. 그 일부는 지금도 로마 시내 하수 처리의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⁷
하수도의 발명은 당연한 진보처럼 보인다. 쓴 물을 모아서 도시 밖으로 내보낸다. 위생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발명에 담긴 세계관의 무게를 우리는 놓치기 쉽다.
하수도는 버리는 물이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한 번 사용된 물은 오염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므로, 없애야 할 것이다. 이 전제 자체가 특정한 존재론이다. 물은 용도별로 분류될 수 있고, 용도가 끝나면 폐기될 수 있다. 물의 전체 여정 — 구름에서 비로, 강으로, 바다로, 다시 증발해서 구름으로 — 은 이 분류 체계 안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근대 서양 환경 사상의 뿌리 중 하나다. 자연을 "자원"과 "폐기물" 로 나누는 사고. 이 사고가 로마의 클로아카 막시마에서 시작되어, 20세기의 일회용 사회에 이르기까지 변형되며 이어진다.
잉카의 길을 보러 가기 전에 한 번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잉카가 "자연과 동행하는 공학" 을 선택했다고 말하려면, 같은 안데스에서 다른 선택을 한 문명이 먼저 있었음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잉카의 길이 기술 수준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의식적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려면, 선행 제국이 이미 반대 방향으로 가보았다는 사실이 필요하다.
그 제국이 와리(Wari) 다.
와리는 기원후 약 600년부터 1100년까지, 잉카 제국보다 약 400년 앞서 존재했던 범안데스 제국이다.⁷ᶜ 중심지는 오늘날 페루 아야쿠초(Ayacucho) 근처. 전성기에 북쪽 카하마르카 근방에서 남쪽 티티카카 호수 근방까지 수천 킬로미터의 광역 지배권을 가졌다. 잉카보다 작았지만, 잉카가 물려받은 행정·도로·건축·수리 기술의 대부분이 와리에서 왔다.
잉카는 와리의 상속자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안데스 문명사의 첫 번째 중요한 층이다.
와리의 물 관리는 로마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논리를 보인다.
대표적 증거가 세로 바울(Cerro Baúl). 오늘날 페루 남부 모케구아(Moquegua) 계곡의 해발 2,500미터 절벽 위 도시. 와리의 남쪽 전초기지였다. 이 도시는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자연 요새지만, 한 가지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물이 없었다.
와리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가.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산의 샘에서 물을 끌어왔다. 절벽 허리를 따라 돌과 점토로 석축 수로를 건설하여, 중력만으로 물이 세로 바울 위까지 올라오도록 했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탄소 연대 측정과 석재 분석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수로는 수 세기에 걸쳐 작동했다.⁷ᵈ
이것은 로마 수도교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같다. 자연의 지형을 기술로 극복하고, 먼 거리의 물을 도시로 끌어오는 것. 도시가 산 위에 있어야 할 이유는 오로지 군사적·상징적 우위 — 와리 엘리트가 피정복민 위에 군림한다는 시각적 선언. 자연이 불편하면, 불편을 공학으로 제거한다.
Donna Nash를 포함한 현대 와리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풍경을 조각하다(sculpt the landscape)" 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⁷ᵉ 와리는 풍경에 순응하지 않았다. 풍경을 자기 의도에 맞춰 조각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사례가 피킬락타(Pikillaqta). 쿠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내가 티폰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지나친 유적이다.
피킬락타는 745미터 × 630미터의 직사각형 격자 도시다.⁷ᶠ 수백 개의 동일 규격 방이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자연 지형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언덕이 있으면 깎아 평평하게 만들었고, 골짜기가 있으면 메웠다. 도시의 축은 풍수나 천문이 아니라 — 관료적 효율성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것은 잉카의 쿠스코와 정반대의 공간 철학이다. 잉카는 쿠스코를 격자로 만들지 않았다. 도시가 지형을 따라 퓨마 모양으로 구부러졌다. 쿠스코에서 30킬로미터 거리의 피킬락타는 격자고, 쿠스코 자체는 퓨마다. 잉카는 와리의 격자를 알고도 거부했다.
이 정보가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와리는 군사적·팽창적 제국이었다. 와리의 저명한 연구자 Luis Lumbreras는 "와리의 경제 정책은 식민화된 민족들을 착취하는 방향이었다" 고 썼다.⁷ᵍ 학계 일부는 이 지배 방식을 "수력학적 우위에 의한 정복(conquest by hydraulic superiority)" 이라 부른다. 물을 통제하는 자가 사람을 통제한다. 산 위 도시에 물을 올리는 기술이 곧 권력의 언어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함의가 나온다.
자연을 조각하는 공학적 오만은 서구 근대의 발명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의 발명도 아니다. 제국적 구조가 반복해서 빠지는 패턴이다. 와리도 그 패턴을 따랐다. 같은 안데스에서, 잉카보다 먼저.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잉카의 다른 선택은 의식적이었던 것이다. 잉카는 와리가 한 일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보고, 알고, 물려받았고, 그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다음 섹션이다.
이제 다른 한 장의 사진으로 돌아온다. 오얀타이탐보의 수로.
잉카의 수로망은 규모에서 로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카팍 냔(Qhapaq Ñan) 은 약 4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이 관개 수로와 결합되어 있었다. 마추픽추, 오얀타이탐보, 피삭, 티폰 — 각 도시마다 정교한 물 공급 체계가 있었다. 티폰의 13단 테라스와 임계 유량 분수는 앞에서 이미 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퀴 없이, 철기 없이, 아치 없이 건설되었다.
잉카 기술자들이 바퀴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잉카의 아이들 장난감에 바퀴가 달려 있다. 그들은 원리를 알았지만 운송에 채택하지 않았다.⁸ 철기도 마찬가지. 청동기는 있었지만 철은 대규모로 제련하지 않았다. 아치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가 모두 썼던 기술인데 잉카는 쓰지 않았다. 방금 본 것처럼 와리는 산 위 20킬로미터의 석축 수로를 만들어 풍경을 극복했다. 잉카는 그것을 알면서도 따라가지 않았다.
이것을 "후진성"이라고 불러온 것이 서구 중심 역사학의 습관이었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 잉카는 이 기술들을 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연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퀴는 직선 도로에서 유용하다. 잉카는 산악 지형을 직선으로 관통하지 않았다. 지그재그로 돌아갔다. 이때 바퀴는 오히려 불편하다. 계단식 석조 길에서는 라마의 발과 사람의 발이 더 효율적이다. 철기는 깊은 땅을 파거나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때 필요하다. 잉카는 땅을 깊이 파지 않았고, 거대한 밀폐 구조물을 만들지 않았다. 아치는 계곡을 가로질러 물을 수평으로 보낼 때 필요하다. 잉카는 계곡을 가로지르지 않았다. 계곡의 굴곡을 따라 흘려보냈다.
즉, 잉카에게 없는 것은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다른 문법의 선택이었다.
잉카 수로의 기본 형태는 개방형이다. 돌로 된 홈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물은 공기와 햇빛을 쐬며 흐른다. 이것은 로마의 밀폐된 납관과 정반대의 선택이다.
왜 개방형인가.
첫째, 물이 자기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맑은지 탁한지, 풍부한지 부족한지, 오염되었는지 건강한지 —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다. 물과 인간 사이에 장벽이 없다. 이것은 투명성의 철학이다.
둘째, 정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햇빛은 자외선으로 병원체를 죽인다. 공기 접촉은 산소를 공급한다. 돌 표면의 미생물은 유기물을 분해한다. 물은 흐르면서 스스로 정화된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 배수의 목적 자체가 달랐다.
단순한 이분법에 빠지지 말자. "잉카에는 하수도가 없었다"는 서술은 부정확하다. 마추픽추의 황제 거주지에는 엘리트용 위생 배수관이 있었다. 켄 라이트(Kenneth R. Wright)의 30년 연구가 밝힌 사실이다. 다만 그 배수관의 출구는 — 식수원이나 농경지를 오염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⁷ᵃ 기술적으로 잉카도 배수 문제를 풀었다.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로마의 클로아카(cloaca)는 '버리기 위한' 시스템이다. 사용된 물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 하류로 흘려보낸다. 그 끝은 강·바다. 즉 타자에게 떠넘긴다.
잉카의 배수는 '순환시키기 위한' 시스템이다. 신전에서 의식용으로 쓴 물이 → 귀족 거주 구역으로 → 평민 주거로 → 농경 테라스로 → 하류 자연수로 돌아간다. 각 단계에서 물은 재사용되고, 마지막에는 땅으로 돌아간다.
가장 극명한 차이가 일반 가정의 배설물 처리에 있다. 잉카 마을에서 배설물은 — 요강에 모여져 밭의 거름으로 돌아갔다. 케추아어 와누(wanu) 는 "배설물"과 "비료"를 동시에 의미한다. 영어 "구아노(guano, 비료)" 의 어원이 바로 이 단어다.⁷ᵇ 와누는 —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순환의 한 단계다. 몸에서 나온 것이 땅으로 돌아가, 다시 식물이 되어, 다시 몸 안으로 들어온다.
로마의 클로아카는 버리는 것. 잉카의 와누는 기르는 것.
이 대비 하나가 이 장 전체를 압축한다. 물을 소유(dominium)로 본 문명과, 물을 관계(ayni)로 본 문명. 쓰고 버린 문명과, 쓰고 돌려보낸 문명. 현대 도시의 하수 시스템이 어느 쪽의 후예인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매일 수 톤의 물을 변기와 개수대로 내려보낸다. 그 물은 하수 처리 시설을 거쳐 강으로 방류된다. 엄청난 에너지와 비용이 투입되지만, 방류된 물이 완전히 깨끗한 법은 거의 없다. 잉카인이라면 이 낭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순환을 끊는가?
잉카 수력 공학의 배후에는 야쿠(yaku) 라는 개념이 있다. 앞서 티폰의 수로를 걸으며 짧게 스쳤던 이 케추아 단어를 여기서 다시 돌아본다.
야쿠는 "물"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다. 야쿠는 살아 있는 물이다. 흐르는 물, 솟아나는 물, 비로 내리는 물, 증발하는 물, 그리고 몸 안을 도는 체액까지. 이 모든 것이 야쿠다. 그리고 이들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의 여러 얼굴이다.
잉카인에게 물은 대명사 "것(it)" 이 아니라 대명사 "너(thou)" 였다. 이 구별이 결정적이다. "것"은 도구로 쓰일 수 있고, 자원으로 취급될 수 있고, 더러워지면 버려질 수 있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너"와 마주 선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의 형식이 아이니(ayni)다. 상호성. 내가 물에게 받으면, 물에게 돌려준다. 내가 사용했으면, 다시 흐르게 한다. 내가 물을 정화했으면, 물이 나를 정화한다. 이 주고받음이 끊기면, 관계가 죽는다. 관계가 죽으면, 존재가 죽는다. 존재가 죽으면, 공동체도 죽는다.
이것이 잉카 수로의 형이상학적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가 돌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다.
이제 두 공학의 운명을 비교할 차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무너졌다.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된 해다. 그 이후 유럽은 약 500년간의 중세 초기 에 들어선다. 이 시기에 로마의 물 공급 체계는 대부분 기능을 잃었다.
왜였는가.
로마 수도교는 중앙 권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⁹ 이 체계의 운영에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전문 기술자 집단. 지속적 예산. 그리고 정치적 의지. 이 세 가지가 모두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 시스템에 의존했다.
전문 기술자는 누구인가. 로마에서 수도교 관리는 쿠라토르 아쿠아룸(curator aquarum) 이라는 고위 관직 아래 조직되었다. 프론티누스가 맡았던 바로 그 직책이다. 그 아래에 아쿠아리(aquarii) 라는 전문 노동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노예, 나중에는 자유민. 이들은 수도교의 누수를 찾고, 막힘을 뚫고, 손상을 수리했다.
제국이 무너지자 이 조직이 해체되었다. 새로 등장한 게르만족 왕국들은 로마 수도교를 유지할 행정 능력이 없었다. 관직이 사라지고, 노동자가 흩어지고, 예산이 끊겼다. 몇십 년 안에 수도교는 누수와 막힘이 쌓여 기능을 잃었다.
중앙 집중 시스템은 중앙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둘째, 사용자는 유지보수를 할 수 없었다. 로마 수도교의 기술은 엘리트의 독점 지식이었다. 일반 시민은 수도에서 물을 받는 법만 알았지, 그 수도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수리하는지 몰랐다. 수도교가 끊기면 그들은 우물을 파거나 강에서 물을 긷는 수밖에 없었다. 옛 수도교의 석재는 새 건물의 자재로 쓰였다. 로마의 거대한 수도 폰티피칼리스(Pons Pontificalis) 같은 구조물이 중세 초기에 채석장이 되었다.
이것은 삭사이와만이 스페인 식민지 쿠스코의 채석장이 된 것과 같은 구조다. 파괴된 문명의 돌은 다음 문명의 건축 자재가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반면 잉카의 수로는,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기능을 잃지 않았다.
스페인이 쿠스코를 점령한 1533년 이후, 잉카 국가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행정 체계가 바뀌었고, 종교가 강제 개종되었으며, 언어조차 부분적으로 스페인어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오얀타이탐보의 수로는 지금도 물이 흐른다. 마추픽추의 16개 분수도 작동한다. 티폰의 13단 테라스 역시 500년째 기능 중이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 답은 관리 구조의 차이에 있다. 로마 수도교가 제국 중앙의 관료제에 의존했다면, 잉카 수로는 지역 공동체(아이유) 가 직접 관리했다. 한 마을의 수로는 그 마을 사람들이 책임졌다. 매년 우기가 시작되기 전, 공동 작업일을 정해 수로를 청소하고 파손된 돌을 교체했다. 이 공동 노동을 파에나(faena) 또는 밍카(minka) 라고 불렀다.¹⁰ 파에나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었다. 그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의식이었다. 빠진 사람은 물을 사용할 권리도 잃었다.
이 구조에는 스페인이 빼앗을 것이 없었다. 중앙의 행정 체계는 무너뜨릴 수 있지만, 마을마다 흩어져 있는 파에나의 관습은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스페인 총독부가 쿠스코에서 무엇을 하든, 고원의 한 마을에서는 여전히 우기 전에 사람들이 모여 수로 돌을 들어올렸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이 늙어 할아버지가 되는 동안, 수로 청소의 관습이 대대로 이어졌다.
이것이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페루 산골 마을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잉카 유산"을 지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을의 물을 관리할 뿐이다. 파에나 날이 오면 주민들이 삽을 들고 나가 수로의 낙엽을 걷어내고, 막힌 돌을 빼낸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는 치차 한 잔을 함께 마신다. 500년 전과 똑같이.
분산된 책임의 힘 — 이것이 잉카 수로가 살아남은 이유다.
이 차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21세기 우리는 여전히 로마식 중앙 집중 인프라 위에 살고 있다. 대규모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력망. 거대한 댐에서 공급되는 상수도. 중앙 서버에 의존하는 인터넷. 이 시스템들은 효율적이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 기술적으로 정교하다.
그러나 이 시스템들은 취약하다. 한 지점의 고장이 전체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2003년 북미 대정전(약 5,000만 명 정전), 2016년 우크라이나 전력망 해킹, 최근의 각종 사이버 공격 — 모두 중앙 집중 시스템의 체계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레바논계 미국인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 는 2012년 저서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¹¹ 그의 구분은 유용하다. 프래자일(fragile) 한 시스템은 충격에 무너진다. 로버스트(robust) 한 시스템은 충격을 견딘다. 그리고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 한 시스템은 충격으로부터 오히려 더 강해진다. 그런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는가. 탈레브의 답은 "그렇다". 그가 든 대표적 예가 분산된 시스템이다. 충격이 왔을 때 일부가 실패해도 전체가 작동하고, 실패한 부분이 학습되어 다음 버전이 개선되는 구조.
잉카 수로가 바로 그런 시스템이다. 500년간 여러 충격(정복, 내전, 독립, 공화국, 산업화)을 겪었는데, 그 모든 충격을 견뎌냈다. 왜냐하면 중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탈레브의 용어를 빌리면, 잉카 수로는 안티프래자일하다.
반면 로마 수도교는 프래자일했다. 제국이 무너지자 같이 무너졌다.
이 대비가 현대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물, 전력, 식량, 통신 — 이 모든 필수 인프라를 우리는 로마식으로 설계해왔다. 지난 100년간의 인프라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집중화의 방향이었다. 그 혜택이 컸다. 그러나 그 대가도 있었다 — 우리는 자기 마을의 물길을 아는 법을 잊었다. 자기 마을의 전기를 만드는 법을 잊었다. 자기 마을의 식량을 기르는 법을 잊었다.
기후 위기와 지정학적 불안의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잉카를 다시 참조해야 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것을 부수라는 말이 아니다. 거대한 것 옆에 작은 것을 다시 짓자는 말이다. 마을 단위의 물 시스템. 분산형 태양광. 지역 식량 네트워크. 이들은 기술적으로 이미 가능하다. 어려운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지난 500년간 우리가 잃어버린, "분산된 책임"이라는 상상력.
기술의 차이는 결국 세계관의 차이다. 이 장의 마지막 과제는 두 세계관의 철학적 뿌리를 간단히 추적하는 것이다. 상세한 계보는 8장("하나의 계보")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두 뿌리의 씨앗만 비교한다.
서구 전통에서 "자연 지배"의 씨앗은 여러 군데에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창세기 1:28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subdue).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have dominion over)." 히브리어 원문의 "카바쉬(kabash)" 는 강한 지배를, "라다(radah)" 는 정복자의 통치를 의미한다.¹²
미국 역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Lynn White Jr.) 가 1967년 『사이언스(Science)』 지에 쓴 논문 「우리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는 이 구절을 서구 생태 위기의 신학적 기원으로 지목했다.¹³ 화이트의 논제는 단순했다 — 기독교는 자연을 인간의 사용을 위해 창조된 대상으로 규정했고, 이 규정이 과학혁명과 결합되면서 무한한 자연 착취의 정당성을 제공했다. 논쟁적이지만 영향력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 화이트의 해석은 반세기 동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장을 떠나기 전에, 그 반론 전통의 핵심 세 갈래를 짧게 짚어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서술 자체가 40년 뒤처진 학술적 단순화가 된다.
첫째, 청지기 해석(stewardship reading). 히브리어 radah가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책임 있는 돌봄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의 의무는 언약적 책임 — 특히 약자를 돌보는 것 — 이었다. 더글러스 존 홀(Douglas John Hall)의 『Imaging God: Dominion as Stewardship』(1986)이 이 해석의 고전이다.¹⁴
둘째, 창세기 2:15의 다른 언어. 창세기 1:28만 읽는 것은 선택적 독해다. 창세기 2:15에서 히브리어 abad(섬기다)와 shamar(지키다)는 농부와 목자의 언어다. 성경 자체가 두 개의 창조 서사를 담고 있고, 두 번째 서사의 중심 동사는 "정복"이 아니라 "섬김과 지킴"이다. 시어도어 히버트(Theodore Hiebert)의 『The Yahwist's Landscape』(1996)가 이 관점을 체계화했다.¹⁵
셋째, 그리고 가장 학술적으로 강력한 반론은 영국 신약학자 리처드 바컴(Richard Bauckham) 의 것이다. 그의 저서 『The Bible and Ecology』(2010)에서 바컴은 — 창세기 1:28을 착취의 명령으로 해석하는 전통은 고대 기독교가 아니라 17세기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 의해 발명된 근대적 독해라고 주장한다.¹⁶ 교부 신학과 중세 신학에서는 오히려 피조물 공동체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13세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의 "피조물 찬가(Cantico delle Creature)" 가 그 증거다.
이 반론들이 화이트의 논제를 완전히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근대 서구 문명이 창세기 1:28을 정복의 근거로 사용해온 역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논쟁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다 — 성경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방식이 문제였다. 그 읽는 방식을 형성한 것은 그리스 이원론, 로마 법적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17세기 이후 근대 과학혁명의 해석 틀이었다.
흥미롭게도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전통은 다른 길을 갔다. 그들은 인간을 "창조의 사제(priest of creation)" 로 보는 우주적 전례 전통을 보존했다. 인간의 역할은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드리는 찬양의 중재자가 되는 것. 이 전통은 이 책 후반부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신학(15장)과 직접 연결된다. 기독교는 하나가 아니다. 주류와 대안 전통이 동시에 존재해왔고, 우리가 선택한 읽기가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스 철학도 같은 방향의 씨앗을 뿌렸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 와 질료(hyle) 의 이분법은 정신을 물질보다 위에 두는 위계를 만들었다. 자연은 질료의 영역이고, 질료는 형상에 의해 질서지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매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위계(광물 → 식물 → 동물 → 인간 → 신) 는 이 구도를 생물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이 위계 안에서 아래 것은 위 것을 위해 존재한다.
로마는 이 그리스적 위계에 법적 형식을 부여했다. 도미니움, 임페리움, 페르소나(persona, 법적 주체) 의 구분. 이 구분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대상인지를 명확히 했다. 중세 유럽은 로마법을 계승했다. 근대 유럽은 로마법을 국제법으로 확장했다.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 그들이 들고 간 법적 도구가 이 도미니움 개념이었다. 로크의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주인 없는 땅") 개념은 이것의 근대적 확장이다. 10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안데스 전통의 씨앗은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 파차(Pacha) 다. 이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시간", "공간", "세계", "질서", "상태" —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품는다. 파차는 시공의 통합체다. 분리된 시간과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서의 존재.
파차는 세 층위로 구성된다. 우쿠 파차(Ukhu Pacha) — 지하 세계, 뿌리와 씨앗의 세계. 카이 파차(Kay Pacha) — 현재 세계, 인간과 동식물이 사는 곳. 하난 파차(Hanan Pacha) — 천상 세계, 태양과 별과 신들의 세계. 이 세 층위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뿌리가 자라 싹이 되고, 싹이 자라 나무가 되며, 나무의 잎이 떨어져 다시 뿌리가 된다. 같은 원리로, 우쿠 파차의 에너지가 카이 파차로 올라오고, 하난 파차의 에너지가 카이 파차로 내려온다. 존재는 수직적으로도 순환한다.
이 파차의 철학과 짝을 이루는 것이 아이니(ayni) 의 윤리다. 상호성. 모든 받음에는 줌이 대응해야 한다. 땅에서 작물을 거두면, 땅에 제물을 돌려준다. 물에서 음용수를 얻으면, 물길을 깨끗이 유지한다. 산(아푸 Apu)의 보호를 받으면, 산에 기도를 올린다. 이 상호성이 끊어지면 관계가 죽는다.
그리고 아이유(ayllu), 공동체. 안데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아이유다. 아이유는 피로 연결된 혈족이면서, 동시에 특정 땅과 물과 산에 영적으로 연결된 집단이다. 자기 아이유의 물길을 관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다.
중요한 점 하나를 짚어두어야 한다. 이 두 뿌리 — 서구의 위계적 세계관과 안데스의 순환적 세계관 — 은 둘 다 복잡하고, 둘 다 오래되었으며, 둘 다 개발되었다. 어느 한쪽이 더 "원시적"이라거나 더 "발전된" 것이 아니다.
서구 전통 안에도 풍부한 대안 계보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흐른다"), 스토아 철학의 자연 일치,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연 형제애, 낭만주의, 현대의 화이트헤드·하이데거 후기 철학. 이들은 모두 주류에서 밀려난 서구의 목소리들이다.
안데스 전통에도 그림자가 있다. 잉카 제국은 정복을 통해 확장했고, 피정복 민족에게 미티마(강제 이주) 정책을 썼으며, 계층 질서가 엄격했다. 순환적 세계관이 자동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두 문명의 지배적 경향은 구별된다. 서구의 주류는 분리와 지배의 길을 갔다. 안데스의 주류는 순환과 동행의 길을 갔다. 그리고 이 분리가 물질화된 것이 각각의 수력 공학이다. 아치교와 하수도. 개방 수로와 순환 구조.
여기서 한 문장만 덧붙이고 다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의학도 두 길을 갔다. 병원체를 박멸하는 길과 면역계를 돌보는 길. 한쪽은 세균론과 항생제의 승리로, 다른 쪽은 생활습관 의학과 마이크로바이옴 연구의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이 두 길의 분기점도 어쩌면 500년 전 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미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이 주장의 근거는 17장에서 풀어내겠다. 여기서는 다만 물과 몸이 같은 이야기라는 점만 기억해두자.
두 사진이 여전히 책상 위에 있다.
퐁 뒤 가르는 박물관 유적이다. 프랑스 정부가 국가 유산으로 관리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85년 등재). 관광객이 하루 수천 명씩 방문한다. 그러나 그 아치 위의 물길에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다. 1,500년 전에 멈췄다.
오얀타이탐보의 수로는 여전히 현역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잉카의 "성스러운 계곡" 일부로), 박물관이 아니다.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옆에서, 마을 할머니가 그 물로 빨래를 한다. 그 물은 500년 동안 단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
이 차이가 우연일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로마 수도교는 위대한 성취였다. 잉카 수로도 위대한 성취였다. 둘 다 자기 맥락에서 작동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500년 전, 이 두 철학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이 다음 장의 질문이다. 1532년 11월 16일, 페루 북부의 작은 고원 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 황제와 168명의 스페인군이 한 광장에서 처음 마주 선 그날. 그 짧은 오후에, 두 세계관이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그 충돌의 결과가 이후 500년의 세계를 만들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그날로 간다.
¹ 로마 제국의 수도교 건설 규모에 관하여는 A. Trevor Hodge, Roman Aqueducts and Water Supply, 2nd ed. (London: Duckworth, 2002), 서장 참조. 약 500개라는 추정은 대략적이며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² 로마 시 주요 수도교 11개의 목록과 총 길이에 관하여는 위의 책, 3장.
³ 퐁 뒤 가르의 기울기 정밀도에 관하여는 Guilhem Fabre, Jean-Luc Fiches, and Jean-Louis Paillet, L'aqueduc de Nîmes et le Pont du Gard (Paris: CNRS Éditions, 2000).
⁴ 로마 납관의 납 중독 영향에 관하여는 논쟁이 있다. Jerome Nriagu, "Saturnine Gout among Roman Aristocrats,"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08 (1983): 660-663은 고전적 연구이나, 최근에는 영향이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⁵ Frontinus, De Aquaeductu Urbis Romae. 영역본: Frontinus: The Aqueducts of Rome, trans. Charles E. Bennett, Loeb Classical Libra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25).
⁶ 위의 책, I.16. 번역은 저자.
⁷ 클로아카 막시마의 역사와 현재에 관하여는 Nicholas Purcell, "Rome and the Management of Water," in Human Landscapes in Classical Antiquity, ed. Graham Shipley and John Salmon (London: Routledge, 1996), pp. 180-212.
⁷ᵃ 마추픽추의 위생 배수 체계에 관하여는 Kenneth R. Wright and Alfredo Valencia Zegarra, Machu Picchu: A Civil Engineering Marvel (Reston, VA: ASCE Press, 2000), 제4장 및 제6장. 배수관의 출구 방향 설계에 관한 라이트의 인터뷰는 PBS NOVA, "Ghosts of Machu Picchu" (2010) 참조.
⁷ᵇ 케추아어 wanu(와누)와 영어 guano(구아노)의 어원 관계는 표준 스페인어 어원 사전과 Real Academia Española의 항목을 참조. 페루 해안의 조류 배설물 산업이 이 단어를 19세기 유럽에 전파했다.
⁷ᶜ 와리(Wari) 제국 개관에 관하여는 William H. Isbell and Gordon F. McEwan (eds.), Huari Administrative Structure: Prehistoric Monumental Architecture and State Government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1991); Justin Jennings (ed.), Beyond Wari Walls: Regional Perspectives on Middle Horizon Peru (Albuquerque: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2010).
⁷ᵈ 세로 바울(Cerro Baúl) 수로 체계에 관하여는 Ryan Williams, "Cerro Baúl: A Wari Center on the Tiwanaku Frontier," Latin American Antiquity 12, no. 1 (2001): 67-83; Donna J. Nash and P. Ryan Williams, "Architecture and Power on the Wari-Tiwanaku Frontier," Archaeological Papers of the 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14, no. 1 (2004): 151-174.
⁷ᵉ Donna J. Nash, "Sculpting the Landscape: Wari Terraforming and the Politics of Labor," in Andean Lifeways: Essays on the Peruvian Past, ed. Joanne Pillsbury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2012). "Sculpt the landscape" 표현은 와리 연구의 표준어가 되었다.
⁷ᶠ 피킬락타(Pikillaqta)의 계획도시 구조에 관하여는 Gordon F. McEwan, Pikillacta: The Wari Empire in Cuzco (Iowa City: University of Iowa Press, 2005).
⁷ᵍ Luis G. Lumbreras, The Peoples and Cultures of Ancient Peru, trans. Betty J. Meggers (Washington, D.C.: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1974); 인용문은 Lumbreras의 와리 분석 맥락을 저자가 요약한 것이다. "Conquest by hydraulic superiority" 라는 표현은 Karl Wittfogel의 Oriental Despotism (1957) 의 수력 사회 이론에서 파생되어 안데스 연구에 적용된 분석 용어다.
⁸ 잉카의 바퀴 미사용에 관하여는 Terence D'Altroy, The Incas, 2nd ed. (Malden, MA: Wiley-Blackwell, 2014), pp. 243-245.
⁹ 로마 수도교 붕괴의 원인에 관한 최근 연구는 Paolo Squatriti, Water and Society in Early Medieval Italy, AD 400-10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¹⁰ 안데스 공동체의 파에나·밍카 전통에 관하여는 Paul H. Gelles, Water and Power in Highland Peru: The Cultural Politics of Irrigation and Development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2000).
¹¹ Nassim Nicholas Taleb, Antifragile: Things That Gain from Disorder (New York: Random House, 2012). 본서는 원어 발음(영국식 /ˈfrædʒ.aɪl/)에 충실한 "안티프래자일" 표기를 사용한다. 한국어 번역서(『안티프래질』, 와이즈베리, 2013)의 표기와는 다르다.
¹² 창세기 1:28의 히브리어 동사 "카바쉬(kabash)"와 "라다(radah)"의 해석에 관하여는 Theodore Hiebert, The Yahwist's Landscape: Nature and Religion in Early Israe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참조.
¹³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 Science 155, no. 3767 (1967): 1203-1207.
¹⁴ Douglas John Hall, Imaging God: Dominion as Stewardship (Grand Rapids, MI: Eerdmans, 1986). 청지기 해석의 체계적 개진.
¹⁵ Theodore Hiebert (1996), 앞의 책. 특히 창세기 2:15의 abad/shamar 해석 부분 참조. 같은 주제에 대한 농업적·성서신학적 종합은 Ellen Davis, Scripture, Culture, and Agriculture: An Agrarian Reading of the Bibl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¹⁶ Richard Bauckham, The Bible and Ecology: Rediscovering the Community of Creation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0). 특히 제1장에서 창세기 1:28의 "지배" 해석이 17세기 베이컨에 의해 재구성된 근대적 독해임을 상세히 논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