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삭사이와만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천천히 산 크리스토발 성당을 지나 쿠스코 시내로 내려왔다. 아르마스 광장의 불빛은 따뜻했고, 저녁 공기는 얇고 차가웠다. 방에 돌아와 책상 위에 노트와 지도들을 펼쳤다.
노트를 펼치니 지도 한 장이 떨어졌다.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 쿠스코 북쪽, 우루밤바 강을 따라 펼쳐진 잉카 문명의 심장부. 지도 위에 지난 며칠간 거쳐온 곳들을 표시해 두었다. 마추픽추(Machu Picchu),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모라이(Moray) 와 마라스 염전(Salineras de Maras). 오늘 오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 이 이제 막 그 지도에 추가되었다.
책상 옆에는 박물관 도록과 현장 사진이 쌓여 있다. 라마 토우, 옥수수 품종, 인티와타나의 각도, 미라로 된 두개골. 하나하나가 독립된 경이였는데 — 이제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세계 지성의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
이 장은 그 얼굴들의 이야기다. 1장에서 나는 삭사이와만의 건축적 경이 앞에서 물었다. "어떻게 95년 만에?" 그 답의 일부로 잉카가 축적한 사회 조직 기술을 보았다. 그러나 잉카가 도달한 지점은 건축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을 읽었고, 땅을 조각했고, 몸을 치료했고, 문자 없이 제국을 다스렸다. 이 다섯 얼굴을 차례로 들여다본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손실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면, 파괴의 무게도 느끼지 못한다. 3부에서 다룰 500년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 정점을 분명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점은 모라이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해발 3,500미터의 고원. 마라스 마을에서 비포장 도로를 20분쯤 달리면 나오는 황량한 언덕 한가운데. 차에서 내려 능선을 몇 걸음 걸으면, 갑자기 땅이 꺼진 듯한 풍경이 열린다.
세 개의 거대한 원형 분지가 땅속으로 파여 있다. 각각이 계단식 테라스로 둘러싸여 있다. 가장 큰 것은 깊이 약 30미터, 지름 약 150미터.¹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원형 극장 같기도 하고, 땅이 만든 나이테 같기도 하다.
처음 본 사람은 묻는다. 무덤일까, 저수지일까, 의식의 장소일까. 답은 실험실이다.
1970~80년대, 농업 연구자들이 각 테라스에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테라스 층 사이의 평균 온도차가 섭씨 2도에서 2.5도에 달했다.² 맨 위와 맨 아래의 차이는 약 15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도 차이를 반경 100미터 남짓 공간 안에 인공적으로 재현한 구조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원형 구조가 바람을 차단한다. 깊이 파 내려간 형태가 지열 저장 방식을 바꾼다. 각 단이 햇빛·바람·지열·복사열의 다른 조합을 받으면서 미기후의 계층이 만들어진다.
잉카는 이 공간을 농업 실험실로 사용했다. 안데스 산맥은 해안 0미터에서 5,000미터 고산까지 극단적으로 다양한 생태 지대를 품는다. 각 고도마다 자랄 수 있는 작물이 다르다.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적응시키려면 여러 조건을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모라이가 바로 그런 장소였다.
이 실험의 결과가 오늘도 살아 있다. 페루에는 공식적으로 3,500종 이상의 감자가 등록되어 있다.³ 색깔·모양·크기가 제각각이다. 4,500미터 고산 내한성 품종부터 가뭄 저항 품종까지, 각 품종이 특정 고도와 기후에 맞춰져 있다. 감자뿐이 아니다. 옥수수, 퀴노아(quinoa), 아마란스(amaranth), 카뉴아(kañiwa) — 모두 각기 다른 고도에서 특화 개량되었다. 국제식량농업기구(FAO)는 안데스를 세계 식물 유전자원의 8대 중심지 중 하나로 지정한다.⁴
우리가 오늘 먹는 감자의 90퍼센트 이상은 안데스 기원이다.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1845~1849)이 가능했던 것도, 독일 맥주 문화와 러시아 인구 부양이 가능해진 것도 — 모두 이 안데스 작물 덕분이었다. 근대 유럽의 인구 폭발은 안데스 작물 없이 불가능했다.
맨 아래에서 한 작물을 시험한다. 살아남으면 한 단 위로. 또 살아남으면 또 한 단 위로. 단계적으로 추위와 바람에 노출시킨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작물이 점점 더 높은 고도에 적응한다. 수십 년, 때로 수백 년이 걸린다.
이것은 다윈 이전의 인위 선택이다. 농부들은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를 몰랐지만, 그 원리를 수천 년간 실천해왔다. 잉카는 그 실천을 국가적 시스템으로 조직했다. 모라이 같은 실험 센터가 페루 전역에 여러 곳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역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고, 그 종자를 카팍 냔 도로망을 통해 전국에 분배했다.
종자 은행이자 연구소이자 보급 센터. 이것이 잉카 농업의 실체였다. "원시 농업"이라는 말은 이 체계 앞에서 무너진다. 잉카는 문자·현미경·유전학 없이 — 세계 농업사에서 가장 정교한 품종 다양화를 이루어냈다. 모라이는 "원시"가 아니다. 근대와는 다른 종류의 과학이었다.
두 번째 점은 하늘이다.
나는 마추픽추 현장에서 인티와타나(Intihuatana) 앞에 서 있었다. 도시의 가장 높은 지점. 북쪽으로 우아이나픽추(Huayna Picchu) 봉우리가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마추픽추 산이 이어진다. 동서 양쪽으로는 좁은 능선. 그 한가운데, 다듬어진 화강암 기둥 하나가 서 있다. 높이 약 1.8미터. 네 개의 모서리가 정확한 방위—북, 남, 동, 서—를 가리킨다.
"태양을 묶는 돌"이라는 뜻이다. 케추아어로 *인티(Inti)*는 태양, *와타나(Wata-na)*는 묶는 것.⁵
인티와타나는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다. 천문 관측 도구다.
기둥의 각 면은 특정한 각도로 깎여 있다. 하지(6월 21일)와 동지(12월 22일) 정오에, 이 기둥이 만드는 그림자가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춘분과 추분에는 그림자가 거의 사라진다. 태양이 기둥 위에 정확히 수직으로 오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적도에서 남쪽으로 약 13도에 있다. 이 위도에서는 특정한 천문학적 사건들이 매우 가시적이다. 그리고 인티와타나는 그 사건들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기준점 역할을 했다.
비슷한 기능의 돌들이 오얀타이탐보에도, 피삭에도, 쿠스코의 코리칸차(Coricancha, 태양의 신전)에도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돌들을 "우상"으로 간주해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마추픽추의 인티와타나가 비교적 온전히 남은 이유는, 스페인이 마추픽추의 존재를 끝까지 몰랐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이 도시는 잊혀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⁶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잉카 천문학은 별 자체가 아니라 별 사이의 어둠을 읽었다.
서양 천문학은 밝은 별들을 선으로 이어 별자리를 만든다. 오리온의 허리띠, 큰곰의 자루. 별이 그림의 점이 된다. 잉카는 달랐다. 안데스 고원의 맑은 밤 하늘에 은하수가 실제로 강처럼 흐르고, 그 강 속의 어두운 먼지 구름을 잉카인들은 동물의 형상으로 읽었다.⁷
가장 유명한 것이 야카나(Yacana), 라마의 모습. 은하수 속에 알파·베타 센타우리를 눈으로 삼고, 주변의 어두운 구름이 만드는 거대한 형상. 잉카인들은 야카나가 은하수를 따라 이동하고, 새벽에 바다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를 만든다고 믿었다. 라마 외에도 여우(아토크), 두꺼비(한푸투), 뱀(마차콰이) — 모두 별이 아니라 별 사이 어둠으로 그려졌다.
서양은 빛을 이어 그림을 만들었다. 잉카는 어둠을 읽어 그림을 보았다. 같은 하늘에서 두 문명이 다른 것을 보았다. 이 다름이 세계 인식의 근본적 차이를 드러낸다.
잉카 천문학은 극도로 실용적이었다. 매년 6월, 동짓날 직전에 플레이아데스(잉카 이름 콜카 Qollqa, "창고")가 동쪽 하늘에 다시 떠오른다. 출현의 날짜와 별빛의 선명도 — 이 두 가지를 잉카 농부들은 세대를 거쳐 기록해왔다. **플레이아데스가 흐린 해에는 강수량이 적었다.**⁸
1990년대 말 벤저민 오를로브(Benjamin Orlove) 등의 연구가 이 관찰을 과학적으로 검증했다. 엘니뇨 해에는 안데스 상공에 고고도 권운이 많이 생기고, 그 권운이 플레이아데스 빛을 흐리게 한다. 그리고 엘니뇨는 안데스 강수 패턴을 교란해 가뭄이나 홍수를 일으킨다.⁹ 즉 잉카 농부들은 현대 기상학이 20세기 후반에야 이해한 엘니뇨를, 밤하늘 별 밝기로 수백 년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운"이라 부르지 않았다. 관찰, 세대 전승, 공동체 집단 지성. 마을 원로들이 플레이아데스를 본 후 파종 시기와 작물 선택을 결정했다. 흐린 해에는 가뭄에 강한 감자를, 선명한 해에는 물을 더 필요로 하는 옥수수를. 예측 과학이었다. 모라이에서처럼, 인티와타나 앞에서도 나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세 번째 점은 몸이다.
쿠스코 잉카 박물관의 2층 한 방이 온통 고대 두개골로 채워져 있다. 수십 개의 두개골, 모두 구멍이 뚫려 있다. 크기와 모양은 다양하다. 동전만 한 것, 계란만 한 것, 작은 접시만 한 것. 원형·사각형·타원형. 한 군데에만 있기도 하고, 서너 군데에 있기도 하다.
이것이 천공 수술(trepanation) 의 흔적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외과 시술. 고대 유럽·이집트·중국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지만, 안데스는 천공 수술이 가장 빈번하고 가장 정교하게 행해진 지역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생존률이다. 두개골 구멍 가장자리에 뼈가 다시 자란 흔적(골유합) 이 있으면, 환자가 수술 후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잉카 시대 페루 표본 분석 결과, 생존률이 시기에 따라 50~80퍼센트 이상에 달했다.¹⁰
비교가 놀랍다. 같은 시기 유럽의 외과 수술 생존률은 훨씬 낮았다. 19세기 말까지도 런던 병원의 개복 수술 환자 대부분이 감염으로 죽었다. 조셉 리스터(Joseph Lister)가 1867년 소독법을 도입하기 전까지, 병원은 죽음의 장소에 가까웠다. 그런데 안데스 외과의들은 500년 전, 때로는 2,000년 전에 —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환자를 살려냈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¹¹
도구 — 흑요석 칼날과 청동 끌. 흑요석은 현대 수술용 강철보다 얇고 정밀하게 잘린다(일부 정밀 안과 수술에 지금도 사용된다).
기법 — 원형 스크레이핑, 사각형 인시전, 링 절단. 부상과 병태에 따라 다른 기법을 선택할 수 있는 전문가 지식 기반이 있었다.
약초 — 코카잎(Erythroxylum coca)이 국소 마취제로 쓰였다. 그 원리가 20세기 초 코카인 분리로 현대 의학에 편입되어 — 오늘의 리도카인·프로카인의 기원이 되었다.
항균 식물 — 볼도(Boldo), 찬카 피에드라(Chanca Piedra), 무냐(Muña). 현대 약리학으로도 항균·항염 효과가 입증된 약초들이다.¹²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들이 나를 멈추게 한다. 500년 전 유럽은 4체액설이라는 2,000년 된 이론에 매여, 사혈과 관장을 일상 치료로 썼다. 같은 시기 안데스 의사들은 — 이미 뇌 수술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사례. 키나(cinchona) 나무. 안데스 원주민들은 이 나무 껍질이 주기적 열병 — 오늘날의 말라리아 — 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630년대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 지식을 유럽에 전했다. 17세기 유럽은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로마 교황들이 여름에 피신한 이유 중 하나도 로마 시내의 말라리아였다. 이 병의 유일한 실효 치료제가 안데스의 키나 껍질 가루였다.
1820년, 프랑스 화학자들이 키나 껍질에서 유효 성분을 분리했다. 그 성분의 이름은 퀴닌(quinine).¹³ 20세기 중반까지 퀴닌은 세계 말라리아 치료의 기본이었다. 영국이 열대 식민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퀴닌 덕분이었다(진 토닉의 기원이 여기 있다—토닉 워터는 원래 퀴닌을 쓴맛으로 가려 마시기 위한 음료였다).
즉 인류는 20세기까지 말라리아와 싸울 때 잉카인들이 알려준 약에 의존하고 있었다.
안데스의 약용 식물은 700종 이상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¹⁴ 그 지식의 대부분은 기록되지 않았고, 스페인 정복 후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현대 약리학은 여전히 탐구 중이다.
"원시 의학"이라는 말은, 이 장의 반복되는 결론처럼, 이 체계 앞에서 무너진다. 잉카는 단지 다른 길을 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은 때때로 서구보다 앞서 있었다.
네 번째 점은 정보다. 1장에서 나는 키푸를 간단히 소개했다. 매듭으로 기록한 정보 체계, 잉카의 "문자". 그러나 키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최근 연구들이 키푸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집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통설: 키푸는 숫자만 기록하는 도구다. 매듭 위치가 자리수, 매듭 수가 값. 복잡한 십진법 계산 도구일 뿐, 서사(narrative)나 언어는 담을 수 없다. 이 견해가 오래 지배적이었고, 잉카에게 "문자가 없었다" 는 판정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연대기 자체에 키푸로 역사를 읊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왕의 계보, 전쟁 기록, 신화 서사. 단순 숫자 장부라면 불가능하다. 또 키푸 전문가 키푸카마욕(quipucamayoc) 은 세습되었고 수년에서 수십 년의 훈련이 필요했다.
2003년, 하버드의 게리 어튼(Gary Urton) 이 저서 《잉카 키푸의 기호》에서 급진적 가설을 제시했다.¹⁵ 키푸의 기록 체계가 2진 구조를 가진다는 것. 매듭 유무, 매듭 종류(단순/긴/8자), 꼬임 방향(Z/S), 소재(목화/라마털), 색 조합 — 각각이 두 상태 중 하나를 가진다. 조합되면 한 단위당 수천 가지 구별 가능한 기호. 이론적으로 음절·형태소·단어를 기록할 수 있는 표현력이 있다.
2017년 하버드 학부생 마누엘 메드라노(Manuel Medrano) 가 페루 북부 산 후안 데 코야타 마을의 18세기 키푸 두 개를 같은 시기 스페인어 세금 대장과 대조했다. 특정 색 조합이 특정 성씨에 대응하는 것이 확인되었다.¹⁶ 키푸가 이름까지 기록할 수 있었다는 직접적 증거.
연구는 초기 단계다. 완전한 해독은 요원하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 키푸는 우리가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잃은 것의 규모는 가늠하기 어렵다. 1583년 제3차 리마 공의회(Third Council of Lima) 는 키푸를 "우상 숭배의 도구"로 공식 규정했다.¹⁷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가톨릭 성직자들이 마을에서 키푸를 발견하는 대로 소각했다. 일부 원주민들이 가족 키푸를 벽·굴·무덤 속에 숨겼다. 그래서 오늘 1,400여 개가 남아 있다. 얼마나 많이 불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수만 개? 수십만 개? 제국 전역에 축적된 행정 기록, 인구 통계, 역사 서사, 신화, 시가 — 모두 재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가 서양 고대사의 상징적 상실이라면, 키푸 소각은 안데스 문명의 소리 없는 파괴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와 달리 — 안데스의 상실은 서양 역사 교과서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는지는, 누가 역사를 쓰느냐에 달려 있다.
박물관 진열장 속 그 매듭들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인구 조사였을까, 누군가의 이름이었을까, 혹은 부드러운 사랑 노래였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 의미는, 매듭을 묶은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가 잃은 것은 유물이 아니다. 사유 방식이다.
다섯 번째 점은 행정이다.
잉카 제국은 전성기에 약 1,000만에서 1,200만의 인구를 품었다.¹⁸ 이것은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제국 중 하나였다.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부를 포괄했다. 다양한 민족, 수십 개의 언어, 급격히 변하는 지형.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유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답은 여러 층에 걸쳐 있다. 여기서는 세 가지 핵심 원리를 본다.
잉카 행정은 십진법으로 조직되었다.¹⁹ 이것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구조였다.
각 계층 관리자는 상위에 보고한다. 인구 조사, 세금(잉카에서는 현금 대신 노동 세금 즉 미타와 생산물 공납), 노동 동원, 분쟁 해결. 모두 이 계층을 따라 움직였다. 각 단위의 경계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정되었고, 카팍 냔 도로망과 차스키 전령 체계로 연결되었다.
흥미로운 특징은 세습과 능력의 결합이다. 쿠라카 지위는 대개 세습되었지만 — 명백히 무능한 후계자는 중앙 정부에 의해 교체될 수 있었다. 각 쿠라카는 자기 단위의 실적으로 평가받았다.
가장 독특한 정책이 미티마(mitimaes) 였다.²⁰ 잉카 정부는 피정복 민족 전체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거나, 충성스러운 잉카계 집단을 새로 정복한 지역에 배치했다.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진 강제 이주. 한 마을이 통째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목적 세 가지: 저항 약화(뿌리 뽑힌 공동체는 반란 조직이 어렵다), 경제적 특화(전문성의 지역간 이식), 문화적 확산(케추아어와 잉카 문화의 전파).
현대의 눈으로 보면 이 정책은 잔인하다. 강제 이주는 인권 침해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중국 문혁의 하방(下放), 캐나다 기숙학교의 아동 분리 — 역사는 이런 정책의 어두운 결과를 여럿 기록했다. 잉카 미티마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잉카가 제국이었다는 사실의 한 얼굴이다. 낭만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 이 정책이 제국의 문화적 통합을 가능케 했다. 잉카 제국은 단순한 군사 정복이 아니라 지리적 재구성이었다. 100년 안에 수천 킬로미터를 통합하는 것은 이것 없이 불가능했다.
세 번째 원리는 콜카(qolqa) 시스템이다.²¹ 전략적 위치에 건설된 국가 창고들. 고산 고도의 서늘한 온도와 바람 통로 설계로 수년 분량의 옥수수, 감자(추뇨), 퀴노아, 차르키, 직물이 저장되었다.
두 가지 기능: 미타 노동자 부양 (콜카 물자가 미타 참여자에게 음식·옷을 제공했다 — 콜카 없이 미타는 작동할 수 없다), 기근 구제 (흉작 지역에 다른 지역의 잉여 식량이 이동).
두 번째 기능이 특히 놀랍다. 잉카는 기근을 국가 책임으로 여긴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유럽에서 국가 주도 기근 구제가 자리잡은 것은 19세기 후반.²² 잉카는 15세기에 이를 체계화했다. 이 체계가 작동했다는 것은 — 스페인 침략 직전까지 제국 전체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식량 공급을 누렸다는 사실로 확인된다.²³
이 세 가지 — 십진법 행정, 미티마, 콜카 — 를 함께 보면 잉카 제국의 성격이 드러난다.
원시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명확한 계층(잉카 귀족, 쿠라카, 평민)이 있었고, 강제 이주와 노동 동원이 있었다. 전제 왕정도 아니었다. 각 지역 공동체(아이유 ayllu)가 상당한 자치를 유지했고, 국가는 간접 조정을 했으며, 공동체 생존 보장이 국가의 책임이었다.
이 체계를 우리는 아직 적절히 명명하지 못했다. 유럽 중심의 범주 — 절대왕정, 공화정, 민주주의, 봉건제, 공산주의 — 중 어느 것도 이것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다. 잉카 제국은 우리의 개념 틀 바깥에 서 있다. 이것은 잉카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 이론의 한계다. 이 한계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 여정의 한 걸음이다.
밤이 깊었다. 책상 위의 노트는 글자로 가득 차 있고, 지도의 점들 사이에 선이 연결되어 있다. 다섯 얼굴이 하나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라이의 원형 계단. 인티와타나의 네 모서리. 두개골에 난 구멍. 매듭으로 묶인 줄. 십진법의 관리 계층. 이 다섯이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 다시 보면 모두 같은 원리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모라이는 자연과의 대화다. 지배가 아니라 협상. 인티와타나는 하늘과의 대화다. 계산이 아니라 관찰. 두개골 수술은 몸과의 대화다. 정복이 아니라 조율. 키푸는 정보와의 대화다. 추상이 아니라 구현. 십진법 행정은 공동체와의 대화다. 명령이 아니라 조정.
모든 것이 대화의 형태를 취했다. 자연, 하늘, 몸, 정보, 공동체 — 어느 것도 정복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관계 맺기의 여러 얼굴이었다. 이것이 잉카 문명의 가장 깊은 원리다. 삭사이와만의 거석도, 모라이의 계단도, 천공 수술의 칼날도, 키푸의 매듭도, 콜카의 창고도 — 모두 같은 관계적 논리의 물질적 표현이었다.
이 장을 시작할 때 나는 이것들이 "같은 문명의 산물"이라는 것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이제 믿을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다. 잉카 농업은 천문학 없이 작동할 수 없었고, 천문학은 행정 없이 기록될 수 없었으며, 행정은 공동체의 건강 없이 유지될 수 없었다. 하나의 짜임이다.
그 짜임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노트를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적은 단어 — 물. 잉카 농업은 물 관리 없이 불가능했다. 도시는 물의 흐름에 맞춰 설계되었다. 의학에서 물은 정화의 매개였고, 천문학에서 물은 은하수의 메타포였으며, 종교에서 물은 신이었다. 무엇보다 — 잉카 공학의 가장 정교한 성취가 물을 다루는 기술이었다.
내일 아침, 어제 만난 가이드의 차로 피삭으로 간다. 그 다음에는 티폰으로 갈 것이다. 거기서 500년째 흐르는 물을 직접 만날 것이다. 그 물을 보고 나야, 이 다섯 얼굴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책을 덮고 불을 끈다. 창밖으로 쿠스코의 불빛이 희미하다. 그 불빛 아래 어딘가에서 — 500년 전의 수로가 여전히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¹ 모라이의 가장 큰 분지의 규모에 관하여는 Kenneth R. Wright, Ruth M. Wright, Alfredo Valencia Zegarra, and Gordon F. McEwan, Moray: Inca Engineering Mystery (Reston, VA: ASCE Press, 2011), pp. 15-22.
² 모라이 테라스 간 온도차 측정에 관하여는 위의 책, 3장 참조. 일부 초기 연구에서는 약 2°C, 후속 연구에서는 2~2.5°C의 변동이 보고되었다.
³ 페루 감자 품종 다양성에 관한 공식 통계는 국제감자연구소(International Potato Center, CIP)의 자료를 참조. CIP는 리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감자 유전자원 은행을 보유하고 있다.
⁴ FAO의 세계 식물 유전자원 중심지 지정에 관하여는 N.I. Vavilov의 1920년대 분류 체계를 계승한 것이다. Vavilov는 안데스를 세계 작물 기원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로 최초로 지정했다.
⁵ 인티와타나의 어원과 기능에 관하여는 Brian S. Bauer and David S.P. Dearborn, Astronomy and Empire in the Ancient Andes: The Cultural Origins of Inca Sky Watching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5), pp. 52-58.
⁶ 마추픽추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관하여는 Richard L. Burger and Lucy C. Salazar eds., Machu Picchu: Unveiling the Mystery of the Inca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4) 참조.
⁷ 잉카의 "검은 별자리"(dark cloud constellations) 체계에 관하여는 Gary Urton, At the Crossroads of the Earth and the Sky: An Andean Cosmology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1).
⁸ 플레이아데스의 계절적 가시성과 잉카 농업 예측에 관하여는 Benjamin S. Orlove, John C.H. Chiang, and Mark A. Cane, "Forecasting Andean rainfall and crop yield from the influence of El Niño on Pleiades visibility," Nature 403 (2000): 68-71.
⁹ 위의 논문. Orlove 등은 안데스 농민들의 전통적 관측법이 현대 과학의 엘니뇨 예측과 놀라울 만큼 일치함을 입증했다.
¹⁰ 페루 천공 수술 생존률에 관한 포괄적 연구는 John W. Verano, Holes in the Head: The Art and Archaeology of Trepanation in Ancient Peru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2016).
¹¹ 위의 책. 기법과 도구에 관한 상세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¹² 안데스 약용 식물의 현대 약리학적 검증에 관하여는 여러 연구가 있다. 예: G. Bussmann, "The globalization of traditional medicine in Northern Peru," Economic Botany 61 (2007): 344-362.
¹³ 퀴닌의 분리와 역사에 관하여는 Fiammetta Rocco, The Miraculous Fever Tree: Malaria, Medicine and the Cure that Changed the World (New York: HarperCollins, 2003).
¹⁴ 안데스 약용 식물 700종에 관한 추정은 R.W. Bussmann and D. Sharon, "Traditional medicinal plant use in Northern Peru: tracking two thousand years of healing culture," Journal of Ethnobiology and Ethnomedicine 2:47 (2006).
¹⁵ Gary Urton, Signs of the Inka Khipu: Binary Coding in the Andean Knotted-String Records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3).
¹⁶ Manuel Medrano and Gary Urton, "Toward the Decipherment of a Set of Mid-Colonial Khipus from the Santa Valley, Coastal Peru," Ethnohistory 65, no. 1 (2018): 1-23.
¹⁷ 제3차 리마 공의회(1582-1583)의 키푸 관련 결정에 관하여는 Sabine Hyland, Gods of the Andes: An Early Jesuit Account of Inca Religion and Andean Christianity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11).
¹⁸ 잉카 제국 인구 추정은 학자에 따라 600만에서 1,400만까지 편차가 크다. 본서는 주류 학계의 중간값을 따랐다. Terence D'Altroy, The Incas, 2nd ed. (Malden, MA: Wiley-Blackwell, 2014), pp. 50-53.
¹⁹ 잉카 행정의 십진법 구조에 관하여는 위의 책, 8장.
²⁰ 미티마 정책에 관하여는 María Rostworowski, History of the Inca Realm, trans. Harry B. Icel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p. 59-63.
²¹ 콜카 창고 시스템에 관하여는 Terry Y. LeVine ed., Inka Storage Systems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92).
²² 유럽의 근대적 기근 구제 정책의 발전에 관하여는 Cormac Ó Gráda, Famine: A Short Histo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²³ 잉카 제국의 식량 안정성에 관하여는 여러 스페인 연대기가 언급하고 있으나, 현대 연구로는 D'Altroy (2014), 앞의 책, 10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