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지배인은 내 얼굴을 한 번, 운동화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시 물었다.
"삭사이와만까지 걸어가신다고요?"
"네."
"택시 타세요. 오르막이에요."
"그래도 걸어가 보려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펜 끝으로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에서 출발하는 길을 짚어가며, 산 크리스토발 성당을 지나 좁은 골목 계단을 올라가라고 했다. 한 시간쯤 걸릴 거라고. 고도 차이는 200미터 남짓이지만, 쿠스코의 해발은 이미 3,400미터다. 숨이 찰 거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도를 받아 접었다.
사실 이 아침이 쿠스코 자체를 답사하는 첫 날이다. 며칠 전 새벽에 이 도시에 도착했지만 — 짐을 풀 여유 없이 그날 바로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향했다. 표를 미리 구하지 못해 현장에서 구해야 했던 탓이다. 가는 길에 버스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작은 마을, 오얀타이탐보를 지나쳤다. 그 도시의 골목과 돌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 돌아오는 길에 하루 머물자고 마음먹었다. 마추픽추를 본 뒤 실제로 오얀타이탐보로 돌아가 하룻밤을 잤고, 다음 날 쿠스코로 오는 길에 모라이와 마라스까지 보고 왔다. 성스러운 계곡을 먼저 경험한 뒤, 마침내 이제 쿠스코의 중심을 본다. 그리고 그 첫 목적지를 삭사이와만으로 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 위에 올라앉은 거대한 돌들을 — 가장 먼저 직접 보고 싶었다.
지배인의 시선이 등 뒤에 남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관광객 대부분은 택시나 투어 버스를 탄다. 산 위의 유적 앞에 잠깐 내렸다가, 가이드의 설명을 삼십 분쯤 듣고, 다시 버스로 돌아간다. 굳이 걸어 올라가겠다는 한국인 남자가 그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왜 걷기로 했는지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떤 장소들은 걸어서 다가가야 비로소 말을 건다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여러 원주민 공동체를 드나들며 배웠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과 땅을 밟으며 다가가는 사람에게, 땅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다. 한 시간을 숨차게 걸어 올라간 몸은 그냥 도착한 몸과 다르다. 그 차이는 유적을 보는 순간에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걸었다.
산 크리스토발 성당을 지나면서 길은 급격히 좁아졌다. 잉카 시대의 돌벽을 따라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회칠한 벽이 겹쳐져 있었다. 아래쪽 1~2미터는 다각형으로 정밀하게 맞물린 잉카의 석조, 그 위로 비뚤한 벽돌과 하얀 회반죽. 500년 전 스페인이 점령한 뒤 기존 건물을 헐고 그 기초 위에 자기 건물을 올린 흔적이다. 돌 하나에도 두 문명의 시간이 포개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 잉카의 돌은, 위쪽 스페인의 벽보다 훨씬 반듯하고 단단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계단은 가파르고 돌은 미끄러웠다. 다섯 걸음을 오르면 숨이 차서 멈춰야 했다. 폐가 다 차오르지 않는 느낌. 공기 속에 산소가 덜 담겨 있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안다. 평원 크리(nêhiyawak) 사람들이 이런 바람을 수천 년 마셨듯, 케추아 사람들은 이 바람을 수천 년 마셨다. 고지대의 몸은 고지대의 세계관을 만든다. 이걸 체감하는 데에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계단이 끝나고 포장도로가 나왔다. 완만한 오르막 길을 이삼십 분쯤 더 올라갔을까. 갑자기 시야가 열렸다.
처음 마주한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책에서 읽었다. 사진으로 보았다. 다큐멘터리로 여러 번 확인했다. 나는 이 장소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파차쿠텍이 1438년에 즉위해 제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그의 뒤를 이은 투팍 잉카 유팡키와 와이나 카팍이 최전성기를 이뤘다는 것을. 삭사이와만이 15세기 중반에 착공되어 한 세기에 걸쳐 건설되었다는 것을. 돌 하나의 무게가 100톤을 넘는다는 것을.
그런데 실제로 그 앞에 서니, 모든 사전 지식이 소용없었다.
거대한 돌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가장 큰 돌은 높이가 5미터, 무게가 약 120톤이었다.¹ 어린 아프리카 코끼리 스무 마리 정도의 무게다. 그런 돌이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였다. 그리고 그 돌들이 서로 다른 모양이었다. 정육면체도 아니고 직육면체도 아니고, 어떤 돌은 12각, 어떤 돌은 16각. 각각의 돌이 제 모양대로 깎여 있었고, 이웃한 돌과 완벽히 맞물려 있었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었다. 칼날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가이드북은 말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돌 사이를 쓸어보았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벽이 세 겹이었다. 지그재그로. 전체 길이 약 400미터.²
나는 손을 떼지 못했다. 돌의 표면은 차가웠다. 살짝 거칠었지만, 모서리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웠다. 500년 동안 비바람을 맞았는데도 그랬다.
가이드북과 다큐멘터리에서 들은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잉카 사람들은 돌을 부드럽게 만드는 법을 알았다는 것. 라마와 알파카를 잡을 때 나오는 위산, 그리고 특정 허브를 혼합하면 돌의 표면이 점토처럼 부드러워졌다는 것. 그 상태에서 깎고 조각하면, 원하는 대로 돌을 다룰 수 있었다고.³ 이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인지, 구전되어온 전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학계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다만 이 돌들 앞에 서면, 그런 이야기라도 믿고 싶어진다. 다른 설명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위쪽으로 올라갔다. 맨 꼭대기에는 원래 거대한 탑 세 개와 태양 숭배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돌로 된 윤곽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16세기 내내 삭사이와만을 조직적으로 해체했다. 돌 하나하나를 뽑아내 쿠스코 시내의 성당과 저택을 짓는 데 사용했다. 삭사이와만은 사실상 식민 도시의 채석장이 되었다. 학자들은 원래 구조의 상당 부분—많게는 3분의 2 이상—이 이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추정한다.⁴ 지금 우리가 보는 거대한 성벽은 그 중에서도 남은 일부일 뿐이다.
원래는 어떠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데스의 오후는 변덕스럽다. 3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 구름은 빠르게 몰려오고 빠르게 사라진다. 곧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가이드들이 우산을 펼치며 무리를 모았다. 셔터 소리가 멈췄다. 단체 관광버스 쪽으로 물결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10분쯤 지나자, 비는 가늘어졌고 삭사이와만은 거의 비어 있었다.
나는 성벽의 그늘진 자리로 옮겨 비를 피했다. 돌은 비를 맞아 더 짙은 회색이 되어 있었다. 안개가 피어올라 윗 성벽의 윤곽을 흐렸다. 쿠스코 시내가 저 아래 펼쳐져 있었지만, 구름에 가려 절반쯤만 보였다. 세상이 반쯤 지워진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나와 이 돌들만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었다. 질문들이 하나씩 떠오른 것은.
첫 번째 질문. 이 돌들은 어디서 왔는가.
삭사이와만의 가장 큰 석회암 블록들은 요새 언덕 자체에서 채석되어 비교적 가까이서 조달되었다. 그러나 더 섬세한 안산암 계열 블록들은 쿠스코에서 남동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루미콜카(Rumiqolqa) 채석장에서 운반되어 왔다. 산악 지대를 가로질러. 계곡을 건너서. 바퀴 없이. 잉카는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들 장난감에서 바퀴의 원리를 발견한 유물이 있지만, 운송 수단으로 채택하지 않았다.⁵ 왜일까. 이 역시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두 번째 질문. 어떻게 옮겼는가.
100톤짜리 돌을. 산 위로. 바퀴도 없이. 쇠 도구도 없이. 주류 학계는 인력과 밧줄, 통나무 굴림대, 경사로를 조합한 것으로 본다.⁶ 이집트 피라미드와 비슷한 원리. 그러나 안데스의 지형은 이집트의 평야와 다르다. 협곡과 급경사와 강을 건너야 했다. 한 돌을 옮기는 데 수백 명이 몇 주, 때로는 몇 달 걸렸다는 연대기 기록이 있다.
세 번째 질문. 어떻게 이 각도로 깎았는가.
다각형의 정밀한 맞물림. 청동 도구밖에 없었던 시대에. 앞서 언급한 위산과 허브 전설은 주류 과학계에서 검증된 가설이 아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장 피에르 프로첸(Jean-Pierre Protzen)은 실험 고고학을 통해, 반복적인 시험-깎기-맞춤 과정으로 이런 정밀도가 가능함을 입증했다.⁷ 두 돌을 놓고 맞닿는 면을 확인해 미세하게 깎고, 다시 놓고 확인하고 다시 깎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다는 것. 한 돌 당 수개월이 걸렸을 수도 있다.
네 번째 질문. 누가 이 일을 했는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잉카 연대기는 스페인 정복 이후 기록된 것이 대부분이고, 거대 석조물을 만든 장인들의 이름은 한 줄도 남지 않았다. 수만 명. 수십 년에 걸쳐. 익명으로. 돌 하나에 그들의 땀이 들어 있지만, 그 땀의 주인의 이름은 사라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질문. 가장 근본적인 질문.
왜, 단지 100년 만에?
잉카 제국의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은 이 질문에 놀란다. 잉카 왕국이 쿠스코 주변 소국에서 제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9대 황제 파차쿠텍(Pachacútec)이 즉위한 1438년부터다.⁸ 그리고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쿠스코를 점령한 것은 1533년.
95년.
이 기간 동안 잉카는 에콰도르 남부에서 칠레 중부까지, 태평양 연안에서 아마존 서쪽 경계까지 약 2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장악했다.⁹ 로마 제국이 이 규모에 도달하는 데 약 500년이 걸렸다. 몽골 제국조차 100년이 넘게 걸렸다. 잉카는 95년에 해냈다.
그리고 그 95년 동안 지어진 것이 삭사이와만만이 아니었다. 오얀타이탐보. 피삭. 마추픽추. 코리칸차. 쿠스코 자체의 재건설. 약 40,000킬로미터의 도로망. 지금 내가 걸어 올라온 이 돌길을 포함해서.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행정 도시, 신전, 저수지, 농경 테라스가 같은 기간에 세워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문자 없이, 바퀴 없이, 철기 없이 이루어졌다.
물론 잉카는 무(無)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잉카가 꽃피운 95년은 안데스 문명사 약 2,400년의 마지막 한 장(章) 이다. 기원전 9세기 차빈(Chavín) 의 신전 문화에서 시작해 — 남쪽 해안의 파라카스(Paracas)와 나스카(Nazca) 의 직물과 대지 그림, 북쪽 해안의 모체(Moche) 의 도자와 금속 공예, 중앙 고원의 티와나쿠(Tiwanaku) 와 와리(Wari) 의 거대 제국, 북쪽 해안을 통일한 치무(Chimú) 의 도시 문명 — 을 거쳐, 마침내 15세기 중반에 잉카가 등장한다. 잉카가 사용한 테라스, 수로, 도로, 직물, 금속, 천문 지식의 기본 문법은 모두 선행 문명에서 상속된 것이다. 잉카의 위업은 무에서 쌓은 위업이 아니라 2,400년의 축적 위에 올려놓은 마지막 완성이다. 그러나 바로 그 완성의 규모와 속도와 조직력이 — 같은 안데스에서 어떤 선대 문명도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이었다.
이것이 나를 멈추게 한 질문이었다.
빗줄기가 완전히 멎었고, 구름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젖은 돌들이 금속처럼 반짝였다. 나는 세 시간째 이 자리에 있었다. 관광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음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돌들 앞에서 생각하고 싶었다.
이미 많은 것을 읽고 왔다. 잉카 문명에 대한 책들, 고고학 논문들, 여행기들.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돌들 앞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달았다. 숫자와 날짜와 이름은 알았지만, 감각으로 와닿지 않았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감각으로 와닿는 순간, 이론적 질문이 실존적 질문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결국 "어떤 사회였기에 이것이 가능했는가"가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우리는 그런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도, 현대 북미도, 현대 유럽도 이런 것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술은 있지만 조직력이 없다. 자원은 있지만 합의가 없다. 똑똑한 개인은 많지만, 집단으로 100년 동안 하나의 거대한 것을 쌓아 올리는 능력은 잃었다. 수원 화성은 2년 반 만에 세워졌지만, 한 세대에 걸친 지속적 건설은 지금 세상에서 찾기 어렵다.
잉카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할 수 있었는가?
이것이 이 책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나를 데려갈 것이다. 데카르트까지. 바야돌리드까지. 포토시까지. 캐나다 평원의 버펄로 뼈까지.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판옥선까지. 그리고 마침내는, 오늘 내가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기 위해 켜둔 AI와의 대화까지.
하지만 지금은, 이 돌 앞이다.
"어떻게 95년 만에?"라는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이 질문은 은연중에 잉카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들이 갑자기 거석을 쌓기 시작했다는 식의.
사실은 다르다.
잉카는 수천 년의 축적 위에 서 있었다.
안데스 산맥은 인류 4대 독자적 문명 발상지 중 하나다.¹⁰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동아시아의 황하-양자강, 남아시아의 인더스-갠지스, 그리고 안데스. 이 네 지역에서 농경과 도시와 문자 이전의 복합 사회가 독립적으로 발생했다. 다른 곳의 영향 없이.
안데스에서 가장 오래된 복합 사회는 카랄(Caral) 이다. 페루 중부 해안, 수페 계곡에 있는 이 유적은 기원전 26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와 거의 같은 시기다. 거대한 의식 센터, 계단식 피라미드, 복잡한 수로 시스템이 이미 이때 존재했다. 그리고 잉카가 등장하기까지 4,000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이 4,000년 동안 안데스에는 여러 문명이 흥망했다. 차빈(Chavín). 파라카스(Paracas). 나스카(Nazca). 모체(Moche). 이 각각의 문명이 잉카에게 유산을 남겼다. 그중 잉카의 직접적 선배로 꼽히는 두 문명이 있다. 티와나쿠와 와리다.
티와나쿠(Tiwanaku) 는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남쪽에서 서기 300년부터 1100년까지 번성한 문명이다.¹¹ 그 유적 중 푸마푼쿠(Pumapunku) 의 돌들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다각형 석재가 아니라 H자형으로 정밀하게 깎인 블록들 이다. 인터넷 음모론에서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자주 인용되는 바로 그 돌들이다.
음모론은 당연히 근거가 없다. 그러나 기술적 경이는 사실이다. 이 돌들은 잉카 삭사이와만의 직계 조상이다. 같은 다각형 맞물림 원리, 같은 정밀도. 다만 스타일이 다르다. 티와나쿠는 기하학적으로 엄격하고, 잉카는 유기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손의 기억은 이어져 있다.
티와나쿠가 멸망한 뒤 그 기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인들의 후손, 그들과 결혼한 집안, 제자와 도제의 사슬을 통해 전승되었다. 그 전승의 끝자락에서 잉카가 등장했을 때, 이미 돌을 다루는 법은 몸의 언어로 존재하고 있었다. 잉카는 그것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다.
와리(Wari) 는 서기 600년부터 1000년까지 페루 중부 고원에서 번성한 문명이다.¹² 나는 쿠스코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떨어진 피키약타(Pikillaqta) 유적을 둘러본 적이 있다. 와리 문명의 행정 도시다.
피키약타는 잉카 도시와 완전히 다르다. 잉카가 지형에 맞춰 유기적으로 배치되는 데 반해, 피키약타는 로마처럼 직선 격자로 구획되어 있다. 수백 개의 동일한 방이 정렬되어 있다. 대량 행정의 필요성을 느낀 사회의 모습이다.
와리는 두 가지를 잉카에게 남겼다. 하나는 도로망이다. 와리의 도로 시스템이 카팍 냔의 원형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행정 기술이다. 넓은 영토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방법, 창고 시스템, 지역 지도자를 통한 간접 통치 — 이 모든 것이 와리에서 실험되어 잉카에게 완성되었다.
잉카의 독창성은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하나의 제국적 체계로 수렴시킨 것이다.
티와나쿠의 석조 기술. 와리의 도로와 행정. 북부 해안 치무의 금속 공예와 관개 농업. 아마존 변경의 식물 지식. 고산 마을의 직물 전통. 이 모든 것이 쿠스코에서 한 점에 모였다.
잉카는 이 수렴을 가능케 한 사회적 동력을 만들었다. 흩어진 기술을 끌어모을 수 있는 권위, 그 기술을 전국적 규모로 적용할 수 있는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을 움직이는 관계의 논리.
이것이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잉카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움직였는가.
답은 미타(Mit'a) 다.
미타는 케추아어로 "차례(turn)"를 뜻한다.¹³ 단어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순번제였다. 모든 성인 남성이 자기 차례에 국가의 공공 사업에 참여해야 했다. 보통 1년에 약 60일에서 90일. 일생 동안 그 차례가 여러 번 돌아왔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강제 노역으로 들린다. 그리고 실제로 강제적 측면이 있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거부는 공동체와 국가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잉카 제국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제 노역만으로 이 설명은 완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체계는 실제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95년 동안 200만 평방킬로미터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여러 연대기 기록은, 미타가 단순한 착취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미타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잉카 국가는 여러 가지를 제공했다.¹⁴
우선 음식이다. 매일 넉넉한 식량이 공급되었다. 옥수수, 감자, 말린 고기(차르키, charqui), 고산 곡물인 퀴노아. 이 중 많은 것이 가정에서보다 더 좋은 수준이었다.
술도 제공되었다. 치차(chicha), 옥수수를 발효시킨 약한 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치차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의식적 음료였다는 점이다. 파차마마(어머니 대지)에게 먼저 한 방울을 땅에 떨어뜨린 뒤 마셨다. 함께 치차를 마시는 것은 공동체적 행위였다.
의복도 제공되었다. 노동 기간 동안 닳는 옷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이것은 단순한 실용을 넘어선 배려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가족의 부양. 미타 기간 동안 집에 남은 가족의 생계는 공동체(아이유)와 국가가 보장했다. 이것이 없었다면 미타는 가족의 붕괴를 의미했을 것이다. 이 보장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차례에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노동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선물이 주어졌다. 직물, 도구, 때로는 새로운 작물 종자. 제국을 다녀온 몸은 빈손이 아니었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Pedro Cieza de León)은 1540년대에 페루를 순회하며 기록한 스페인 연대기 작가다. 그의 《페루 연대기(Crónica del Perú)》는 잉카 멸망 직후, 정복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 쓰인 1차 사료다. 그가 남긴 묘사 중 하나:
"그들은 수만 명이 모여 거대한 돌을 끌어올렸는데, 고통에 찬 노동이 아니라 축제 같았다. 노래와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치차를 나눠 마시며 땀을 흘렸다. 한 돌이 제자리에 놓일 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자긍심이 있었다."¹⁵
이 기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시에사는 정복자의 입장이다. 그가 본 것을 미화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자신의 가치 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정직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이것을 "축제 같았다"고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강제 노역의 현장이라면 그가 이 단어를 쓸 이유가 없다. 다른 연대기 작가들(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후안 데 베탄소스 등)도 비슷한 묘사를 남겼다.¹⁶ 이들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미타 노동은 축제와 겹쳐 있었던 것이다. 건설 현장은 동시에 종교 의식의 현장이었고, 공동체 간 경쟁의 장이었고, 결혼이 성사되는 자리였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돌을 들어 올렸다. 그 경험이 자긍심과 소속감을 만들었다.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우리가 알게 된 노동과는 다르다. 시계에 맞춰 공장에 들어가고, 부품처럼 움직이고, 급여를 받고 나오는 노동. 현대인에게 노동은 삶의 외부다. 잉카에게 미타는 삶의 일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강화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미타에는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페인은 잉카를 정복한 뒤, 미타 시스템을 자기 식으로 이어받았다. 이름만 빌려왔다. 형식은 유지했지만 내용을 완전히 바꿨다. 축제가 사라졌다. 치차와 음식과 선물이 사라졌다. 가족 부양의 보장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강제 노역뿐이었다.
그리고 그 강제 노역은 16세기 중반부터 포토시 은광으로 향했다.
포토시는 1545년에 발견된 볼리비아의 거대한 은 광맥이다. 이 은이 이후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11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지금 주목할 것은, 스페인이 미타를 이용해 원주민을 포토시 지하 터널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다. 일 년 중 몇 달, 남자들은 산 아래 어둠 속에서 수은에 중독되며 은을 캤다. 귀향하는 비율은 낮았다. 돌아온다 해도 폐가 망가져 있었다. 한 세기 동안 수백만 명이 이렇게 죽었다.
이것이 역사의 가장 잔인한 역설 중 하나다. 관계적 협력의 도구였던 미타가, 추출적 학살의 도구로 변형되었다. 같은 이름이 붙은 두 체계가 정반대의 일을 했다.
무엇이 달랐는가? 형식은 같았다. 순번제로 사람들을 동원하는 구조. 그러나 그 안의 관계가 달랐다. 축제가 있느냐 없느냐. 음식과 술이 있느냐 없느냐. 가족이 보호받느냐 버려지느냐. 돌아올 수 있는가 없는가.
같은 노동도 어떤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이것이 미타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21세기 자본주의가 "유연 근무"나 "자율 노동"이나 "창업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포장하고 있는지 묻게 한다. 형식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관계는?
이 질문을 품고 다음 섹션으로 넘어간다. 잉카가 문자 없이 어떻게 제국을 운영했는지로.
쿠스코의 잉카 박물관(Museo Inka) 에는 여러 개의 키푸가 전시되어 있다. 처음 보면 아주 평범하다. 굵은 줄 하나에서 가느다란 줄들이 여러 가닥 늘어져 있고, 각 줄에는 매듭이 여러 개 묶여 있다. 색깔은 다양하다. 적갈색, 흰색, 검은색, 푸른색. 길이도 다르다. 어떤 것은 20센티미터쯤, 어떤 것은 거의 1미터가 넘는다.
이것이 잉카의 문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문자라는 단어로 부르기 애매한 무엇이었다. 우리가 아는 문자는 음성 언어를 시각 기호로 옮긴 것이다. 키푸는 그렇지 않다. 매듭과 색과 꼬임으로 정보 자체를 담았다. 언어의 소리를 옮긴 것이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것을 직접 기록한 것이다.
키푸의 기본 단위는 매듭이다.¹⁷ 세 종류가 있다. 단순 매듭(simple knot), 긴 매듭(long knot), 그리고 8자 매듭(figure-eight knot).
위치에 따라 자리수가 정해졌다. 맨 아래가 일의 자리, 그 위가 십의 자리, 그 위가 백의 자리. 십진법이다. 이것은 잉카가 인류의 또 다른 십진법 체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했음을 의미한다. 유럽이 아랍 숫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색깔은 범주를 뜻했다. 적갈색은 군인, 흰색은 은, 노란색은 금, 푸른색은 특정 작물. 이런 식이다. 그러나 색의 의미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을 수 있다.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꼬임 방향(Z꼬임 vs. S꼬임)과 줄 사이의 간격도 의미를 담았다. 즉 한 개의 키푸에는 최소 다섯 가지 차원의 정보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었다 — 매듭 종류, 매듭 수, 매듭 위치, 줄 색깔, 줄 꼬임 방향.
현대 학자들이 이것을 고차원 정보 체계라고 부르는 이유다.¹⁸
키푸는 혼자서 읽히지 않았다. 키푸카마욕(Quipucamayoc) 이라는 세습 전문가 계층이 함께 있어야 했다. 이들은 키푸를 손에 쥐고 구술로 그 내용을 풀어냈다.
즉 키푸는 완전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의 조력자였다. 키푸 자체가 모든 것을 담은 것이 아니고, 키푸카마욕의 훈련된 기억과 결합해서 완전해졌다. 이것은 서구 문자와는 완전히 다른 원리다. 서구 문자는 이론상 누구나 읽을 수 있다(글자를 아는 한). 키푸는 오직 훈련된 자만이 읽을 수 있었다.
결함일까? 아니다. 이것은 정보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방식이었다. 기록과 해석자가 함께 있어야 의미가 성립한다. 그리고 해석자는 공동체 안에서 책임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익명의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록에는 이름이 있다.
이 원리는 AI 시대의 우리에게 묘한 울림을 준다. 익명의 데이터가 쏟아지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정보가 알고리즘을 움직이는 시대. 잉카는 정보에 얼굴을 붙여두었다.
오랫동안 서구 학자들은 키푸가 단순한 계산 도구, 일종의 원시 회계 장부라고 여겼다. 숫자만 기록하는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이 견해를 뒤집고 있다.
하버드의 게리 어튼(Gary Urton) 은 2003년 저서 《잉카 키푸의 기호(Signs of the Inka Khipu)》 에서 키푸가 서사적 정보까지 담을 수 있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¹⁹ 매듭의 조합이 음절이나 개념 단위를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팀이 2005년 이후 진행해 온 디지털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지역의 키푸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이 문법의 증거라면, 키푸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2017년에는 하버드 학부생이었던 마누엘 메디나(Manuel Medrano) 가 페루 북부 산 후안 데 코야타 마을에서 발견된 키푸 두 개를, 같은 마을의 족보 기록과 대조해 이름까지 읽어낼 가능성을 제시했다.²⁰ 연구는 진행 중이고 논쟁도 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키푸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이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을 잃었다.
1583년, 제3차 리마 공의회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은 키푸를 "우상 숭배의 도구"로 규정했다.²¹ 교회의 교리에 맞지 않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기록 체계가, 악마의 소산으로 선포된 것이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조직적 소각이 이루어졌다.
얼마나 많은 키푸가 불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추정만 있을 뿐이다. 수만 개, 혹은 그 이상. 잉카 제국 전역에 걸쳐 축적된 행정 기록, 역사, 아마도 문학까지. 모두 재가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키푸는 약 1,400개로 집계된다.²² 대부분은 박물관과 사적 수집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미해독 상태다.
나는 쿠스코 박물관에서 그중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유리 진열장 안, 붉은 줄과 흰 줄과 검은 줄이 매듭을 묶고 있었다. 그 줄 위에 누군가가 어떤 내용을 기록했다. 인구 통계였을까, 작물 수확량이었을까, 혹은 누군가의 이름이었을까, 혹은 전쟁의 기억이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 매듭들의 의미는, 매듭을 묶은 사람과 그것을 읽을 줄 알았던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가 잃은 것은 유물이 아니다. 사유 방식이다.
키푸가 정보의 언어였다면, 차스키(Chaski) 는 그 정보를 움직이는 다리였다.²³
차스키는 릴레이 전령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훈련받아 일정 구간을 전력으로 달리고, 다음 차스키에게 메시지(때로는 키푸)를 건네고, 다음 차스키가 다음 구간을 달렸다. 구간마다 차스키와시(chaskiwasi) 라고 불리는 휴식소가 있었다.
이 시스템의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쿠스코에서 현재의 에콰도르 키토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000킬로미터다. 길을 따라가면 더 멀다. 이 거리를 차스키는 5일 만에 주파했다. 하루 평균 400킬로미터 이상. 이것이 17세기까지 세계 어느 제국도 도달하지 못한 통신 속도다. 로마 제국의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보다도 빨랐다.
차스키가 운반한 것은 문서만이 아니었다. 신선한 생선도 운반했다. 태평양 연안에서 잡힌 물고기가 이틀이 지나지 않아 쿠스코의 황제 식탁에 올랐다. 해발 3,400미터의 고산 도시에서 황제는 아침에 싱싱한 회를 먹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하나의 제국이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키푸와 차스키. 이 둘이 있었기에 잉카는 1,200만 명의 인구와 2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할 수 있었다. 문자 없이. 바퀴 없이.
"문자가 없으면 야만"이라는 유럽 중심주의는, 이 사실 앞에서 무너진다.
잉카 문명의 혈관은 길이었다.
카팍 냔(Qhapaq Ñan), "왕의 길"이라는 뜻의 이 도로망은 전체 길이 약 40,000킬로미터에 달했다.²⁴ 북으로는 콜롬비아 남부에서 시작해, 남으로는 칠레 중부의 산티아고 근처까지 내려갔다. 이는 지구 한 바퀴의 거의 절반이다. 그리고 이 길은 현재의 여섯 나라에 걸쳐 있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 여섯 나라 공동으로 등재되었다.²⁵
카팍 냔은 두 개의 간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해안을 따르는 코스탈 로드(Costal Road), 다른 하나는 안데스 산맥 능선을 따르는 하일랜드 로드(Highland Road). 이 두 간선을 수백 개의 지선이 연결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해안에서 산맥으로, 산맥에서 아마존으로.
길의 건설은 지형에 따라 달랐다. 평지에서는 단순한 다져진 흙길이었다. 경사지에서는 돌계단이 만들어졌다. 어떤 구간은 2미터 폭의 포장도로였다. 가파른 절벽에는 돌을 쌓아 인공 테라스를 만들었다. 강을 건너는 곳에는 현수교가 놓였다. 라마 털과 용설란 섬유로 엮은 거대한 밧줄을 협곡 양쪽에 고정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깐 다리. 매년 공동체가 모여 새 밧줄로 교체했다. 이 전통은 페루의 퀘스와차카(Q'eswachaka) 다리에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매년 6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오래된 밧줄을 끊고 새 것으로 엮는다. 500년 된 의식이다.
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두 종류의 시설이 세워졌다.
탐보(tambo) 는 휴식소였다. 보통 하루 여정 거리인 약 20킬로미터마다 하나씩 있었다. 여행자는 그곳에서 먹고 잠들 수 있었다. 탐보는 여관이 아니라 국가 시설이었다. 사용은 대개 공무 여행자에게 한정되었다.
콜카(qolqa) 는 창고였다.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 지어져 서늘한 온도를 유지했고, 바람 통로가 있어 곡물이 썩지 않았다. 콜카에는 옥수수, 감자, 퀴노아, 말린 고기, 직물 등이 수년 분량씩 저장되었다. 흉작 시 이곳이 열렸다. 잉카는 기근을 국가 책임으로 여겼다. 한 지역에 수확이 실패하면 다른 지역의 콜카에서 식량이 이동했다. 이 이동도 카팍 냔을 통해서였다.
길은 제국의 혈관이자 신경이었다. 물류가 흘렀고, 정보가 움직였고, 군대가 이동했고, 기근이 구제되었고, 문화가 순환했다.
비교의 순간: 로마 제국이 자랑한 도로망은 약 80,000킬로미터였다. 잉카는 그 절반의 길이를 훨씬 험한 지형에서, 훨씬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길은 지금도 많은 부분이 사용되고 있다. 현대 페루 시골 마을의 농부들은 500년 된 잉카 도로를 일상적으로 걷는다. 아침에 시장 가는 길, 이웃 마을로 가는 길. 로마의 도로가 박물관 유적이 된 반면, 카팍 냔은 여전히 현역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장의 핵심 테제에 도달한다.
삭사이와만을 본 뒤 내가 품었던 질문 — "어떻게 95년 만에?" — 에 대한 답이 서서히 드러난다.
답은 기술의 발명이 아니다.
잉카가 특별히 새로운 기술을 발명했다는 증거는 없다. 거석 가공? 티와나쿠에서 물려받았다. 도로망? 와리에서 물려받았다. 관개 농업? 북부 해안 문명에서 물려받았다. 천체 관측? 수천 년의 안데스 전통에서 물려받았다.
잉카가 한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람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 장의 핵심 명제다. 잉카에게는 기술이 곧 사회 조직이었고, 사회 조직이 곧 기술이었다. 둘은 분리되지 않았다.
현대는 반대의 길을 갔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점점 더 많은 일을 기계에게 맡겨 왔다. 증기기관이 인간 근육을 대체했다. 컴퓨터가 인간 계산을 대체했다. 로봇이 공장 노동을 대체했다. 이제 생성형 AI가 인간 창작의 일부를 대체하려 한다.
이 궤적 안에서, 사람은 점점 대체 가능한 변수가 되었다. 경영학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사람이 자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자원은 기술이 발전하면 대체된다.
이 모델의 성과는 명백하다. 생산성이 수십 배 증가했다. 물질적 풍요가 유례없이 확산되었다. 평균 수명이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함께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한국은 5,000만 인구의 선진국이고, 세계 10위권 경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세대가 협력해 100년짜리 건축물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한다. 모든 공사는 공사 감리, 예산, 계약, 소송, 정권 교체로 중단되거나 변형된다. 개별 건물은 더 커지고 더 복잡해졌지만, 공동의 기념비를 세우는 능력은 사라졌다.
이것이 기술로 사람을 대체한 결과 중 하나다. 개별 능력은 증폭되었지만, 집단의 장기 지속성은 약해졌다.
잉카의 모델은 반대였다.
기술은 있었지만 단순했다. 청동기. 돌 도구. 통나무 굴림대. 밧줄. 이 수준의 기술로 100톤짜리 돌을 산 위로 올렸고, 200만 평방킬로미터 제국을 건설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사람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가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다.
첫째, 미타. 분산된 개별 노동력이 아니라, 순번제로 집결되는 집단 노동력. 그리고 그 집단 노동이 축제와 의식과 결합되어 자발성을 낳음.
둘째, 키푸와 차스키. 중앙과 지방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정보 체계. 이것이 없었다면 200만 평방킬로미터의 협력은 불가능했다.
셋째, 카팍 냔과 콜카. 물리적 이동과 자원 비축의 시스템. 기근이 올 때 다른 지역의 자원이 이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이 세 가지가 결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사회 기계를 만들었다. 금속 부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진 기계. 그리고 이 기계는 95년 동안 작동했다.
이 테제를 가장 잘 증언하는 것이 삭사이와만이다.
내가 이 장을 시작하며 던졌던 다섯 번째 질문 — "왜 95년 만에?" — 의 답은, 잉카 사회가 95년 동안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다. 관계가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증거는 돌 그 자체에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현장 관찰이 있다. 삭사이와만 성벽의 가장 큰 돌과 가장 작은 돌의 가공 기법이 동일하다는 사실이다.²⁶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인터넷에는 "선(先) 잉카 문명의 거인이 큰 돌을 쌓았고, 잉카는 위에 작은 돌을 얹었다"는 식의 유사과학 주장이 꽤 있다. 삭사이와만의 스케일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잉카가 한 게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관찰하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큰 돌이든 작은 돌이든 같은 다각형 맞물림 기법으로 깎여 있다. 모서리의 처리가 같다. 표면의 질감이 같다. 만약 다른 문명이 큰 돌을 먼저 쌓고 잉카가 나중에 작은 돌을 얹었다면, 두 기법 사이에 단절이 보여야 한다. 없다. 연속이다. 이것은 한 문명의 일관된 지적 전통의 표현이다.
인터넷 음모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잉카의 놀라움을 인정하는 대신 외계인이나 고대 거인을 끌어들이는 태도 자체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점이다. "원주민이 이 정도를 해낼 수 없다"는 전제. 이 전제는 이 책이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되짚을 오래된 태도다.
그러나 여기서 낭만화의 덫을 피해야 한다.
잉카 제국은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제국이었다. 제국은 팽창한다. 팽창은 정복을 의미한다. 정복은 저항을 만나고, 저항은 진압된다. 잉카가 제국이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족이 복속되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원한을 품었다.
카냐리족, 우앙카족, 치무족. 이들은 잉카의 팽창 과정에서 강제 편입된 세력이다. 이들의 원한이 50년 뒤 잉카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스페인이 168명의 병력으로 1,200만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원한들을 군사 동맹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1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잉카 제국 안에서도 불평등이 존재했다. 쿠스코의 잉카 귀족과 변방의 평민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미타에 참여하는 남자는 평민이었다. 귀족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보편적 체계가 아니라 계층적 체계였다.
그럼에도, 잉카가 보여준 것은 현대가 잃어버린 어떤 원리다. 사람의 조직 자체를 기술로 삼는 원리. 이 원리는 평민을 착취의 도구로만 쓰지 않았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포함시켰다. 그들이 건설한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어도, 자기 자신이 속한 세계의 것이었다.
그 차이가, 95년 동안 협력을 지속할 수 있게 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삭사이와만의 성벽 위로 그림자가 길어졌다.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의 햇빛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젖은 돌의 표면이 노을을 반사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세 겹의 성벽 윤곽이 더 깊어졌다. 마치 돌 자체가 호흡하는 것 같았다.
저 아래, 쿠스코 시내의 조명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아르마스 광장의 성당, 라 메르세드 수도원, 산토도밍고 수도원의 종탑. 이 모든 건물들이 삭사이와만의 돌로 지어진 것이다. 16세기 내내, 스페인 정복자들은 삭사이와만을 해체하며 자신들의 성당과 저택을 세웠다. 그들에게 삭사이와만은 유적이 아니라 자재였다.
나는 이 두 풍경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위쪽의 잉카 석벽, 아래쪽의 스페인 도시. 위쪽은 세운 자의 흔적이고, 아래쪽은 부순 자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연대기에 이름이 남은 것은 부순 자들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에르난도 피사로. 디에고 데 알마그로. 비센테 데 발베르데. 이 이름들은 역사책에 있다. 그들이 어떻게 잉카를 정복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자산을 얻었는지, 스페인으로 돌아가 어떤 작위를 받았는지, 우리는 세세하게 안다.
세운 자들의 이름은? 없다. 삭사이와만의 100톤 돌을 산 위로 올린 사람들, 그 돌을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깎은 사람들, 수십 년에 걸쳐 이 성벽을 쌓은 사람들. 그들 수만 명의 이름은 역사에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다. 익명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역사의 가장 잔인한 비대칭이다. 파괴는 기록되지만 창조는 잊힌다. 정복자는 승리를 기록으로 남기지만, 건설자는 완성만 남기고 자신은 지워진다.
이 책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뒤집어 보려 한다. 남은 돌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이름을 잃은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 이것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 부순 자들의 이야기에 숨겨진 어떤 깊은 경향을 진단하기 위해. 그 경향의 이름은 천천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 지금은 이 돌 앞이다.
세 시간의 침묵 끝에, 나는 성벽에서 일어났다. 입장권에 "달의 신전(Temple of the Moon)" 이 포함되어 있다고 읽었다. 삭사이와만 동쪽 능선 너머, 걸어서 한 시간쯤. 해가 지기 전에 가보자.
그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현지 가이드였다. 그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삭사이와만만 보고 가시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설명했다. 쿠스코 통합 입장권(Boleto Turístico) 에는 삭사이와만만 있는 것이 아니라 — 네 곳이 포함되어 있다. 삭사이와만, 켄코(Qenqo), 푸카푸카라(Puka Pukara), 탐보마차이(Tambomachay). 이 네 유적이 하나의 의식적 축을 이룬다고.
그의 안내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 그의 지식이 예상을 크게 넘었다. 현지 가이드라기보다 — 평생 이 돌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통찰. 반나절을 함께 돌아다닌 뒤, 우리는 다시 삭사이와만으로 돌아왔다. 내가 오전에 그저 감탄하며 지나친 구조물들 — 특히 의식용 수로, 세 겹 성벽의 미묘한 비대칭, 일부 돌의 천문학적 정렬 — 을 그가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같은 장소가 다시 새로워졌다.
헤어질 때 그가 물었다. "내일은 어디 가십니까?" "피삭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가 웃었다. "그럼 제 차로 함께 갑시다. 콜렉티보보다 낫습니다." 그렇게 — 다음 날의 여정이 정해졌다. 뜻밖의 동반자와 함께.
이 만남이 내 여행 전체를 바꿨다. 혼자 관광객으로서 유적을 훑는 것과 — 평생 이 돌들과 함께 산 사람의 눈을 빌려 보는 것은 — 다른 층위의 경험이다. 그리고 — 4장에서 이야기할 피삭 답사가, 이 우연한 만남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지금은 — 다시 돌 앞이다.
삭사이와만은 첫 질문을 남기고 내 여정에 길을 텄다. 95년 만에 어떻게? 그 답은 기술의 발명이 아니라 관계의 발명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발명은 단지 건축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농업에도, 천문학에도, 의학에도, 행정에도 적용되었다. 잉카 문명 전체가 하나의 관계적 원리로 짜여 있었다.
그 원리의 다른 얼굴들을 보러, 나는 내일 다시 걷기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는 쿠스코 남쪽의 모라이로, 혹은 북쪽의 오얀타이탐보로. 돌 너머에 있던 문명의 지적 정점을 찾아서.
하늘을 읽고, 땅을 조각하고, 몸을 치료했던 사람들.
다음 장에서 그들을 만난다.
¹ 삭사이와만 최대 석재의 무게는 연구자에 따라 120톤에서 200톤 사이로 추정된다. 본서에서는 보수적 중간값을 사용한다. Jean-Pierre Protzen, Inca Architecture and Construction at Ollantaytambo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p. 178-182.
² 삭사이와만의 구조와 규모에 관한 상세한 고고학적 기술은 Brian S. Bauer, Ancient Cuzco: Heartland of the Inka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4), 6장 참조.
³ 라마 위산과 허브를 이용한 석재 연화 전승은 페루 일부 지역에서 구전되어 왔다. 화학자 Ivan Watkins의 1983년 가설에서 태양광 집중과 식물성 산을 결합한 석재 가공법이 제안된 바 있다. 그러나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로 분류된다. Jean-Pierre Protzen, "Inca Quarrying and Stonecutting," Journal of the Society of Architectural Historians 44, no. 2 (1985): 161-182.
⁴ 삭사이와만의 해체 과정에 관하여는 John Hemming, The Conquest of the Incas (New York: Harcourt Brace, 1970), pp. 222-225; 그리고 페드로 피사로의 회고록 Relación del descubrimiento y conquista de los reinos del Perú (1571) 참조.
⁵ 잉카의 바퀴 미사용에 관한 논의는 Terence D'Altroy, The Incas, 2nd ed. (Malden, MA: Wiley-Blackwell, 2014), pp. 243-245. 잉카 아동 유적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이 출토된 바 있다.
⁶ Kenneth R. Wright and Alfredo Valencia Zegarra, Machu Picchu: A Civil Engineering Marvel (Reston, VA: ASCE Press, 2000), 3장.
⁷ Protzen (1985), 앞의 논문. Protzen은 실험 고고학 방법으로 청동 도구와 반복 시험을 통해 잉카식 석재 가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⁸ 파차쿠텍의 즉위 연도는 연구자에 따라 1438년 또는 1471년으로 추정된다. 본서에서는 대다수 학계의 견해인 1438년을 따른다. María Rostworowski, History of the Inca Realm, trans. Harry B. Icel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p. 24-30.
⁹ 잉카 제국 최대 영토에 관하여는 Gordon F. McEwan, The Incas: New Perspectives (Santa Barbara: ABC-CLIO, 2006), p. 93.
¹⁰ 인류 4대 독자적 문명 발상지 개념에 관하여는 Charles C. Mann, 1491: New Revelations of the Americas Before Columbus (New York: Knopf, 2005), 특히 3부 참조.
¹¹ 티와나쿠 문명에 관하여는 Alan L. Kolata, The Tiwanaku: Portrait of an Andean Civilization (Cambridge, MA: Blackwell, 1993).
¹² 와리 문명에 관하여는 William H. Isbell and Gordon F. McEwan eds., Huari Administrative Structure: Prehistoric Monumental Architecture and State Government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1991).
¹³ 미타 시스템에 관한 전반적 설명은 Rostworowski (1999), pp. 196-206.
¹⁴ 잉카 국가의 미타 참여자 지원에 관하여는 D'Altroy (2014), pp. 264-270.
¹⁵ 시에사 데 레온의 묘사는 의역이며, 원문은 Pedro Cieza de León, Crónica del Perú, Segunda Parte (1553), 18장 참조.
¹⁶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 (1609); Juan de Betanzos, Suma y Narración de los Incas (1551).
¹⁷ 키푸의 구조와 매듭 체계에 관하여는 Gary Urton, Signs of the Inka Khipu: Binary Coding in the Andean Knotted-String Records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3).
¹⁸ 위의 책, 특히 서장과 결론.
¹⁹ 위의 책.
²⁰ Manuel Medrano and Gary Urton, "Toward the Decipherment of a Set of Mid-Colonial Khipus from the Santa Valley, Coastal Peru," Ethnohistory 65, no. 1 (2018): 1-23.
²¹ 제3차 리마 공의회의 키푸 소각 결정에 관하여는 Sabine Hyland, The Quipu of Tupicocha: Political and Ritual Meanings in the Andes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6), 서장 참조.
²² 현존 키푸의 수에 관한 추정은 Urton의 Khipu Database Project (하버드 대학교)의 자료를 따랐다.
²³ 차스키 시스템에 관하여는 John Hyslop, The Inka Road System (New York: Academic Press, 1984), 특히 9장 참조.
²⁴ 카팍 냔의 규모 추정은 UNESCO 세계유산 등재 시 공동 제출된 자료를 따랐다.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Qhapaq Ñan, Andean Road System," https://whc.unesco.org/en/list/1459.
²⁵ 위의 자료.
²⁶ 삭사이와만 석재 가공 기법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는 Protzen (1985, 1993), 앞의 자료 참조. Protzen은 삭사이와만 세 성벽의 석재 가공 기법에 기술적 단절이 없음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