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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본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

팽창의 시대,
건강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 5부 17장 · 2026 —
여는 글

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보다

몇 해 전,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학회장에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암 학회 중 하나인 유럽종양학회. 하얀 가운을 벗고 정장을 차려입은 종양내과 의사 수천 명 사이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체육학과 교수였다. 그 방에서 내 명찰에 적힌 소속 한 줄은 늘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그 학회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이방인도 아니었다. 단상에 올라 발표를 하는 사람이었으나 그 학문의 식구는 아니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 경계에 서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함민복 시인의 시 한 편을 자주 떠올렸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 함민복, 「꽃」

경계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이 첫 줄을 가장 오래 생각했다. 왜 꽃은 하필 경계에서 피는가. 담장은 집의 안과 밖을 가르는 선이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선 위에서 피어 있는 국화를 보았다. 가르는 자리가 곧 피어나는 자리라는 것. 문득 나는, 내가 늘 그런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체육학자다. 평생 몸을 연구했다. 그런데 내가 일해 온 자리는 언제나 경계였다. 체육 분야에서 나는 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단아였고, 의학 분야에서 보기에 나는 체육과 교수였다. 체육과 의학 사이, 운동과 종양학 사이, 어느 쪽의 온전한 식구도 아닌 자리. 혹시 여러분도 그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해 외로웠던 자리, "나는 여기 사람인가, 저기 사람인가"를 자꾸 되묻게 되는 자리 말이다. 그 사이에 오래 서 있으면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경계는 단지 선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를 가장 많이 자라게 한 것은 안전한 안쪽에서 보낸 시간이 아니라, 늘 그 불안한 경계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이 글의 제목은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김주환 교수에게서 얻었다. 그는 명상을 경계에 서서 경계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안도 밖도 아닌 자리에 서서, 자기가 딛고 선 그 선을 바라보는 것.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내가 오래 서 있던 자리에 누군가 이름을 붙여 준 것 같았다.

다만 나는 그 뒤를 조금 다르게 걷는다. 그는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경계가 흐려지고 넓어져 끝내 나와 세계의 구별이 사라지는 데까지 간다고 말한다. 내가 본 것은 달랐다. 끝까지 가 본 사람에게 경계는 분명히 허물어진다. 그런데 허물어진 자리에 다음 경계가 다시 선다. 깨지고 넓어지고, 다시 깨지고 또 넓어진다. 몸이 그렇게 자라고 사람도 그렇게 자란다.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경계가 없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경계가 살아 있는 자리를 향해 간다.

이 책은 건강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건강을 몸 안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상 옆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건강은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난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는 막이라는 경계로 살아가고, 심장은 수축과 이완의 경계에서 뛰며, 숨은 들이쉼과 내쉼의 경계에서 생명을 잇는다. 건강이란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경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한 문장으로 모인다. 건강은 경계에서, 리듬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삶을 너무 빨리 채점한다. 성과가 있으면 성공, 없으면 실패. 통과하면 잘 산 해, 떨어지면 잘못 산 해. 여러분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편리한 이분법이지만, 삶을 너무 좁게 줄인다. 나는 우리 삶이 네 개의 자리를 천천히 지난다고 생각한다. 생존, 성공, 성장, 그리고 성숙. 생존은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건너는 일이고, 성공은 사회 속에 내 자리를 만드는 일이며, 성장은 안에서 자라나 내 경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리고 성숙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아는 일이다. 이것은 위로 오르는 사다리가 아니다. 무게중심이 바깥에서 안으로, 속도에서 리듬으로 천천히 옮겨 가는 이동에 가깝다. 그리고 성숙에는 자리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내가 얻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이다. 이 책은 결국 거기까지 간다.

그런데 이 이동에는 그림자가 하나 따라붙는다. 성장인 척하지만 성장이 아닌 것, 곧 팽창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시대는 이 그림자를 성장이라 부르며 떠받든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과사회라 불렀다. 예전에는 누군가 밖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눌렀다면,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명령처럼 되뇌며, 자유롭다고 믿는 채로 자기 자신을 태운다. 번아웃이 가장 성실한 사람의 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텅 비어 주저앉는다.

평생 운동과 건강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병이 가장 깊이 파고든 자리로 건강을 들고 싶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지고 싶어 한다. 측정하고 기록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몸을 좇는다. 그런데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고 물으면, 의외로 대답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건강이 또 하나의 성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충분함이 없으니 멈출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정작 건강에서 가장 멀리 있곤 한다. 정말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을 잊고 산다. 우리가 몸을 또렷이 의식하는 건 대개 어딘가 아플 때가 아니던가.

팽창과 성장은 겉으로 참 닮았다. 둘 다 커지니까. 그러나 나무가 자랄 때 안쪽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기는 것과, 풍선이 커지며 고무막이 얇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에 가장 약하다. 팽창의 가장 깊은 병은 회복을 죄악처럼 여기는 데 있다. 근육이 운동으로 찢기고 쉼으로 자라듯, 자라는 것은 애쓰는 동안이 아니라 쉬는 동안인데도 말이다. 들이쉬기만 하고 내쉴 줄 모르는 숨은,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터진다.

이 네 자리는 한 번 지나면 끝나는 계단이 아니다. 경계는 한 번 넘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달라진 나로 같은 경계를 다시 만나게 한다. 나선형이다. 중학교 시절 열등생으로 분류되어 느꼈던 그 열등감과, 오늘 연구비 심사에서 떨어지며 느끼는 감정은 놀랍게도 똑같다. "나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 물음 자체가 경계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아직 그 물음 앞에 서 있다는 건, 아직 우리가 길 위에 있다는 뜻이니까.

이 책은 그 경계를 따라가는 여정이고, 다섯 번의 걸음으로 되어 있다. 먼저 부풀기만 하는 이 시대를 진단하고(1부), 경계란 대체 무엇인지 읽는 눈을 얻는다(2부). 그다음 그 경계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리듬이 된다는 것을 배우고(3부), 그 리듬 위에서 새것이 태어나는 자리를 본다(4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얻은 경계를 다음 사람에게 어떻게 건네는지를 묻는다(5부). 진단에서 원리로, 원리에서 리듬으로, 리듬에서 생성으로, 생성에서 계승으로.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홀로 타 버리지 말고 관계 안에서 쉬기를, 그리고 다 자란 뒤에는 물려주기를 바라면서.

한 철학자가 이 시대의 병을 정확히 이름 지었다면, 나는 그 곁에서 몸의 언어로 답해 보고 싶다. 병상 옆에서, 건강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건강은 경계에서, 리듬으로 태어난다.

이 한 문장이 이 책의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이 문장을 풀어낸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경계를 넓히고 싶다. 다만 이제는 속도보다 정렬을, 성과보다 지속을, 증명보다 의미를 더 자주 묻는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멈춘다. 인디언들이 그랬다던가,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니 잠시 멈춰 영혼을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자, 이제 경계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함민복, 「꽃」(『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한병철, 『피로사회』 · 김주환의 경계 논의

제 1 부

진단 — 팽창을 성장으로 착각한 시대

부풀기는 자라기가 아니다

1 장

우쭈쭈 시대

부정성이 사라진 시대, 상처를 두려워하는 마음

요즘 캐나다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 석차를 발표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험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 번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한국도 점점 그쪽으로 가고 있다. 등수를 지우고, 기회를 늘리고,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쭈쭈는 아기를 어를 때 내는 소리다. 다 자란 사람에게도 그 소리를 내고 있는 시대라는 뜻으로, 나는 이 시대를 '우쭈쭈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게 아픈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다. 아무도 함부로 상처 주지 않으려 한다. 비판은 조심스러워지고, 소셜미디어에는 "너무 좋아요"가 넘친다. 겉으로 보면 이보다 따뜻한 세상이 없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긍정성이 과잉된 시대라 불렀다. 예전의 병이 억압과 금지, 곧 '아니오'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끝없는 '예스'에서 온다는 것이다. 우쭈쭈 시대는 바로 그 '예스'만 남은 세상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 아프게 하는 말, 곧 부정성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다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약해진다. 작은 비판에도 무너지고,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한다. 왜일까? 답은 뜻밖이다.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살아 있는 것은 적당한 상처를 통해 자란다. 근육은 미세하게 찢겨야 굵어지고, 면역은 균을 만나야 강해진다. 상처를 완전히 지운 세계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자랄 기회를 빼앗긴 무균실이다.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인 동시에, 상처를 두려워하는 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가 길러 내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치는 것이 무서워, 진짜로 자기를 걸지 않는다. 대신 부푼다. 여기서 이 책의 첫 번째 구별이 시작된다. 부푸는 것과 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라는 것은 안에서 채워지는 일이다. 나무가 자랄 때, 나무는 안쪽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다. 밀도가 높아지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부푸는 것은 밖으로 얇아지는 일이다. 풍선이 커질 때 고무막은 점점 얇아진다. 그리고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숲에서 폭풍에 먼저 쓰러지는 것도 작은 나무가 아니라, 속이 빈 채 키만 자란 큰 나무다.

자라남은 밀도를 얻고, 팽창은 밀도를 잃는다.

팽창과 성장의 비교 — 얇아지는 풍선과 나이테가 늘어나는 나무 단면
둘 다 커진다. 그러나 하나는 얇아지면서 커지고, 다른 하나는 두꺼워지면서 커진다.

이 구별을 심리학자 칼 융은 오래된 이미지 하나로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내보이는 사회적 얼굴을 '페르소나(persona)'—배우의 가면—라 불렀다. 가면은 나쁜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그 가면을 자기 자신이라 착각하고 거기에 자기를 부풀리면—융은 이것을 '팽창(inflation)'이라 불렀다—겉은 커 보여도 속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반대로 참된 성장은 가면(밖)이 아니라 자기(Self, 안)로 향한다. 흩어진 나를 안에서 통합해 단단해지는 것, 융이 평생 '개성화'라 부른 그 길이 바로 자라기다. 부풀기는 가면의 팽창이고, 자라기는 자기의 심화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부풀까? 자신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짜 실패가 무섭기 때문이다. 진짜 실패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전부를 걸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존재에 대한 판결. 그 판결이 두려워, 사람은 최선을 아껴 둔다. 심리학은 이것을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라 부른다. 시험 전날 일부러 공부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이다. 열심히 하고도 낮은 점수를 받으면 "나는 원래 이 정도"라는 판결이 남지만, 하지 않고 낮은 점수를 받으면 "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알리바이가 남는다. 하지 않은 최선은 실패할 수 없다. 그러나 하지 않은 최선은 성공할 수도 없다.

우쭈쭈 시대는 이 도피를 부추긴다. 아무도 "아니, 그건 부족해"라고 말해 주지 않으니, 사람은 자기 한계에 부딪힐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니체는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밀려드는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 '아니오'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은 검증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다만, 자라지 못할 뿐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이 부풀림을 정확히 가리키는 문장이 있다. "지식은 사람을 부풀리고, 사랑은 사람을 세운다(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고린도전서 8장 1절) 부풀리는 것과 세우는 것—팽창과 성장의 차이가 벌써 여기 있다.

힘에는 두 종류가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앞의 힘만 있고 뒤의 힘이 없으면, 우리는 밀려드는 모든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는 기계가 된다. 멈출 수 없고, 거절할 수 없고, 그래서 자라지도 못한다. 성숙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경계란 바로 그 힘이 사는 자리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아니오'를 세울 수 있는 작은 틈, 부정성의 공간 말이다. 우쭈쭈 시대가 지운 것이 바로 이 틈이고, 이 책이 되찾으려는 것도 바로 이 틈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에게도 그 두려움이 있다. 보스턴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시절, 죽음의 언덕이라 부르던 오르막이 있었다. 끙끙거리며 오르는데 앞에 바구니를 단 자전거를 탄 백발의 할머니가 나를 쌩하고 지나쳐 갔다.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나는 그분을 쫓았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가고 또 다른 언덕을 올라가며 이십 분을 쫓아가다가, 거의 잡았다 싶었는데 그분은 옆길로 빠져 다른 방향으로 가 버리셨다.

내가 이래도 체육 전공인데, 앞에 바구니를 달고 있는 할머니 자전거에 추월을 당하다니. 자존심 박살났다.— 2011년, 페이스북

그 자존심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이십 분을 쫓아간 것은 목적지가 급해서가 아니었다.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나와 겨루고 있지 않았다. 겨루고 있던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치지 않으려고 부푼다.

그런데 그날의 결말은 따로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예정보다 오 분이 일렀다. 그분을 쫓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평소보다 빨리 달렸던 것이다. 나를 창피하게 만든 사람이 나를 제시간에 데려다 놓았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 사람이, 그 상황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사람들. 자존심이 상하는 일과 나를 자라게 하는 일이 같은 얼굴로 온다는 것을, 나는 그 언덕에서 배웠다. 이 이야기는 6장에서 다시 하겠다.

그러니 이 책은 우쭈쭈 시대가 지워 버린 상처를 다시 초대하는 책이다. 다정함이 성장을 지우지 않도록, 아픔이 다시 자람의 자리가 되도록.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상처를 피하지 말고 통과하기를. 두려움은 감출 때가 아니라 마주할 때 비로소 작아지니까. 자,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이 장의 참고

칼 융, 페르소나·자기(Self)·개성화 개념 · Berglas & Jones(1978),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36(4):405–417 —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보는 법을 배운다") · 한병철, 『피로사회』 · 고린도전서 8장 1절

2 장

녹아버리거나, 굳어버리거나

경계가 사라진 시대의 두 얼굴

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그 동네는 이랬다.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서로 알고 지냈다. 누구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온 동네가 함께 울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제 일처럼 기뻐했다. 마당에 솥을 걸어 국수를 한 솥 가득 삶았고, 담이라고 해봐야 허리께에 오는 낮은 돌담이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낮은 담이 높은 벽돌담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혼밥, 혼술, "나 혼자 산다"가 자랑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여러분의 동네는 어떤가?

정말 자랑일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가 캐나다에 가 있던 어느 여름날, 나는 혼자 학창 시절 다니던 분식집에서 순두부를 먹고 나와 팥빙수가 당겨 근처 가게에 들어갔다. 종업원이 물었다. 숟가락은 몇 개 드릴까요.

난 두 개요, 라고 대답했다. 분명히 혼자 먹을 건데. 나는 혼자서 팥빙수를 먹는다는 것이 순간 창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2015년, 페이스북

쉰을 앞둔 남자가 팥빙수 한 그릇 앞에서 오지 않을 사람의 숟가락을 시켰다. 나는 그 숟가락을 왜 시켰을까. 그날 이어서 적은 글에 답이 있다.

괜히 혼자 밥을 먹는 게 왠지 내가 뭔가 잘못 산 결과 같은, 괜히 루저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나에게 많은 열등감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왕따 그리고 격리됨의 두려움인 것 같다.— 2015년, 페이스북

혼자라는 사실보다 혼자로 보이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시대는 혼자를 자랑이라 부르는데, 정작 우리는 혼자를 들킬까 봐 숟가락을 하나 더 시킨다. 이 어긋남 안에 오늘의 병이 있다.

그날 글의 마지막 줄은 이랬다. 이런 것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 수십 년 전 상처의 흔적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내 안에는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처받은 아이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쉰을 앞둔 남자가 팥빙수 앞에서 만난 것은 종업원이 아니라 그 아이였다.

나는 오늘의 많은 병이 바로 여기, 경계의 소멸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의 병은 옛날의 병과 결이 다르다. 예전의 병이 대개 무언가의 결핍—먹을 것, 위생, 자유의 결핍—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과잉에서 온다. 너무 많은 연결, 너무 많은 자극, 너무 많은 "할 수 있음"에서. 1장에서 본 긍정성의 과잉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밖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라, 안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긍정의 홍수다.

이 진단을 나는 얼마 전 가보르 마테와 직접 나눈 대담에서 더 선명하게 들었다. 2026년, 나는 동료 교수와 함께 그를 화상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테는 우리가 '정상(normal)'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뒤섞어 쓴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건강하고 자연스럽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다, 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을 건강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끝없는 경쟁도, 만성적인 수면 부족도, 도구가 되어 버린 관계도,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정상'으로 통하지만 결코 건강하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마테에게 병이란 개인의 고장이 아니라, 이 비정상이 정상 행세를 하는 독성 문화에 대한 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아무리 개인을 치료해도 그를 같은 환경으로 돌려보내면 병은 되돌아온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왜 아픈가"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 환경은 무엇인가"이다.

이 홍수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다. 바로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이다. 나는 얼마 전, 힘든 시간을 지나며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런데, 난 '힘들다'라고 인정하는 건 내가 실패한 거라는 생각을 한 걸까? … 힘들어도 힘든 걸 부정하고, 다른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고 밥맛 없는 소리만 해댔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난 괜찮아'라고 자기 암시를 넘어 자기 최면을 하고 있었는지도.— 2024년, 페이스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요가 되면,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할 자리마저 사라진다. 슬픔에도, 분노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밀려드는 것에 저항하고, 잠시 멈추고,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선을 긋는 힘—이 바로 경계를 세우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이 약해지면,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가지 병이 찾아온다. 뿌리는 하나다.

하나는 녹아버림이다. 경계가 무너져 모든 것이 서로에게 흘러든다. 밤늦도록 그치지 않는 알림, 퇴근이라는 선이 지워진 노동, 멈추지 못하는 손가락의 스크롤. 우리는 그것을 연결이라 부른다. 그러나 연결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연결이 아니라 침수다. 섬이 물에 잠기는 것은 섬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과 이어져 있으나, 정작 어느 것과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굳어버림이다. 녹아내림에 지친 사람은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담을 쌓고, 문을 닫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아무것과도 만나지 않는다. 냉소가 편해지고, 무감각이 안전해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갑옷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는 성(城)은, 밖의 적에게 함락되기 전에 안에서 먼저 말라 간다.

녹아버림도 병이고, 굳어버림도 병이다.

심리학자 칼 융도 같은 두 얼굴을 보았다. 사회적 가면 뒤에 자기를 가둬 딱딱해지는 것이 굳어버림이라면, 나와 너의 선이 흐려져 상대를 삼키고 자기 안에 잠기는 것—융이 나르시시즘이라 부른 것—이 녹아버림이다. 둘 다 살아 있는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먼 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 안에서 자주 교대한다. 온종일 모든 알림에 반응하며 자신을 흩뿌리다가(녹아버림), 저녁이 되면 아무도 만나기 싫어 방문을 닫는다(굳어버림). 과잉연결과 고립은 반대가 아니라,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 보이는 두 얼굴이다. 경계를 잃은 사람은 늘 너무 열려 있거나 너무 닫혀 있다.

이 뒤집힘을 짚은 더 날카로운 말이 있다. 과잉활동은 어느 순간 과잉수동성으로 급변한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사람이 어느 지점을 넘으면, 밀려드는 모든 자극에 저항 없이 복종하는 상태가 된다. 더 활동적인 것이 더 자유로운 것이라는 믿음은 그래서 환상이다.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가 고른 것은 하나도 없었던 날, 우리는 그것을 겪는다. 녹아버림과 굳어버림이 한 사람 안에서 교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둘 다 스스로 고르는 힘이 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치유의 방향은 분명하다. 더 많이 연결되는 것도, 더 단단히 닫는 것도 아니다. 잃어버린 경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열려 있으되 아무거나 들이지 않고, 닫혀 있으되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경계. 병이 경계의 소멸이라면, 치유는 경계의 회복이다. 그런데 그 살아 있는 경계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아주 뜻밖의 곳에서 배울 수 있다. 바로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 세포 하나에서.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가보르 마테, 『정상이라는 신화』 · 칼 융(페르소나·나르시시즘)

3 장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날숨 없는 들숨, 소진의 해부학

몇 해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적이 있다. 대단한 장면도 아니었다. 어떤 어른이 고등학생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었다. 아이고 많이 힘들었겠다, 맘고생이 심했지, 고생했어. 그 세 마디에 내가 왈칵 울었다. 나에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내 안에 위로 받고 싶은 내가 있나 보다.— 2022년, 페이스북

그때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강의를 했고 논문을 썼고 회의에 들어갔다.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안 어딘가에는 저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소진이라는 것이 그렇게 온다.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오지 않는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는 사람 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다가, 전혀 엉뚱한 데서 한 번에 드러난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병은 소진, 곧 번아웃이다. 여기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철학자 한병철의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해 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다 타 버린다. 예전에는 명령하는 주인이 있었다. 상사가, 규율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이루어도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그가 성과주체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자기를 부리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를 자유라고 착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 에렝베르는 이 시대의 지친 마음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라 불렀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그러지 못한 것이 온전히 자기 탓이 되어, 자기를 실현하려다 지쳐 무너진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짜 문제는 자기가 자기 이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댈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자면 에렝베르가 "자기가 되지 못해 아프다"고 했다면, 그는 "자기밖에 없어서 아프다"고 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라진 타자를 되찾는 쪽에 서 있다.

드라마를 보다 운 그날, 나는 글을 이렇게 맺었다.

우리는 힘이 들지만 다 힘든 티를 내고 살 수는 없다. 내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무 힘들 때는 괜찮은 척 할 필요 역시 없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이 나에게 새 힘이 되듯, 우리는 종종 타인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그게 사람 사는 것이니까.— 2022년, 페이스북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아무 이론도 읽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다 운 밤에 그냥 적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저 마지막 줄이 이 장의 답이다. 소진의 반대는 더 많은 휴식이 아니라 기댈 사람이다.

왜 끝이 없을까? 1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어 오르는 사람은 들이쉬기만 하려 한다. 성취를 쌓고, 크기를 부풀리고, 움켜쥔다. 그러나 날숨 없이 들숨만 반복하는 것—그것이 과호흡이고, 그것이 풍선의 팽창이다. 숨을 생각해 보라. 들이쉬기만 하면 죽는다. 내쉬어야 다시 들이쉴 수 있다. 생명은 채움과 비움의 교대다. 그런데 성과에 쫓기는 사람은 비우기를 거부한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아서.

채우기만 하는 것은 자라남이 아니라 터짐을 향한 팽창이다.

이 말을 삼천 년 전에 이미 한 사람들이 있다. 『주역』의 첫 괘인 건괘는 여섯 효가 모두 양인, 순수한 상승과 창조의 괘다. 그 여섯 자리가 용이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에 잠긴 용에서 시작해 점점 올라가다, 다섯째 자리에서 비룡재천, 곧 하늘을 나는 용이 되어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째 자리의 이름이 항룡유회다. 끝까지 올라간 용에게는 후회가 있다는 뜻이다.

절정과 추락 사이가 한 칸이다. 더 오를 데가 없어진 순간이 곧 떨어질 일만 남은 순간이라는 것을, 저 오래된 책은 괘의 맨 윗자리에 적어 두었다. 이 장의 제목을 다르게 쓰면 그것이 항룡유회다.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태극도를 떠올려 보아도 좋다. 검은 것이 가장 커진 자리에 이미 흰 점이 박혀 있고, 흰 것이 가장 커진 자리에 검은 점이 박혀 있다. 극에 이르면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점은 안전한 자리가 아니다. 정점은 방향이 바뀌는 자리다. 지혜란 비룡에서 멈출 줄 아는 것, 항룡이 되기 전에 물러설 줄 아는 것이다.

몸은 이 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다. 2004년, 심리학자 엘리사 에펠과 노벨상 수상자 엘리자베스 블랙번의 연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아픈 아이를 돌보며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린 어머니들의 세포에서, 염색체 끝을 보호하는 마디인 텔로미어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던 것이다(Epel et al., 2004). 쉬지 못한 시간만큼 세포가 실제로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운동생리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근육은 운동하는 동안 자라지 않는다. 근육은 쉬는 동안 자란다. 우리는 운동으로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회복으로 그것을 더 굵게 키운다. 회복을 생략한 훈련을 과훈련(overtraining)이라 하는데, 쉬지 않고 몰아붙인 몸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미묘한 구별이 하나 있다. 멈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진되어 주저앉는 멈춤과, 스스로 택해 숨을 고르는 멈춤. 앞의 것은 죽음이고, 뒤의 것은 생명이다. 앞의 멈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지만, 뒤의 멈춤은 다음을 잉태한다. 날숨이 다음 들숨을 부르듯이. 여기서 문학의 한 인물이 스쳐 간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침묵의 부동으로 스러진다. 흔히 그는 저항의 영웅으로 읽히지만, 나는 그를 소진의 초상으로 읽는다. 그의 멈춤은 주권적인 '아니오'가 아니라, 다 타 버린 자의 무력이다. 그는 새것을 낳지 못한 채 꺼진다.

쉬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여기 있다. 스스로 택하는 멈춤을 배우지 못했기에, 끝내 택하지 못한 멈춤—무너지는 정지—에 붙잡힌다. 그러니 이 책이 찾는 것은 뒤의 멈춤이다. 소진의 정지가 아니라, 새것을 낳는 날숨의 멈춤. 그렇다면 부푸는 대신 자라나게 하고, 무너지는 대신 회복하게 하는 경계란 대체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 하나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 몸의 지혜를 따라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Epel 외(2004), PNAS 101(49):17312–17315 — 만성 스트레스와 텔로미어 단축 · 알랭 에렝베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주역』 건괘 상구 항룡유회

제 2 부

원리 — 경계란 무엇인가

세포에서 배우는 살아 있는 막

4 장

살아 있는 막

세포는 경계로 산다

대학에서 처음 현미경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들여다보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세포의 '내용물'—핵이며 소기관이며—이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을 붙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싸며 안과 밖을 가르는 얇은 막. 만약 누가 나에게 "생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하겠다. 생명은 막(膜)이다.

이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다. 세포 주기를 조절하는 원리를 밝혀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생물학자 폴 너스(Paul Nurse)는,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에서 생물학의 위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로 다름 아닌 '세포'를 꼽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세포 안에 담긴 정교한 부품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바깥 세계로부터 갈라 주는 막이다. 막이 안과 밖을 나누어 하나의 구별된 내부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생명의 화학이 흩어지지 않고 조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명의 첫 조건은 복제도, 대사도 아니었다. 자기를 세계로부터 구별해 내는 경계, 곧 막이었다. 생명은 경계에서 시작된다.

세포를 세포이게 하는 것은 핵도, 유전자도 아니다. 그것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막이다. 막이 없으면 세포도 없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물에 풀린 화학물질일 뿐이다. 수리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은 살아 있는 모든 시스템이 '마르코프 블랭킷'이라 부르는 경계를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안은 밖을 감지하고(받음), 밖을 향해 행동한다(응답). 즉 산다는 것은 경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일이다. 막이 없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경계가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부터 말해 온 것—존재는 경계에서 태어난다—을, 생물학도 같은 말로 들려준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시 만드는 경계'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했다. 살아 있는 것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은 따로 있지 않고, 서로를 빚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경계 이전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경계에서, 세상과 주고받으며 매 순간 만들어진다. 경계는 이미 다 된 나를 두른 벽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자리다.

세포막의 위대함은 그것이 단순한 벽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벽은 모든 것을 막는다. 그러나 세포막은 고른다. 어떤 것은 들이고, 어떤 것은 내보내고, 어떤 것은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 산소와 영양은 받아들이고, 노폐물은 내보내며, 해로운 것은 거부한다. 이것을 선택적 투과라고 부른다. 막은 가르는 동시에 잇는다. 그래서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다.

이 문장을 그림 한 장으로 본 적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에셔의 판화인데, 검은 새들과 흰 새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검은 새에 시선을 맞추면 검은 새가 선명해지고 흰 새는 배경으로 물러난다. 흰 새를 보면 반대가 된다. 그런데 둘 다 언제나 거기 있다. 검은 새의 윤곽선을 만들어 주는 것이 흰 새의 몸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를 지우면 다른 하나도 함께 사라진다. 경계란 그런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제3의 물건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그어 주는 선이다.

이 한 문장 안에 2장에서 본 두 병의 처방이 모두 들어 있다. 막이 완전히 열려 아무거나 들이면—녹아버림—세포는 안팎의 구별을 잃고 죽는다. 막이 완전히 닫혀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면—굳어버림—세포는 굶어 죽는다. 건강한 세포는 늘 그 사이에 있다. 열려 있으되 분별하고, 닫혀 있으되 소통하는 막. 나는 히브리어의 오래된 두 단어를 떠올린다. 창세기에서 사람에게 맡겨진 두 소명, 아바드(섬김·경작함)와 샤마르(지킴·보존함)다. 놀랍게도 세포막이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받아들여 섬기고, 지켜서 보존하는 일. 경계를 지키는 것이 곧 사랑이고, 경계 없는 융합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경계의 세 상태 — 녹아버림, 살아 있는 막, 굳어버림
같은 병의 두 얼굴이 양쪽에 있고, 건강은 그 사이에 있다. 열려 있으되 분별하고, 닫혀 있으되 소통하는 막.

죽음이 무엇인지도 세포막이 가르쳐 준다. 세포가 죽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바로 막의 붕괴다.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고, 안의 것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밖의 것이 안으로 밀려든다. 경계의 소멸이 곧 죽음인 것이다. 2장에서 사회의 병으로 보았던 '녹아버림'을, 세포는 문자 그대로의 죽음으로 안다.

이 막은 세포에만 있지 않다. 우리 몸에는 층층이 경계가 있고, 그중 가장 넓은 것이 바로 장(腸)의 벽이다. 장 상피를 활짝 펼치면 테니스코트만 하다는 말을 나는 오래 들어 왔고, 부끄럽지만 그렇게 강의해 온 적도 있다. 그런데 2014년에 스웨덴 연구진이 정밀한 현미경 계측으로 다시 재어 보니 삼십에서 사십 제곱미터였다. 테니스코트가 아니라 배드민턴 코트의 절반쯤이다. 교과서에 오래 실려 있던 숫자가 열 배 가까이 부풀려져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원룸 한 채만 한 면적이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바깥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안과 밖이 맞닿는 가장 큰 최전선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지는 관은, 위상학적으로 보면 사실 몸의 '바깥'이다. 도넛의 구멍처럼, 우리 몸을 관통하는 외부인 것이다. 그러니 장벽은 나와 세계가 가장 크게 맞닿는 막, 곧 세포막의 거대한 신체적 확장이다.

그리고 이 장벽도 세포막과 똑같은 원리로 작동한다—선택적 투과다. 상피세포들 사이를 밀착연접(tight junction)이라는 이음매가 촘촘히 봉합하고 있어서, 영양소는 들이고 독소와 병원체는 막는다. 그런데 이 이음매가 헐거워지면 어떻게 될까? 원래 통과하면 안 되는 것들—채 소화되지 않은 단백질 조각, 세균 성분—이 혈류로 새어 들고, 몸은 이 침입자들에 반응해 만성적인 낮은 불씨의 염증을 켠다. 이것이 흔히 '장 누수'라 불리는, 장 투과성이 높아진 상태다. (대중적으로는 만병의 근원처럼 과장되기도 하지만, 장벽 기능과 투과성 자체는 엄연히 확립된 생리 현상이다.)

여기서 이 책의 명제가 몸속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장벽의 건강은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장에 사는 수십조 마리 미생물—곧 내 몸 안의 '타자'—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채소와 통곡물의 식이섬유를 먹으면, 장내 세균이 그것을 발효시켜 부티르산이라는 짧은사슬지방산을 만든다. 그런데 이 부티르산이 바로 대장 상피세포의 주된 먹이다. 부티르산이 넉넉해야 상피가 튼튼하고, 점액층이 두꺼워지고, 이음매가 단단하고, 염증이 가라앉는다. 반대로 섬유질을 안 먹으면 부티르산이 마르고, 굶주린 세균은 몸을 지키던 점액층을 대신 갉아먹어 경계를 허문다. 내가 타자(미생물)를 먹이면, 그 타자가 나의 경계를 지켜 준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이 관계야말로, 몸으로 실현된 상호내주다.

경계가 무너질 때 벌어지는 일도 의미심장하다. 장벽이 새어 자기와 비자기의 구별이 흐려지면, 면역계가 혼란에 빠져 급기야 자기 몸을 공격하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계가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지 못해 자기를 공격하는 것—말하자면 세포 차원의 나르시시즘이다. 앞 장들에서 마음의 병으로 본 '경계의 붕괴'가, 여기서는 면역의 병으로 나타난다. 물론 반대의 실패도 있다. 항생제를 남용하고 지나치게 무균으로 살아 미생물이라는 타자를 아예 박멸하면, 면역이 타자를 배우지 못해 오히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이 늘어난다. 경계를 지우는 것(융합)도, 경계를 벽으로 만드는 것(격리)도 병이다. 건강한 장은 그 사이—열려 있으되 분별하는 살아 있는 막이다.

이 원리는 뇌에서 가장 엄격하게 지켜진다. 뇌를 지키는 혈뇌장벽은 우리 몸에서 가장 선택적인 경계다. 뇌는 가장 지켜야 할 '안쪽'이니, 그 문지기도 가장 삼엄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경계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 장벽이 새어 염증 물질이 온몸을 돌면, 그것이 혈뇌장벽마저 헐겁게 하고, 뇌 안으로 염증이 번져 우울과 멍한 피로를 부른다. 이른바 장-뇌 축이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내가 주목해 온 뇌의 한 부위, 섬엽(insula)이 등장한다. 섬엽은 장과 내장에서 올라오는 몸속 신호를 '느낌'으로, 나아가 '나'라는 감각으로 번역하는 자리다. 그러니 몸의 경계가 무너지면, 그 무너짐이 섬엽을 통해 '내가 낯설다'는 자기의 흔들림으로 번역된다. 몸의 경계와 마음의 자기가 바로 여기서 만난다.

그런데 이 번역은 한 방향만이 아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염증이 나를 낯설게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벌어진 일도 몸의 경계를 바꾼다. 생쥐를 반복해서 사회적으로 패배시키면, 그 스트레스에 무너진 개체들의 뇌에서 혈관의 이음매를 봉합하던 단백질 하나가 줄어든다. 클라우딘-5라고 한다. 이음매가 헐거워지자 혈뇌장벽이 열리고, 그 틈으로 염증 신호가 들어가 우울한 행동이 나타났다. 눈여겨볼 것은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도 버텨 낸 개체들에게서는 그 감소가 없었다는 점이다. 무너진 쪽에서만 경계가 새었다. 그리고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의 뇌를 사후에 살펴보았을 때, 같은 자리에서 같은 단백질이 줄어 있었다. 관계에서 겪은 일이 내피세포의 이음매를 푸는 것이다. 그러니 몸의 경계와 마음의 경계는 위아래로 포개진 두 층이 아니다. 하나의 회로다.

여기서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세포막은 만질 수 있고 장 상피는 제곱미터로 잴 수 있지만, 마음의 경계는 대체 무엇으로 재느냐고. 나도 오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실험은 뜻밖에 단순하다. 한쪽 손을 가려 두고 그 옆에 고무손을 놓는다. 보이지 않는 진짜 손과 눈에 보이는 고무손을 붓으로 동시에 쓸어 준다. 몇십 초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저 고무손이 내 손 같다. 뒤이은 연구는 한 걸음 더 갔다. 그 고무손을 다치게 하는 시늉을 하자, 진짜 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손바닥에 땀이 배며 몸이 놀랐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을 자기로 삼은 몸이, 그 물건이 위협받자 진짜로 반응한 것이다.

내 몸의 경계가 몇십 초 만에 저쪽으로 옮겨 간 셈이다. 그러니 마음의 경계는 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재는 정도가 아니라 밀어서 옮길 수도 있다.

옮길 수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세포막에서 본 것을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갖다 붙이는 것이 그럴듯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말장난이 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층위가 다른 것들 사이에 같은 무늬가 반복될 때, 그것은 아래층이 위층을 만들어 냈다는 뜻도 아니고 둘이 그저 닮았다는 뜻도 아니다. 각 층위에는 그 층위에서만 나타나는 성질이 있고,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것이 자기를 유지하려면 어느 층위에서든 풀어야 하는 같은 문제가 있다. 안과 밖을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 일이다. 세포도 장기도 사람도 공동체도 그 문제를 푼다. 그래서 같은 무늬가 나온다. 이 책이 세포에서 시작해 관계로 올라가는 것은 은유의 사다리를 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제가 층마다 어떻게 풀리는지를 따라가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몸은 하나의 경계 지도다. 가장 안쪽 미토콘드리아의 막에서 시작해, 세포막, 혈뇌장벽, 장벽, 피부, 그리고 나와 남의 마음의 경계까지—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일을 한다.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고, 자기를 지키면서 세계와 주고받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경계를 한꺼번에 살리는 하나의 처방이 있다. 다름 아닌 운동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장내 미생물을 다양하게 하고 부티르산을 만드는 세균을 늘려 장벽을 튼튼하게 하고,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와 미주신경을 통해 혈뇌장벽과 신경염증을 다스리며, 미토콘드리아를 되살린다. 내가 평생 운동을 '약'이라 불러 온 까닭이 여기 있다. 운동은 미토콘드리아의 막부터 마음의 경계까지, 모든 층위의 경계를 동시에 살리는 개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속 수십조 개의 막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가장 구체적인 생명의 일이다. 나는 경계로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막이 건네는 지혜가 하나 더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폴 너스, 『생명이란 무엇인가』 · 칼 프리스턴(자유에너지 원리) · 마투라나·바렐라(자기생성) · M. C. 에셔, 「낮과 밤」(1938) · 창세기 2:15(아바드·샤마르) · Helander & Fändriks(2014), 소화관 표면적 재측정 · Botvinick & Cohen(1998), Nature 391:756 — 고무손 착각 · Armel & Ramachandran(2003),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270(1523):1499–1506 — 고무손을 위협했을 때의 피부전도반응 · Menard 외(2017), Nature Neuroscience 20(12):1752–1760 — 만성 사회패배 스트레스와 클라우딘-5, 혈뇌장벽 투과성

5 장

그 선은 누가 그었는가

경계는 실체가 없다

중학교 여름 보충수업 때였다. 학교가 학생들을 성적으로 갈라 반을 다시 짰다. 우반과 열반이었다. 나는 열반이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날의 기분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열이 받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나는 그 보충수업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은 시험지 몇 장이 그은 것이었다. 몇 점 차이였을 것이고, 어느 날 컨디션이었을 수도 있고, 애초에 그런 반을 만들기로 한 어느 회의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선을 그은 사람들도 아마 대단한 뜻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은 내 안으로 들어와 오래 살았다. 나는 열반에 배정된 아이가 아니라 열반인 아이가 되었다.

4장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막을 보았다. 세포를 세포이게 하는 그 막은 실제로 거기 있다. 만질 수 있고, 뚫리면 죽는다. 그런데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경계가 있다. 우반과 열반 사이의 선 같은 것이다. 그 선은 어디에도 없다. 운동장에 그어져 있지도 않고 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간 아이는 다른 사람이 된다.

어떤 경계는 실재하고, 어떤 경계는 합의될 뿐이다. 그리고 합의된 경계가 더 아프다.

이 구별을 가장 철저하게 밀고 간 사람이 이천 년쯤 전 인도에 있었다. 나가르주나, 한자로는 용수라 불린 이 사람이 쓴 책이 『중론』이다. 내가 이해한 한에서, 그가 말한 핵심은 이렇다. 무엇이든 그것만으로 홀로 성립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것이 된다. 길다는 것은 짧은 것이 있어야 성립하고, 안이라는 것은 밖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그 자체로 고유한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

경계에 이 말을 대 보면 이렇게 된다. 경계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우반이 있어야 열반이 있고, 멤버가 있어야 비멤버가 있다. 선 자체가 어딘가에 실물로 존재해서 나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나누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그 선이 있다.

이것은 힘 빠지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산은 옮길 수 없지만 합의는 다시 할 수 있다. 나를 가둔 그 선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누군가의 결정이었다면, 다른 결정도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서둘러 말하면 위험하다. 실체가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그 선 안에 갇혀 본 적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그 선을 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열반이라는 두 글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두 글자가 내 안에서 힘을 잃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실체가 없는 것이 사람을 이십 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무서운 부분이다.

열반이라는 두 글자에게 일어난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밖에 있었다. 교무실의 결정이었고 게시판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앉더니, 어느 순간 밖의 합의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앞에서 나는 열반에 배정된 아이가 아니라 열반인 아이가 되었다고 썼다. 그 '되었다'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합의가 자아가 되는 순간이 거기 있다.

그러니 자아의 경계는 실재하는 경계와 합의된 경계 사이에 낀 어정쩡한 제3의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합의된 경계가 안으로 들어와 실재가 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 사람을 이십 년 지배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때쯤 그것은 더 이상 합의가 아니라 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은 논박으로 벗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4장의 세포막을 다시 불러야겠다. 우리는 세포막이 만질 수 있는 물건이라서 실재하고, 자아의 경계는 만져지지 않으니 그보다 못한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말한 대로, 세포막도 원래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고, 우리가 그것을 막이라는 물건으로 부를 뿐이다. 나가르주나의 말과 다르지 않다. 경계는 물건이 아니라 관계다. 그렇다면 세포막과 자아의 경계는 재료가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만들어지는 속도가 다를 뿐이다. 세포막은 쉼 없이 새로 만들어져서 늘 그대로인 물건처럼 보이고, 자아의 경계는 너무 느리게 새로 만들어져서 바꿀 수 없는 바위처럼 보인다.

둘 다 실은 흐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느릴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경계를 갈라 보는 것이다. 첫째는 주어진 경계다. 세포막이 그렇고 장벽이 그렇다. 그것이 무너지면 융합이거나 죽음이다. 둘째는 합의된 경계다. 누가 안이고 누가 밖인지, 누가 멤버이고 누가 비멤버인지를 정한 선이다. 이것은 다시 그을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있다. 자란 경계다. 나와 너 사이의 선, 그리고 나 자신의 윤곽이 여기 속한다. 그것은 세포막처럼 주어지지도 않았고 명단처럼 밖에 걸려 있지도 않다. 밖에서 들어와 안에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셋은 다루는 법이 저마다 다르다. 주어진 경계는 지키는 것이고, 합의된 경계는 다시 긋는 것이며, 자란 경계는 지킬 수도 다시 그을 수도 없어 길러야 한다. 이것을 헷갈리면 잘못이 생긴다. 지켜야 할 막을 허물면서 자유롭다고 하거나, 다시 그을 수 있는 선 앞에서 이것이 내 운명이라고 하거나, 길러야 할 경계를 두고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다그치거나.

어릴 적의 나는 가운데 잘못을 저질렀다. 누군가 그은 선을 자연법칙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 선을 지우는 대신 그 선 아래에서 나를 미워했다.

선을 다시 긋는 일은 대개 조용히 일어난다. 어느 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처음으로 다른 대접을 받거나, 누군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거나 할 때다. 그때 알게 된다. 아, 저 선은 나를 따라오지 않는구나. 저 선은 저 학교 안에서만 있던 것이구나.

나에게 그 일은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역도부에 들어가 주장을 맡으면서 바닥이던 자존감이 조금 올라왔다. 그리고 체육을 전공할 수 있다는 것, 운동선수가 되지 않고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평생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적이 올랐다. 순서가 중요하다. 성적이 올라서 자신감이 생긴 것이 아니라, 다른 방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나서 성적이 올랐다.

그러니 누군가를 그은 선에서 꺼내는 방법은 그에게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선은 설득으로 지워지지 않고 다른 합의로만 바뀐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선이 사라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면 학회가 있고, 학회를 넘으면 또 다른 명단이 있다. 어느 학회의 회원 명단에서 내 이름이 거절되던 날의 이야기를, 나는 7장에서 하려 한다. 쉰이 넘어 받은 그 메일이 열네 살의 여름을 그대로 데려왔다. 선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앞에서 조금 덜 무너진다.

이 장의 참고

나가르주나(용수), 『중론』 — 연기와 무자성에 관한 이해 · 우열반 관련 회고는 저자의 페이스북 기록(2015) · 마투라나·바렐라(자기생성) — 4장 참조

6 장

죽이지 않는 것

호르메시스, 경계에서의 자극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운동을 하세요"라고 말하면, 많은 분이 놀란다. "이렇게 힘든데 몸을 더 힘들게 하라고요?" 충분히 그럴 만한 반응이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의 연구가 한결같이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적절한 운동은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고, 여러 암에서 재발과 사망 위험을 낮춘다. 2019년 미국스포츠의학회는 전문가들을 모아 "운동은 암 환자에게 안전하며 권장되어야 한다"고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몸에 스트레스를 주는 그 운동이, 어떻게 몸을 살릴까? 그 비밀이 오늘 이야기의 열쇠다.

운동생리학에는 호르메시스(hormesis)라는 개념이 있다. 소량의 스트레스가 오히려 유기체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원리다. 독(toxin)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 말은, 약간의 독이 면역을 깨우고 적응을 촉발한다는 역설을 품는다. 운동이 바로 그렇다. 운동은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심장에 부담을 주고, 세포를 산화 스트레스에 노출시킨다. 그런데 그 작은 손상에 몸이 반응하여, 이전보다 더 강하게 회복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자극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가 남긴 이 문장은, 사실 세포 생물학의 문장이기도 하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죽이지 않을 만큼이어야 한다. 너무 크면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파괴이고, 너무 없으면 그것은 안전이 아니라 쇠퇴다.

경계는 부딪히며 단단해진다. 시험받지 않은 경계는 경계가 아니다.

나 역시 그 '죽이지 않을 만큼'의 경계에서 자주 논다. 캐나다에서 밴프의 산을 오르던 날, 나는 케이블카를 두고 6킬로미터 산길을 걸어 올랐다.

3분의 2쯤 갔을까? 심박수가 165다.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거의 최대 심박수다. … 어질어질하다. … 정상에 올라가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황홀했다.— 2023년, 페이스북

어질어질할 만큼 심장을 몰아붙였지만, 죽지 않을 만큼이었기에 나는 더 튼튼해져 내려왔다. 무균실에서 자란 몸을 상상해 보라. 아무 균도 만나 본 적 없는 면역계는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하다. 적을 만나 본 적이 없기에, 진짜 적 앞에서 무너진다. 오늘날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나는 한 가지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깨끗한 세계에서, 경계를 시험받지 못한 채 자란다. 아이를 온실에서만 키우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1장에서 말한 우쭈쭈 시대가 바로 이 무균실이자 온실이다. 상처를 지운 다정함이, 우리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어려움이 우리를 자라게 한다는 이 원리를, 나는 몸에서 배웠다. 그런데 같은 것을 문명에서 본 사람이 있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다. 그는 문명도 '도전과 응전'으로 자란다고 보았다. 편안한 곳에서는 문명이 생기지 않고, 어려움을 만나 응답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도전에 알맞은 크기가 있다고 했다. 너무 작으면 아무 자극이 못 되고, 너무 크면 자극이 아니라 사람을 짓눌러 버린다. 내가 세포에서 본 호르메시스의 원리를, 그는 문명에서 다시 확인해 준 셈이다.

사실 내가 평생 재어 온 것이 바로 그 알맞은 크기다. 환자에게 운동을 얼마나, 얼마나 세게, 얼마나 자주 처방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 그것이고, 우리는 그 관계를 용량반응이라 부른다. 너무 적으면 듣지 않고 너무 많으면 해가 되며, 그 사이 어딘가에 몸을 바꾸는 구간이 있다. 토인비가 문명에서 그린 곡선과 우리가 운동처방에서 그리는 곡선은 같은 모양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문명의 흥망에서 보았고 나는 환자의 혈액검사지에서 볼 뿐이다.

이 알맞은 크기를 물고기 한 마리가 보여 준다. 코이라는 잉어는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이십 센티미터 남짓에서 자라기를 멈추고, 큰 강에 풀어 놓으면 일 미터까지 자란다고 흔히 이야기된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항을 벗어나 강으로 나가라는 말로 즐겨 쓴다. 그런데 나는 그 결론이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강물은 성장을 주지만 위험도 함께 준다. 급류가 있고 천적이 있다. 어항은 답답하지만 안전하다.

그러니 문제는 어항이냐 강이냐가 아니라 때다. 어린 물고기에게는 어항이 맞고 자란 물고기에게는 강이 맞다. 언제 머물고 언제 나갈지를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물고기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물고기는 강의 크기를 바꿀 수 없지만 사람은 견딜 힘을 만들 수 있다. 강물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물고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물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내모는 도전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도전을 가르는 것은 도전의 크기가 아니라 곁에 누가 있는가다.

자극의 크기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도 몸을 바꾼다. 심리학자 알리아 크럼은 한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가 도전을 이겨 내도록 돕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배운 집단은 긍정적 정서와 인지 유연성이 높아졌고, 면역과 근골격에 이로운 것으로 알려진 호르몬의 분비까지 늘었다. 스트레스는 무조건 나쁘니 피하라고 배운 집단에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자극인데 이름이 달랐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9장에서 한 사람이 같은 사십 년에 두 개의 이름을 붙이는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같은 연구자가 그전에 한 실험은 더 놀랍다. 호텔에서 객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이 하루 종일 하는 그 일이 곧 운동이라고 알려 주기만 했다. 일과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뒤 그들의 체중과 혈압이 의미 있게 낮아져 있었다. 같은 노동인데 이름이 바뀌자 몸이 다르게 반응한 것이다.

몸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재는 방법도 이 원리를 따른다. 최대산소섭취량은 사람이 쓰러지기 직전에 측정된다. 더 못 하겠다고 내려오기 바로 그 순간에 몸은 가장 많은 산소를 쓴다. 최대치는 언제나 실패 직전에 있다. 나는 연구비 신청에서 백 번 넘게 떨어졌고, 어떤 논문은 스무 번을 거절당하고 십일 년 만에 실렸다. 그 숫자가 자랑스러워서 적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까지 가 보지 않았다면 내 한계가 어디인지 나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겪어 봐서 알게 되었다는 이 말에는 이천오백 년 된 이름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파테이 마토스라 불렀다. 겪어서 배운다는 뜻이다. 아이스킬로스가 기원전 458년에 쓴 비극 『아가멤논』에 나오는데, 코러스가 제우스를 부르며 그분이 겪어서 배우는 일을 사람의 법으로 정해 두었다고 노래한다. 파토스는 겪는 것이고 마토스는 배우는 것이어서, 두 낱말은 뜻만이 아니라 소리까지 닮았다.

내가 오래 붙들린 것은 그 배움의 이름이었다. 원문이 겪은 사람에게 온다고 지목한 것은 강함이 아니다. 분별이다. 제정신을 차리는 일, 우리말로 하면 철이 드는 일에 가깝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겪은 자에게 오는 것을 힘이 아니라 선을 아는 감각이라고 보았다. 이 책이 내내 말해 온 바로 그 감각이다. 겪어 본 사람은 세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자기 자리인지를 알게 된다.

다만 아이스킬로스가 이 노래를 어디서 불렀는지 알고 나면 이 말을 함부로 쓰기 어려워진다. 그 노래는 위로의 자리에서 불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딸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 위에서 불렸다. 게다가 코러스는 소녀가 죽는 대목에 이르자 그다음은 보지도 않았고 말하지도 않겠다며 입을 다문다. 겪어서 배운다는 말은 그 침묵 바로 다음에 나온다. 설명이 되는 자리에서 흐뭇하게 꺼낸 말이 아니라, 설명이 불가능한 자리에서 겨우 꺼낸 말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말은 자기가 지나온 겪음을 두고 뒤늦게 할 수는 있어도, 지금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지나는 중인 사람에게 이것이 너를 자라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판정이 된다.

더 서늘한 것은 그다음이다. 코러스가 겪어서 배운다고 노래한 직후, 아가멤논은 딸을 죽인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 배치가 우연일 리 없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원리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것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거의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을 같은 호흡으로 보여 준다. 그러니 이 구절을 고난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뜻으로 읽을 때, 우리는 정확히 아가멤논의 자리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배움은 대체 누구에게 가는가. 그 물음은 12장에서 다시 꺼내겠다.

여기서 1장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부풀기만 하는 사람은 진짜 자극을 피한다. 실패라는 작은 독을 거부한다. 그래서 강해지지 못한다. 자극 없이 부풀기만 한 근육은 사실 근육이 아니라 부종(浮腫)이다. 겉보기엔 커 보여도 힘이 없다. 그러니 상처를 거부하는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거부다. 살아 있는 것은 경계에서 조금씩 다치고, 그 상처를 통해 자란다. 이 진실은 뒤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이것만 기억하자. 적당한 독은 약이다. 그리고 상처는, 경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장의 참고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176–183행(파테이 마토스)과 248–250행 — 삼부작 전체의 논지는 12장에서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도전과 응전) · Campbell 외(2019), Medicine & Science in Sports & Exercise 51(11):2375–2390 — ACSM 운동-암 라운드테이블 · Crum & Langer(2007), Psychological Science 18(2):165–171 — 호텔 객실 청소 노동자 · Crum, Salovey & Achor(2013), JPSP 104(4):716–733 — 스트레스 마인드셋 · 코이 사례는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

7 장

문지방의 시간

안도 밖도 아닌 자리

몇 해 전, 대학원생들과 유럽 암학회(ESMO)에 참석하려던 며칠 전, 학생들의 학회 멤버십 신청이 무더기로 거절당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체육' 전공이라는 것. 나는 그 학회의 초청 발표자였고 좌장이었는데도, 내가 낸 멤버 신청조차 "거절되었습니다(REJECT)"라는 답이 몇 시간 만에 돌아왔다. 속이 상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런 생각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냥 체육 분야에 있으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을 텐데. 그냥 내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 멤버 vs. 비멤버, 내부자 vs. 외부자.— 2023년, 페이스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 자리, 나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보면 나를 가장 많이 바꾼 것이 바로 그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왜 그럴까? 오늘은 '문지방'이라는 오래된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문지방은 문 아래 깔린 나무 판대기다. 안도 밖도 아닌, 그 얇은 나무 위에 서 있는 순간. 라틴어 리멘(limen)이 바로 이 문지방을 뜻하고, 여기서 리미널(liminal)이라는 말이 태어났다. 인류학자 아르놀트 반 헤네프는 통과의례가 세 단계—분리, 전이, 통합—를 거친다고 보았고, 빅터 터너는 그 가운데 '전이'의 단계에 주목했다.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의례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이상한 시간이 있다. 더 이상 소년도 아니고 아직 어른도 아닌 시간. 이름도, 지위도, 소속도 잠시 벗겨진 채 문지방 위에 서 있는 시간이다. 터너는 바로 이 리미널한 상태에서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옛것을 벗고 새것을 입는 일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태어난다.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내 공식 호칭은 '방문자(visitor)'였다. 하버드의 도서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하버드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그 시절은 참 외로웠다. 소속이 없다는 것은 나를 받쳐 줄 벽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나는 두 세계를 잇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체육과 의학 사이에 서 있었기에, 운동을 암 병동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어정쩡함은 나이가 든다고 끝나지 않는다. 몇 해 전 부산에서 열린 대장항문학회에서 발표 책자를 넘겨보다가, 나는 오랜만에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참가자 명단에서 내 소속만 유난히 쌩뚱맞았다. 외과 의사들 사이에 체육 전공자 하나. 그런데 그날 내가 발표한 것은 대장암 수술을 받은 환자가 정해진 운동을 하면 퇴원이 하루 이틀 당겨지고 입원 기간에도 다리 근력이 오히려 좋아진다는 결과였다. 걷기만 많이 한 환자에게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혼자서는 그 결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외과의 언어와 운동생리학의 언어를 둘 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만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문지방은 건널 수도 있다. 보스턴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내가 있던 당뇨센터에서는 매주 외부 강사를 초청해 특강이 열렸다. 뒷자리에 앉아 하버드 의대 교수들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여러 해가 지나 어느 여름, 나는 한창 꿈에 관한 책에 꽂혀 있었다. 학생들에게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데 도전하자고 이메일까지 보내 놓은 참이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서 그 센터의 교수를 우연히 마주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불쑥 말했다. 와서 특강 한번 하시죠. 나는 얼떨결에 그러지 뭐, 하고 헤어졌다.

한 달쯤 뒤에 정말로 연락이 왔다. 그것도 조그만 모임이 아니라 한 학기에 여덟 번뿐인 그 시리즈 중 하나였다. 뒷자리에서 올려다보던 바로 그 자리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시 메일을 보내며 잔뜩 허풍을 떨었다. 거 봐라, 꿈꾸고 도전하면 실제 현실이 되는 거야.

그날 그 방에서 나는 두 사람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꿈꾸던 사람과 앞에 서 있는 사람. 문지방을 건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방에서의 내 자리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건너 본 사람은, 다음 문지방 앞에서 조금 덜 무서워한다.

문지방에 선 사람의 쓸모가 여기 있다. 그는 어느 쪽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래서 통역을 할 수 있다. 양쪽 방의 말을 다 서툴게 하는 사람이 두 방을 잇는다.

이 쓸모가 개인의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얼마 전 한 강연에서 확인했다. 유체역학을 전공한 민태기는 윌리엄 허셜을 꺼냈다. 교과서는 그를 천왕성을 발견한 천문학자로 적는다. 그런데 그는 교향곡을 스물네 편 쓴 음악가였고, 과학자들의 모임에 음악가로 초대받아 갔다가 망원경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보다가 새 행성을 찾았다.

음악가라는 이야기는 한 줄도 안 나오죠. 천왕성을 발견한 사람 윌리엄 허셜은 음악가였습니다.— 민태기, 「문과도 이과도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2024

허셜은 천문학의 식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배우는 자리에 앉았고,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굳이 하지 않던 일—망원경을 자기 손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가 새것을 본 것은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방의 식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그 방에 들여보낸 것은 천문학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나는 여기서 순서가 뒤집히는 것을 본다. 우리는 안쪽에서 인정받아야 비로소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에게는 반대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안쪽에 있지 않고 경계에 있었다. 명찰 한 줄을 늘 설명해야 했던 그 자리가, 실은 문 앞이었다.

사실 모든 탄생은 문지방을 지난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산도(産道)라는 좁은 경계를 지나는 일이고, 씨앗이 싹트는 것도 껍질이 터지는 경계의 사건이다. 문지방은 불편하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그 불편을 건너뛰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 있다면, 그 불안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자리가 바로 무언가 태어나려는 자리일지 모른다. 문지방을 견디는 힘—그것이 다음 장에서 만날 건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장의 참고

아르놀트 반 헤네프, 『통과의례』 · 빅터 터너, 『의례의 과정』 · 민태기, 강연 「문과도 이과도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언더스탠딩, 2024)

8 장

건강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병인론에서 건강생성론으로

한 의료사회학자가 여성들의 갱년기 적응을 연구하다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사실 하나와 마주쳤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 가운데 일부가,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도 놀랄 만큼 건강하게,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론 안토노프스키다. 당시의 의학은 "왜 사람들이 병드는가"에는 능숙하게 답했다. 그러나 이 소수는 그 질문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무너져야 마땅한 조건에서, 대체 무엇이 이들을 살게 했을까?

의학의 역사는 대부분 하나의 질문 위에 세워졌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 병인론(pathogenesis)이다. 원인을 찾고, 제거하고, 병을 고친다. 세균을 발견해 항생제를 만들고, 유전자 변이를 찾아 표적 치료를 개발한다. 이 패러다임이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는 질문을 뒤집었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건강을 낳는가. 그는 이것을 살루토제네시스(salutogenesis, 건강생성론)라 불렀다. 건강과 온전함을 뜻하는 라틴어 살루스와, 기원을 뜻하는 그리스어 게네시스를 합친 말이다.

그의 유명한 비유가 '강의 흐름'이다. 기존 의학은 강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사람을 하류에서 건져 올린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안토노프스키는 묻는다. 왜 이 사람들은 강물에 빠질까? 그리고 더 중요하게, 어떻게 하면 이들이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할까? 건강은 강에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강 속에서 헤엄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건강은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트레스 속에서도 헤엄치는 힘이다.

나는 이 관점을 평생 몸으로 살아왔다. 운동종양학이라는 내 분야가 바로 이 논리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 환자에게서 병만 없애려 하지 않는다. 병과 더불어, 병 이후에도 살아갈 몸의 힘—헤엄치는 능력—을 길러 주려 한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능력을 통합감(sense of coherence)이라 불렀다. 세상이 이해 가능하고(comprehensibility), 감당 가능하며(manageability), 의미 있다고(meaningfulness) 느끼는 감각이다. 여기서 안토노프스키의 통찰이 앞 장들과 만난다. 그가 말하는 건강은 무균의 안전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것이 그의 전제다. 호르메시스가 말한 것과 같고, 문지방의 불안을 통과하는 힘과 같다.

이 질문의 전환은 건강의 정의 자체를 바꾼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에 건강을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문장이었다. 질병이 없는 것만으로는 건강이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이 정의에는 치명적인 말이 하나 들어 있다. 완전한 상태라는 말이다. 그 기준대로라면 평생 건강한 사람은 지구에 거의 없다. 몸은 늘 흔들리고, 관계는 늘 삐걱거리고, 마음은 늘 오르내린다. 건강을 상태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 대부분은 환자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가야 한다. 건강을 이렇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건강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오늘 우리는 건강을 새로운 우상으로 떠받든다. 삶이 의미와 이야기를 잃고 벌거벗은 생존으로 쪼그라들면, 남는 것이 오직 '건강한 몸'이라는 목표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가 통합감의 세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은 것이 바로 유의미성—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오히려 병이 된다. 무엇을 위한 건강인지, 누구와 함께하는 건강인지를 잃으면, 건강 관리마저 또 하나의 성과가 되어 우리를 갉아먹는다.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고 일하고 의미를 살아 낼 수 있게 해 주는 바탕이다. 여는 글에서 물었듯,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답이 있을 때에만, 건강은 비로소 건강이 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마슬로가 사람의 바람 가운데 맨 위에 둔 것도 이 방향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실현'이라 불렀다.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삶에서, 자기 안의 가능성을 피워내는 삶으로 무게가 옮겨가는 것. 안토노프스키의 의미와 마슬로의 자기실현은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건강은 모자람을 메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의미를 향해 자라날 때 온전해진다.

이것을 나는 보스턴에서 배웠다. 처음 그곳에 갈 때 내 마음은 분명했다. 세계적인 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그 결과를 이름난 학술지에 실어 내 이름을 알리는 것. 솔직히 말하면 그 일 년의 목표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내가 실제로 한 일 가운데 지금도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논문이 아니었다. 암을 지나온 분들의 운동 프로그램에서 보조원 노릇을 한 일이다. 강사도 아니고 연구책임자도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학부 실습생에게 맡겼을 일이었다. 그 일 년이 끝나 갈 무렵 함께 운동을 가르치던 운동처방사 낸시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 분 가까이 소리 내어 울었다. 왜 울었는지 나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중 몇 분은 그 뒤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알게 된 구별이 하나 있다. 멋진 일과 중요한 일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멋진 일을 좇는다. 눈에 띄고 이름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체로 멋지지 않은 일이다. 곁에 있어 주는 일, 운동 기구를 옮겨 주는 일, 이름이 남지 않는 일. 그 뒤로 나는 연구를 고를 때 이 질문을 먼저 한다. 이것은 멋진 일인가, 중요한 일인가.

다만 나는 그의 통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통합감을 개인의 내면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개인 안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통합감은 진공에서 생기지 않는다. 안전한 애착, 믿을 수 있는 사람,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서 자라난다. 병상 옆에서 20여 년을 보내며 나는 그것을 거듭 보았다. 곁에 사람이 있는 환자가 더 오래, 더 잘 견딘다.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라, 경계에서 함께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4부에서 다시 이어진다. 우선은 이것만 붙들자. 건강은 병의 부재가 아니라, 경계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 '매 순간'이란 무엇일까? 경계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리듬이 된다. 이제 3부로 넘어가 보자.

이 장의 참고

세계보건기구 건강 정의(1948) · 아론 안토노프스키(살루토제네시스) · 에이브러햄 마슬로(자기실현) · 한병철, 『피로사회』

제 3 부

리듬 — 경계는 시간이 되어 리듬친다

나아감과 물러섬, 들숨과 날숨

9 장

나아감과 물러섬

심장은 쉬며 뛴다

쉰 살이 되던 해, 나는 문득 활시위가 최대로 당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활을 쏘려면 뒤로 당겨야 한다. 시위를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호흡을 멈추고, 겨냥하고, 놓는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당기는 시간은 길다. 그리고 당기는 시간이 날아가는 거리를 결정한다.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나는 열두 통이 넘는 거절 편지를 연달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인생이 뒤로만 후퇴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그 후퇴가 사실은 활시위가 당겨지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전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몸이 이 진실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 주는 곳이 있다. 바로 심장이다.

경계를 공간에서 보면 막이지만, 시간에서 보면 리듬이다. 경계란 결국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일이고, 오감은 시간 속에서 리듬이 되기 때문이다. 심장을 보라. 심장은 뛰기만 하지 않는다. 수축하고, 이완한다. 짜내고, 풀어 준다. 나아가고, 물러선다. 만약 심장이 이완을 잊고 수축만 계속한다면—그것이 경직이고, 그것이 죽음이다. 심장은 쉼으로써 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건강한 심장은 일정하게 뛰지 않는다. 심장 박동 사이의 간격은 미세하게 늘 변한다. 이것을 심박변이도(HRV)라 부르는데, 이 변이가 클수록 건강하다. 반대로 박동 간격이 기계처럼 똑같아지는 것은 몸이 경직되고 위태롭다는 신호다. 실제로 낮은 심박변이도는 심장질환과 사망 위험을 예고하는 지표로 쓰인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심전도는 하나의 직선을 향해 간다. 완벽하게 규칙적인 리듬은 리듬이 아니라 정지다.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리듬친다.

생리학에는 이 사실을 가리키는 이름이 따로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몸이 항상성, 곧 정해진 값을 지키려 애쓴다고 배웠다. 체온은 36.5도, 혈당은 얼마. 그러나 지금은 알로스타시스라는 말을 쓴다. 변화를 통해 안정을 얻는다는 뜻이다. 건강한 몸은 값을 고정하는 몸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값을 옮길 줄 아는 몸이다. 달릴 때는 심장을 올리고 잘 때는 내린다. 그 폭이 넓을수록 건강하다. 고정하려는 몸이 아니라 옮길 줄 아는 몸. 이것이 이 책이 리듬이라 부르는 것의 학술적인 이름이다.

이 리듬을 지휘하는 것이 미주신경(vagus nerve)이다. 미주신경은 몸의 브레이크다. 흥분한 몸을 가라앉히고, 심장을 늦추고, 소화와 회복을 켠다. 나아가기만 하던 몸을 물러서게 하는 신경이다. 신경과학자 스티븐 포지스의 이론에 따르면, 이 미주신경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누군가와 따뜻하게 연결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심리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의 연구는 여기서 놀라운 선순환을 발견했다. 따뜻한 관계는 미주신경의 힘을 키우고, 튼튼해진 미주신경은 다시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물러섬의 능력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를 받쳐 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다. 리듬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과 맞닿아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건강이란 나아감과 물러섬의 리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큰일을 이루는 사람도, 문명도 똑같은 리듬으로 자란다고 보았고, 그것을 물러남과 복귀라 불렀다. 큰 것을 이루는 사람은 세상 한복판에서 곧장 이기지 않는다. 일단 물러나—광야로, 고독으로—안에서 바뀐 뒤, 새 힘으로 돌아와 세상을 바꾼다. 심리학자 융이 개성화라 부른 내면의 여정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나를 오래 붙든 것은 그가 이 리듬에 붙인 이름이었다. 토인비는 문명의 성장을 설명하면서 중국철학의 음양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陰은 쉼이고 물이며, 陽은 활동이고 불이다. 그리고 그는 문명의 발생을 우주를 관통하는 리드미컬한 맥동의 한 박자라고 불렀다.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가 인류 문명 전체를 설명할 언어를 찾다가, 결국 주나라 사람들이 쓰던 두 글자에 도달한 것이다.

서로를 몰랐던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도착했다.

덧붙여 둘 것이 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개념은 토인비의 것이다. 다만 나는 오래전 캐나다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며, 그의 통찰을 한 문장으로 벼려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다이내믹이라 불러 왔다. 그 명사형은 그의 원문에서 찾지 못했으니 내 말로 남겨 둔다. 개념은 그의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불러 온 것은 나다.

같은 자리에 도착한 사람이 또 있다. 『주역』은 이 리듬을 성숙의 정의로 삼는다. 순수한 상승과 창조를 뜻하는 건괘의 마지막 자리에 항룡유회, 곧 끝까지 올라간 용에게는 후회가 있다는 말이 붙어 있다. 그 풀이가 이렇다. 나아감을 알되 물러남을 모르고, 존속을 알되 소멸을 모른다. 그것이 끝까지 오른 자의 병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나아감과 물러남, 존속과 소멸을 다 알면서도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오직 그런 사람이 성인이다.

성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한다. 더 많이 나아갈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설지를 아는 것이다. 주역은 그것을 때에 맞음이라 불렀다. 같은 행동도 때에 맞으면 길하고 때에 어긋나면 흉하다. 나아감이 언제나 옳은 것도, 물러섬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다.

앞에서 나는 물러난다는 말을 광야라고 썼다. 그 광야에 이름을 하나 붙이고 싶다.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는 마흔에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달아나, 자기 양도 아닌 장인의 양을 치며 다시 마흔 해를 보냈다. 그 광야에서 첫아들을 낳고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다.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를 낳고 엘리에셀이라 지었다. 나를 건져 내셨다는 뜻이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광야였고 여전히 남의 양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마흔 해에 두 개의 이름이 붙었다.

순서가 중요하다. 게르솜이 먼저였다. 나그네라는 정직한 이름을 먼저 붙인 사람만이 나중에 다른 이름에 도달한다. 처음부터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재해석이 아니라 회피이고, 그것이 1장에서 말한 우쭈쭈다. 걸림돌을 걸림돌이라 부르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이 디딤돌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장을 닫으며 하나만 더 적는다. 물러섬을 견디는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더 자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도전 앞에서 그 말은 잔인하다. 나아감이 양의 성공이라면 물러섬에도 그 나름의 성공이 있다. 겨울을 난 나무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하게 서서 봄을 기다린 그 겨울은 나무의 실패가 아니라 지혜였다.

그 겨울에 주역이 붙인 이름이 복(復)이다. 괘의 모양이 곧 뜻이다. 위로 다섯 개의 음이 어둡게 눌러앉아 있고, 맨 아래에서 하나의 양이 막 돋는다. 위는 땅이고 아래는 우레이니, 언 땅 밑에서 봄의 첫 진동이 시작되는 자리다. 주역은 이 자리를 두고 되돌아옴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했다. 천지의 마음이 절정에 있지 않고 바닥에 있다는 말이다.

복괘 도형 — 다섯 개의 음효 아래 하나의 양효
복괘(復卦). 위는 땅 곤(坤), 아래는 우레 진(震). 다섯 음 아래 맨 밑에서 하나의 양이 돋는다.

양이 하나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섯이 아니라 하나다. 그러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회복의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주역은 그 하나에 칠일래복, 이레면 되돌아온다는 말을 붙였다. 되돌아옴이 애써 얻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리듬의 성질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성장이 성공이고, 때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주역은 되돌아옴을 한 덩어리로 말하지 않았다. 여섯 자리로 나누어 놓았다. 돌아온다는 한 가지 일에도 저마다 다른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맨 아래 초구는 불원복, 멀리 가기 전에 얼른 돌아오는 것이다. 크게 길하다고 했다. 그 위 육이는 휴복, 먼저 돌아온 사람에게 기대어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육삼은 빈복, 자주 넘어지고 자주 돌아오는 것이다. 위태롭다고 하면서도 허물은 없다고 했다. 넘어진 횟수를 센 것이 아니라 돌아온 횟수를 센 것이다. 육사는 독복, 다섯 음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홀로 돌아오는 것이다. 함께 가던 무리에서 혼자 방향을 트는 자리다. 육오는 돈복, 두텁고 묵직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맨 위 상육이 미복이다. 돌아올 때를 놓친 것이다. 여섯 자리 가운데 유일하게 흉하다는 말이 붙었고, 그 뒤로 경고가 길게 이어진다. 재앙이 있고, 이 상태로 군사를 일으키면 끝내 크게 패하며, 그 여파가 임금에게까지 미쳐 십 년이 지나도록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했다. 주역이 한 자리를 두고 이렇게까지 길게 말한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흉한 것은 물러선 일이 아니었다. 물러설 때를 놓친 일이었다.

여섯 가운데 아름답다는 말을 받은 자리가 휴복이라는 사실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쉴 휴(休) 자가 되돌아옴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게다가 그 풀이는 아름다움의 이유를 아래에 있는 어진 이에게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홀로 돌아오는 것보다 기대어 돌아오는 것을 더 높이 쳤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뒤에서 다시 만난다.

부풀기만 하던 삶의 병에 이제 이름이 하나 더 붙는다. 미복이다.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삶, 수축만 하고 이완하지 못하는 심장이다. 그 리듬은 하나의 직선을 향해 굳어 간다. 그를 살리는 길은 더 세게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쉬며 뛰는 법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쉼의 비밀을, 다음 장에서 우리는 숨 한 번에서 찾는다.

이 장의 참고

알로스타시스 — Sterling & Eyer(1988), McEwen(1998) NEJM 338(3):171–179 · 스티븐 포지스, 다미주신경 이론(2011) · Kok 외(2013), Psychological Science 24(7):1123–1132 — 따뜻한 관계와 미주신경 긴장도의 상승 나선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 음양 리듬 제1권 201쪽, 우주적 맥동 제1권 205쪽 · 『주역』 건괘 「문언전」, 복괘(地雷復) 괘사·「단전」(復其見天地之心)·육효 효사(不遠復·休復·頻復·獨復·敦復·迷復)와 육이 「상전」(以下仁也) · 출애굽기 2:22, 18:3–4

10 장

내쉼에서 태어나는 것들

息, 호흡이라는 글자

지친 어느 밤, 나는 그저 숨 한 번을 길게 내쉬어 본 적이 있다. 특별한 명상법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날숨 뒤에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사실 여기에는 과학이 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면 앞 장에서 만난 미주신경이 켜지고, 심장이 느려지며, 몸이 이제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는다. 우리는 하루에 수만 번을 숨 쉬면서도, 정작 그 숨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은 그 숨에 관한 한 글자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쉴 식(息)이다.

息은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다. 그런데 自는 본래 코의 상형이다. 그래서 息의 첫 뜻은 숨이다. 코 아래에서 마음이 오르내리는 것. 숨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매 순간 완결되면서 동시에 완결이 필요 없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이 시대가 완결을 빼앗긴 시대라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 지표를 채우면 다음 지표. 끝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숨은 다르다. 날숨 하나하나가 이것으로 됐다의 반복이다.

여기에 息의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자식(子息), 불어남, 생겨남. 이자(利息)의 息이 그것이다. 원금이 숨 쉬듯 스스로 불어나는 것. 사람에게 오면 자식(子息)이 된다. 그런데 왜 숨(息)과 자식(息)이 같은 글자일까? 우연이 아니다.

불어남은 움켜쥠이 아니라 내어줌에서 온다.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 것을 내어주는 일이다. 부모가 자기 몸과 시간을 덜어내어 다음 생명이 태어난다. 씨앗은 자기를 터뜨려 싹을 낸다. 이자조차 원금을 움켜쥐면 불어나지 않는다. 빌려주어야, 내보내야 불어난다. 息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불어남은 들숨이 아니라 날숨의 원리를 따른다고. 이것이 부풀기만 하는 삶에 대한 완벽한 반증이다. 움켜쥐면 커진다는 믿음과 정반대로, 진짜 자라남은 내쉼에서, 비움에서, 덜어냄에서 온다.

그런데 자식을 낳는 것만 내어주는 일이 아니다. 보내는 것도 그렇다. 2022년 여름, 둘째 아들이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공항에서 돌아오던 날 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자 걱정과 근심의 원천인 기현이. 이제 한국에서의 삶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네요. Less worry and anger. But significantly less joy and happiness.— 2022년, 페이스북

걱정과 화는 줄었다. 그런데 기쁨이 확연히 줄었다. 이것이 부모가 치르는 정확한 셈이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걱정도 기쁨도 함께 있고, 아이를 보내면 걱정도 기쁨도 함께 줄어든다. 둘 중 하나만 가져갈 수는 없다. 내가 그날 배운 것은 사랑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효율을 따진다면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息이라는 글자가 숨과 자식을 한 몸에 담은 것은 옳다. 숨도 자식도, 붙들면 상하고 내보내야 산다. 폐 안에 공기를 오래 담아 두면 그것은 저장이 아니라 질식이다.

이렇게 보면 내쉼은 일종의 작은 죽음이다. 우리는 날숨마다 방금 붙들었던 공기를 놓아 보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작은 죽음이 있어야 다음 숨이 들어온다. 성경은 사람의 시작을 이렇게 그린다.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사람이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히브리어로 그 숨은 네샤마, 숨이자 곧 영이다. 息이라는 글자가 코(自) 아래에 마음(心)을 둔 것처럼, 숨은 몸과 영이 만나는 자리에서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 숨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불어넣어진 것, 곧 빌린 것이었다. 우리는 평생 그 빌린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어느 날 마지막 날숨과 함께 그것을 온전히 돌려드린다. 우리말이 죽음을 숨을 거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정확하다. 삶이란 결국, 빌린 숨을 잘 쉬다가 잘 돌려드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息은 두 얼굴을 한 몸에 품는다. 한쪽은 그침이다. 숨을 거두다, 불이 꺼지다(熄). 다른 쪽은 낳음이다. 자식, 생식(生息). 한 글자 안에 멈춤과 생명이 함께 있다. 이것이 심오하다. 멈추는 것이 곧 낳는 것이다.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오듯, 종결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부풀다 터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다. 한 번의 긴 날숨이다.

그리고 이 두 얼굴이 온전히 만나는 자리에, 다음 글자가 우리를 기다린다. 安息이다.

이 장의 참고

창세기 2:7(네샤마) · 息·熄·子息·利息 자원 풀이 · Gerritsen & Band(2018), Frontiers in Human Neuroscience 12:397 — 느린 날숨과 미주신경 활성

11 장

멈추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休·安·息, 그리고 창조의 완성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가 점점 약해지신다. 이제 워커가 없으면 걷기 힘드시고, 손자의 이름도 잊으셨다. 논어를 다 외우시던 분인데. 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이런 글을 적었다.

누군가 그런다. 우리도 아빠와 엄마이지만, 우리도 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존재라고. 그런데 그 아빠와 엄마는 점점 약해지고, 힘들어지고… 참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2024년, 페이스북

같은 무렵, 아버지와 목욕탕에 다녀온 날에도 적어 둔 것이 있다. 두 문단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사람의 자리가 어떻게 옮겨 가는지가 보인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녔다.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가 오래 버티는 아버지는 초인이었다. 나를 앉혀 놓고 등을 밀어 주시고, 목욕이 끝나면 짜장면을 사 주셨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닌다. 도움 없이는 탕에서 나올 수 없는 아버지를 앉혀 놓고 발의 각질을 제거해 드린다. 목욕이 끝나면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 드린다. 목욕탕 가는 날은 기쁜데 슬픈 날이다.— 2023년, 페이스북

같은 목욕탕, 같은 짜장면, 같은 두 사람이다. 바뀐 것은 누가 누구를 앉혀 놓는가 하나뿐이다. 나는 그 글을 쓰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였다. 아무리 강한 어른도 기댈 품이 필요하고, 평생 기대게 해 주던 사람도 언젠가 기댈 곳을 찾는다. 그 자리를 우리 조상들은 세 글자에 새겨 두었다.

먼저 쉴 휴(休)를 보자. 休는 사람(亻)과 나무(木)가 합쳐진 글자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다. 여기 첫 번째 답이 있다. 쉼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休 안의 사람은 혼자 웅크린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것—나무—에 자기를 맡기고 있다. 나무는 성과를 내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어 준다. 성과에 쫓기는 사람이 잃어버린 바로 그 존재가 休의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를 조금 멀리서 보면, 그저 한 그루 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의 한가운데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고 상상했다. 뿌리는 땅속 깊이 내리고 가지는 하늘에 닿아,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 북유럽인은 그것을 위그드라실이라 불렀고, 신라의 금관은 그 나무를 머리에 얹은 형상이었으며, 에덴의 한가운데에도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를 우주목(宇宙木)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주목이 선 자리가 언제나 경계라는 점이다. 땅과 하늘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사람이 참으로 쉬는 자리는 바로 그 경계의 나무 아래다.

다음은 편안할 안(安)이다. 갓머리(宀, 지붕)와 여자 여(女)가 합쳐진 글자, 지붕 아래 사람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安의 편안함은 성취에서 오지 않는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음에서 온다. 그러니 끝없이 바깥으로 부푸는 사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병명은 정확히 불안(不安), 곧 安이 없음이다. 이제 두 글자가 만난다. 安息. 安은 제자리에 깃들어 자리 잡음, 곧 공간의 안정이다. 息은 내쉬며 그치고 그 비움에서 새로 태어남, 곧 시간의 리듬이다. 安息은 제자리에 깃들어(安) 숨을 내려놓는 것(息)이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여기서 창조의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경에서 신은 엿새를 만들고 이렛날에 安息한다. 히브리어 샤바트(shabbat)는 그치다, 멈추다라는 뜻이다. 놀랍지 않은가. 창조의 마지막이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치는 것이라니. 안식일이 있어야 창조가 완성된다. 노동이 아니라 멈춤이 창조를 매듭짓는다. 우리는 쉼을 창조의 중단으로 여기지만, 창세기는 정반대로 말한다. 쉼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이라고. 신조차 息하심으로 이것으로 됐다를 선언했는데,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그 息을 거부하기에 영원히 됐다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安息에는 가장 깊은 층이 하나 더 있다. 동아시아에서 安息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이 安息하소서. 息에 숨을 거둔다는 뜻이 있으니, 安息은 숨을 온전히 내려놓음, 곧 죽음과 맞닿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앞 장에서 보았듯 息은 그침과 낳음을 한 몸에 품는다. 安息의 죽음도 그러하다.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자리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요한복음 12장 24절). 씨앗은 땅에 묻혀(安, 자리 잡아) 자기를 그쳐야(息) 비로소 새싹을 낸다. 安息은 바로 그 씨앗의 자리다.

그래서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실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매일 밤 잠드는 것은 작은 죽음의 연습이고, 매 순간의 날숨은 그보다 더 작은 연습이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쉼이 아니라 죽음이다. 멈추면 사라질 것 같은 그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살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가 오늘을 산다는 오랜 지혜가, 安息이라는 두 글자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잘 쉬는 법이 곧 잘 죽는 법이고, 잘 죽는 법이 곧 잘 사는 법이다.

그러니 다음 물음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기대어 쉴 수 있을까? 그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목욕탕에서 아버지를 앉혀 놓던 그날처럼, 기대던 사람이 기댈 곳이 되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4부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창세기 2:2–3(이렛날의 그침)과 출애굽기 20:8–11(안식일) · 요한복음 12:24 · 休·安·息 자원 풀이 · 미르체아 엘리아데, 『성과 속』(1957) — 우주목과 세계의 축(axis mundi)

제 4 부

생성 —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

상처, 관계, 그리고 성숙

12 장

상처 입은 치유자

경계의 신학

2015년 봄, 보스턴에서 자전거로 출근하다 크게 넘어졌다. 언덕을 내려와 코너를 돌며 멈춰 선 차 옆으로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난 자전거를 던지고 몸을 날렸고, 나의 왼 엉덩이는 기찻길을 때리고, 나의 몸은 굴러 나의 얼굴로 기찻길에 착지. 혀로 느껴진 깨진 앞니, 뱉은 침과 섞인 핏물. 헬멧에 보호된 나의 머리, 살이 열린 나의 어깨, 쑥 들어간 나의 앞니. 앰뷸런스를 부르는 사람, 휴지를 가져다주는 사람, 차를 열고 바라보는 아이, 쓰러져 버린 나의 자전거.— 2015년, 페이스북

그날 나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무언가를 적었다.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고, 아니 영혼이 더 또렷해졌다고 썼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나왔다.

넘어짐은 순간이다. 그게 나의 진짜 모습이다. 넘어질 수도 있는 나의 모습이 진짜다. 넘어진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넘어진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으켜 줄 수밖에는….— 2015년, 페이스북

피가 흐르는 자리에서 쓴 문장이라 그런지, 나는 그 뒤로 이 말을 취소하지 못했다. 넘어져 본 사람만이 넘어진 사람 곁에 앉을 수 있다.

여러 해 뒤, 나는 연세대학교 채플 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오래된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만점에 2.63이던 성적, 발표만 하려 하면 두근거리던 가슴, 외모와 낮은 자존감. 어릴 적에는 간염 보균자라는 이유로 식판을 따로 써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상처들을 꺼내 놓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강당이 조용해지고, 몇몇 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성취가 아니라 내 상처가, 그들에게 가닿은 것이다.

왜 감춘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가 사람을 살릴까? 얼마 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나는 그 답의 한 자락을 몸으로 배웠다. 상주에서 아들의 혼주까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씩씩해야 했다. 그런데 그 억누름의 대가가 있었다.

슬픈 감정을 부인하고 억누르다 보니 모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몸에서 오는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2025년, 페이스북

정신의학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감당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고 말한다. 감정을 닫아 버리면, 몸은 그 닫힘을 앓는다. 상처를 감추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몸을 병들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상처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열어야 하는 무엇이다.

가보르 마테는 이 단절을 더 깊은 곳에서 짚는다. 그와의 대담에서 가장 오래 남은 말이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감정을 닫는 것은 곧 나의 몸과, 나 자신과 끊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를 감추는 사람은 남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이 된다. 치유가 상처를 여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열림은 곧 나 자신과 다시 이어지는 일이니까.

나는 이것을 몸으로 오래 겪었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9년 여름, 수상스키 훈련 중에 보트가 터지는 사고로 몸의 삼십 퍼센트에 화상을 입고 한 달을 입원했다.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그런데 몸이 나은 뒤가 더 길었다. 흉터를 남들이 볼까 봐 나는 삼 년 동안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여름마다 긴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나는 상처를 감추는 일이 상처보다 오래간다는 것을 배웠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생각은 근대의 발명이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09년에 올린 「필록테테스」가 이미 그 이야기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로 가는 길에 뱀에 물려 낫지 않는 상처를 얻는다. 상처에서 나는 악취와 그가 지르는 비명을 견디지 못한 그리스군은 그를 렘노스라는 섬에 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십 년 뒤, 그가 가진 헤라클레스의 활이 없으면 트로이를 이길 수 없다는 신탁이 내려온다. 버린 자들이 데리러 돌아온다.

이 극에서 내가 오래 붙든 것이 둘이다. 하나는 상처와 활이 같은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것이다. 냄새가 나서 내다 버린 그 사람 없이는 이길 수 없다. 공동체가 견디지 못해 밀어낸 것과 공동체가 끝내 필요로 하는 것이 한 몸이다. 다른 하나는 그 상처가 언제 낫는가다. 섬에서는 십 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신탁은 그가 트로이에 도착해서야, 곧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을 때 낫는다고 말한다. 혼자 있는 동안 아물지 않던 것이 무리 안으로 돌아가자 아문다.

그리고 이 극에서 정작 배우는 사람은 필록테테스가 아니다. 그를 데리러 간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속여서 활을 빼앗아 오라는 지시를 받고 간다. 그런데 곁에서 그의 발작을 지켜보다가 부끄러워져 활을 돌려준다. 십 년을 앓은 사람이 아니라 그를 속이러 온 젊은이가 달라진다. 이 어긋남이 이 장의 뒷부분에서 다시 문제가 된다.

네덜란드의 사제이자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로 붙잡았다.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이 자기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닿는다. 나는 동료인 이지선 교수를 떠올린다. 대학생 시절 음주운전 사고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고 수십 번의 수술을 견뎌 낸 그는, 지금 학생을 가르치며 수많은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건넨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사고와 만났고, 그리고 성공적으로 헤어졌다고. 우리가 2003년에 처음 만나 이십 년이 넘도록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로 남은 것은, 아마 우리 둘 다 같은 자리를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상처가 닫히지 않고 열려, 타인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나우웬에게서 배우기 전에 다른 자리에서 먼저 만났다. 2013년 여름, 한 학기 수업과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런 문장을 적어 두었다. 사랑은 자기를 상처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영어의 vulnerable은 깨어지기 쉽다, 상처받기 쉽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크기를 재는 자도 달라진다.

사랑의 척도는,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얼마나 상처받을 수 있는가이다.

그때 내가 적어 둔 목록은 뜻밖에 사소했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전화를 끊기 전에 먼저 그 말을 해 주는 것, 먼저 자기 약점을 고백하는 것, 먼저 안아 주는 것, 먼저 주는 것. 전부 먼저였다. 사랑이 위험한 일인 이유가 여기 있다. 먼저 내민 손은 언제나 거절당할 수 있고, 먼저 내민 사람이 언제나 더 많이 다친다.

같은 무렵 나는 취약함의 힘에 관한 브레네 브라운의 강연을 보다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온전한 사람이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대목에서였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옮겨 적었다. 온전한 사람은 자기 약점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꺼이 열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사람이다.

여기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것은 상처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술이 아니다. 상처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자기를 세워 두는 일이고, 그 일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다. 그날 내 글은 밀알 이야기에서 끝났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11장에서 그 구절은 멈춤의 이야기였다. 여기서는 사랑의 이야기가 된다. 그 사람을 위해 땅에 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이 그날 내가 나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상처 없는 사람은 닫힌 성(城)이다.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한다.

왜 그럴까? 상처란 나의 표면이 뚫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매끈한 껍질로 닫혀 있던 내가, 그 자리에서 열린다.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열린 자리로만 타인이 들어올 수 있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나갈 수 있다. 상처는 곧 경계다. 안의 나와 밖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 6장의 호르메시스를 기억하는가.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몸을 강하게 했다. 여기서 그 원리는 관계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사람을 치유자로 만든다. 6장에서 겪어서 배운다는 말의 끝이 자기 분별이었다면, 여기서 그 분별은 남에게 건너간다. 같은 자리를 지나 본 사람만이, 남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아본다. 우쭈쭈 시대는 상처를 감추고 괜찮은 척하라고 가르치지만, 감춘 상처는 결코 통로가 되지 못한다.

다만 상처가 저절로 통로가 되지는 않는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했다. 그 순간을 겪는 경험 자아와, 그 경험에 이야기를 붙이는 기억 자아다. 군대에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이 제대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군대 이야기만 하는 것은, 그가 그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같은 고통이라도 이름 붙이지 못한 고통은 흉터로만 남고, 이름을 얻은 고통은 통로가 된다. 9장에서 모세가 같은 사십 년에 두 번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그런데 여기에 정직하지 못한 구석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 상처가 통로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든 상처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실패한 사람은 대개 그냥 부서지고, 아픈 사람은 대개 그냥 아프다.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고통이 훨씬 많다. 6장에서 남겨 둔 물음이 이것이었다. 아가멤논은 겪고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은 누구에게 가는가.

아이스킬로스는 그 답을 삼부작 전체로 풀어 놓았다. 아가멤논은 십 년 뒤 돌아와 아내에게 죽고, 아내는 아들에게 죽는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배신자가 없다. 아가멤논은 동생을 위해 원정을 일으켰고, 아내는 딸을 위해 남편을 죽였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죽였다. 저마다 지킬 사람이 있었고 모두 그 의무에 충실했다. 부딪히는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선과 선이다.

그래서 이 순환은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정당함을 근거로는 멈출 수 없고, 더 옳은 사람을 데려와도 그는 자기 몫의 정당함을 들고 회로 안으로 들어올 뿐이다. 삼부작이 화해나 용서가 아니라 아테네에 세워진 재판정에서 끝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릴 자리를 회로 바깥에 만드는 것. 그러니 겪어서 배운다는 말은 애초에 한 사람의 성장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공동체가 배우는 방식에 관한 말이었다.

배움은 순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오지 않았다. 아가멤논도 그의 아내도 그의 아들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지혜는 그 순환을 바깥에서 지켜본 사람들, 기원전 458년 봄 아테네의 극장에 앉아 있던 관객에게 왔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진다.

잔인하게 들리지만 이쪽이 정직하다. 당신의 실패가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라는 약속은 자주 거짓이다. 그러나 검증할 수 있는 다른 문장이 있다. 말해진 고통은 누군가에게 도달한다는 것, 이야기가 된 실패는 그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장이 없다. 내가 채플에서 성적과 식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회복하지 못했지만, 듣던 사람 몇은 울었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부작의 마지막에서 아들은 끝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후회하지도 않고 자기 행위를 다시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무죄가 된다. 판결을 내리는 것은 그 회로 안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은 자, 유일하게 바깥에 서 있던 자다. 그리고 그는 판정에서 그치지 않고 복수의 여신들을 자비의 여신들로 바꾸어 놓는다. 밖에서 배운 자가 회로 자체의 성질을 바꾼 것이다.

그러니 방향은 이렇게 완성된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지며, 그 배움이 다시 안으로 돌아와 값을 치른 사람을 건진다. 내 이야기가 나를 지나 누군가에게 닿았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 내가 끝내 보지 못한 것을 대신 보고 돌아올 수 있다. 나는 내 실패의 뜻을 모른 채로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프리모 레비를 떠올린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 평생을 증언에 바친 사람인데,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 생존자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완전한 증인은 바닥까지 가라앉은 자들인데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말할 수 없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 말할 뿐이다.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진다는 말이 결코 흐뭇한 문장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장 깊이 겪은 사람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다. 우리가 듣는 모든 증언은 덜 겪은 사람의 것이다.

다만 두 가지를 잊으면 이것은 곧바로 위선이 된다. 하나, 돌아온 사람이 잃은 것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이피게네이아는 끝까지 죽어 있다. 회로를 끊는 일과 값을 갚는 일은 다르다. 이 둘을 섞는 순간 우리는 고난을 사후에 정당화하는 장부로 미끄러진다. 둘, 밖에서 배운 사람은 값을 치르지 않고 배운 사람이다. 그가 구원자 자리에 서면 가장 쉽게 시혜자가 되고, 그러면 순환은 끊어지는 대신 위계로 모양만 바꾼다. 그가 돌아갈 자격을 얻는 근거는 그가 더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빚졌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상처를 부끄러워했다. 더 많은 성취로 그것을 덮으려 했다. 부풀기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은 덮은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였다. 암 환자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두려움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무너져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치유자는 경계에 서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라는 경계를 닫지 않고 열어 두어, 그 자리로 타인의 아픔이 드나들게 하는 사람. 그렇게 열린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태어날까? 그것이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 · 에드먼드 윌슨, 『상처와 활』(1941) · 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 브레네 브라운, 「취약함의 힘」(TEDxHouston, 2010) · 요한복음 12:24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13, 2015, 2025) · 아이스킬로스,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 「아가멤논」의 파테이 마토스와 「자비로운 여신들」의 아레이오스 파고스 재판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가보르 마테, 『정상이라는 신화』(2022) — 트라우마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로부터의 단절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2011) —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

13 장

관계 안에서 쉬다

상호내주라는 오래된 지혜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평생 무엇을 좇아왔는지가 선명해진다. 나는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인정을 늘 간구하던 나. 새로운 성취를 이룰 때 아버지에게 하던 자랑질. 그때마다 늘 기뻐하시던 아버지. 돌아보면 내 성취의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고 기뻐해 줄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쉬지 못하는 사람의 병은 바로 여기서 온다.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스스로의 주인이 된 대가로, 우리는 인정해 주는 이도 함께 잃었다. 생각해 보면 만족이란 본질적으로 인정이고, 인정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상은 상이 아니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다. 부풀기의 비극이 여기 있다.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려는, 원리상 불가능한 시도에 갇혀, 아무리 이루어도 됐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는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기댈 나무를 찾고, 함께 숨 쉴 사람을 찾는 것.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캐나다 유학 시절 이야기다.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집에서 교회까지 버스로 한 시간이고 첫차를 타도 시간에 댈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다섯 시에 집을 나와 정류장에 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나님이 내가 새벽기도에 가기를 원하신다면 저 차 중 하나가 나를 태워 주겠지.

아무도 서지 않았다. 손을 들면 될 일이었지만 창피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십 분쯤 서 있는데 마음에 한 문장이 들려왔다.

용관아, 네가 진정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싶다면, 왜 너의 손을 들어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니?— 2016년, 페이스북

나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지 않아도 차가 알아서 서 주기를, 창피를 무릅쓰지 않고도 도움이 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손을 들었다. 세 번째 차가 섰다. 그 사람은 내가 말한 환승소가 아니라 교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의 새벽기도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休가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이라면, 기대지 못하는 병의 이름이 바로 그 십 분이다. 우리는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손을 들지 못해서 혼자인 경우가 많다.

반대편에는 먼저 알아보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후배 기주를 나는 1990년에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03년 보스턴의 한국 식품점에서, 다시 2011년 찰스강가 맥도날드에서 그를 만났다. 두 번 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불렀다. 용관이 형. 낯선 땅에 막 도착해 정신없던 우리 가족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의 아내 덕분이었다. 자전거 사고로 앞니가 부러졌던 날, 토요일이라 열지 않는 병원을 열어 내 이를 치료해 준 사람도 그의 아내였다. 손을 드는 쪽과 먼저 부르는 쪽. 관계는 그 두 동작으로 완성된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두 가지 관계를 구별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 나-그것에서 상대는 이용하고 분석하는 대상이다. 나-너에서 상대는 온전한 현존으로 마주 서는 존재다. 부버는 나-너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고 했다. 사이(das Zwischen)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와 너가 살아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다. 나는 관계 이전에 있지 않다. 나는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몸도 이 진실을 안다. 우리 몸에는 관계의 분자라 불릴 만한 호르몬이 있다. 옥시토신이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안고, 신뢰할 때 옥시토신이 오른다. 2005년에 나온 유명한 실험이 있다.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한 사람이 낯선 상대에게 더 많은 돈을 맡겼다는 연구다. 한동안 이 결과는 신뢰의 호르몬이라는 별명의 근거로 널리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 결과는 뒤이은 재현 시험을 잘 통과하지 못했다. 2015년의 한 비판적 검토는 재현에 실패한 연구 여섯 편을 모아 놓았고, 2020년의 대규모 사전등록 재현 연구도 효과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을 이 책에 그대로 적어 두려 한다. 오래 옥시토신을 이야기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좋아하는 결과일수록 흔들린 뒤에 남는 것만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패한 재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것이 나온다. 원래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투약 뒤 오 분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재현 연구들은 대개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는 조건이었다. 2020년 연구도 사람 사이의 접촉이 최소인 조건에서 효과가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증거가 가리키는 것은 이렇게 정리된다. 분무기로 넣은 옥시토신이 사람을 믿게 만들지는 않는다.

옥시토신은 관계를 대신하지 못한다.

이 책의 주장에는 오히려 이쪽이 맞다. 신뢰를 만드는 것은 분자가 아니라 사이다. 몸의 화학은 관계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기보다, 관계가 일어날 때 몸에서 함께 일어나는 일에 가깝다. 관계가 건강을 만든다는 말은 그래서 은유가 아니다. 다만 그 말의 주어는 호르몬이 아니라 사람이다.

신학은 이 오래된 지혜를 상호내주(perichoresis)라 부른다. 서로 안에 깃들어 삶.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안에 깃들어 쉰다. 성부가 성자 안에서, 성자가 성부 안에서. 신은 홀로 쉬지 않고, 관계 안에서 쉰다.

이 오래된 신학의 통찰을, 나는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와의 대담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로 다시 만났다. 이 교수는 우리라는 것이 나와 너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1 더하기 1이 아니라, 그보다 큰 제3의 실재, 곧 우리 사이가 창발(emergence)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이 우리 집, 우리 아내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가, 사실은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관계의 과학인 셈이다. 신학자 마리아 목사와의 대담에서는 같은 진실이 더 따뜻한 이미지로 왔다. 늙어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엄마를 돌봐 줄 엄마가.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그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돌 때, 관계는 멈추지 않는 춤이 된다.

安息은 곧 관계 안에서의 쉼이다.

이 상호내주에는 두 얼굴이 하나로 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되(연합), 각자는 온전히 자기로 남는다(구별). 녹아 하나가 되는 융합도 아니고, 등 돌린 격리도 아니다. 앞서 본 세포막처럼, 가르면서 잇는 살아 있는 경계가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다. 그러고 보면 4장에서 본, 장 속 미생물과 내가 서로를 먹이고 지켜 주던 그 관계가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가장 작은 몸속 판본이었다. 관계 안에서 쉰다는 것은, 신학이기 이전에 생물학이다. 11장에서 만난 우주목이 바로 이 궁극의 나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쉬는 그 나무는, 하나의 고독한 기둥이 아니라 서로 안에 깃들어 함께 서 있는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나무가 되어 줄 때,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목이 된다. 누군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축.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서로 안에 깃든다는 것은 문을 활짝 열어 두는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경계는 열림과 닫힘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무엇을 언제 들일지 매번 가려내는 조건부의 투과다. 세포막이 그렇고 장벽이 그렇다. 사람 사이에서 그 가려냄의 이름이 환대다. 환대는 아무나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를 지운 채 삼켜지지도 않고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으면서 낯선 이를 안으로 들이는 기술이다. 그래서 환대에는 반드시 주인이 필요하다. 자기가 없는 사람은 손님을 맞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8장에서 남겨 둔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안토노프스키의 통합감은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받쳐 주는 관계, 나를 조건 없이 인정하는 사람, 함께 숨 쉬는 사이에서 태어난다. 9장에서 본 미주신경이 안전한 관계 앞에서야 비로소 켜지듯이.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다. 건강은 관계라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장의 참고

마르틴 부버, 『나와 너』 · Kosfeld 외(2005, Nature 435:673–676, 옥시토신과 신뢰)와 그 재현 논쟁 — Nave, Camerer & McCullough(2015,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의 비판적 검토, Declerck 외(2020, Nature Human Behaviour)의 사전등록 재현 · 이성회 교수·마리아 목사와의 대담 · 상호내주(perichoresis) — 요한복음 14:10–11, 카파도키아 교부 전통

14 장

가장 닫힌 경계에서 피어난 생명

DMZ

한반도에서 사람이 가장 오래 들어가지 못한 땅에,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멸종위기 동물이 산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그어 놓은 선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백오십 킬로미터, 폭 사 킬로미터의 띠가 있다. 넓이로는 구백 제곱킬로미터 남짓, 서울보다 조금 넓다. 그 안에서 조사된 생물이 육천백육십팔 종이다. 한반도의 멸종위기종 이백육십칠 종 가운데 백두 종이 이 띠에서 확인되었다. 세계에 열다섯 종뿐인 두루미 가운데 일곱 종이 여기서 겨울을 난다. 산양이 있고 사향노루가 있고 반달가슴곰이 있고 수달과 독수리가 있다. 깊은 숲에는 아직 호랑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돈다.

이 사실은 늘 아름다운 이야기로 소비된다. 사람이 물러나니 자연이 돌아왔다는 이야기, 분단이 뜻밖의 낙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나는 이 장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쓰면 이 책이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배반하게 된다.

그 땅이 보존된 이유는 지뢰다.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지뢰가 가장 조밀하게 묻힌 곳이 이 띠와 그 언저리다. 두루미가 거기 내려앉는 것은 그곳이 안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어서다. 그러니 DMZ는 자연보호구역이 아니다. 너무 위험해서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상처다. 칠십 년을 아물지 못한 채 벌어져 있는, 한 나라의 갈라진 자리다.

더 곤혹스러운 사실이 있다. 이곳을 오래 연구해 온 사람들은 평화를 걱정한다. DMZ생태연구소의 김승호 소장은 이 지역이 지켜진 것은 환경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군사적 대치 덕분이었으므로, 대치가 풀리면 심각한 위협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식물을 연구하는 정수영은 더 아픈 말을 한다. 지뢰를 제거하는 일이 곧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뢰를 걷어 내려면 땅을 파야 하고, 땅을 파면 그 위의 것이 사라진다.

상처가 생명을 지키고 있고, 그 상처를 치료하면 생명이 위험해진다.

이보다 더 정확한 경계의 역설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4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살아 있는 경계는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다고 했다. 완전히 닫혀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 막 안에서 세포는 굶어 죽는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DMZ는 반증인가. 완전히 닫혔는데 생명이 넘치지 않는가.

아니다. DMZ의 생명은 그 선이 살아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이 비운 자리에 생명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손을 뗀 어떤 틈에도 들어간다. 폐허에도 들어가고 체르노빌에도 들어간다. 그것은 생명의 힘에 관한 증거이지 벽의 공로가 아니다. 두루미가 지뢰밭에 앉아 있다고 해서 지뢰밭이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벽에도 생명은 깃든다. 그러나 그것은 벽이 잘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그 벽에 구멍이 났던 때가 있었다. 1991년 봄, 일본 지바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분단 사십육 년 만에 남과 북이 하나의 팀으로 나갔다. 팀 이름은 코리아, 유니폼에는 두 나라 국기가 아니라 한반도 모양이 붙었고, 시상대에서는 애국가도 아니고 북의 국가도 아닌 아리랑이 울렸다. 여자 단체전에서 이 팀이 중국을 꺾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남쪽의 현정화와 북쪽의 리분희가 그 팀에 있었다.

이십일 년 뒤 그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와 이렇게 적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습니다. 왜 남한과 북한은 둘로 나뉘어져 있어야 하는지, 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인지.— 2012년, 페이스북

그때 나를 더 아프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얼마 전 리분희와 현정화가 중국에서 만나려 했는데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이십 년 전에는 같은 팀으로 같은 시상대에 올랐던 두 사람이, 이제는 제삼국에서 차 한잔 나누는 것도 안 되었다. 열렸던 경계가 다시 닫힌 것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울면서 감사하기도 했다. 남과 북이 최악으로 치닫던 그때에, 하필 그 기억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이런 문장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봐라, 할 수 있다. 가능한 일이다.

한 번 열려 본 경계는 그 사실이 지워지지 않는다. 7장에서 나는 한 번 건너 본 사람이 다음 문지방 앞에서 조금 덜 무서워한다고 썼다. 공동체도 같다. 지바는 사십육 년 만의 첫 문지방이었고, 그 뒤로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문지방에는 나도 조금 얹혀 있다. 나는 육 년 넘게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유치위원회에서 일했다. 2007년 IOC 총회에서는 갑자기 최종 발표자로 지명되어, 앞이 안 보일까 봐 원고를 통째로 외우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속으로 그 원고를 외웠다. 그리고 떨어졌다. 그전에도 떨어졌으니 두 번 내리 진 셈이다. 세 번째에야 우리는 2018년 대회를 따냈다.

유치가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 협약이 어긋나고 예산이 모자라고 여론이 싸늘해지는 동안, 우리가 이러려고 유치했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유치위에서 보낸 육 년 중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정작 회의실이 아니었다. 실사단이 컬링장에 왔을 때 강원도민 이천십팔 명이 합창단을 이루어 아리랑을 부르던 장면, 그리고 실사단이 탄 버스를 배웅하러 길가에 늘어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울면서 다짐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그 대회의 개회식에서 남과 북이 함께 걸어 들어왔다. 여자 아이스하키에서는 다시 단일팀이 꾸려졌다. 지바로부터 이십칠 년이 지나 있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빠뜨리면 안 된다. 그 단일팀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다. 오래 준비해 온 우리 선수 몇이 그 결정 때문에 뛸 자리를 잃었고, 그 일로 적지 않은 사람이 화를 냈다. 나는 그 화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열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고,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 묻지 않는 열림은 환대가 아니다. 13장에서 환대에는 주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인이 자기 것을 내놓는 것이 환대이지, 남의 것을 대신 내주는 것은 환대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벽이 무너져 아무 선도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4장의 언어로 하면 막이 터진 세포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선이 벽에서 막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전히 나누되, 무엇을 언제 들일지 매번 가려내면서, 가르는 동시에 잇는 선.

2018년 첫날, 나는 가족과 임진각에 갔다. 새해에 통일을 염원하며 종을 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날 내가 페이스북에 남긴 말은 이랬다.

통일을 염원하며 임진각에서. 그런데 종소리보다 아이 목소리가 더 크네.— 2018년 1월 1일, 페이스북

사진 속에서 나는 웃고 있다. 무거운 자리에 왔는데 아이가 떠들어서 종소리가 묻혔다. 그때는 그저 우스워서 적은 말이었다. 지금 다시 보니 이 장의 결론이 거기 있었다.

종은 어른들이 친다. 우리는 종을 치고, 성명을 내고, 회담을 하고, 또 결렬시킨다. 칠십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그 소리 위로 아이 목소리가 얹혔다. 그 아이는 그날 통일이 무엇인지 몰랐고 자기 목소리가 종소리를 덮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 아이가 자란다. 그리고 우리가 끝내 막으로 바꾸지 못한 이 선을 물려받는다. 우리가 물려주는 것은 결국 두 가지다. 아물지 않은 상처 하나와, 그것이 한 번은 열린 적이 있다는 기억 하나다.

12장에서 나는 값은 안에서 치러지고 배움은 밖에서 거두어진다고 썼다. 이 선 앞에서 그 말은 시간의 언어가 된다. 값은 이 안에서, 이 세대에서 치러진다. 배움은 아직 이 회로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 종소리보다 목소리가 컸던 그 아이 쪽에서 거두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우리가 끝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비슷한 일을 다른 갈라진 땅에서 한 사람이 있다.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는 1990년, 북아일랜드의 분쟁이 한창이던 때에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를 다시 썼다. 제목은 「트로이의 치유」였다. 낫지 않는 상처 때문에 버려졌던 사람을 결국 데리러 가는 이야기를, 서로를 오래 버려 둔 땅 위에 다시 올린 것이다. 그 극의 코러스가 이렇게 노래한다. 역사는 무덤 이편에서 희망을 갖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일생에 한 번쯤은 오래 기다린 정의의 밀물이 밀려와 희망과 역사가 운을 맞추는 때가 온다고.

나는 그 말을 이 선 앞에서 다시 읽는다. 히니는 그런 일이 자주 온다고 하지 않았다. 일생에 한 번쯤이라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1991년 봄의 지바가 우리에게는 그 한 번이었다.

경계를 물려주는 일이 이 책의 마지막 물음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에게서 시작해 너에게로 갔다. 상처가 통로가 되는 자리를 보았고, 두 사람이 서로 안에 깃드는 자리를 보았고, 이제 한 공동체가 반세기 넘게 닫아 둔 자리까지 왔다. 남은 것은 시간의 방향이다. 내가 배운 경계를 다음 사람에게 어떻게 건네는가.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부다.

이 장의 참고

국립생태원 DMZ 일원 생물다양성 조사(6,168종) · 환경부 멸종위기종 자료 · DMZ생태연구소 김승호 소장과 식물연구자 정수영 인터뷰 — NPR, 2019년 4월 20일 ·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지바, 1991) 남북 단일팀 · 영화 「코리아」(2012) · 2018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 셰이머스 히니, 『트로이의 치유 —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의 한 판본』(1990)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12, 2018)

제 5 부

계승 — 경계가 되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15 장

사랑은 받아들이고 존중은 놓아준다

가족의 경계

사랑은 첫 번째 선물이다. 아이가 말하기 전에, 선택하기 전에, 이해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져야 한다. 안기고 먹여지고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사랑은 아이를 덮어 주고, 스스로 설 수 없을 때 대신 들어 준다. 그것이 없으면 생명은 시작되기도 전에 시든다.

그런데 사랑만으로는 한 사람을 불러내지 못한다. 어떤 부모는 깊이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는다. 정원을 돌보듯 아이를 아낀다. 보호하고 가꾸고 무엇이 될지를 정해 준다. 그 헌신은 진짜이고 때로 희생적이다. 아이는 자기가 귀하다는 것을 배운다. 배우지 못하는 것은 자기 목소리에 무게가 있다는 것, 자기 질문이 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자기 판단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존중은 소유가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관리하는 대신 말을 거는 일이다. 약할 때조차 내 아래가 아니라 내 앞에 선 사람으로 보는 일이다. 그러면 아이의 거절은 고쳐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이 되고, 아이의 질문은 방해가 아니라 초대가 된다.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존중인 이유가 여기 있다. 성장이란 부모가 주는 것이 커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아내가 급히 캐나다로 가고 나는 한 달 넘게 기현이와 둘이 지냈다. 그때 쓴 글을 지금 다시 읽으면 낯이 뜨겁다.

애를 깨운다. 이게 보통 10분 정도 걸린다. 이거 잘못하다 아들의 발차기에 얼굴을 맞은 적도 있다.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곁들여 밥을 입에 쑤셔 넣고 나면… 애를 씻기고 간식을 먹이고 재우면 나는 마음도 몸도 영혼도 만신창이가 된다. 왜 불쌍한 애에게 소리를 질렀을까? 왜 궁뎅이를 때렸을까? 내가 정신이 미쳐 가는 것은 아닐까?— 2014년, 페이스북

그런데 그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날 나는 이렇게도 적었다. 애를 재우고 텔레비전을 보며 멍때리는 시간이 힐링타임이라고, 그리고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면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고, 귀찮다는 애를 꼭 껴안고 잠이 든다고. 다음 날 또 한 번의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그 글은 끝난다.

이것이 부모의 하루다. 소리 지른 것과 껴안은 것이 같은 날 안에 있다. 나는 나쁜 아버지였다가 좋은 아버지였다가 한 것이 아니다. 사랑과 불안이 한 몸으로 굴러간 것이다. 그래서 구별이 어렵다.

협박과 회유. 내가 고른 단어다. 그 한 달 동안 내가 아들에게 한 일의 대부분은 관리였다. 깨우고 먹이고 데려다주고 학습지를 시키고 재웠다. 사랑이 아니었느냐고 물으면 사랑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문법이 명령형이었다.

부모의 가장 큰 유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불안이다.

우리는 아이가 실패할까 봐, 다칠까 봐, 어리석게 선택할까 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불안은 너무 쉽게 사랑으로 위장해서 좀처럼 들키지 않는다. 불안은 쉬지 않고 말한다. 고치고 상기시키고 경고하고 지시한다. 침묵할 수가 없다. 침묵이 방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이 깊어지면 우리는 사랑을 희생으로 재기 시작한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 줬는데. 그 셈법 아래에는 말해지지 않은 간청이 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는 어떻게 내가 바라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니. 그때부터 사랑은 이 아이가 누가 되어 가는지를 묻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아이는 깊이 사랑받지만 온전히 신뢰받지는 못한다. 보호받되, 되어 가는 것은 허락받지 못한다.

2018년 케임브리지에서 그 불안이 한 번 터졌다.

기현이가 말을 시킨다. 대답하다 왼쪽 공사하던 곳을 들이받았다. 차 왼쪽이 찌그러졌다. 기현이가 뭐라 말한다. 닥쳐. 소리치는 나를 발견한다.— 2018년, 페이스북

그것은 아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의 불안, 가장이라는 압박, 뜻대로 되지 않던 연구, 사오십 명이 함께 쓰는 방에서 눈치를 보던 수치심. 그 전부가 차가 찌그러지는 순간 한꺼번에 터졌고, 하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터졌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미안하다 뒤에 그런데를 붙이고 싶은 충동을 참는 일이었다. 그 한마디가 붙는 순간 사과는 변명이 된다.

그래서 존중은 사랑보다 어렵다. 사랑은 책임을 느끼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오고, 사랑은 행동하고, 행동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존중은 다르다. 한 사람의 삶이 통제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응답할 자유로 단단해진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림은 무섭다. 안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위험한 자리이고, 어떤 아이는 그 자리에 훨씬 덜 안정되게 선다. 흔들리는 아이가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것을 보면 부모는 앞을 막아서고 싶어지고, 대개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매번 경계를 건너 안겨 온 아이는 경계에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경계는 머지않아 그 아이를 혼자 찾아온다. 부모의 자리는 가장자리 위가 아니라 가장자리 바로 뒤다.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서는 일이 아이의 것이 될 만큼은 떨어진 자리.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조정할 것은 존중이 아니라 무게다. 아이가 가진 것을 넘어서는 도전은 아이를 키우지 않고 부순다. 6장의 호르메시스가 여기서 부모의 언어로 번역된다. 죽이지 않을 만큼. 다만 무게가 무거울 때의 답은 무게를 줄이는 것이지 신뢰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맡기고, 어떤 아이에게는 오늘 어느 문제부터 풀지를 맡긴다. 크기는 다르되 맡긴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경계는 위험하고, 동시에 무엇인가 태어나는 유일한 자리다. 안전한 한가운데에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진짜 기술은 아이를 가장자리에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자리가 태어나는 자리로 남을 만큼만 위험하게 두는 것이다.

이 장을 쓰면서 오래 걸린 것은 개념이 아니라 한 가지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들을 관리하려 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성적은 양호하나 주의가 산만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중학교에 가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주의도 산만함이 되었다. 우산과 보온도시락은 들고 나가면 집에 들어온 날이 별로 없었다. 나는 고쳐야 할 아이였다.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나를 다시 불렀다.

의사들은 나 같은 사람을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라고 부르고 범주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Active, Diligent, Highly-sensitive, Delightful. 나는 자랑스러운 ADHD입니다.— 2014년, 페이스북

나에게 그 말을 해 주기까지 마흔 해가 걸렸다. 그런데 같은 기질을 가진 아들에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깨우고 먹이고 학습지를 시켰다. 고치려 했다. 평생 듣기 싫었던 그 문장을, 나는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사랑은 말한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다. 존중은 말한다. 나는 네가 스스로 서도 될 만큼 너를 믿는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존중 없는 사랑은 소유가 되고, 사랑 없는 존중은 거리가 된다. 하나는 숨 막히게 하고 하나는 버린다. 두 가지가 서로 안에 깃들 때에만 어느 쪽도 온전해진다. 13장에서 말한 상호내주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취하는 형태가 이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존중은 사람을 놓아준다.

10장에서 나는 아들을 공항에서 보내며 걱정과 화는 줄었는데 기쁨이 확연히 줄었다고 적었다. 그때는 그것을 상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게 읽는다. 그 빈자리는 잃어버린 자리가 아니라 놓아준 자리다. 부모됨의 가장 깊은 소명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살아남는 아이를 기르는 것도, 성공하는 아이를 기르는 것도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 앞에 서서 자기 이름으로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나는 나다, 라고.

이 장의 참고

저자의 미발표 에세이 「Love Keeps a Child Alive; Respect Lets a Child Become」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14, 2018) · 상호내주는 13장, 감당할 만한 무게는 6장 참조

16 장

이름 없이, 얼굴 없이

스승은 잊히면서 남는다

몇 해 전, 진짜 고수는 어떤 사람인가를 적어 둔 적이 있다. 세상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도, 때로는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소명을 찾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오면서 만난 그런 분들을 떠올리며 공통점을 넷으로 적었다.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배우려고 한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본다. 뭐가 감사한지, 계속 감사하다고 한다. 자신이 발견한 사실, 혹은 지식을 자꾸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고 한다.— 2022년, 페이스북

네 가지를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이것들이 결국 한 가지를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넷 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다 안다고 하지 않으니 배우고, 조직이 아니라 사람을 보니 힘을 좇지 않고, 감사하니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고, 아는 것을 나누니 독점하지 않는다. 고수는 크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어진 사람이다.

그 글을 나는 이렇게 맺었다. 이 글을 읽으며 혹시 내 이야기를 쓴 건가 싶다면 맞다, 바로 당신 이야기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냥 버티세요. 곧 더 좋은 날이 올 거예요. 그때는 지나가는 말로 적은 줄 알았는데, 이 장은 결국 그분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이십 년쯤 전, 보스턴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후배가 선물한 책 한 권을 읽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다. 병으로 죽어 가는 노교수가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십 년간 사회심리학을 가르쳤지만 이번에는 이 강의를 들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죽을병을 앓고 있어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걱정되면 다른 과목으로 바꾸어도 좋다.

스승이 자기 죽음을 강의 계획서에 적어 넣은 것이다. 12장에서 말한 상처를 여는 일의 가장 마지막 형태가 저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비행기 안에서 나는 눈물로 다짐했다. 진짜 스승이 되겠다고.

그리고 십 년이 흘러 그 책을 다시 펴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난 지난 10년간 어떤 스승이었을까? 좋은 스승이란 어떤 스승일까? 인기 있는 스승은 아닐 텐데. 강의를 잘하는 교수? 강의만 잘하면 좋은 교수일까? 연구를 잘하는 교수? 누구를 무엇을 위한 연구였을까?— 2014년, 페이스북

그 십 년 동안 많은 강의를 만들었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눈물을 쏙 뺄 만큼 혼낸 적도 있고 내 감정에 못 이겨 학생들 앞에서 운 적도 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십 년의 답이 무엇이었느냐고 지금 묻는다면, 나는 강의도 연구도 아니라고 답하겠다.

스승의 목표는 제자에게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다리는 건너간 사람에게 기억되지 않는다. 건너편에 도착한 사람은 앞을 보고 걸어가지 뒤를 돌아 다리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리가 없으면 아무도 건너지 못한다. 잊히는 것이 다리의 실패가 아니라 다리의 완성이다.

내가 이십 년 넘게 출근하는 학교에 그 완성의 한 예가 있다. 연세대학교 생활과학대학과 이과대학이 서 있는 자리다. 그 건물들 앞을 매일 수천 명이 지나가지만, 그 땅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49년 3월 17일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교수 부인들이 한 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한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현관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다른 한 명이 뒷문으로 들어와 뒤에서 총을 쏘았다. 총을 맞은 사람은 에델 밴 와고너 언더우드, 연세대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가문의 며느리이자 원한경 박사의 아내였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총을 쏜 젊은이들은 그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평생을 바쳐 제자를 키웠는데 그 제자가 아내를 죽였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원한경 박사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들을 용서했다. 그리고 과도한 수사와 강압 수사를 하지 말라며, 자기 아내를 죽인 자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 뒤 전쟁이 나자 홀로 부산으로 피난해 전시 캠퍼스를 준비하고 고아원을 제주도로 옮기는 일에 힘쓰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아들 원일한 박사는 어머니가 총에 맞은 그 집과 주변 만 평의 땅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 땅 위에 지금의 건물들이 섰다. 2004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가문은 남은 소유권까지 모두 학교에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저 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 이야기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 다리는 잊히면서 건너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 가문이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땅이었고, 땅 위에 선 것은 그들의 기념비가 아니라 남의 강의실이었다.

1장에서 우리는 부풀기와 자라기를 갈랐다. 이제 그 구별을 마지막으로 다시 말할 수 있다. 부풀기는 이름을 키우는 일이고, 자라기는 이름이 지워져도 남는 것을 만드는 일이다. 팽창한 사람은 자기 이름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이름이 사라져도 남을 것을 짓는다. 이 장의 제목을 이름 없이, 얼굴 없이라고 붙인 것은 겸손해 보이려는 수사가 아니다. 1장에서부터 준비된 논증의 결론이다.

영어에서 축복을 뜻하는 bless는 피를 뜻하는 옛말과 뿌리를 나눈다. 반면 행복을 뜻하는 happiness의 뿌리는 우연을 뜻하는 hap이다. 행복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축복은 누군가 흘린 피에서 온다. 내 피 흘림이 다른 사람의 축복이 되는 자리, 그것이 경계에 선 사람이 마지막으로 서는 자리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 위로, 누가 걸어가고 있는가.

이 장의 참고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에델 밴 와고너 언더우드(1949)와 원한경·원일한 박사의 기록 · bless와 happiness의 어원

17 장

성과에서 성숙으로

다음 세대의 경계를 위하여

스물세 살이던 해에 들은 설교 한 편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훗날 장인이 되신 목사님의 말씀이었다.

세상에 한 무명의 사람이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한 작은 마을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그 작은 마을이 변했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장인어른의 설교, 1990년대 초

그 한 문단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공을 크기로 재고 있었다. 얼마나 알려지는가, 얼마나 커지는가. 그런데 저 문장은 다른 자를 내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한 마을이 변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삼십 년 뒤 그분은 담도암으로 십구 개월을 앓다 떠나셨다. 마지막까지 그분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사셨다. 그분을 보내 드리며 나는 뒤늦게 한 가지를 알았다. 그 설교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언젠가 내가 그 무명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십 년이 지나 보니 순서가 반대였다. 그분이 그 무명의 사람이었고, 내가 그 작은 마을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그분은 한 사람을 가르쳤고, 그 한 사람이 변했다. 이 장에서 하려는 이야기가 결국 그 설교의 풀이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더 크게 부풀라는 격려가 아니다.

세 단어로 그 마음을 옮겨 보고 싶다. 성과, 성장, 성숙.

흥미롭게도 이 세 단어는 모두 이룰 성(成)을 지녔다. 그런데 그다음 글자가 길을 가른다. 성과(成果)는 열매 과(果)다. 밖으로 내놓을 결과물, 측정되고 비교되는 산출이다. 성장(成長)은 길 장(長)이다. 안에서 자라남, 구조와 함께 커지는 일이다. 성숙(成熟)은 익을 숙(熟)이다. 때가 되어 무르익고, 물러날 줄 아는 것이다. 1장에서 말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여기서 열매를 맺는 셈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멈추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성숙이다. 니체가 그린 진짜 강한 사람도 쉼 없이 달리는 자가 아니라, 고요히 느리게 움직이며 지나친 분주함을 싫어하는 여가의 사람이었다. 쉼 없이 부푸는 사람은 그가 경멸한 최후의 인간에 가깝지, 결코 초인이 아니다. 성과가 목표인 삶은 늘 바깥을 보고, 성숙에 이른 삶은 안이 정렬된다. 성장이 얼마나 멀리 왔는가를 묻는다면, 성숙은 이 길이 나에게 맞는가를 묻는다.

성장과 팽창의 이 차이를,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는 한 문장으로 벼려 주었다. 성장은 통합성(integrity)을 잃지 않으면서 경계가 넓어지는 것이고, 통합성 없이 외형만 커지는 것은 팽창이며, 팽창은 죽음이다. 안이 함께 자라며 밖이 넓어지면 성장이지만, 안은 그대로인데 겉만 부풀면 그것은 죽음을 향한 팽창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1장부터 풍선과 나무로 이야기해 온 그 구별을, 그는 이렇게 학문의 언어로 정확히 짚어 주었다.

성숙이란 삶의 무게가 밖에서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라고, 나는 오래 생각해 왔다. 놀랍게도 역사가 토인비도 문명 전체에서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가 본 참된 성장은 힘을 밖, 곧 정복과 확장이 아니라 안, 곧 자기를 다스리는 힘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같은 것을 한 사람에게서 보았다. 미숙한 사람은 잣대를 늘 밖에 둔다. 남이 어떻게 볼까. 성숙한 사람은 그 잣대가 안으로 들어와, 자기 마음의 감각으로 판단한다. 역사가와 심리학자가 각자 자리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진실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오래된 기도 하나를 꺼내고 싶다. 성경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짧게 등장해 이렇게 구한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경(地境)을 넓혀 주십시오. 처음 이 기도를 들었을 때 나는 불편했다. 더 많이, 더 크게 달라는 기도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 책의 언어로는 팽창을 구하는 기도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경이라는 말을 다시 본다. 지경은 땅의 경계다. 야베스가 구한 것은 더 부풀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넓혀 달라는 것이었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부풀기는 얇아지면서 커지는 것이고, 경계가 넓어지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자라는 것이다. 풍선은 커질수록 막이 얇아지지만, 나무는 굵어질수록 껍질이 두꺼워진다. 그러니 야베스의 기도는 팽창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장을 구하는 기도다.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가 아니라, 더 많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

그런데 여기서 이 책이 가장 오래 미뤄 둔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1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기만 하던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하기를 두려워했다. 진짜 실패가 무서워, 최선을 아껴 두고 부풀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부풀기에서 자라기로 돌려세울까? 답은 뜻밖에도 역설적이다. 최선을 다해 봐야, 비로소 자신의 경계를 알 수 있다.

경계란 내가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경계를 끝내 모른다. 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 자신을 두기에, 자기가 실제로 어디까지인지를 영영 알 수 없다. 경계를 모르니 자랄 방향도 모른다. 그저 사방으로 부풀 뿐이다. 팽창은 자기 경계를 모르는 자의 성장 흉내다. 반대로,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자기 경계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나구나. 이 벽이 지금의 나구나. 그 벽에 부딪혀 본 사람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6장에서 근육이 자극받은 자리에서 굵어졌듯, 사람은 자기 경계에 부딪힌 자리에서 자란다.

검증된 유한한 실패가, 검증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살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놓아야 할 것은 단 한 문장이다. 만약 내가 그때 최선을 다했더라면. 이 알리바이를 내려놓는 순간, 진짜 문장이 찾아온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성숙의 도착점이고, 우리가 11장에서 만난 安息의 다른 이름이다. 최선을 다했기에 비로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 息하는 자리 말이다.

그런데 됐다고 말한 다음에도 하나가 남는다. 이 책이 가장 오래 미뤄 둔 자리다. 여기까지 나는 줄곧 주는 쪽을 이야기해 왔다. 15장에서는 놓아주는 일을, 16장에서는 밟히는 일을 말했다. 그런데 삶의 끝으로 갈수록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는 받아야 한다. 누가 나를 태워다 주고, 병원에 데려가고, 밥을 차려 준다.

평생 주는 자리에 서 있던 사람에게 이것이 가장 어렵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온다. 겸손하게 들리지만 나는 그 말이 조금 의심스럽다. 그 밑에 마지막까지 남은 한 문장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도 결국 쥐고 있는 자리다.

13장에서 상호내주를 이야기하며 나는 그것이 서로 안에 깃드는 일이라고 했다. 서로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은 상호내주가 아니다. 그러니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허락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마지막 성숙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주역』 「계사전」에 이런 말이 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막다른 곳에 이른 것이 끝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변한 것만이 오래간다는 뜻이다. 이 책이 처음부터 말해 온 것이 결국 그것이다. 부풀기만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가는 것은 리듬을 가진 것이다. 나아갔다 물러서고, 들이쉬었다 내쉬고, 자랐다 멈추는 것.

이 책이 지나온 자리를 여섯 줄로 접으면 이렇게 된다.

생존은 경계를 지켰다.
성공은 경계 밖에 자리를 만들었다.
성장은 경계를 넓혔다.
성숙은 경계에 서서 경계를 바라보았다.
사랑은 경계를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경계마저 놓는다.

나는 이제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그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더 크게 부풀라는 격려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자기 경계에 닿아 보라는 초대다. 그 경계에서 다치고, 그 상처로 자라고, 그 자람을 나누고, 다한 뒤에는 쉬라는 것. 부풀지 말고 자라라는 것. 홀로 서지 말고 관계 안에서 태어나라는 것.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한 마을이 변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 그것이 내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경계다.

이 장의 참고

아널드 토인비(에테르화) · 칼 로저스(내적 평가) · 칼 융(개성화) · 프리드리히 니체(최후의 인간) · 역대상 4:10 · 『주역』 「계사전」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닫는 글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한 달 사이에 상주가 되었다가 혼주가 되었다. 93년을 사시고 어머니가 하늘로 떠나신 지 한 달 만에,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보다 앞서 치매를 앓으시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드신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에 다녀가셨다. 28년을 사신 그 집을. 앰뷸런스로 병원에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나는 이런 글을 적었다.

꿈 같은 나들이이자 아버지에게는 소풍이다. 우리네 인생이 소풍이라는 말이 불현듯 생각을 스친다.— 2025년, 페이스북

그때는 몰랐는데, 그 한 달이 이 책의 마지막 부를 통째로 살아 낸 시간이었다. 한쪽 문으로 앞 세대를 보내고 다른 쪽 문으로 다음 세대를 들이는 일. 검은 옷을 입었다가 한 달 뒤에 다른 옷을 갈아입는 일. 그것이 5부에서 내가 계승이라 부른 것의 실물이었다.

인생이 소풍이라면, 우리는 모두 잠시 왔다 가는 존재다. 그리고 소풍의 끝에는 돌아감이 있다. 이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는 함민복 시인의 「꽃」으로 문을 열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첫 줄로. 그 시는 이렇게 끝난다.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 「꽃」

열일곱 개의 장을 지나, 이 시가 다르게 읽힌다. 처음에는 첫 줄만 보였다. 경계에서 꽃이 핀다는 것, 가르는 자리가 곧 피어나는 자리라는 것. 지금은 마지막 연이 더 오래 남는다. 눈물이 메말라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이 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

왜 하필 눈물인가. 눈물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슬픔이든 감동이든, 눈물은 바깥의 무언가가 내 안까지 건너왔을 때 흐른다. 안과 밖이 아직 통하고 있다는 표시다. 그러니 눈물이 메마른다는 것은 슬픔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가 통로이기를 그쳤다는 뜻이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거기서 갈린다. 경계는 저절로 살아 있지 않다. 거기 서는 사람이 있어야 산다. 건강은 안에도 밖에도 없다. 그 사이, 그 자리, 그 경계에 있다. 세포는 막이라는 경계로 살고, 심장은 수축과 이완의 경계에서 뛰며, 숨은 들이쉼과 내쉼의 경계에서 생명을 잇는다. 그리고 사람은 나와 너의 경계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돌아보면 이 책은 하나의 물음을 다섯 층으로 밟아 올라온 여정이었다. 부풀기만 하는 시대를 진단하는 데서 시작해, 세포막과 장벽과 혈뇌장벽이라는 몸의 경계에서 그 원리를 배웠다. 그 경계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 나아감과 물러섬의 리듬이 되는 것을 보았고, 상처가 통로가 되고 두 사람이 서로 안에 깃드는 자리에서 새것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얻은 경계를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까지 왔다. 층위는 달라도 물음은 언제나 하나였다. 네 경계는 살아 있는가. 몸이든 마음이든 관계든 공동체든, 건강은 늘 같은 것을 묻는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두 개의 역설이 남는다. 하나는 밝고 하나는 어둡다.

밝은 쪽부터 말하면,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은 끝내 그 경계를 넘어선다. 13장의 상호내주가 그러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어, 마침내 서로를 가르던 경계가 사랑 안에서 투명해지는 것. 구별은 남되, 벽은 사라지는 것. 세포막도 그렇다. 그 단단한 경계는 사실 매 순간 무언가를 안으로 밖으로 흘려보내며, 안과 밖을 하나의 생명으로 잇고 있다. 가장 완고해 보이는 경계가, 실은 가장 부지런한 소통의 자리다. 경계의 완성은 벽이 아니라 통로다.

경계에서 시작해, 경계가 사랑 안에서 무너지는 자리까지.

어두운 쪽은 14장에 있었다. 어떤 경계는 우리 대에 끝내 통로가 되지 못한다. 칠십 년을 아물지 못한 자리에 지뢰가 묻혀 있고, 그 위로 두루미가 내려앉는다. 상처가 생명을 지키고 있고 그 상처를 치료하면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자리 앞에서, 나는 이 책이 그렇게 쉽게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임진각에서 통일의 종을 치던 날, 종소리보다 아이 목소리가 컸다. 그때는 그저 우스워서 그 말을 적었다. 지금은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문턱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 풀지 못한 경계는 결국 물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5부가 필요했다. 무엇을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15장에서 나는 사랑과 존중을 갈랐다. 사랑은 받아들이는 일이고 존중은 놓아주는 일이며,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뒤의 것이 어렵다. 16장에서는 다리를 이야기했다. 건너간 사람은 다리를 기억하지 않지만, 다리가 없으면 아무도 건너지 못한다. 잊히는 것이 다리의 실패가 아니라 완성이다. 그리고 17장에서, 나는 이 책이 가장 오래 미뤄 둔 문장에 도착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세 장이 결국 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 쓰고 나서야 알았다. 물려준다는 것은 내 것을 넘겨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비켜서는 일이라는 것. 존중은 자리를 내주는 일이고, 다리는 밟히는 일이며, 됐다고 말하는 것은 더 쥐지 않겠다는 뜻이다. 계승은 주는 동작이 아니라 놓는 동작이다.

그러고 보면 그 한 달이 나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를 보내 드리는 일도, 아들을 보내는 일도, 결국은 붙잡고 있던 손을 펴는 일이었다. 하나는 슬퍼서 폈고 하나는 기뻐서 폈지만, 손을 편다는 점에서 두 일은 같았다.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 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셨다. 늘 집에서 입던 가운을 입고. "엄마 잘 갔다 왔어?" 나는 물었고, 어머니는 그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셨다. 그 미소가, 나에게는 마지막 安息처럼 느껴졌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무언가 태어난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리에서도.

나는 이 책을 그 믿음으로 썼다.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홀로 타 버리지 말고 관계 안에서 쉬기를, 최선을 다한 뒤에 "됐다"고 말할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조용히 비켜설 수 있기를.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경계가 벽이 아니라 막이기를, 그리고 그 막이 당신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조금 더 열려 있기를 바란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이 글의 참고

함민복, 「꽃」(『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필자의 페이스북 기록(2025)

부록

참고문헌

본문에서 근거로 삼은 자료를 종류별로 나누어 적는다. 한국어 문헌은 가나다순, 서양 문헌은 알파벳순이다. 번역서는 한국어판을 앞세우고 원서를 괄호에 넣었으며, 한국어판이 없는 것은 원서만 적었다. 각 장 끝의 참고는 읽기를 끊지 않으려고 줄여 둔 것이므로, 서지사항은 이곳이 기준이다.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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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 프리드리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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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빌, 허먼, 「필경사 바틀비」,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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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 헤네프, 아르놀트, 『통과의례』(Arnold van Gennep, Les rites de passage, Paris: Émile Nourry, 1909).
  • 부버, 마르틴, 『나와 너』(Martin Buber, Ich und Du, Leipzig: Insel,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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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너, 빅터, 『의례의 과정』(Victor Turner,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 Chicago: Aldine, 1969).
  • 토인비, 아널드(Arnold J. Toynbee, A Study of History, 12 vol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4–1961). 본문이 인용한 대목은 제1권 201쪽(음양), 제1권 205쪽(우주적 맥동), 제2권 31쪽("ease is inimical to civilization").
  • 포지스, 스티븐(Stephen W. Porges, The Polyvagal Theory, New York: W. W. Norton, 2011).
  •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Byung-Chul Han, Müdigkeitsgesellschaft, Berlin: Matthes & Seitz, 2010).
  • 함민복,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창비시선 156), 1996.
  • 히니, 셰이머스, 『트로이의 치유 —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의 한 판본』(Seamus Heaney, The Cure at Troy: A Version of Sophocles' Philoctetes, Derry: Field Day, 1990). 북아일랜드 분쟁기에 쓰인 개작. 본문의 코러스 대목은 원문 인용이 아니라 뜻을 옮긴 것이며, 시행으로 인용하려면 허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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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 나가르주나, 『중론』. 연기(緣起)와 무자성(無自性)에 관한 부분.
  • 소포클레스, 「필록테테스」, 기원전 409년. 낫지 않는 상처 때문에 렘노스에 버려진 궁수와, 그를 속이러 갔다가 활을 돌려주는 네오프톨레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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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周易)』. 건괘 「문언전」과 상구 항룡유회(亢龍有悔), 복괘(地雷復) 괘사와 「단전」(復其見天地之心), 육효 효사(不遠復·休復·頻復·獨復·敦復·迷復)와 육이 「상전」(休復之吉, 以下仁也), 「계사전」의 一陰一陽之謂道와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경전 인용

  • 창세기 2장 7절(네샤마), 2장 15절(아바드·샤마르) · 출애굽기 2장 22절과 18장 3–4절(게르솜과 엘리에셀), 20장 8–11절(안식일) · 역대상 4장 10절(야베스의 기도) · 요한복음 12장 24절, 14장 10–11절 · 고린도전서 8장 1절.
  • 상호내주(perichoresis)는 요한복음 14장 10–11절을 바탕으로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다듬은 개념이다.

그 밖의 자료

  • 국립생태원, DMZ 일원 생물다양성 조사. 여덟 개 권역에서 6,168종이 확인되었고, 한반도 멸종위기종 267종 가운데 102종이 이 일원에서 기록되었다.
  • 김주환의 경계 논의. 명상을 경계에 서서 경계를 바라보는 일로 규정하고, 마코프 블랭킷과 바렐라의 엔액티비즘을 거쳐 나가르주나의 중론으로 잇는다. 여는 글이 빌려 온 문장의 출처다. 경계가 끝내 공하다는 결론으로 간다는 점에서 이 책과 갈린다. 같은 논지가 본인 채널의 강의 「경계에 서서 경계를 알아차리기 — 마코프 블랭킷 모델과 행위주의」(2025년 3월 30일)와 「진정한 사랑은 경계의 공(空)함을 바라보는 것」(2025년 5월 11일)에 담겨 있다.
  • 세계보건기구, 『세계보건기구 헌장』 전문, 1948. 건강의 정의.
  • 에셔, M. C., 「낮과 밤(Day and Night)」, 목판화, 1938.
  • 영화 「코리아」, 문현성 감독, 2012.
  •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일본 지바, 1991년 4월 24일–5월 6일. 남북 단일팀 코리아.
  • 2018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 NPR, "In Korean DMZ, wildlife thrives. Some conservationists worry peace could disrupt it," 2019년 4월 20일. DMZ생태연구소 김승호 소장과 식물연구자 정수영의 발언.
  • bless는 고대 영어 blētsian에서 왔고 피(blood)와 어근을 나눈다. happiness의 뿌리는 우연을 뜻하는 hap이다.

대담과 미발표 자료

  • 가보르 마테와의 화상 대담, 2026년.
  • 이성회 교수와의 대담. 창발(emergence)로서의 우리.
  • 마리아 목사와의 대담.
  • 저자의 미발표 에세이, 「Love Keeps a Child Alive; Respect Lets a Child Become」.
  • 장인의 설교, 1990년대 초.

저자의 기록

  • 본문에 인용한 페이스북 글은 저자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남긴 개인 기록이며, 인용 끝에 해당 연도를 밝혔다. 원자료는 연도별 아카이브로 보관되어 있다.

확인하지 못한 것

  • 여는 글과 닫는 글의 함민복 인용은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의 표제시 「꽃」에서 가져왔다. 여는 글은 시의 처음(첫 행과 둘째 연 첫 두 행), 닫는 글은 마지막 연이다. 현대시이므로 출간 전에 시인과 출판사의 인용 허락이 필요하다.
  • 여는 글이 김주환에게서 얻었다고 밝힌 문장은 그가 여러 자리에서 되풀이한 것이라 어느 자리를 출처로 적을지 확정하지 못했다. 본인 채널의 강의(2025년 3월 30일, 5월 11일)에 같은 논지가 있고, 최겸의 유튜브 채널에도 그의 강의 시리즈와 좌담 출연분이 따로 있다. 저자가 그 말을 처음 들은 자리를 확인해 서지를 확정해야 한다.
  • 9장 참고에 있던 J. G. Sparks(2017)는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해 이 목록에서 뺐다.
  • 코이(잉어)가 어항에서는 작게, 강에서는 크게 자란다는 이야기는 널리 회자되지만 학술적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에도 그렇게 밝혀 두었다.
  • 현대시를 본문에 인용하려면 시인과 출판사의 허락이 필요하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분들에게도 출간 전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