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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학회장에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암 학회 중 하나인 유럽종양학회. 하얀 가운을 벗고 정장을 차려입은 종양내과 의사 수천 명 사이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체육학과 교수였다. 발표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는데, 누군가 내 명찰을 힐끗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체육 선생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악의는 없었다. 그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 나는 그 학회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이방인도 아니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 경계에 서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함민복 시인의 시 한 편을 자주 떠올렸다.
꽃이 피는 것은 꽃이 아니다
꽃이 지는 것도 꽃이 아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그 자리가 꽃이다 — 함민복, 「꽃」
경계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이 세 줄을 가장 오래 생각했다. 꽃이 피는 것도, 지는 것도 꽃이 아니라면, 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피었다 지는 그 자리. 둘이 만나는 그 사이. 문득 나는, 내가 늘 그런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체육학자다. 평생 몸을 연구했다. 그런데 내가 일해 온 자리는 언제나 경계였다. 한쪽에서는 "당신은 체육 선생이잖아요"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당신은 의학을 모르잖아요"라고 했다. 체육과 의학 사이, 운동과 종양학 사이, 어느 쪽의 온전한 식구도 아닌 자리. 혹시 여러분도 그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해 외로웠던 자리, "나는 여기 사람인가, 저기 사람인가"를 자꾸 되묻게 되는 자리 말이다. 그 사이에 오래 서 있으면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경계는 단지 선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를 가장 많이 자라게 한 것은 안전한 안쪽에서 보낸 시간이 아니라, 늘 그 불안한 경계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이 책은 건강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건강을 몸 안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상 옆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건강은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난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는 막이라는 경계로 살아가고, 심장은 수축과 이완의 경계에서 뛰며, 숨은 들이쉼과 내쉼의 경계에서 생명을 잇는다. 건강이란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경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한 문장으로 모인다. 건강은 경계에서, 리듬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삶을 너무 빨리 채점한다. 성과가 있으면 성공, 없으면 실패. 통과하면 잘 산 해, 떨어지면 잘못 산 해. 여러분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편리한 이분법이지만, 삶을 너무 좁게 줄인다. 나는 우리 삶이 네 개의 자리를 천천히 지난다고 생각한다. 생존, 성공, 성장, 그리고 성숙. 생존은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건너는 일이고, 성공은 사회 속에 내 자리를 만드는 일이며, 성장은 안에서 자라나 내 경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리고 성숙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아는 일이다. 이것은 위로 오르는 사다리가 아니다. 무게중심이 바깥에서 안으로, 속도에서 리듬으로 천천히 옮겨 가는 이동에 가깝다.
그런데 이 이동에는 그림자가 하나 따라붙는다. 성장인 척하지만 성장이 아닌 것, 곧 팽창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시대는 이 그림자를 성장이라 부르며 떠받든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과사회라 불렀다. 예전에는 누군가 밖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눌렀다면,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명령처럼 되뇌며, 자유롭다고 믿는 채로 자기 자신을 태운다. 번아웃이 가장 성실한 사람의 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텅 비어 주저앉는다.
평생 운동과 건강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병이 가장 깊이 파고든 자리로 건강을 들고 싶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지고 싶어 한다. 측정하고 기록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몸을 좇는다. 그런데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고 물으면, 의외로 대답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건강이 또 하나의 성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충분함이 없으니 멈출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정작 건강에서 가장 멀리 있곤 한다. 정말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을 잊고 산다. 우리가 몸을 또렷이 의식하는 건 대개 어딘가 아플 때가 아니던가.
팽창과 성장은 겉으로 참 닮았다. 둘 다 커지니까. 그러나 나무가 자랄 때 안쪽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기는 것과, 풍선이 커지며 고무막이 얇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풍선은 가장 커진 순간에 가장 약하다. 팽창의 가장 깊은 병은 회복을 죄악처럼 여기는 데 있다. 근육이 운동으로 찢기고 쉼으로 자라듯, 자라는 것은 애쓰는 동안이 아니라 쉬는 동안인데도 말이다. 들이쉬기만 하고 내쉴 줄 모르는 숨은,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터진다.
이 네 자리는 한 번 지나면 끝나는 계단이 아니다. 경계는 한 번 넘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달라진 나로 같은 경계를 다시 만나게 한다. 나선형이다. 중학교 시절 열등생으로 분류되어 느꼈던 그 열등감과, 오늘 연구비 심사에서 떨어지며 느끼는 감정은 놀랍게도 똑같다. "나는 이쪽인가, 저쪽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 물음 자체가 경계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아직 그 물음 앞에 서 있다는 건, 아직 우리가 길 위에 있다는 뜻이니까.
이 책은 그 경계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먼저 팽창의 시대를 진단하고, 경계를 읽는 눈을 얻고, 경계가 시간 속에서 리듬이 되는 것을 배우고, 마침내 그 경계에서 새것이 태어나는 것을 함께 보려 한다.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홀로 타 버리지 말고 관계 안에서 쉬기를 바라면서. 독일의 한 철학자가 이 시대의 병을 정확히 이름 지었다면, 나는 그 곁에서 몸의 언어로 답해 보고 싶다. 병상 옆에서, 건강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건강은 경계에서, 리듬으로 태어난다.
이 한 문장이 이 책의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이 문장을 풀어낸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경계를 넓히고 싶다. 다만 이제는 속도보다 정렬을, 성과보다 지속을, 증명보다 의미를 더 자주 묻는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멈춘다. 인디언들이 그랬다던가,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니 잠시 멈춰 영혼을 기다려야 한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자, 이제 경계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함민복, 「꽃」 · 한병철, 『피로사회』
부정성이 사라진 시대, 상처를 두려워하는 마음
언젠가 한 젊은 연구자의 발표를 듣고, 고쳤으면 하는 점을 조심스럽게 몇 가지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나중에 누군가 조용히 귀띔했다. "교수님, 요즘은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아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오래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게 아픈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모두가 "잘한다, 멋지다"라고만 말하는 시대. 나는 이 시대를 '우쭈쭈 시대'라고 부른다.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다. 아무도 함부로 상처 주지 않으려 한다. 비판은 조심스러워지고, 소셜미디어에는 "너무 좋아요"가 넘친다. 겉으로 보면 이보다 따뜻한 세상이 없다.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긍정성이 과잉된 시대라 불렀다. 예전의 병이 억압과 금지, 곧 '아니오'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끝없는 '예스'에서 온다는 것이다. 우쭈쭈 시대는 바로 그 '예스'만 남은 세상이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 아프게 하는 말, 곧 부정성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다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약해진다. 작은 비판에도 무너지고,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한다. 왜일까? 답은 뜻밖이다.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살아 있는 것은 적당한 상처를 통해 자란다. 근육은 미세하게 찢겨야 굵어지고, 면역은 균을 만나야 강해진다. 상처를 완전히 지운 세계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자랄 기회를 빼앗긴 무균실이다.
우쭈쭈 시대는 다정한 시대인 동시에, 상처를 두려워하는 시대다. 그리고 이 시대가 길러 내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는 다치는 것이 무서워, 진짜로 자기를 걸지 않는다. 대신 부푼다. 여기서 이 책의 첫 번째 구별이 시작된다. 부푸는 것과 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라는 것은 안에서 채워지는 일이다. 나무가 자랄 때, 나무는 안쪽에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다. 밀도가 높아지고, 단단해진다. 그러나 부푸는 것은 밖으로 얇아지는 일이다. 풍선이 커질 때 고무막은 점점 얇아진다. 그리고 가장 커진 순간, 가장 약하다. 숲에서 폭풍에 먼저 쓰러지는 것도 작은 나무가 아니라, 속이 빈 채 키만 자란 큰 나무다.
자라남은 밀도를 얻고, 팽창은 밀도를 잃는다.
이 구별을 심리학자 칼 융은 오래된 이미지 하나로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내보이는 사회적 얼굴을 '페르소나(persona)'—배우의 가면—라 불렀다. 가면은 나쁜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그 가면을 자기 자신이라 착각하고 거기에 자기를 부풀리면—융은 이것을 '팽창(inflation)'이라 불렀다—겉은 커 보여도 속은 텅 빈 껍데기가 된다. 반대로 참된 성장은 가면(밖)이 아니라 자기(Self, 안)로 향한다. 흩어진 나를 안에서 통합해 단단해지는 것, 융이 평생 '개성화'라 부른 그 길이 바로 자라기다. 부풀기는 가면의 팽창이고, 자라기는 자기의 심화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부풀까? 자신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짜 실패가 무섭기 때문이다. 진짜 실패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전부를 걸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존재에 대한 판결. 그 판결이 두려워, 사람은 최선을 아껴 둔다. 심리학은 이것을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라 부른다. 시험 전날 일부러 공부하지 않는 아이의 마음이다. 열심히 하고도 낮은 점수를 받으면 "나는 원래 이 정도"라는 판결이 남지만, 하지 않고 낮은 점수를 받으면 "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알리바이가 남는다. 하지 않은 최선은 실패할 수 없다. 그러나 하지 않은 최선은 성공할 수도 없다.
우쭈쭈 시대는 이 도피를 부추긴다. 아무도 "아니, 그건 부족해"라고 말해 주지 않으니, 사람은 자기 한계에 부딪힐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니체는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밀려드는 자극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 '아니오'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은 검증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다만, 자라지 못할 뿐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는 이 부풀림을 정확히 가리키는 문장이 있다. "지식은 사람을 부풀리고, 사랑은 사람을 세운다(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고린도전서 8장 1절) 부풀리는 것과 세우는 것—팽창과 성장의 차이가 벌써 여기 있다.
한병철은 이 힘을 둘로 나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앞의 힘만 있고 뒤의 힘이 없으면, 우리는 밀려드는 모든 자극에 반응하기만 하는 기계가 된다. 멈출 수 없고, 거절할 수 없고, 그래서 자라지도 못한다. 성숙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경계란 바로 그 힘이 사는 자리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아니오'를 세울 수 있는 작은 틈, 부정성의 공간 말이다. 우쭈쭈 시대가 지운 것이 바로 이 틈이고, 이 책이 되찾으려는 것도 바로 이 틈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에게도 그 두려움이 있다. 언젠가 캐나다 밴프의 산을 오르다,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질 수 없다"며 나잇값도 못 하고 속도를 냈다. 심박수가 최대치까지 올라 어질어질했지만,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난 체육과 교순데." 그 자존심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지고 싶지 않은 마음, 곧 내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치지 않으려고 부푼다.
그러니 이 책은 우쭈쭈 시대가 지워 버린 상처를 다시 초대하는 책이다. 다정함이 성장을 지우지 않도록, 아픔이 다시 자람의 자리가 되도록.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상처를 피하지 말고 통과하기를. 두려움은 감출 때가 아니라 마주할 때 비로소 작아지니까. 자,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이 장의 참고
칼 융, 페르소나·자기(Self)·개성화 개념 · S. Berglas & E. E. Jones(1978), 자기불구화(self-handicapping)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보는 법을 배운다") · 한병철, 『피로사회』 · 고린도전서 8장 1절
경계가 사라진 시대의 두 얼굴
내가 어릴 적 자란 시골 동네에서는,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서로 알고 지냈다. 누구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온 동네가 함께 울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제 일처럼 기뻐했다. 어머니들은 마당에 솥을 걸어 국수를 한 솥 가득 삶았고, 담이라고 해봐야 허리께에 오는 낮은 돌담이 전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낮은 담이 높은 벽돌담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혼밥, 혼술, "나 혼자 산다"가 자랑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여러분의 동네는 어떤가?
나는 오늘의 많은 병이 바로 여기, 경계의 소멸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의 병은 옛날의 병과 결이 다르다. 예전의 병이 대개 무언가의 결핍—먹을 것, 위생, 자유의 결핍—에서 왔다면, 오늘의 병은 과잉에서 온다. 너무 많은 연결, 너무 많은 자극, 너무 많은 "할 수 있음"에서.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을 긍정성의 과잉이라 불렀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밖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라, 안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긍정의 홍수라는 것이다.
이 진단을 나는 얼마 전 가보르 마테와 직접 나눈 대담에서 더 선명하게 들었다. 2026년, 나는 동료 교수와 함께 그를 화상으로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테는 우리가 '정상(normal)'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뒤섞어 쓴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건강하고 자연스럽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다, 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익숙한 것을 건강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끝없는 경쟁도, 만성적인 수면 부족도, 도구가 되어 버린 관계도, 우리에게 익숙하기에 '정상'으로 통하지만 결코 건강하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마테에게 병이란 개인의 고장이 아니라, 이 비정상이 정상 행세를 하는 독성 문화에 대한 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아무리 개인을 치료해도 그를 같은 환경으로 돌려보내면 병은 되돌아온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왜 아픈가"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 환경은 무엇인가"이다.
이 홍수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다. 바로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이다. 나는 얼마 전, 힘든 시간을 지나며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런데, 난 '힘들다'라고 인정하는 건 내가 실패한 거라는 생각을 한 걸까? … 힘들어도 힘든 걸 부정하고, 다른 사람이 힘들다고 하면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고 밥맛 없는 소리만 해댔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난 괜찮아'라고 자기 암시를 넘어 자기 최면을 하고 있었는지도.— 2024년, 페이스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요가 되면,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할 자리마저 사라진다. 슬픔에도, 분노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힘—밀려드는 것에 저항하고, 잠시 멈추고,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선을 긋는 힘—이 바로 경계를 세우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이 약해지면,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가지 병이 찾아온다. 뿌리는 하나다.
하나는 녹아버림이다. 경계가 무너져 모든 것이 서로에게 흘러든다. 밤늦도록 그치지 않는 알림, 퇴근이라는 선이 지워진 노동, 멈추지 못하는 손가락의 스크롤. 우리는 그것을 연결이라 부른다. 그러나 연결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연결이 아니라 침수다. 섬이 물에 잠기는 것은 섬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것과 이어져 있으나, 정작 어느 것과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굳어버림이다. 녹아내림에 지친 사람은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담을 쌓고, 문을 닫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아무것과도 만나지 않는다. 냉소가 편해지고, 무감각이 안전해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갑옷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나가지 못하는 성(城)은, 밖의 적에게 함락되기 전에 안에서 먼저 말라 간다.
녹아버림도 병이고, 굳어버림도 병이다.
심리학자 칼 융도 같은 두 얼굴을 보았다. 사회적 가면 뒤에 자기를 가둬 딱딱해지는 것이 굳어버림이라면, 나와 너의 선이 흐려져 상대를 삼키고 자기 안에 잠기는 것—융이 나르시시즘이라 부른 것—이 녹아버림이다. 둘 다 살아 있는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이 서로 먼 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 안에서 자주 교대한다. 온종일 모든 알림에 반응하며 자신을 흩뿌리다가(녹아버림), 저녁이 되면 아무도 만나기 싫어 방문을 닫는다(굳어버림). 과잉연결과 고립은 반대가 아니라, 경계를 잃은 하나의 병이 보이는 두 얼굴이다. 경계를 잃은 사람은 늘 너무 열려 있거나 너무 닫혀 있다.
그러니 치유의 방향은 분명하다. 더 많이 연결되는 것도, 더 단단히 닫는 것도 아니다. 잃어버린 경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열려 있으되 아무거나 들이지 않고, 닫혀 있으되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경계. 병이 경계의 소멸이라면, 치유는 경계의 회복이다. 그런데 그 살아 있는 경계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아주 뜻밖의 곳에서 배울 수 있다. 바로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 세포 하나에서.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가보르 마테, 『정상이라는 신화』 · 칼 융(페르소나·나르시시즘)
날숨 없는 들숨, 소진의 해부학
첫 번째 안식년을 보스턴에서 보내던 해, 나는 세계 최고의 대학 옆에 살면서 통장 잔고가 60달러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쪼들리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더 읽고, 더 쓰고, 더 증명하려고 나를 몰아붙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를 태우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여기서 멈추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두려움이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시간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병은 소진, 곧 번아웃이다. 번아웃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이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해 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다 타 버린다. 예전에는 명령하는 주인이 있었다. 상사가, 규율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이루어도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면, 성과를 좇는 주체는 아무도 자기를 부리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착취하며, 그 착취를 자유라고 착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 에렝베르는 이 시대의 지친 마음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라 불렀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그러지 못한 것이 온전히 자기 탓이 되어, 자기를 실현하려다 지쳐 무너진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짜 문제는 자기가 자기 이상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댈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자면 에렝베르가 "자기가 되지 못해 아프다"고 했다면, 한병철은 "자기밖에 없어서 아프다"고 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라진 타자를 되찾는 쪽에 서 있다.
왜 끝이 없을까? 앞 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어 오르는 사람은 들이쉬기만 하려 한다. 성취를 쌓고, 크기를 부풀리고, 움켜쥔다. 그러나 날숨 없이 들숨만 반복하는 것—그것이 과호흡이고, 그것이 풍선의 팽창이다. 숨을 생각해 보라. 들이쉬기만 하면 죽는다. 내쉬어야 다시 들이쉴 수 있다. 생명은 채움과 비움의 교대다. 그런데 성과에 쫓기는 사람은 비우기를 거부한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아서.
채우기만 하는 것은 자라남이 아니라 터짐을 향한 팽창이다.
몸은 이 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다. 2004년, 심리학자 엘리사 에펠과 노벨상 수상자 엘리자베스 블랙번의 연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아픈 아이를 돌보며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린 어머니들의 세포에서, 염색체 끝을 보호하는 마디인 텔로미어가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던 것이다(Epel et al., 2004). 쉬지 못한 시간만큼 세포가 실제로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운동생리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근육은 운동하는 동안 자라지 않는다. 근육은 쉬는 동안 자란다. 우리는 운동으로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회복으로 그것을 더 굵게 키운다. 회복을 생략한 훈련을 과훈련(overtraining)이라 하는데, 쉬지 않고 몰아붙인 몸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미묘한 구별이 하나 있다. 멈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소진되어 주저앉는 멈춤과, 스스로 택해 숨을 고르는 멈춤. 앞의 것은 죽음이고, 뒤의 것은 생명이다. 앞의 멈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하지만, 뒤의 멈춤은 다음을 잉태한다. 날숨이 다음 들숨을 부르듯이. 여기서 문학의 한 인물이 스쳐 간다.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다 침묵의 부동으로 스러진다. 흔히 그는 저항의 영웅으로 읽히지만, 나는 그를 소진의 초상으로 읽는다. 그의 멈춤은 주권적인 '아니오'가 아니라, 다 타 버린 자의 무력이다. 그는 새것을 낳지 못한 채 꺼진다.
쉬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여기 있다. 스스로 택하는 멈춤을 배우지 못했기에, 끝내 택하지 못한 멈춤—무너지는 정지—에 붙잡힌다. 그러니 이 책이 찾는 것은 뒤의 멈춤이다. 소진의 정지가 아니라, 새것을 낳는 날숨의 멈춤. 그렇다면 부푸는 대신 자라나게 하고, 무너지는 대신 회복하게 하는 경계란 대체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몸의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 하나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 몸의 지혜를 따라가 보자.
이 장의 참고
한병철, 『피로사회』 · Epel 외(2004, PNAS, 텔로미어) · 알랭 에렝베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피로』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세포는 경계로 산다
대학에서 처음 현미경으로 살아 있는 세포를 들여다보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세포의 '내용물'—핵이며 소기관이며—이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눈을 붙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싸며 안과 밖을 가르는 얇은 막. 만약 누가 나에게 "생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하겠다. 생명은 막(膜)이다.
이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다. 세포 주기를 조절하는 원리를 밝혀 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생물학자 폴 너스(Paul Nurse)는,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에서 생물학의 위대한 첫 번째 아이디어로 다름 아닌 '세포'를 꼽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세포 안에 담긴 정교한 부품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바깥 세계로부터 갈라 주는 막이다. 막이 안과 밖을 나누어 하나의 구별된 내부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생명의 화학이 흩어지지 않고 조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생명의 첫 조건은 복제도, 대사도 아니었다. 자기를 세계로부터 구별해 내는 경계, 곧 막이었다. 생명은 경계에서 시작된다.
세포를 세포이게 하는 것은 핵도, 유전자도 아니다. 그것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막이다. 막이 없으면 세포도 없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물에 풀린 화학물질일 뿐이다. 수리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은 살아 있는 모든 시스템이 '마르코프 블랭킷'이라 부르는 경계를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안은 밖을 감지하고(받음), 밖을 향해 행동한다(응답). 즉 산다는 것은 경계에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일이다. 막이 없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경계가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처음부터 말해 온 것—존재는 경계에서 태어난다—을, 생물학도 같은 말로 들려준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시 만드는 경계'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했다. 살아 있는 것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은 따로 있지 않고, 서로를 빚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경계 이전에 완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경계에서, 세상과 주고받으며 매 순간 만들어진다. 경계는 이미 다 된 나를 두른 벽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는 자리다.
세포막의 위대함은 그것이 단순한 벽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벽은 모든 것을 막는다. 그러나 세포막은 고른다. 어떤 것은 들이고, 어떤 것은 내보내고, 어떤 것은 문 앞에서 돌려보낸다. 산소와 영양은 받아들이고, 노폐물은 내보내며, 해로운 것은 거부한다. 이것을 선택적 투과라고 부른다. 막은 가르는 동시에 잇는다. 그래서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가르면서 동시에 잇는다.
이 한 문장 안에 앞 장에서 본 두 병의 처방이 모두 들어 있다. 막이 완전히 열려 아무거나 들이면—녹아버림—세포는 안팎의 구별을 잃고 죽는다. 막이 완전히 닫혀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면—굳어버림—세포는 굶어 죽는다. 건강한 세포는 늘 그 사이에 있다. 열려 있으되 분별하고, 닫혀 있으되 소통하는 막. 나는 히브리어의 오래된 두 단어를 떠올린다. 창세기에서 사람에게 맡겨진 두 소명, 아바드(섬김·경작함)와 샤마르(지킴·보존함)다. 놀랍게도 세포막이 하는 일이 정확히 이것이다. 받아들여 섬기고, 지켜서 보존하는 일. 경계를 지키는 것이 곧 사랑이고, 경계 없는 융합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세포막이 가르쳐 준다. 세포가 죽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바로 막의 붕괴다.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가 무너지고, 안의 것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밖의 것이 안으로 밀려든다. 경계의 소멸이 곧 죽음인 것이다. 앞 장에서 사회의 병으로 보았던 '녹아버림'을, 세포는 문자 그대로의 죽음으로 안다.
이 막은 세포에만 있지 않다. 우리 몸에는 층층이 경계가 있고, 그중 가장 넓은 것이 바로 장(腸)의 벽이다. 장 상피를 활짝 펼치면 테니스코트만 한 넓이가 된다고 한다. 우리 몸에서 안과 밖이 맞닿는 가장 큰 최전선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지는 관은, 위상학적으로 보면 사실 몸의 '바깥'이다. 도넛의 구멍처럼, 우리 몸을 관통하는 외부인 것이다. 그러니 장벽은 나와 세계가 가장 크게 맞닿는 막, 곧 세포막의 거대한 신체적 확장이다.
그리고 이 장벽도 세포막과 똑같은 원리로 작동한다—선택적 투과다. 상피세포들 사이를 밀착연접(tight junction)이라는 이음매가 촘촘히 봉합하고 있어서, 영양소는 들이고 독소와 병원체는 막는다. 그런데 이 이음매가 헐거워지면 어떻게 될까? 원래 통과하면 안 되는 것들—채 소화되지 않은 단백질 조각, 세균 성분—이 혈류로 새어 들고, 몸은 이 침입자들에 반응해 만성적인 낮은 불씨의 염증을 켠다. 이것이 흔히 '장 누수'라 불리는, 장 투과성이 높아진 상태다. (대중적으로는 만병의 근원처럼 과장되기도 하지만, 장벽 기능과 투과성 자체는 엄연히 확립된 생리 현상이다.)
여기서 이 책의 명제가 몸속에서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장벽의 건강은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장에 사는 수십조 마리 미생물—곧 내 몸 안의 '타자'—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채소와 통곡물의 식이섬유를 먹으면, 장내 세균이 그것을 발효시켜 부티르산이라는 짧은사슬지방산을 만든다. 그런데 이 부티르산이 바로 대장 상피세포의 주된 먹이다. 부티르산이 넉넉해야 상피가 튼튼하고, 점액층이 두꺼워지고, 이음매가 단단하고, 염증이 가라앉는다. 반대로 섬유질을 안 먹으면 부티르산이 마르고, 굶주린 세균은 몸을 지키던 점액층을 대신 갉아먹어 경계를 허문다. 내가 타자(미생물)를 먹이면, 그 타자가 나의 경계를 지켜 준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이 관계야말로, 몸으로 실현된 상호내주다.
경계가 무너질 때 벌어지는 일도 의미심장하다. 장벽이 새어 자기와 비자기의 구별이 흐려지면, 면역계가 혼란에 빠져 급기야 자기 몸을 공격하기도 한다. 자가면역질환이다. 면역계가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지 못해 자기를 공격하는 것—말하자면 세포 차원의 나르시시즘이다. 앞 장들에서 마음의 병으로 본 '경계의 붕괴'가, 여기서는 면역의 병으로 나타난다. 물론 반대의 실패도 있다. 항생제를 남용하고 지나치게 무균으로 살아 미생물이라는 타자를 아예 박멸하면, 면역이 타자를 배우지 못해 오히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이 늘어난다. 경계를 지우는 것(융합)도, 경계를 벽으로 만드는 것(격리)도 병이다. 건강한 장은 그 사이—열려 있으되 분별하는 살아 있는 막이다.
이 원리는 뇌에서 가장 엄격하게 지켜진다. 뇌를 지키는 혈뇌장벽은 우리 몸에서 가장 선택적인 경계다. 뇌는 가장 지켜야 할 '안쪽'이니, 그 문지기도 가장 삼엄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경계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 장벽이 새어 염증 물질이 온몸을 돌면, 그것이 혈뇌장벽마저 헐겁게 하고, 뇌 안으로 염증이 번져 우울과 멍한 피로를 부른다. 이른바 장-뇌 축이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내가 주목해 온 뇌의 한 부위, 섬엽(insula)이 등장한다. 섬엽은 장과 내장에서 올라오는 몸속 신호를 '느낌'으로, 나아가 '나'라는 감각으로 번역하는 자리다. 그러니 몸의 경계가 무너지면, 그 무너짐이 섬엽을 통해 '내가 낯설다'는 자기의 흔들림으로 번역된다. 몸의 경계와 마음의 자기가 바로 여기서 만난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몸은 하나의 경계 지도다. 가장 안쪽 미토콘드리아의 막에서 시작해, 세포막, 혈뇌장벽, 장벽, 피부, 그리고 나와 남의 마음의 경계까지—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일을 한다. 닫혀 있으면서 열려 있고, 자기를 지키면서 세계와 주고받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경계를 한꺼번에 살리는 하나의 처방이 있다. 다름 아닌 운동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장내 미생물을 다양하게 하고 부티르산을 만드는 세균을 늘려 장벽을 튼튼하게 하고,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와 미주신경을 통해 혈뇌장벽과 신경염증을 다스리며, 미토콘드리아를 되살린다. 내가 평생 운동을 '약'이라 불러 온 까닭이 여기 있다. 운동은 미토콘드리아의 막부터 마음의 경계까지, 모든 층위의 경계를 동시에 살리는 개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속 수십조 개의 막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가장 구체적인 생명의 일이다. 나는 경계로 살아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막이 건네는 지혜가 하나 더 있다. 살아 있는 경계는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다음 장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폴 너스, 『생명이란 무엇인가』 · 칼 프리스턴(자유에너지 원리) · 마투라나·바렐라(자기생성) · 창세기 2:7 참조
호르메시스, 경계에서의 자극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운동을 하세요"라고 말하면, 많은 분이 놀란다. "이렇게 힘든데 몸을 더 힘들게 하라고요?" 충분히 그럴 만한 반응이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의 연구가 한결같이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 적절한 운동은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줄이고, 여러 암에서 재발과 사망 위험을 낮춘다. 2019년 미국스포츠의학회는 전문가들을 모아 "운동은 암 환자에게 안전하며 권장되어야 한다"고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몸에 스트레스를 주는 그 운동이, 어떻게 몸을 살릴까? 그 비밀이 오늘 이야기의 열쇠다.
운동생리학에는 호르메시스(hormesis)라는 개념이 있다. 소량의 스트레스가 오히려 유기체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원리다. 독(toxin)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 말은, 약간의 독이 면역을 깨우고 적응을 촉발한다는 역설을 품는다. 운동이 바로 그렇다. 운동은 근육을 미세하게 찢고, 심장에 부담을 주고, 세포를 산화 스트레스에 노출시킨다. 그런데 그 작은 손상에 몸이 반응하여, 이전보다 더 강하게 회복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자극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가 남긴 이 문장은, 사실 세포 생물학의 문장이기도 하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죽이지 않을 만큼이어야 한다. 너무 크면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파괴이고, 너무 없으면 그것은 안전이 아니라 쇠퇴다.
경계는 부딪히며 단단해진다. 시험받지 않은 경계는 경계가 아니다.
나 역시 그 '죽이지 않을 만큼'의 경계에서 자주 논다. 캐나다에서 밴프의 산을 오르던 날, 나는 케이블카를 두고 6킬로미터 산길을 걸어 올랐다.
3분의 2쯤 갔을까? 심박수가 165다.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거의 최대 심박수다. … 어질어질하다. … 정상에 올라가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황홀했다.— 2023년, 페이스북
어질어질할 만큼 심장을 몰아붙였지만, 죽지 않을 만큼이었기에 나는 더 튼튼해져 내려왔다. 무균실에서 자란 몸을 상상해 보라. 아무 균도 만나 본 적 없는 면역계는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하다. 적을 만나 본 적이 없기에, 진짜 적 앞에서 무너진다. 오늘날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나는 한 가지 이유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깨끗한 세계에서, 경계를 시험받지 못한 채 자란다. 아이를 온실에서만 키우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1장에서 말한 우쭈쭈 시대가 바로 이 무균실이자 온실이다. 상처를 지운 다정함이, 우리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어려움이 우리를 자라게 한다는 이 원리를, 나는 몸에서 배웠다. 그런데 같은 것을 문명에서 본 사람이 있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다. 그는 문명도 '도전과 응전'으로 자란다고 보았다. 편안한 곳에서는 문명이 생기지 않고, 어려움을 만나 응답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도전에 알맞은 크기가 있다고 했다. 너무 작으면 아무 자극이 못 되고, 너무 크면 자극이 아니라 사람을 짓눌러 버린다. 내가 세포에서 본 호르메시스의 원리를, 그는 문명에서 다시 확인해 준 셈이다.
여기서 1장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부풀기만 하는 사람은 진짜 자극을 피한다. 실패라는 작은 독을 거부한다. 그래서 강해지지 못한다. 자극 없이 부풀기만 한 근육은 사실 근육이 아니라 부종(浮腫)이다. 겉보기엔 커 보여도 힘이 없다. 그러니 상처를 거부하는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거부다. 살아 있는 것은 경계에서 조금씩 다치고, 그 상처를 통해 자란다. 이 진실은 뒤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이것만 기억하자. 적당한 독은 약이다. 그리고 상처는, 경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 장의 참고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 아널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도전과 응전) · ACSM 운동-암 라운드테이블(2019)
안도 밖도 아닌 자리
몇 해 전, 대학원생들과 유럽 암학회(ESMO)에 참석하려던 며칠 전, 학생들의 학회 멤버십 신청이 무더기로 거절당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체육' 전공이라는 것. 나는 그 학회의 초청 발표자였고 좌장이었는데도, 내가 낸 멤버 신청조차 "거절되었습니다(REJECT)"라는 답이 몇 시간 만에 돌아왔다. 속이 상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런 생각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그냥 체육 분야에 있으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을 텐데. 그냥 내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면 되는데. … 멤버 vs. 비멤버, 내부자 vs. 외부자.— 2023년, 페이스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그 자리, 나는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보면 나를 가장 많이 바꾼 것이 바로 그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왜 그럴까? 오늘은 '문지방'이라는 오래된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문지방은 문 아래 깔린 나무 판대기다. 안도 밖도 아닌, 그 얇은 나무 위에 서 있는 순간. 라틴어 리멘(limen)이 바로 이 문지방을 뜻하고, 여기서 리미널(liminal)이라는 말이 태어났다. 인류학자 아르놀트 반 헤네프는 통과의례가 세 단계—분리, 전이, 통합—를 거친다고 보았고, 빅터 터너는 그 가운데 '전이'의 단계에 주목했다.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의례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이상한 시간이 있다. 더 이상 소년도 아니고 아직 어른도 아닌 시간. 이름도, 지위도, 소속도 잠시 벗겨진 채 문지방 위에 서 있는 시간이다. 터너는 바로 이 리미널한 상태에서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옛것을 벗고 새것을 입는 일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안전한 안쪽이 아니라 불안한 경계에서 태어난다.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내 공식 호칭은 '방문자(visitor)'였다. 하버드의 도서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하버드의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그 시절은 참 외로웠다. 소속이 없다는 것은 나를 받쳐 줄 벽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나는 두 세계를 잇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체육과 의학 사이에 서 있었기에, 운동을 암 병동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사실 모든 탄생은 문지방을 지난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산도(産道)라는 좁은 경계를 지나는 일이고, 씨앗이 싹트는 것도 껍질이 터지는 경계의 사건이다. 문지방은 불편하다.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그 불편을 건너뛰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 지금 여러분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서 있다면, 그 불안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자리가 바로 무언가 태어나려는 자리일지 모른다. 문지방을 견디는 힘—그것이 다음 장에서 만날 건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장의 참고
아르놀트 반 헤네프, 『통과의례』 · 빅터 터너, 『의례의 과정』
병인론에서 건강생성론으로
한 의료사회학자가 여성들의 갱년기 적응을 연구하다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사실 하나와 마주쳤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 가운데 일부가, 그 끔찍한 고통을 겪고도 놀랄 만큼 건강하게,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론 안토노프스키다. 당시의 의학은 "왜 사람들이 병드는가"에는 능숙하게 답했다. 그러나 이 소수는 그 질문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무너져야 마땅한 조건에서, 대체 무엇이 이들을 살게 했을까?
의학의 역사는 대부분 하나의 질문 위에 세워졌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 병인론(pathogenesis)이다. 원인을 찾고, 제거하고, 병을 고친다. 세균을 발견해 항생제를 만들고, 유전자 변이를 찾아 표적 치료를 개발한다. 이 패러다임이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는 질문을 뒤집었다. 무엇이 병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건강을 낳는가. 그는 이것을 살루토제네시스(salutogenesis, 건강생성론)라 불렀다. 건강과 온전함을 뜻하는 라틴어 살루스와, 기원을 뜻하는 그리스어 게네시스를 합친 말이다.
그의 유명한 비유가 '강의 흐름'이다. 기존 의학은 강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사람을 하류에서 건져 올린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안토노프스키는 묻는다. 왜 이 사람들은 강물에 빠질까? 그리고 더 중요하게, 어떻게 하면 이들이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할까? 건강은 강에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강 속에서 헤엄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건강은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트레스 속에서도 헤엄치는 힘이다.
나는 이 관점을 평생 몸으로 살아왔다. 운동종양학이라는 내 분야가 바로 이 논리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 환자에게서 병만 없애려 하지 않는다. 병과 더불어, 병 이후에도 살아갈 몸의 힘—헤엄치는 능력—을 길러 주려 한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능력을 통합감(sense of coherence)이라 불렀다. 세상이 이해 가능하고(comprehensibility), 감당 가능하며(manageability), 의미 있다고(meaningfulness) 느끼는 감각이다. 여기서 안토노프스키의 통찰이 앞 장들과 만난다. 그가 말하는 건강은 무균의 안전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것이 그의 전제다. 호르메시스가 말한 것과 같고, 문지방의 불안을 통과하는 힘과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고 가야 한다. 건강을 이렇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건강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 시대가 건강을 새로운 우상으로 떠받든다고 꼬집었다. 삶이 의미와 이야기를 잃고 벌거벗은 생존으로 쪼그라들 때, 남는 것은 오직 '건강한 몸'이라는 목표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토노프스키가 통합감의 세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은 것이 바로 유의미성—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오히려 병이 된다. 무엇을 위한 건강인지, 누구와 함께하는 건강인지를 잃으면, 건강 관리마저 또 하나의 성과가 되어 우리를 갉아먹는다.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고 일하고 의미를 살아 낼 수 있게 해 주는 바탕이다. 여는 글에서 물었듯, "왜 건강해지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답이 있을 때에만, 건강은 비로소 건강이 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마슬로가 사람의 바람 가운데 맨 위에 둔 것도 이 방향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실현'이라 불렀다.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삶에서, 자기 안의 가능성을 피워내는 삶으로 무게가 옮겨가는 것. 안토노프스키의 의미와 마슬로의 자기실현은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건강은 모자람을 메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의미를 향해 자라날 때 온전해진다.
다만 나는 그의 통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안토노프스키는 이 통합감을 개인의 내면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개인 안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통합감은 진공에서 생기지 않는다. 안전한 애착, 믿을 수 있는 사람, 의미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서 자라난다. 병상 옆에서 20여 년을 보내며 나는 그것을 거듭 보았다. 곁에 사람이 있는 환자가 더 오래, 더 잘 견딘다.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라, 경계에서 함께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4부에서 다시 이어진다. 우선은 이것만 붙들자. 건강은 병의 부재가 아니라, 경계에서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 '매 순간'이란 무엇일까? 경계가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리듬이 된다. 이제 3부로 넘어가 보자.
이 장의 참고
아론 안토노프스키(살루토제네시스) · 에이브러햄 마슬로(자기실현) · 한병철, 『피로사회』
심장은 쉬며 뛴다
쉰 살이 되던 해, 나는 문득 활시위가 최대로 당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활을 쏘려면 뒤로 당겨야 한다. 시위를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호흡을 멈추고, 겨냥하고, 놓는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당기는 시간은 길다. 그리고 당기는 시간이 날아가는 거리를 결정한다. 젊은 시절, 보스턴에서 나는 열두 통이 넘는 거절 편지를 연달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인생이 뒤로만 후퇴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그 후퇴가 사실은 활시위가 당겨지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전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몸이 이 진실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 주는 곳이 있다. 바로 심장이다.
경계를 공간에서 보면 막이지만, 시간에서 보면 리듬이다. 경계란 결국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일이고, 오감은 시간 속에서 리듬이 되기 때문이다. 심장을 보라. 심장은 뛰기만 하지 않는다. 수축하고, 이완한다. 짜내고, 풀어 준다. 나아가고, 물러선다. 만약 심장이 이완을 잊고 수축만 계속한다면—그것이 경직이고, 그것이 죽음이다. 심장은 쉼으로써 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건강한 심장은 일정하게 뛰지 않는다. 심장 박동 사이의 간격은 미세하게 늘 변한다. 이것을 심박변이도(HRV)라 부르는데, 이 변이가 클수록 건강하다. 반대로 박동 간격이 기계처럼 똑같아지는 것은 몸이 경직되고 위태롭다는 신호다. 실제로 낮은 심박변이도는 심장질환과 사망 위험을 예고하는 지표로 쓰인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심전도는 하나의 직선을 향해 간다. 완벽하게 규칙적인 리듬은 리듬이 아니라 정지다.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리듬친다.
이 리듬을 지휘하는 것이 미주신경(vagus nerve)이다. 미주신경은 몸의 브레이크다. 흥분한 몸을 가라앉히고, 심장을 늦추고, 소화와 회복을 켠다. 나아가기만 하던 몸을 물러서게 하는 신경이다. 신경과학자 스티븐 포지스의 이론에 따르면, 이 미주신경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누군가와 따뜻하게 연결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심리학자 바버라 프레드릭슨의 연구는 여기서 놀라운 선순환을 발견했다. 따뜻한 관계는 미주신경의 힘을 키우고, 튼튼해진 미주신경은 다시 더 깊은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물러섬의 능력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를 받쳐 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다. 리듬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과 맞닿아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건강이란 나아감과 물러섬의 리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큰일을 이루는 사람도, 문명도 똑같은 리듬으로 자란다고 보았고, 그것을 '물러남과 복귀'라 불렀다. 큰 것을 이루는 사람은 세상 한복판에서 곧장 이기지 않는다. 일단 물러나—광야로, 고독으로—안에서 바뀐 뒤, 새 힘으로 돌아와 세상을 바꾼다. 심리학자 융이 '개성화'라 부른 내면의 여정도 다르지 않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출발한 이들이, 내가 몸에서 본 것과 같은 리듬에 이른 것이다. 물러섬은 내쉼이고, 복귀는 들이쉼이다. 심장이 쉬며 뛰듯, 사람도 문명도 물러났다 돌아오며 자란다.
부풀기만 하던 삶의 병을 이제 다시 이름 붙일 수 있다. 그것은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삶, 수축만 하고 이완하지 못하는 심장이다. 그 리듬은 하나의 직선을 향해 굳어 간다. 그를 살리는 길은 더 세게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쉬며 뛰는 법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쉼의 비밀을, 다음 장에서 우리는 숨 한 번에서 찾는다.
이 장의 참고
스티븐 포지스(다미주신경 이론) · Fredrickson & Kok(2013) · 아널드 토인비(물러남과 복귀) · J. G. Sparks(2017)
息, 호흡이라는 글자
지친 어느 밤, 나는 그저 숨 한 번을 길게 내쉬어 본 적이 있다. 특별한 명상법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의 날숨 뒤에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사실 여기에는 과학이 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면 앞 장에서 만난 미주신경이 켜지고, 심장이 느려지며, 몸이 '이제 안전하다'는 신호를 받는다. 우리는 하루에 수만 번을 숨 쉬면서도, 정작 그 숨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은 그 숨에 관한 한 글자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쉴 식(息)이다.
息은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다. 그런데 自는 본래 코의 상형이다. 그래서 息의 첫 뜻은 숨이다. 코 아래에서 마음이 오르내리는 것. 숨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매 순간 완결되면서 동시에 완결이 필요 없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이 시대가 완결을 빼앗긴 시대라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 지표를 채우면 다음 지표. 끝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숨은 다르다. 날숨 하나하나가 "이것으로 됐다"의 반복이다.
여기에 息의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자식(子息), 불어남, 생겨남. 이자(利息)의 息이 그것이다. 원금이 숨 쉬듯 스스로 불어나는 것. 사람에게 오면 자식(子息)이 된다. 그런데 왜 숨(息)과 자식(息)이 같은 글자일까? 우연이 아니다.
불어남은 움켜쥠이 아니라 내어줌에서 온다.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 것을 내어주는 일이다. 부모가 자기 몸과 시간을 덜어내어 다음 생명이 태어난다. 씨앗은 자기를 터뜨려 싹을 낸다. 이자조차 원금을 움켜쥐면 불어나지 않는다. 빌려주어야, 내보내야 불어난다. 息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불어남은 들숨이 아니라 날숨의 원리를 따른다고. 이것이 부풀기만 하는 삶에 대한 완벽한 반증이다. 움켜쥐면 커진다는 믿음과 정반대로, 진짜 자라남은 내쉼에서, 비움에서, 덜어냄에서 온다.
이렇게 보면 내쉼은 일종의 작은 죽음이다. 우리는 날숨마다 방금 붙들었던 공기를 놓아 보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작은 죽음이 있어야 다음 숨이 들어온다. 성경은 사람의 시작을 이렇게 그린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히브리어로 그 숨은 '네샤마'—숨이자 곧 영(靈)이다. 息이라는 글자가 코(自) 아래에 마음(心)을 둔 것처럼, 숨은 몸과 영이 만나는 자리에서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 숨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 불어넣어진 것, 곧 빌린 것이었다. 우리는 평생 그 빌린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가, 어느 날 마지막 날숨과 함께 그것을 온전히 돌려드린다. 우리말이 죽음을 '숨을 거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정확하다. 삶이란 결국, 빌린 숨을 잘 쉬다가 잘 돌려드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息은 두 얼굴을 한 몸에 품는다. 한쪽은 그침이다. 숨을 거두다, 불이 꺼지다(熄). 다른 쪽은 낳음이다. 자식, 생식(生息). 한 글자 안에 멈춤과 생명이 함께 있다. 이것이 심오하다. 멈추는 것이 곧 낳는 것이다.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오듯, 종결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얼굴이 온전히 만나는 자리에, 다음 글자가 우리를 기다린다. 安息이다.
이 장의 참고
창세기 2:7 참조 · (호흡·미주신경 생리)
休·安·息, 그리고 창조의 완성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가 점점 약해지신다. 이제 워커가 없으면 걷기 힘드시고, 손자의 이름도 잊으셨다. 논어를 다 외우시던 분인데. 아버지 댁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이런 글을 적었다.
누군가 그런다. 우리도 아빠와 엄마이지만, 우리도 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존재라고. 그런데 그 아빠와 엄마는 점점 약해지고, 힘들어지고… 참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2024년, 페이스북
나는 그 글을 쓰며,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였다. 아무리 강한 어른도 기댈 품이 필요하다. 그 자리를 우리 조상들은 세 글자에 새겨 두었다.
먼저 쉴 휴(休)를 보자. 休는 사람(亻)과 나무(木)가 합쳐진 글자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쉬는 모습이다. 여기 첫 번째 답이 있다. 쉼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休 안의 사람은 혼자 웅크린 것이 아니라, 자기 아닌 것—나무—에 자기를 맡기고 있다. 나무는 성과를 내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어 준다. 성과에 쫓기는 사람이 잃어버린 바로 그 존재가 休의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를 조금 멀리서 보면, 그저 한 그루 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의 한가운데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고 상상했다. 뿌리는 땅속 깊이 내리고 가지는 하늘에 닿아,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 북유럽인은 그것을 위그드라실이라 불렀고, 신라의 금관은 그 나무를 머리에 얹은 형상이었으며, 에덴의 한가운데에도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를 우주목(宇宙木)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주목이 선 자리가 언제나 경계라는 점이다. 땅과 하늘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사람이 참으로 쉬는 자리는 바로 그 경계의 나무 아래다.
다음은 편안할 안(安)이다. 갓머리(宀, 지붕)와 여자 여(女)가 합쳐진 글자, 지붕 아래 사람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安의 편안함은 성취에서 오지 않는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음에서 온다. 그러니 끝없이 바깥으로 부푸는 사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병명은 정확히 불안(不安), 곧 安이 없음이다. 이제 두 글자가 만난다. 安息. 安은 제자리에 깃들어 자리 잡음, 곧 공간의 안정이다. 息은 내쉬며 그치고 그 비움에서 새로 태어남, 곧 시간의 리듬이다. 安息은 제자리에 깃들어(安) 숨을 내려놓는 것(息)이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여기서 창조의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경에서 신은 엿새를 만들고 이렛날에 安息한다. 히브리어 샤바트(shabbat)는 '그치다, 멈추다'라는 뜻이다. 놀랍지 않은가? 창조의 마지막이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치는 것이라니. 안식일이 있어야 창조가 완성된다. 노동이 아니라 멈춤이 창조를 매듭짓는다. 우리는 쉼을 창조의 중단으로 여기지만, 창세기는 정반대로 말한다. 쉼이야말로 창조의 완성이라고. 신조차 息하심으로 "이것으로 됐다"를 선언했는데,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그 息을 거부하기에 영원히 "됐다"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安息에는 가장 깊은 층이 하나 더 있다. 동아시아에서 安息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이 安息하소서." 息에 숨을 거둔다는 뜻이 있으니, 安息은 숨을 온전히 내려놓음, 곧 죽음과 맞닿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앞 장에서 보았듯 息은 그침과 낳음을 한 몸에 품는다. 安息의 죽음도 그러하다.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자리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요한복음 12장 24절). 씨앗은 땅에 묻혀(安, 자리 잡아) 자기를 그쳐야(息) 비로소 새싹을 낸다. 安息은 바로 그 씨앗의 자리다.
그래서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실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매일 밤 잠드는 것은 작은 죽음의 연습이고, 매 순간의 날숨은 그보다 더 작은 연습이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쉼이 아니라 죽음이다. 멈추면 사라질 것 같은 그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살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가 오늘을 산다는 오랜 지혜가, 安息이라는 두 글자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잘 쉬는 법이 곧 잘 죽는 법이고, 잘 죽는 법이 곧 잘 사는 법이다.
그러니 다음 물음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기대어 쉴 수 있을까? 그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4부의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출애굽기 20:8–11 · 요한복음 12:24 참조 · (우주목·axis mundi 상징)
경계의 신학
여러 해 전, 나는 연세대학교 채플 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내 오래된 비밀들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만점에 2.63이던 성적, 발표만 하려 하면 두근거리던 가슴, 외모와 낮은 자존감. 어릴 적에는 간염 보균자라는 이유로 식판을 따로 써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상처들을 꺼내 놓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강당이 조용해지고, 몇몇 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 성취가 아니라 내 상처가, 그들에게 가닿은 것이다.
왜 감춘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가 사람을 살릴까? 얼마 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나는 그 답의 한 자락을 몸으로 배웠다. 상주에서 아들의 혼주까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씩씩해야 했다. 그런데 그 억누름의 대가가 있었다.
슬픈 감정을 부인하고 억누르다 보니 모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몸에서 오는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2025년, 페이스북
정신의학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감당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고 말한다. 감정을 닫아 버리면, 몸은 그 닫힘을 앓는다. 상처를 감추는 것은 안전이 아니라, 몸을 병들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상처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열어야 하는 무엇이다.
가보르 마테는 이 단절을 더 깊은 곳에서 짚는다. 그와의 대담에서 가장 오래 남은 말이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나에게 일어난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감정을 닫는 것은 곧 나의 몸과, 나 자신과 끊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를 감추는 사람은 남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이 된다. 치유가 상처를 '여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열림은 곧 나 자신과 다시 이어지는 일이니까.
네덜란드의 사제이자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로 붙잡았다.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유의 원천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이 자기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에 닿는다. 나는 동료인 이지선 교수를 떠올린다. 대학생 시절 음주운전 사고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고 수십 번의 수술을 견뎌 낸 그는, 지금 이화여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수많은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건넨다. 그의 상처가 닫히지 않고 열려, 타인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 것이다.
상처 없는 사람은 닫힌 성(城)이다.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한다.
왜 그럴까? 상처란 나의 표면이 뚫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매끈한 껍질로 닫혀 있던 내가, 그 자리에서 열린다.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열린 자리로만 타인이 들어올 수 있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나갈 수 있다. 상처는 곧 경계다. 안의 나와 밖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 5장의 호르메시스를 기억하는가.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몸을 강하게 했다. 여기서 그 원리는 관계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죽이지 않을 만큼의 상처가, 사람을 치유자로 만든다. 우쭈쭈 시대는 상처를 감추고 괜찮은 척하라고 가르치지만, 감춘 상처는 결코 통로가 되지 못한다.
나는 오랫동안 내 상처를 부끄러워했다. 더 많은 성취로 그것을 덮으려 했다. 부풀기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것은 덮은 상처가 아니라 열린 상처였다. 암 환자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두려움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무너져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치유자는 경계에 서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라는 경계를 닫지 않고 열어 두어, 그 자리로 타인의 아픔이 드나들게 하는 사람. 그렇게 열린 두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태어날까? 그것이 이 책이 오래 준비해 온 마지막 이야기다.
이 장의 참고
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 가보르 마테(트라우마)
상호내주라는 오래된 지혜
치매를 앓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평생 무엇을 좇아왔는지가 선명해진다. 나는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인정을 늘 간구하던 나. 새로운 성취를 이룰 때 아버지에게 하던 자랑질. 그때마다 늘 기뻐하시던 아버지." 돌아보면 내 성취의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고 기뻐해 줄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쉬지 못하는 사람의 병은 바로 여기서 온다.
"할 수 있다"고 외치며 스스로의 주인이 된 대가로, 우리는 인정해 주는 이도 함께 잃었다. 생각해 보면 만족이란 본질적으로 인정이고, 인정은 반드시 밖에서 온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상은 상이 아니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공허한 메아리다. 부풀기의 비극이 여기 있다.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려는, 원리상 불가능한 시도에 갇혀, 아무리 이루어도 "됐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치유는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기댈 나무를 찾고, 함께 숨 쉴 사람을 찾는 것.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두 가지 관계를 구별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 나-그것에서 상대는 이용하고 분석하는 대상이다. 나-너에서 상대는 온전한 현존으로 마주 서는 존재다. 부버는 나-너의 만남에서 둘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고 했다. '사이(das Zwischen)'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와 '너'가 살아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다. 나는 관계 이전에 있지 않다. 나는 관계 안에서 태어난다.
몸도 이 진실을 안다. 우리 몸에는 관계의 분자라 불릴 만한 호르몬이 있다. 옥시토신이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안고, 신뢰할 때 옥시토신이 오른다. 2005년 한 연구는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한 사람이 낯선 상대를 더 잘 믿는다는 사실을 보였다(Kosfeld et al., 2005). 옥시토신이 높으면 상대의 마음을 더 잘 읽고, 스트레스에 덜 무너지며, 심지어 상처도 더 빨리 아문다. 반대로 옥시토신이 낮으면 우울과 염증, 통증의 위험이 오른다. 관계가 건강을 만든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우리 몸속에 흐르는 화학이다.
신학은 이 오래된 지혜를 상호내주(perichoresis)라 부른다. 서로 안에 깃들어 삶.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안에 깃들어 쉰다. 성부가 성자 안에서, 성자가 성부 안에서. 신은 홀로 쉬지 않고, 관계 안에서 쉰다.
이 오래된 신학의 통찰을, 나는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와의 대담에서 사회과학의 언어로 다시 만났다. 이 교수는 '우리'라는 것이 나와 너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1 더하기 1이 아니라, 그보다 큰 제3의 실재—'우리 사이'—가 창발(emergence)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사회과학이 오래 '개인의 행위'에만 매달려 온 반면, 그는 그 '사이' 자체를 살아 있는 하나의 실체로 보고 연구한다. 우리말이 '우리 집', '우리 아내'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가, 사실은 가장 오래되고 정교한 관계의 과학인 셈이다.
신학자 마리아 목사와의 대담에서는 같은 진실이 더 따뜻한 이미지로 왔다. 마리아 목사는 어느 날 늙어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엄마를 돌봐 줄 엄마가." 상호내주란 바로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땅에게 하늘이 되어 주고, 다시 그 땅의 땅이 되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것. "네가 기댈 언덕이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돌 때, 관계는 멈추지 않는 춤이 된다. 각자가 자기를 내어주며 상대를 자기보다 높이기에, 그 순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安息은 곧 관계 안에서의 쉼이다.
이 상호내주에는 두 얼굴이 하나로 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되(연합), 각자는 온전히 자기로 남는다(구별). 녹아 하나가 되는 융합도 아니고, 등 돌린 격리도 아니다. 앞서 본 세포막처럼, 가르면서 잇는 살아 있는 경계가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다. 그러고 보면 4장에서 본, 장 속 미생물과 내가 서로를 먹이고 지켜 주던 그 관계가 바로 이 상호내주의 가장 작은 몸속 판본이었다. 관계 안에서 쉰다는 것은, 신학이기 이전에 생물학이다. 10장에서 만난 우주목이 바로 이 궁극의 나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어 쉬는 그 나무는, 하나의 고독한 기둥이 아니라 서로 안에 깃들어 함께 서 있는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나무가 되어 줄 때,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목이 된다. 누군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축.
이제 우리는 7장에서 남겨 둔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안토노프스키의 통합감은 개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받쳐 주는 관계, 나를 조건 없이 인정하는 사람, 함께 숨 쉬는 사이에서 태어난다. 8장에서 본 미주신경이 안전한 관계 앞에서야 비로소 켜지듯이. 건강은 홀로 서는 힘이 아니다. 건강은 관계라는 경계에서 태어나는 사건이다.
이 장의 참고
마르틴 부버, 『나와 너』 · Kosfeld 외(2005, Nature, 옥시토신·신뢰) · 이성회·마리아 목사 대담
다음 세대의 경계를 위하여
언젠가 채플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 서서 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사실 나 자신에게도 하고 있었다. 이제 이 책의 마지막에서, 나는 다음 세대에게 정말로 물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것은 "더 크게 부풀어라"가 아니다. 세 단어로 그 마음을 옮겨 보고 싶다. 성과, 성장, 성숙.
흥미롭게도 이 세 단어는 모두 이룰 성(成)을 지녔다. 그런데 그다음 글자가 길을 가른다. 성과(成果)는 열매 과(果)다. 밖으로 내놓을 결과물, 측정되고 비교되는 산출이다. 성장(成長)은 길 장(長)이다. 안에서 자라남, 구조와 함께 커지는 일이다. 성숙(成熟)은 익을 숙(熟)이다. 때가 되어 무르익고, 물러날 줄 아는 것이다. 1장에서 말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여기서 열매를 맺는 셈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멈추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그것이 성숙이다. 니체가 그린 진짜 강한 사람도 쉼 없이 달리는 자가 아니라, 고요히 느리게 움직이며 지나친 분주함을 싫어하는 여가의 사람이었다. 쉼 없이 부푸는 사람은 그가 경멸한 '최후의 인간'에 가깝지, 결코 초인이 아니다. 성숙은 그 느림 쪽에 있다. 성과가 목표인 삶은 늘 바깥을 보고, 성숙에 이른 삶은 안이 정렬된다. 성장이 "얼마나 멀리 왔는가"를 묻는다면, 성숙은 "이 길이 나에게 맞는가"를 묻는다.
성장과 팽창의 이 차이를, 교육학자 이성회 교수는 한 문장으로 벼려 주었다. "성장은 통합성(integrity)을 잃지 않으면서 경계가 넓어지는 것이고, 통합성 없이 외형만 커지는 것은 팽창이며, 팽창은 죽음이다." 안이 함께 자라며 밖이 넓어지면 성장이지만, 안은 그대로인데 겉만 부풀면 그것은 죽음을 향한 팽창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1장부터 풍선과 나무로 이야기해 온 그 구별을, 그는 이렇게 학문의 언어로 정확히 짚어 주었다.
성숙이란 삶의 무게가 밖에서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라고, 나는 오래 생각해 왔다. 놀랍게도 역사가 토인비도 문명 전체에서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가 본 참된 성장은 힘을 밖(정복과 확장)이 아니라 안(자기를 다스리는 힘)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같은 것을 한 사람에게서 보았다. 미숙한 사람은 잣대를 늘 밖에 둔다—남이 어떻게 볼까. 성숙한 사람은 그 잣대가 안으로 들어와, 자기 마음의 감각으로 판단한다. 역사가와 심리학자가 각자 자리에서, 내가 본 것과 같은 진실에 이른 것이다. 성숙이란, 삶의 무게가 마침내 밖에서 안으로 옮겨와 자리 잡은 상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책이 가장 오래 미뤄 둔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1장에서 본 부풀기를 떠올려 보자. 부풀기만 하던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하기를 두려워했다. 진짜 실패가 무서워, 최선을 아껴 두고 부풀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부풀기에서 자라기로 돌려세울까? 답은 뜻밖에도 역설적이다. 최선을 다해 봐야, 비로소 자신의 경계를 알 수 있다.
경계란 내가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경계를 끝내 모른다. "했으면 잘했을 텐데"라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 자신을 두기에, 자기가 실제로 어디까지인지를 영영 알 수 없다. 경계를 모르니 자랄 방향도 모른다. 그저 사방으로 부풀 뿐이다. 팽창은 자기 경계를 모르는 자의 성장 흉내다. 반대로,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자기 경계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나구나. 이 벽이 지금의 나구나. 그 벽에 부딪혀 본 사람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5장에서 근육이 자극받은 자리에서 굵어졌듯, 사람은 자기 경계에 부딪힌 자리에서 자란다.
검증된 유한한 실패가, 검증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살아 있다.
그러니 우리가 놓아야 할 것은 단 한 문장이다. "만약 내가 그때 최선을 다했더라면……." 이 알리바이를 내려놓는 순간, 진짜 문장이 찾아온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성숙의 도착점이고, 우리가 10장에서 만난 安息의 다른 이름이다. 최선을 다했기에 비로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 息하는 자리 말이다.
나는 이제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그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더 크게 부풀라는 격려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자기 경계에 닿아 보라는 초대다. 그 경계에서 다치고, 그 상처로 자라고, 그 자람을 나누고, 다한 뒤에는 쉬라는 것. 부풀지 말고 자라라는 것. 홀로 서지 말고 관계 안에서 태어나라는 것. 그것이 내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경계다.
이 장의 참고
아널드 토인비(에테르화) · 칼 로저스(내적 평가) · 칼 융(개성화) · 프리드리히 니체(최후의 인간)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한 달 사이에 상주가 되었다가 혼주가 되었다. 93년을 사시고 어머니가 하늘로 떠나신 지 한 달 만에,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보다 앞서 치매를 앓으시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드신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에 다녀가셨다. 28년을 사신 그 집을. 앰뷸런스로 병원에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나는 이런 글을 적었다.
꿈 같은 나들이이자 아버지에게는 소풍이다. 우리네 인생이 소풍이라는 말이 불현듯 생각을 스친다.— 2025년, 페이스북
인생이 소풍이라면, 우리는 모두 잠시 왔다 가는 존재다. 그리고 소풍의 끝에는 돌아감이 있다. 이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는 함민복 시인의 시로 문을 열었다.
꽃이 피는 것은 꽃이 아니다
꽃이 지는 것도 꽃이 아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그 자리가 꽃이다 — 함민복, 「꽃」
열세 개의 장을 지나, 이 시가 다르게 읽힌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비유로 읽었다. 지금은 내 삶의 요약으로 읽는다. 건강은 안에도 밖에도 없다. 피는 것에도 지는 것에도 없다. 그 사이, 그 자리, 그 경계에 있다. 세포는 막이라는 경계로 살고, 심장은 수축과 이완의 경계에서 뛰며, 숨은 들이쉼과 내쉼의 경계에서 생명을 잇는다. 그리고 사람은 나와 너의 경계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돌아보면 이 책은 하나의 경계를 층층이 올라온 여정이었다. 가장 안쪽 세포막과 장벽과 혈뇌장벽이라는 몸의 경계에서 시작해, 나와 너를 가르는 마음의 경계를 지나, 마침내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의 경계—상호내주—에 이르렀다. 크기와 층위는 달라도 물음은 언제나 하나였다. 네 경계는 살아 있는가. 몸이든 마음이든 관계든, 건강은 늘 같은 것을 묻는다. 경계에 서서, 그 경계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 이 책의 제목이 처음부터 그 물음이었다—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의 역설이 남는다. 경계에서 태어난 것들은, 끝내 그 경계를 넘어선다. 12장의 상호내주가 그러했다. 서로 안에 깊이 깃들어, 마침내 서로를 가르던 경계가 사랑 안에서 투명해지는 것. 구별은 남되, 벽은 사라지는 것. 세포막도 그렇다. 그 단단한 경계는 사실 매 순간 무언가를 안으로 밖으로 흘려보내며, 안과 밖을 하나의 생명으로 잇고 있다. 가장 완고해 보이는 경계가, 실은 가장 부지런한 소통의 자리다. 경계의 완성은 벽이 아니라 통로다.
경계에서 시작해, 경계가 사랑 안에서 무너지는 자리까지.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 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셨다. 늘 집에서 입던 가운을 입고. "엄마 잘 갔다 왔어?" 나는 물었고, 어머니는 그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셨다. 그 미소가, 나에게는 마지막 安息처럼 느껴졌다.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무언가 태어난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리에서도. 나는 이 책을 그 믿음으로 썼다. 부풀지 말고 자라기를, 홀로 타 버리지 말고 관계 안에서 쉬기를, 최선을 다한 뒤에 "됐다"고 말할 수 있기를.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그 자리가 꽃이다.
이 장의 참고
함민복,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