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집트를 떠올린다. 나일강 서안에 우뚝 솟은 기자(Giza)의 세 거대 피라미드, 특히 쿠푸(Khufu)의 대피라미드(c. 2560 BCE)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구조물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 이집트"라는 등식은 "문명 = 서양"이라는 더 큰 등식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진실은 이렇다: 인류는 전 세계 곳곳에서, 서로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석조 구조물을 쌓아 하늘을 향해 올렸다. 그리고 그 구조물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 천문학적 정렬(astronomical alignment)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브루스 트리거(Bruce Trigger)는 1990년 논문에서 세계 각지의 초기 문명들이 독립적으로 기념비적 건축(monumental architecture)을 발전시킨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인류 사회 조직의 보편적 특성과 연결된다고 논증했다 (Trigger, 1990, "Monumental Architecture: A Thermodynamic Explanation of Symbolic Behaviour," World Archaeology 22(2):119-132). 하늘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별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씨를 뿌릴 시기를 아는 것이었고, 홍수를 예측하는 것이었으며, 죽은 자의 영혼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늘을 읽는 자가 권력을 쥐었고, 그 권력은 돌로 새겨졌다.
아일랜드 미스(Meath) 주의 보인 강(River Boyne) 굽이에 뉴그레인지(Newgrange)가 있다. 기원전 3200년경 축조된 이 원형 봉분(passage tomb)은 기자 대피라미드보다 약 600년, 스톤헨지보다 약 1,000년 앞선다. 직경 85미터, 높이 13미터의 이 구조물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라이트박스(light box)"라 불리는 작은 개구부이다. 매년 동지(winter solstice)에 — 오직 동지에만 — 떠오르는 태양의 첫 빛줄기가 이 개구부를 통과하여 19미터 길이의 좁은 통로를 따라 내부 제의실(chamber) 바닥까지 정확히 도달한다. 이 현상은 약 17분간 지속된다.
5,200년 전 아일랜드의 신석기 농경민들이 태양의 궤도를 이 정도로 정밀하게 관측하고, 그 관측 결과를 석조 건축으로 구현했다는 사실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전파되었다"는 전파론적 서사에 균열을 낸다. 뉴그레인지의 건축자들은 쐐기문자를 쓰지 않았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금속 도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읽었다. 그리고 읽은 것을 돌에 새겼다.
만주 서부,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와 랴오닝(遼寧)성 접경 지역에 홍산문화(紅山文化, c. 4500-3000 BCE)가 있었다. 이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우하량(牛河梁, Niuheliang)에서 발견된 것들은 동아시아 고대사의 시간표를 근본적으로 재편한다. 우하량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ped pyramid)는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 사이로 편년된다 (Guo Dashun, 1999, "Hongshan and Related Cultures," in Loewe & Shaughnessy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Cambridge UP, pp. 55-64). 이것은 이집트의 계단피라미드(조세르, c. 2667 BCE)보다 500년에서 1,000년 앞선다.
우하량에는 피라미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신전(女神殿)"이라 불리는 제의 건축물에서는 실물 크기의 여성 두상(頭像)이 출토되었고, 옥기(玉器)로 이루어진 정교한 제의 복합체가 발견되었다. 옥으로 만든 용(C자형 옥룡, C-shaped jade dragon)은 이후 중국 문명 전체를 관통하는 용 상징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인가? 지리적으로 이 문화는 만주 —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영역 — 에 위치한다. 이것은 단순한 학술적 쟁점이 아니라, 문명의 기원을 둘러싼 동아시아 역사 정치학의 핵심이다.
기자 대피라미드로 돌아가자. 마크 레너(Mark Lehner)의 고전적 연구가 보여주듯, 대피라미드의 네 변은 동서남북 방위에 대해 오차 약 3/60도 — 거의 완벽한 정밀도로 — 정렬되어 있다 (Lehner, 1997, The Complete Pyramids, Thames & Hudson). 왕의 방에서 뻗어 나가는 좁은 통로(shaft) 두 개는 각각 오리온자리(Orion)의 벨트 세 별과 용자리(Draco)의 투반(Thuban) — 당시 북극성 — 을 향해 정렬되어 있다는 이론이 있다. 오리온은 이집트인들에게 오시리스(Osiris), 곧 부활의 신이었다. 파라오의 영혼은 이 통로를 통해 별에 이르렀다.
이 "별 통로 이론(star shaft theory)"은 학술적으로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러나 논쟁의 존재 자체가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천문학적 장치(astronomical instrument)였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이집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멕시코시티 북동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테오티와칸(Teotihuacán)은 기원후 1-7세기에 인구 10만 이상을 가진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였다. 태양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Sun)와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를 잇는 중심축인 "죽은 자의 대로(Avenue of the Dead)"는 진북(true north)에서 약 15.5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이 각도는 플레이아데스 성단(Pleiades)의 특정 시기 지평선 위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천문학적 격자(astronomical grid)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유카탄 반도의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에서는 더 극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매년 춘분과 추분에 쿠쿨칸(Kukulcán) 피라미드의 북쪽 계단 난간에 삼각형 빛과 그림자의 연쇄가 나타나, 마치 깃털 달린 뱀(feathered serpent)이 피라미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수만 명의 관광객이 이 광경을 보러 모이지만, 이것이 건축적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 설계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야의 건축가들은 태양의 궤도, 계단의 각도, 난간의 높이를 동시에 계산하여 이 효과를 만들어냈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압록강 북안에 장군총(將軍塚)이 서 있다. 5세기에 축조된 이 구조물은 7단 계단 구조의 석조 피라미드로, 한 변의 길이 약 31미터, 높이 약 13미터에 달한다. 화강암 블록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린 이 구조물은 동아시아 최대의 석조 피라미드이다. 장수왕(재위 413-491)의 능으로 추정되며, "동방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East)"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장군총은 고구려가 단순한 변방 왕국이 아니라, 대규모 석조 건축을 수행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과 조직력을 갖춘 문명이었음을 보여준다. 지안 일대에는 장군총 외에도 수천 기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계단식 석총(積石塚) 형태이다. 이 계단식 석총의 전통은 홍산문화의 계단식 피라미드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만주 지역에서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된 석조 건축 전통의 연속성을 시사한다.
한반도의 천문 관측 전통은 놀라울 정도로 깊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의 덮개석(capstone)에는 "성혈(性穴)"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들이 파여 있는데, 이것이 별자리를 나타낸다는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Park Changbom, 2010, "Archaeoastronomy in Korea," in Ruggles ed., Handbook of Archaeoastronomy and Ethnoastronomy, Springer).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등의 별자리 패턴이 고인돌 성혈에서 확인된다. 돌에 하늘을 새긴 것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이어진다. 덕흥리(德興里) 고분(408년), 강서대묘(江西大墓, 6세기 후반)를 비롯한 여러 고구려 고분의 천장에는 정교한 별자리도(star maps)가 그려져 있다. 사신도(四神圖) — 청룡, 백호, 주작, 현무 — 가 사방을 지키는 가운데, 천장에는 해와 달, 그리고 주요 별자리들이 배치된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의 우주관(cosmology)이 건축 공간 안에 구현된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 전통은 경주 첨성대(瞻星臺, 7세기)를 거쳐 조선 시대로 이어진다. 첨성대에 대해서는 천문 관측대인지 상징적 구조물인지 오랜 논쟁이 있으나, 나일성(Nha Il-Seong) 교수는 정밀한 분석을 통해 천문 관측 기능을 논증했다 (Nha, 2001, "Silla's Cheomseongdae," Vistas in Astronomy 44:141-148).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석각 천문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이 천문도의 기반이 된 것은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였다고 비문(碑文)에 명시되어 있다 (Kim Yong-Woon, 2012, "Star Maps and Astronomy in the Joseon Dynasty," 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45(5):143-153).
여기서 하나의 연속적 선이 드러난다: 청동기시대 고인돌 성혈 → 고구려 고분벽화 별자리 → 첨성대 → 고구려 석각 천문도 기반의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 이것은 한반도에서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된 천문학적 전통의 연속성을 보여주며, 데이비드 팬케니어(David Pankenier)가 동아시아 천문학 전통의 연속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연구와 맥을 같이한다 (Pankenier, 2013, Astrology and Cosmology in Early China, Cambridge UP).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이 일찍이 밝혔듯, 동아시아의 과학과 기술은 유럽과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며, 많은 경우 시간적으로 앞섰다 (Needham, 1959,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3, Cambridge UP).
아일랜드의 뉴그레인지, 만주의 홍산, 이집트의 기자, 메소아메리카의 테오티와칸과 치첸이트사, 고구려의 장군총, 한반도의 고인돌과 고분벽화. 이 모든 것에 공통된 하나의 사실은, 인류가 어디에 살든 하늘을 읽었다는 것이며, 그 읽은 것을 돌에 새겨 영원히 남기려 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는 인류의 것이다. 하늘을 읽는 충동은 특정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species)의 특성이다. "피라미드 = 이집트"라는 등식을 깨뜨리는 것은, "문명 = 서양"이라는 더 큰 등식을 깨뜨리는 것의 출발점이다.
References: Lehner, M. (1997). The Complete Pyramids. Thames & Hudson; Trigger, B.G. (1990). "Monumental Architecture: A Thermodynamic Explanation of Symbolic Behaviour." World Archaeology 22(2):119-132; Guo Dashun (1999). "Hongshan and Related Cultures." In Loewe & Shaughnessy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Cambridge UP; Pankenier, D. (2013). Astrology and Cosmology in Early China. Cambridge UP; Needham, J. (1959).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3. Cambridge UP; Nha, I.-S. (2001). "Silla's Cheomseongdae." Vistas in Astronomy 44:141-148; Kim, Y.-W. (2012). "Star Maps and Astronomy in the Joseon Dynasty." J. Korean Astronomical Society 45(5):143-153; Park, C. (2010). "Archaeoastronomy in Korea." In Ruggles (ed.), Handbook of Archaeoastronomy and Ethnoastronomy. Springer.
지구상에서 인삼(Panax)속 식물은 기묘한 분포를 보인다. 한국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고려인삼(Panax ginseng C.A. Meyer)이 자생하고, 태평양을 건너 북미 동부에 화기삼(花旗蔘, Panax quinquefolius L.)이 자생한다. 두 종 사이에는 태평양 전체와 북미 서부의 건조 지대라는 수만 킬로미터의 빈 공백이 놓여 있다. 다른 대륙에는 없다. 유럽에도, 아프리카에도, 남미에도 인삼은 없다. 오직 동아시아와 북미 동부. 왜 이 두 곳에만 있는가?
답은 식물지리학(phytogeography)에서 온다. 1859년, 하버드 대학의 식물학자 에이사 그레이(Asa Gray)는 동아시아와 북미 동부의 식물상(flora)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이 "아사 그레이 격리(Asa Gray Disjunction)"로 알려진 현상이다. 제3기(Tertiary period, 약 6,500만-260만 년 전)에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는 베링 육교(Bering Land Bridge)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이 거대한 대륙을 가로질러 연속적인 온대 낙엽 활엽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숲 아래에서 인삼속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다 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이 연속적 삼림이 분리되었고, 인삼속 식물도 동아시아와 북미 동부에 각각 고립되었다. 수천만 년의 격리 끝에 두 식물은 같은 속(genus)의 다른 종(species)이 되었다 (Court, 2000, Ginseng: The Genus Panax, CRC Press).
여기까지는 식물학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식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층위가 있다. 동아시아와 북미 원주민 사이에서, 인삼을 둘러싼 문화적 관행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첫째, 이름이다. 한국어 "인삼(人蔘)"은 글자 그대로 "사람(人) 모양의 뿌리(蔘)"라는 뜻이다. 인삼 뿌리가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린 사람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북미 이로쿼이(Iroquois, 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의 언어에서 인삼은 "garentoquen" — "사람의 다리를 닮은 것"이라는 뜻이다 (Fenton, 1941, "Contacts Between Iroquois Herbalism and Colonial Medicine," Smithsonian Institution Annual Report).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두 문화가, 같은 식물을 보고, 같은 은유를 떠올렸다.
둘째, 용도이다. 동아시아에서 인삼은 수천 년간 만병통치약(panacea)으로 사용되었다. Panax라는 학명 자체가 그리스어 pan(모든) + akos(치유)에서 유래한다. 북미 원주민들 역시 화기삼을 광범위한 질환에 사용했다 — 열병, 두통, 상처 치유, 불임, 소화 장애. 윤틱구(Yun Tik-Koo)의 리뷰가 정리하듯, 이 만병통치약적 사용법은 양쪽 대륙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Yun, 2001, "Brief Introduction of Panax ginseng C.A. Meyer," Journal of Korean Medical Science 16(Suppl.):S3-S5).
셋째, 채취 의례이다. 한국의 심마니(인삼 채취인)들은 산에 들어가기 전에 산신(山神)에게 기도하고, 채취 중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첫 번째 발견한 뿌리는 반드시 남겨둔다. 이것은 산의 영혼에 대한 경의이자, 지속 가능한 채취를 위한 관행이다.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거의 동일한 의례가 관찰된다 — 대지의 영혼(Earth Mother)에게 기도하고, 첫 번째 뿌리를 남겨두며, 채취 시 정해진 절차를 따른다 (Taylor, 2006, Ginseng, the Divine Root: The Curious History of the Plant That Captivated the World, Algonquin Books). 같은 식물, 같은 형상 인식, 같은 만병통치약 사용, 같은 채취 의례. 이 유사성은 아사 그레이 격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제3기의 연속 삼림 시대에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삼이 서양에 알려진 경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담이다. 1709년에서 1711년 사이,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만주 지도 제작 사업에 참여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피에르 자르투(Pierre Jartoux, 중국명 杜德美)는 만주의 깊은 산속에서 인삼 채취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자르투는 인삼의 형태, 재배 환경, 약효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럽으로 보냈고, 이것이 1714년 영국 왕립학회의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게재되었다 (Jartoux, 1714, "The Description of a Tartarian Plant, call'd Gin-seng," Philosophical Transactions 28:237-247). 자르투는 이 논문의 말미에 한 가지 예언적 추측을 덧붙였다: 만약 인삼이 이러한 위도와 기후 조건에서 자란다면, 비슷한 조건을 가진 북미 동부에도 인삼이 있을 것이라고.
캐나다 몬트리올 근처에 주재하던 또 다른 예수회 선교사 조제프프랑수아 라피토(Joseph-François Lafitau)가 이 논문을 읽었다. 라피토는 이로쿼이 영토의 숲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1716년 마침내 북미 인삼(Panax quinquefolius)을 발견했다. 자르투의 추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라피토는 1718년 이 발견을 회고록으로 출판했다 (Lafitau, 1718, Mémoire ... concernant la précieuse plante de gin-seng de Tartarie, Paris).
라피토의 발견 이후, 북미산 인삼의 대중국 수출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1720년대부터 프랑스 상인들이 캐나다 원주민들로부터 인삼을 매입하여 중국에 팔기 시작했고, 미국 독립 이후에는 미국인들이 이 무역에 뛰어들었다.
1784년 2월 22일, 미국 최초의 대중국 무역선 엠프레스 오브 차이나(Empress of China)호가 뉴욕항을 출발하여 광저우(Canton)를 향했다. 이 배의 주요 화물은 30톤의 북미산 인삼이었다 (Taylor, 2006). 인삼은 당시 미국이 중국에 팔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품이었다. 1784년 8월 광저우에 도착한 엠프레스 오브 차이나호는 인삼을 팔고, 차(tea), 비단(silk), 도자기(porcelain)를 싣고 1785년 5월 뉴욕에 귀환했다. 이것이 미중무역(US-China trade)의 시작이다. 오늘날 연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중무역의 첫 화물이 — 인삼이었다.
인삼의 여행을 시간순으로 추적하면 하나의 원이 그려진다. 수천만 년 전 제3기의 연속 삼림에서 인삼속 식물이 유라시아와 북미에 걸쳐 분포했다. 빙하기가 그것을 분리했다. 수만 년 전 동아시아의 인류가 베링 육교를 건너 아메리카에 도달했고 — 이때 인삼에 대한 지식이나 문화적 관행이 함께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Lee Ji-Young, 2017, "Ginseng and Trans-Pacific Cultural Connections," Journal of Korean Studies 22(2):271-300).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와 북미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인삼 문화가 발전했다.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가 아시아의 인삼을 유럽에 소개하고, 그 정보가 북미로 건너가 북미의 인삼이 "재발견"되고, 그 인삼이 다시 아시아로 수출되었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인삼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약초 하나가 대양을 건너고, 제국을 연결하고, 무역로를 열었다. 하찮아 보이는 것이 세계를 움직이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References: Court, W.E. (2000). Ginseng: The Genus Panax. CRC Press; Taylor, D.A. (2006). Ginseng, the Divine Root. Algonquin Books; Yun, T.-K. (2001). "Brief Introduction of Panax ginseng." J. Korean Medical Science 16(Suppl.):S3-S5; Fenton, W.N. (1941). "Contacts Between Iroquois Herbalism and Colonial Medicine." Smithsonian Institution Annual Report; Jartoux, P. (1714). "The Description of a Tartarian Plant, call'd Gin-seng." Philosophical Transactions 28:237-247; Lafitau, J.-F. (1718). Mémoire concernant la précieuse plante de gin-seng. Paris; Lee, J.-Y. (2017). "Ginseng and Trans-Pacific Cultural Connections." J. Korean Studies 22(2):271-300; Schafer, E.H. (1963). The Golden Peaches of Samarkand. UC Press.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이 발흥했다. 그 팽창 속도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불과 한 세기 만에, 이슬람 세력은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부까지 진출했다. 지중해는 더 이상 "로마의 바다(Mare Nostrum)"가 아니었다. 지중해의 남쪽과 동쪽 해안 전체가 이슬람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에게 이것은 실존적 위기였다. 성지(聖地)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 아래 들어갔다.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Crusades)은 약 200년간 지속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예루살렘은 잠시 탈환되었다가 다시 빼앗겼고, 마지막 십자군 거점 아크레(Acre)는 1291년 함락되었다. 유럽은 군사적으로 이슬람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 좌절 속에서 두 개의 환상(fantasy)이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팡구(Zipangu)였다.
1165년경, 유럽 전역에 하나의 편지가 유포되었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의 발신인은 "프레스터 존(Presbyter Johannes)" — 이슬람 세계 너머의 동방 어딘가에 존재하는 전설적인 기독교 왕이었다. 편지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을 묘사했다: 72개 속국을 거느린 거대한 기독교 제국, 금과 보석으로 가득한 궁전, 흐르는 우유와 꿀, 그리고 무적의 군대. 이 편지는 거의 확실히 위조(forgery)였다 (Silverberg, 1972, The Realm of Prester John, Doubleday). 그러나 유럽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왜 믿었는가? 이슬람에 포위된 유럽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협공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슬람 세계 뒤편에 강력한 기독교 동맹이 있다면, 양쪽에서 이슬람을 압박할 수 있다.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전략적 판타지였다 (Rogers, 1962, The Quest for Eastern Christians, U. Minnesota Press; Brewer, 2015, Prester John: The Legend and its Sources, Ashgate). 이 전설의 모델 가운데 하나는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왕국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실제로 4세기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아프리카의 고대 기독교국이었고, 이슬람 세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해안 탐험에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다. 항해왕 엔히크(Infante Henrique, 1394-1460)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탐험을 조직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프리카를 돌아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 도달하여 이슬람에 대한 협공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탐험의 표면적 동기는 금, 노예, 향신료 무역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두 번째 환상은 지팡구(Zipangu), 곧 일본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상상한 지팡구는 실제 일본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동방견문록(Il Milione)(c. 1298)에서 지팡구를 이렇게 묘사했다: "중국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섬. 금이 무한히 풍부하여 궁전의 지붕과 바닥을 금으로 덮었다. 진주와 보석이 풍부하다." 마르코 폴로는 일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 묘사는 전문(傳聞, hearsay)이었다 (Larner, 1999, Marco Polo and the Discovery of the World, Yale UP).
그러나 이 과장된 묘사는 유럽인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특히 한 사람에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 필사본은 현재 세비야의 콜롬비나 도서관(Biblioteca Colombina)에 보존되어 있으며, 콜럼버스가 직접 남긴 여백 메모(marginal notes)가 빼곡하다. 특히 지팡구를 묘사한 대목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고, 여러 개의 메모가 적혀 있다 (Flint, 1992, The Imaginative Landscape of Christopher Columbus, Princeton UP).
콜럼버스의 1492년 서쪽 항해는 "신대륙 발견"이 아니었다. 적어도 콜럼버스 자신에게는. 그의 목적은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아시아 — 구체적으로 인도(India), 중국(Cathay), 그리고 지팡구 — 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Phillips & Phillips, 1992, The Worlds of Christopher Columbus, Cambridge UP). 콜럼버스는 지구의 크기를 심하게 과소평가했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폭을 과대평가하고 대서양의 폭을 과소평가하여, 서쪽으로 약 4,000-5,000킬로미터만 항해하면 일본에 도달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실제 거리의 약 4분의 1이었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산살바도르 또는 왓링스 섬)에 도착했다. 그는 이것이 인도제도(Indies)의 일부라고 확신했다. 원주민을 "인디오(indio)"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인디언(Indian)"이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남아 있다. 콜럼버스는 1493년, 1498년, 1502년 총 네 차례 항해를 했으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시아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Zamora, 1993, Reading Columbus, U. California Press; Fernández-Armesto, 1991, Columbus, Oxford UP).
콜럼버스의 도착(1492)은 포르투갈을 공황에 빠뜨렸다. 카스티야(스페인)가 서쪽으로 가서 아시아(로 생각한 곳)에 도달했다면, 포르투갈은 동쪽 경로를 더 빨리 완성해야 했다. 1494년, 교황의 중재 아래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이 체결되었다. 지구를 수직으로 반 갈라,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한다. 두 이베리아 왕국이 — 지구를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나머지 세계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속도 변화를 보라. 마데이라 제도 발견(1419)에서 희망봉 도달(바르톨로메우 디아스, 1488)까지 약 70년이 걸렸다. 그러나 희망봉에서 인도(바스쿠 다 가마, 1498)까지는 불과 10년, 말라카(1511)를 거쳐 일본(1543)에 도달하기까지 약 55년이었다. 콜럼버스라는 충격이 포르투갈의 동진(東進)을 극적으로 가속시킨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인과 사슬이 드러난다. 이슬람의 팽창 → 유럽의 실존적 공포 → 프레스터 존(협공의 환상)과 지팡구(황금의 환상) → 대항해시대의 시작 → 콜럼버스 서쪽 항해 / 포르투갈 동쪽 항해 → 포르투갈이 일본 도달(1543) → 총 두 자루가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 유럽의 두 환상 — 프레스터 존과 지팡구 — 이 결과적으로 유럽인을 바다로 내몰았고, 그 바다 끝에서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도달하여, 총(銃)을 전해주었다. 이 총이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는 제10장에서 다룬다 (Abulafia, 2008, The Discovery of Mankind, Yale UP).
환상이 역사를 움직였다. 존재하지 않는 왕과 존재하지 않는 황금 섬이, 실제의 배와 실제의 총을 대양 너머로 보냈다. 역사는 종종 사실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작동한다.
References: Silverberg, R. (1972). The Realm of Prester John. Doubleday; Rogers, F.M. (1962). The Quest for Eastern Christians. U. Minnesota Press; Brewer, K. (2015). Prester John: The Legend and its Sources. Ashgate; Larner, J. (1999). Marco Polo and the Discovery of the World. Yale UP; Flint, V.I.J. (1992). The Imaginative Landscape of Christopher Columbus. Princeton UP; Phillips, W.D. & Phillips, C.R. (1992). The Worlds of Christopher Columbus. Cambridge UP; Fernández-Armesto, F. (1991). Columbus. Oxford UP; Zamora, M. (1993). Reading Columbus. U. California Press; Abulafia, D. (2008). The Discovery of Mankind. Yale UP.
1492년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이 나중에 주장한 것처럼 "빈 야생(pristine wilderness)"이 아니었다. 윌리엄 데네반(William Denevan)은 1992년 논문에서 이것을 "원시림 신화(Pristine Myth)"라 불렀다 (Denevan, 1992, "The Pristine Myth: The Landscape of the Americas in 1492,"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82(3):369-385).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는 5,000만에서 1억 사이로 추정된다. 이 인구가 대륙의 경관(landscape)을 광범위하게 변형시키고 있었다. 아마존의 밀림조차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수천 년에 걸쳐 관리해온 경관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찬란한 문명들이 있었다. 멕시코 중앙 고원의 아즈텍 제국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은 인구 20만에서 30만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다 — 같은 시기 유럽의 어떤 도시보다 컸다. 호수 위에 건설된 이 도시에는 정교한 수로 체계, 거대한 시장, 피라미드형 신전, 식물원, 동물원이 있었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병사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íaz del Castillo)는 이 도시를 처음 보았을 때 "이것은 꿈인가?"라고 기록했다.
남미의 잉카 제국은 안데스 산맥을 따라 약 4,000킬로미터에 걸친 도로 체계(Qhapaq Ñan)를 운영했으며, 키푸(quipu)라는 매듭 장치로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독자적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마야 문명은 독자적으로 영(零, zero)의 개념을 발명했다 — 인도와 마야 이외에 영을 독립적으로 발명한 문명은 없다. 북미의 이로쿼이(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은 다섯(후에 여섯) 부족이 연합하여 대의제적 통치 구조를 운영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미국 헌법의 연방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접촉이 일어났다. 1492년 이후 100년에서 15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의 약 90퍼센트가 소멸했다. 노벨 데이비드 쿡(Noble David Cook)의 연구에 따르면, 이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은 구대륙에서 유입된 전염병이었다 — 천연두(smallpox), 홍역(measles), 인플루엔자(influenza), 장티푸스(typhus) (Cook, 1998, Born to Die: Disease and New World Conquest, 1492-1650, Cambridge UP).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 질병들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수만 년간 구대륙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매튜 레스톨(Matthew Restall)이 분석했듯, "소수의 용감한 정복자가 거대한 원주민 제국을 무너뜨렸다"는 서사는 신화에 가깝다 (Restall, 2003, Seven Myths of the Spanish Conquest, Oxford UP). 실제로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아즈텍에 반감을 품은 수만 명의 원주민 동맹 덕분이었고, 아즈텍 내부의 정치적 분열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천연두가 테노치티틀란을 초토화시킨 뒤였다. 카밀라 타운젠드(Camilla Townsend)는 Fifth Sun(2019)에서 아즈텍인들 자신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복의 실상을 재구성했다 (Townsend, 2019, Fifth Sun: A New History of the Aztecs, Oxford UP).
질병 외에 의도적 폭력과 제도적 착취가 있었다. 스페인의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는 정복자에게 원주민의 노동력을 "위탁"하는 제도였으나, 사실상 강제 노동이었다. 잉카 지역의 미타(mita) 제도 역시 원주민을 은광과 수은 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게 만들었다. 포토시(Potosí) 은광에서만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9년, 알렉산더 코흐(Alexander Koch) 등의 연구팀은 Quaternary Science Reviews에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 5,600만 명이 사망함에 따라 약 5,580만 헥타르의 경작지와 관리 경관이 버려졌고, 이 땅에 숲이 다시 자랐으며(재조림, reforestation), 이 숲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측정 가능한 CO₂ 감소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Koch et al., 2019, "Earth system impacts of the European arrival and Great Dying in the Americas after 1492," Quaternary Science Reviews 207:13-36).
이 CO₂ 감소는 남극 빙핵(ice core) 기록에서 약 1610년경에 뚜렷한 저점으로 확인되며, 이것이 이른바 "오르비스 스파이크(Orbis spike)"이다. 코흐 등은 이 사건이 "소빙기(Little Ice Age)"의 심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인류가 지구의 기후에 측정 가능한 영향을 미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대량 사망이 지구 반대편의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이보다 더 극적으로 역사의 상호 연결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앨프리드 크로스비(Alfred Crosby)가 1972년 명명한 "콜럼버스 교환(Columbian Exchange)"은 1492년 이후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서 일어난 식물, 동물, 미생물, 문화의 양방향 이동을 가리킨다 (Crosby, 1972, The Columbian Exchange: Biological and Cultural Consequences of 1492, Greenwood Press). 그러나 이 "교환"은 극도로 비대칭적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들을 보자. 감자(potato), 옥수수(maize), 고구마(sweet potato), 토마토(tomato), 고추(chili pepper), 카카오(cacao), 담배(tobacco), 고무(rubber), 바닐라(vanilla), 해바라기(sunflower). 이 가운데 감자와 옥수수만으로도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다. 레들리프 살라만(Redcliffe Salaman)의 고전적 연구가 보여주듯, 감자는 아일랜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 기근 방지의 핵심 작물이 되었다 (Salaman, 1949,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Cambridge UP). 넌(Nathan Nunn)과 치안(Nancy Qian)의 계량 분석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산 작물의 도입은 1700년에서 1900년 사이 유럽 인구의 급격한 증가 — 약 1억에서 약 4억으로 — 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Nunn & Qian, 2010, "The Columbian Exchange: A History of Disease, Food, and Ideas,"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4(2):163-188).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 역시 유사한 분석을 제시한다 (McNeill, 1999, "How the Potato Changed the World's History," Social Research 66(1):67-83).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들은 무엇이었나?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말라리아 — 질병이었다. 그리고 폭력이었다. 그리고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운송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 200만 명이 대서양 횡단 중간항로(Middle Passage)에서 사망했다 (Crosby, 1986, Ecological Imperialism: The Biological Expansion of Europe, 900-1900, Cambridge UP). 아메리카가 유럽에 준 것은 생명을 살리는 작물이었고, 유럽이 아메리카에 가져온 것은 생명을 빼앗는 질병과 폭력이었다. 이것을 "교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극에 달한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 이 작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수천 년에 걸쳐 야생 식물에서 재배 식물로 개량(domestication)한 것이다. 옥수수의 원종인 테오신테(teosinte)는 현대 옥수수와 외형이 전혀 다르다. 야생 감자의 대부분은 독성이 있다. 원주민 농경민들이 수백 세대에 걸친 선택적 육종(selective breeding)을 통해 이 식물들을 오늘날의 형태로 만들어낸 것이다 (Mann, 2011, 1493: Uncovering the New World Columbus Created, Knopf).
이 작물들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의 인구 폭증을 가능하게 했다. 인구가 늘어난 유럽은 더 많은 이주민을 아메리카에 보냈다. 더 많은 이주민은 남아 있는 원주민을 더 서쪽으로, 더 남쪽으로, 더 작은 땅으로 밀어냈다. 약탈당한 자의 유산이 약탈자를 먹여 살렸고, 그 먹여 살림이 더 많은 약탈자를 만들어냈다. 이보다 더 잔인한 역사적 순환이 있을까.
데네반이 "원시림 신화"를 반박한 것은 이 맥락에서 중요하다.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 "빈 땅"을 발견했다는 서사는,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북미에서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 대륙의 서쪽 끝까지 확장하는 것이 미국의 신의 뜻에 의한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 — 는 이 "빈 땅" 신화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땅은 비어 있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전염병으로 사라진 뒤에 비어 보였을 뿐이다.
"서양 문명의 위대함"을 논할 때, 그 위대함의 물질적 기반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일은 드물다. 유럽 인구를 폭증시킨 작물은 아메리카에서 왔다. 유럽의 산업혁명을 가동시킨 자본의 상당 부분은 아메리카의 은(silver)과 노예 노동에서 왔다 — 이것은 다음 장(제9장: 은이 만든 세계)에서 다룬다. 아시아의 지식과 기술이 유럽에 전해진 경로는 제11장(활자의 원)과 제14장(부베에서 라이프니츠로)에서 다룬다.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은 "먼 과거의 비극"이 아니다. 코흐 등의 연구가 보여주듯, 그 결과는 지구의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작물들이 — 감자가, 옥수수가, 고구마가, 토마토가, 고추가 — 오늘 우리가 먹는 밥상 위에 놓여 있다. 한국의 김치에 들어가는 고추(chili pepper)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수천 년에 걸쳐 개량한 식물이다. 우리는 매일 그들의 유산을 먹고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이 장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References: Cook, N.D. (1998). Born to Die: Disease and New World Conquest, 1492-1650. Cambridge UP; Crosby, A.W. (1972). The Columbian Exchange. Greenwood Press; Crosby, A.W. (1986). Ecological Imperialism. Cambridge UP; Koch, A. et al. (2019). "Earth system impacts of the European arrival and Great Dying in the Americas after 1492." Quaternary Science Reviews 207:13-36; Restall, M. (2003). Seven Myths of the Spanish Conquest. Oxford UP; Townsend, C. (2019). Fifth Sun. Oxford UP; Denevan, W.M. (1992). "The Pristine Myth." Annals of the AAG 82(3):369-385; Mann, C. (2011). 1493. Knopf; Nunn, N. & Qian, N. (2010). "The Columbian Exchange." J. Economic Perspectives 24(2):163-188; Salaman, R.N. (1949).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Cambridge UP; McNeill, W.H. (1999). "How the Potato Changed the World's History." Social Research 66(1):67-83.